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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군 답사(2024. 3. 10)
오늘의 답사 계획은 구례군이다.
광주민학회는 약 12년간 회장을 맡아 고생하신 이민영의 뒤를 이어 노영대님께서 자원하여 대를 이어 수고하게 되었고, 금년 첫 답사는 구례를 답사하기로 하여서 참가인원 26명이 8시 30분에 법원 광장에서 출발하였다. 88고속도로로 달리면서 차중에서 전회장님깨 공로패와 기념품 전달이 있었다.
이민영 회장 노고를 치하하며
十年歲月幾多言(십년세월기다언) 십년의 세월을 어찌 많다 말하는가
忽過如流追憶溫(홀과여류추억온) 물 같이 훌쩍 흘러 추억만 따스하다.
回顧同尋名勝處(회고동심명승처) 회고하니 같이 찾은 명승처에는
會長足跡有留根(회장족적유유근) 회장님의 족적의 뿌리가 남았으리.
처음 찾은 곳이 천은사(泉隱寺)다.
「천은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다. 이 절은 828년(흥덕왕 3)에 덕운대사가 창건했는데 극락보전 앞뜰에 있던 샘물이 감로와 같다고 하여 감로사라고 했다. 875년(헌강왕 1) 도선대사가 중축한 이래 여러 차례 중건. 중수했다.」(퍼온글)
천은사(泉隱寺)입구의 주차장에 하차하니 단청된 집으로 가려진 직경 약 2m정도의 큰 술잔형 화강암 그릇의 중앙에 물이 솟게하고 감로천(甘露泉)이라 한자로 써있다. 물론 감로천의 원래 있던 곳은 이곳이 아니지만 천은사의 유래에 읜 것이다. 내용은
「숙종때.. 단유선사가 절을 중수할 무렵 절의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나 사람들을 무서움에 떨게 하였으므로 이에 한 스님이 용기를 내어 잡아 죽였으나 그 이후로는 샘에서 물이 솟지 않았다. 샘의 물이 자취를 감추자 절이름을 "샘이 숨었다"라는 뜻으로 천은사라는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절 이름을 바꾸고 가람을 크게 중창은 했지만 절에는 여러차례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불상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마을사람들은 입을 모아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가 죽은 탓이라 하였다.
얼마 뒤 조선의 4대 명필가의 한 사람인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절에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이광사는 마치 물이 흘러 떨어질 듯 한 필체(水體)로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써 주면서 이 글씨를 현판으로
일주문에 걸면 다시는 화재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그대로 따랐더니 신기하게도 이후로는 화재가 일지 않았다고 한다.」(퍼온글)
천은사 감로천(泉隱寺 甘露泉)
世上許多奇蹟生(세상허다기적생) 세상에는 허다한 기적이 생기니
有言泉隱我心驚(유언천은아심경) 천은사 말이 있서 내 마음 놀란다.
只今甘露假淸出(지금감로가청출) 지금 감로라고 거짓 맑게 솟아
回想古來傳說明(회상고래전설명) 엣날 회상하는 전설을 밝히누나.
주차장에서 푸라스틱 모양의 천은사 안내문을 만들고 일주문 까지 약 50m를 포장하고 연등을 매달아 놓아 마치 관광객을 환영하는 것 같다.
일주문 앞에 섯다. 세로로 된 마치 용이 살아 승천 할 것 같은 원교(圓嶠)의 글씨를 감상한다.
천은사 일주문(泉隱寺 一柱門)
松陰端正到初門(송음단정도초문) 소나무 그늘 단정한 문에 도착하니
飛勢丹靑定襟言(비세단청정금언) 비세 단청이 옷깃 단정히 하라네
常有我心親一見(상유아심친일견) 내 마음에 항상 보고 싶었던 것은
圓嶠狂筆世人論(원교광필세인론) 원교 광필을 세인이 논함이네
문을 지나 천은저수지를 좌로하고 걸어가니 천왕문 가기 전에 광의천을 가로질러 피안교인 홍교(虹橋)를 만들고 이 절의 트레이드마크인 수홍루(垂虹樓)가 아름답다. 수홍루 입구와 밑에 1m정도되는 용의 석상이 이채롭다.
「'수홍(垂虹)'이란 '무지개가 드리워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2층 누각형태로 세워진 수홍루는 조선 영조 때 건물이라고 하며, 특히, 일몰 모습이 장관이라고 합니다
천은사 수홍루 편액은 조선 말기와 근대기의 학자이자 서화가 염재 송태회(1872~1942) 선생의 글씨로 천은사의 설선당, 응진당, 팔상전의 편도 그가 썼습니다. 염재 선생은 전남 화순 출신으로 9세때 쓴 글씨가 당시 우리나라를 와있던 청나라 위안스카이(원세개)의 눈에 들어, 청나라에 서 글씨와 신문물을 배워와 고향에서 후진양성에 힘썼다고 합니다.」 (퍼온글)
수홍루(垂虹樓)
垂虹樓下石虹橋(수홍루하석홍교) 수홍루 밑에는 홍교가 있어
朝霧夕霞仙客招(조무석하선객초) 아침 안개 저녁 노을 사람 부른다.
