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장군과 9·15 인천상륙작전
이 선 호 한국시사문제연구소장
1. 맥아더장군의 생애
맥아더는 1880. 1. 26 미국 아칸소에서 태어나~1964. 4. 5 워싱턴 D. C.에서 타계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남서태평양 전역(戰域) 사령관이었고, 연합군 점령기에 전후의 일본을 통치했으며, 6·25전쟁 초기의 9개월 동안 유엔군 총사령관직을 맡았다. 맥아더는 후에 육군 고위장교가 된 아버지 아서 맥아더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야심적인 어머니 메리 하디 맥아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3년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0년 동안 부관과 하급부대 장교를 지내고 이어 4년을 일반참모로 복무했다. 1914년에는 멕시코의 베라크루스를 점령한 미군 부대에서 몇 달을 지냈다. 1917~19년에 제42사단의 참모진에 배속된 맥아더는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전투작전과 뒤이은 라인 지구 점령군의 전투에 참여하면서 참모장·여단장·사단장 등으로 직책을 바꾸어가며 활약했다. 1920년대 미국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광범위한 개혁을 실시했고, 윌리엄(빌리) 미첼의 군법회의에 참석했다. 필리핀에서 2차례 사령관직을 맡았으며, 미국의 2개 군단을 통솔했고, 1928년에는 미국 올림픽 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맥아더는 눈부신 활동과 혁혁한 무공을 인정받아 1918년 38세에 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919년에는 육사교장이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9세였으며, 전임자는 71세였다. 젊은 교장이 부임한 육사에서는 획기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때의 일화가 있다. 『당시 학교에서는 생도들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다니는 것이 큰 골칫거리였다. 이 문제는 마침내 교수회의에 올려지고 대책이 논의되었다. 잔디밭을 망치는 생도를 처벌하자는 주장과 곳곳에 팻말을 세워 계몽하자는 등 갑론을박이 계속 되었지만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을 때, 맥아더 교장은 “생도들이 지름길로 다니는 것은 그 나름대로 필요가 있어서 일 것이다. 그렇다면 잔디를 파헤치고 지름길을 만들어 주면 될 것이 아닌가”라고 이야기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18년 준장으로 진급하고 7년 후에 소장이 된 맥아더는 1930년 육군 참모총장으로 발탁되면서 대장으로 승진되었다. 군의 최고수뇌로서 그후 5년 동안 그가 주력한 사업은 대공황의 타격으로 약해져가는 미육군의 군사력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그가 1932년 중엽 정규군 부대를 워싱턴으로 보내 ‘노병 보너스 군대’(Bonus Army of veterans)를 축출하자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1935~41년에 필리핀의 군사고문과 육군 원수로서 자금의 부족을 무릅쓰고 필리핀 방위군을 조직하는 데 전력했다. 1937년 12월 미 육군 현역에서 은퇴했다. 맥아더는 1922년 루이스 크롬웰 브룩스와 결혼했지만, 아이를 갖지 못한 이 결합은 7년 후 이혼으로 끝났다. 1937년 잔 페어클로스와 재혼했고, 이듬해 마닐라에서 외아들 아서를 얻었다. 1941년 7월 현역으로 소환된 맥아더는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필리핀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영웅적인 전투를 수행했다. 1942년 3월 남서태평양 전역 연합군 사령관직을 맡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 소환되었다. 그는 곧 뉴기니에서 공격을 개시해 1943년 1월 파푸아로부터 일본군을 몰아냈다. 1943~44년의 일련의 작전으로 맥아더군은 라에에서 샌사포어까지 뉴기니의 전략지점들을 장악하고, 애드미럴티 제도와 뉴브리튼 서부를 점령했다. 맥아더가 지휘하는 솔로몬 제도의 남태평양군은 일제히 북진해 라바울 시를 제압하고 많은 일본군 부대를 우회했다. 다음으로 타이완보다는 필리핀으로 진공해야 한다는 주장을 관철시킨 맥아더는 1944년 가을에 모로타이·레이테·민도로를 공격했다. 레이테 작전이 시작되고서야 전폭적인 병참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이전의 계획들은 태평양함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인원과 장비의 빈곤을 무릅쓰고 수행되었다. 맥아더는 태평양전쟁보다 유럽 전쟁을 우선시하고 자기가 담당한 남서태평양지역보다 중부태평양 전역을 우선시하는 상부의 결정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가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최대의 작전들은 1945년의 7개월간에 걸친 루손 전투에서 벌어졌다. 그해 봄에 그는 남부 필리핀과 보르네오의 재정복에 나서기도 했다. 그동안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의 어려운 소탕작전은 오스트레일리아군에 일임했다. 그는 1944년 12월 육군 원수로 승진되고, 4개월 후 태평양지역의 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9월 2일 그는 도쿄 만[東京灣]에서 항복 조인식에 승전국의 대표로 참석했다. 1945~51년에 일본 점령 연합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일본군의 해산, 군국주의자들의 제거, 경제복구, 자유주의 헌법의 기초(起草) 등을 독재적인 면은 있었으나 효과적으로 지휘했다. 또한 토지 재분배, 교육, 노동, 공중위생, 여성의 권리 등에서 상당한 개혁을 이루었다. 일본에 있는 동안 맥아더는 극동군 총사령관직도 맡았다.
2. 한국전쟁중의 맥아더 그리고 그의 자질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는 즉시 주한 유엔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부산 근방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한 후 9월에 대담한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10월에 북한으로 진격했다. 북한군은 급속히 붕괴되어갔다. 하지만 11월 대규모의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38선 이북에서 양단된 맥아더군은 서울 이남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2개월 후 맥아더가 지휘하는 부대들은 공세를 전환하여 북쪽으로 재진격했다. 1951년 4월 11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이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제한전을 수행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귀국한 맥아더는 처음에는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해임에 관한 상원의 공개청문회가 있은 후 그 열광은 가라앉았다. 1944, 1948, 1952년에 공화당의 보수세력은 연이어 맥아더의 대통령후보 지명을 따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맥아더는 1952년 레밍턴랜드사(社)의 이사회 회장직 제의를 수락했으며, 그후 회장의 직무를 보는 일 외에는 어쩌다 한번씩 공개석상에 나타날 뿐 뉴욕시에서 은거생활을 보냈다. 그는 1964년 워싱턴 D. C.에서 타계하여 버지니아 주 노퍽에 묻혔다. 인격적인 면에서 맥아더는 불가사의했고 모순적이었다. 많은 사람에게 고압적이고 도도하며, 이기적이고 잘난체하는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 특히 그의 사령부 직원들이 보기에는 다정하며 용기있고 가식이 없으며 겸손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가 우수한 지능과 보기 드문 통솔력을 갖추었고 의무·명예·조국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에는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대담한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 수복작전이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을 공산 침략으로부터 구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면서 지략과 대담성이 뛰어난 군인의 삶을 살아왔다. 대부분 그의 생애는 초고속 승진과 연전연승 개선장군의 영광과 환희로 빛나고 있다. 인천 상륙작전 성공은 그를 한국전 영웅으로 만들었고 그의 인기는 본국은 물론 한국과 극동지역에서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의 일생에 가장 아쉽고 원통한 일은 그와 한국인들의 소원대로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는 남북통일을 성사시키지 못한 것이었다. 이 목표는 1950년 10월 중순 중공군 개입으로 아깝게 좌절되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 아더 맥아더는 남북전쟁에서 무공훈장을 받았고 그후 미국 - 스페인 전쟁과 필리핀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맥아더 장군은 1903년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 공병대에 배치되