古木相隣成別境(고목상린성별경) 고목과 이웃하여 별경을 이루고
念齋題額一層嬌(염재제액일층교) 염제선생 편액이 아름 답도다.
수홍루를 지나니 큰 용머리가 버티고 있는 3열의 30계단 돌층계가 나오고 위에 천왕문이 있다. 올라가면 법 세계가 있을것 같다.
천왕문에는 현판이 없고, 사천왕(四天王)은 무서운 얼굴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응시한다.
천은사 사천왕(四天王)
風塵世界衆生中(풍진세계중생중) 어지러운 세상에 사는 사람들아
有罪人間數入功(유죄인간삭입공) 죄 있는 사람은 자주 들어오게
猛虎四天王目見(맹호사천왕목견) 맹호 같은 사천왕 눈을 보며는
自然反省重心空(자연반성중심공) 자연 반성되어 무거운 맘 사라지네.
천왕문을 들어서니 광장에 석등이 있고, 돌계단 위에 강당(講堂)과 종루(鍾樓)가 웅장하다.
돌층계를 오르니 극락보전이 오른편에 응진각 전면에 보제루로 호위하고 있다.
극락보전 주련 중 극락당전 만월용(極樂堂前 滿月容 : 극락보전 앞에는 보름달의 얼굴이니)을 읽어 보고, 앞에 세워진 안내문을 읽어본다.
천은사 극락보전(極樂寶殿)
極樂西方此地開(극락서방차지개) 서방 극락세계를 이 곳에 여니
阿彌陀佛奉高臺(아미타불봉고대) 아미타불을 높은 대에 받들었네.
何人死後無憂事(하인사후무우사) 누가 죽은 후에 근심이 없을까
善行宣多應答倍(선행선다응답배) 선행을 베풀면 응답이 배리라.
강당인 보제루(普濟樓) 현판은 이삼만(李三晩, 1770~1845) 낙관이 있으며 장중하고 엄숙한 글씨 맛이 있고, 명부전(冥府殿)의 현판은 그림 같은 초서로 누구 글씨인지 모르겠다.
화려하고 웅장한 범종각(梵鐘閣)을 보면서 주련을 읽어 본다.
聞鐘聲煩惱斷(문종성번뇌단) 종소리 들으면 번뇌가 사라지고
智惠長菩提生(지혜장보제생) 지혜는 늘고 보리심이 생긴다.
離地獄出三界(리지옥출삼계) 지옥을 떠니서 삼계에 나와서
願成佛慶衆生(원성불경중생) 부처되고 중생이 잘되기 원한네.
몇층의 돌 층계를 오르니 응진당(應眞堂) 팔상전(八相殿) 관음전(觀音殿)이 한층에 늘어서고, 앞뜰에 환히 웃고 있는 석조화상 앞에 복전함(福田函)이 있다.
관음전의 주련을 읽어본다.
一葉紅蓮在海中(일엽홍련재해중)연꽃 한잎 바다에 있어
碧波深處現神通(벽파심처현신통)파도 깊은 곳에 신통함이 나타났네
昨夜普陀觀自在(작야보타관자재)지난 밤 보타관자재님 께서
今日降起道場中(금일강기도장중)오늘에는 이 도장에 내려오셨네.
관음전에는 천수십일면광음보살(千手十一面觀音菩薩)이 모셔저 있다.
천수십일면광음보살(千手十一面觀音菩薩)
世上生平喜苦憂(세상생평희고우)세상에 살아가며 생긴 괴로움
切尋何處解消愁(절심하처해소수)어느 곳에 찾아가 근심을 푸나
觀音菩薩儼存在(관음보살엄존재)관음보살 엄연히 계셔서
今日今時覽視眸(금일금시람시모)지금도 널리 둘러보시네.
팔상전의 주련을 읽어본다.
世尊當入雪山中(세존당입설산중)세존께서 설산으로 들어가셔서
一坐不知經六年(일좌부지경육년)육년이 지나감을 알지 못했네.
因見明星云悟道(인견명성운오도)밝은 별을 보고 도를 깨치니
言詮消息遍三千(언전소식편삼천)가르침의 소식이 세계에 퍼졌네.
관음전 서편으로 한건물에 산왕각(山王閣), 삼성전(三聖殿), 칠성전(七星殿)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주련을 읽어본다.
諸大聖衆振玄風(제대성중진현풍)모든 성인 중생들이 현묘한 바람으로
敎化群生一體同(교화군생일체동)생명을 교화하니 모두가 하나일쎄
洞察人間如反掌(통찰인간여반장)인간을 살펴서 손쉽게 하여
消災降福願皆從(소재강복원개종)재앙 없고 복을 내림을 모두 원하네.
나는 천은사의 매력에 빠져서 11시가 되어서 절에서 내려와 호수의 절경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세자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산수유 꽃이 간혹 보이는 도로를 달려 쌍산재(雙山齋)를 찾았다. 도로변에 1m정도의 표지석이 있다. 쌍산재는 해주오씨 문양공후 진사공파의 주택과 별서정원으로 전라남도 5호인 민간정원이며 현재 6대 후손인 오경영이 관장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 만나는 곳이 당몰샘이다. 이 샘은 집 안에 있었으나 이웃이 사용할 수있게 담을 헐고 밖으로 내 놓았다고 하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물을 떠가고 있다.
우물가 담에는 명천(名泉)이라고 새긴 돌비가 있고, 우물각 처마에 지존지미(至尊至味) 즉 “지극히 존귀하고 지극히 맛이있다”는 현판이 걸렸으며, 담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千年古里(천리고리) 천년 된 옛 마을에
甘露靈泉(감로영천) 감로수가 솟은 영험한 샘이다.
당몰샘
千年不渴露靈泉(천년불갈로령천)천년을 마르지 않는 감로영천은
數萬人間口說傳(수만인간구설전)수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하네
鄰近黎民專汲水(인근여민전급수)인근의 사람들이 오로지 물 떠가니
主翁恩澤只今連(주옹은택지금연)주인의 은택이 지금도 이어지네‘
쌍산재에 대하여 자료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
「주거 공간 너머로 울창한 대숲이 펼쳐진다. 이곳을 지나며 쌍산재의 새로운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주거 공간에 이은 별서 정원이다. 대숲 초입에 별채(거연당)가 있고, 돌계단이 이어진다. 울창한 대숲에 야생 차나무가 어우러지고, 대숲을 비집고 햇살이 들어오는가 하면, 불어오는 바람에 대숲이 일렁인다. 다른 공간으로 향하는 대숲 길은 쌍산재 최고의 비경을 선사한다. 호서정을 지나 굵은 동백나무가 터널을 이루는가 싶더니, 금세 너른 잔디밭이 나온다. 가정문을 지나면 서당채(쌍산재), 그 왼쪽으로 연못(청암당)과 경암당, 영벽문이 차례로 보인다.
현 주인의 6대조 할아버지가 서당채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 ‘쌍산재(雙山齋)’라 이름 붙였다. 쌍산재에는 온갖 화초와 나무, 돌이 어울려 꽉 찬 느낌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푸른 잔디가 눈부시고, 색과 향을 품은 수목이 피고 진다. 특히 길을 가로질러 멋스럽게 휜 동백나무가 인상적이다. 쌍산재는 집안의 자제들이 학문을 나눈 곳이다. 쌍산재 외에 사락당(四樂堂), 염수실(念修室), 서소헌(舒嘯軒) 등 현판이 곳곳에 걸렸다.
청암당을 지나면 너른 공간에 경암당이 앉았고, 담장 끄트머리에 영벽문이 나 있다. 영벽문을 열면 또 다른 공간이 대미를 장식한다. 열린 영벽문의 프레임에 가느다란 리기다소나무 두 그루와 푸른 저수지의 풍광이 가득하다. 일제강점기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사도저수지다. 하늘빛을 그대로 품은 저수지를 바라보며 방죽을 따라 산책해도 좋다.
쌍산재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오후 4시 30분(안전상 영·유아 출입 제한), 관람료 1만 원이다. 관람료를 내면 커피, 매실차 등 웰컴 티를 제공한다. 그러니 쌍산재는 전통과 자연을 품은 카페도 되는 셈이다. 쌍산재 숙박은 아쉽게도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숙박 재개 여부는 쌍산재 홈페이지에 따로 공지할 예정이다.」
나는 주거공간만 둘러 보노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입구네 들어서자 사랑채 벽면에 다음과 같은 글이 마음을 끈다.
慮事不可以不豫(여사불가이불예)생각난 일은 불가하다고 하여 미루면 안된다.
입장로가 10,000원으로 매실차를 한잔씩 준다.
안채 좌 언덕에 가묘(家廟)를 바라보니 문지망에 가훈(家訓)이 있다.
편액 양편에 큰 글씨로 효우(孝友), 문무(文武) 라 하고 가훈(家訓)은 다음과 같다.
사친(事親: 부모 섬기라), 봉사(奉祀: 제사 잘 모시라)
존사(尊師: 스승을 존대하라), 돈목(敦睦: 친족과 화목하라)
근학(勤學: 부지런히 배우라), 강례(講禮: 예절을 가르치라)
신언(愼言: 말을 삼가라), 숭륜(崇倫: 윤리을 숭상하라)
접빈(接賓: 손님 대접하라), 계주(戒酒: 술을 조심하라)
택교(擇交: 벗을 가려 사귀라), 절용(節用: 절약하여 사용하라)
궁휼(窮恤: 불쌍한 사람 돕기). 원색(遠色: 여자를 멀리 하라)
(際)
쌍산재 가묘(家廟)
家廟仰然心肅然(가묘앙연심숙연)가묘를 바라보며 마음이 숙연햐니
祖先敎訓子孫連(조선교훈자손연)선조의 교훈이 자손에 이러졌네.
雙山累代保存事(쌍산누대보존사)쌍산재가 여러 대 보존된 것은
遠客應知此處邊(원객응지차처변)내 이곳에서 응당 알겼도다.
아랫채 남쪽으로 마루가 있고 앞에 정원이 있다. 방은 양정당(養靜堂)과 사락당(四樂堂)의 편액에 주련이 있다. 주련은 나무색으로 변하여 기록하지 못하였다. 몹시 아쉽다.
담 사이 좁은 문으로 나서니 2채의 사랑채 있고, 헌(軒)이 3개가 있어 많은 선비들이 모여서 풍류를 즐겼을 것 같다.
나는 별서정원을 가지 못하고 차에서 기다리다가, 운조루(雲鳥樓)로 향했다. 운조루는 이 집의 사랑채에 붙어있는 다락의 명칭인데 이 집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다락 밑에 설명 표지석이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雲無心以出峀(운무심이출수)구름은 무심하게 산에서 나오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새는 날기 싫으면 도라올줄 안다.
한데서 따온 이름이라한다. 멏 번을 와 봐도 대문위의 호랑이 뼈와 행랑채의 크기에 놀란다, 새로 보수를 많이 하였고, 쌀 두지 같은 것은 유물관을 새로 짓고 옮겼다고 하며. 새로 만든 뒤주 앞에서 주인할머니는 입장료를 받고 소일하고 계신다.
입구의 연못에 물이 말랐고, 대문 옆에 핀 수선화가 곱다.
어운조루(於雲鳥樓)
雲生集散訪窺樓(운생집산방규루)구름은 집산하며 루를 엿보고
鳥雀隨時古木遊(조작수시고목유)새들은 수시로 고목에서 노래하나
吟詠主賓何處去(음영주빈하처거)시 읊던 주인 손님 어디로 갔는가
無心觀客表形求(무심관객표형구)무심한 관관객은 겉모습만 보노라
이 지역이 모두가 명당터인데 그 중에 금환낙지(金環落地)라고 하는 곳에 곡전재(穀田齋)가 있다. 자세한 내용을 알려고 인터넷을 뒤저본다.
「구례향토문화유산 제9호
곡전재는 전남 구례군 산동면 오미리에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고택으로, 금환락지 명당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금환락지는 금가락지가 떨어진 땅이라는 뜻으로, 천상의 옥녀가 떨어뜨린 금가락지 형국을 하고 있어 남한 3대 명당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곡전재는 1929년 박승림이라는 분이 지었으며, 1940년 이교신씨가 인수하여 현재까지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안채, 사랑채, 문간채, 행랑채 등이 ㅡ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특히 안채는 2.8m 이상의 높은 호박돌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는 금환락지의 형국을 살려 만든 것으로, 집 안으로 들어오는 기운을 잡아주고 집안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곡전재는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특히 안채는 툇마루, 대청마루, 사랑방, 안방 등이 마루로 연결되어 있어 공간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쾌적합니다. 또한, 곳곳에 정교한 목조 건축 양식이 돋보이며, 다양한 생활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어 조선시대 생활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담을 돌아 대문으로 들어가서 보니 하나의 왕국을 건설 한듯하다. 문간채부터 사랑채, 안채가 있으며 정원과 연못이 장관이다. 후원에 잔디밭이 있는데 돌담과 산의 조화는 과연 명당인 듯하다.
곡전재(穀田齋)를 나오며
金環落地此明堂(금환락지차명당)금환락지 이 명당에
全力築城成別鄕(전력축성성별향)전력으로 축성하여 특별히 만들었네‘
萬代反芻言訪客(만대반추언방객)영원히 반추하며 방문객이 말하리니
智山精氣溢高墻(지산정기일고장)지리산 정기가 담 안에 넘치도다.
다음에 지리산 공원을 찾으니 남쪽산 기슭 숲속에 시설이 잘 갖추어 졌으나, 아직 봄기운이 일어나지 않아 찾은 사람이 없어 적막한 공원을 걸어보고 하산하여 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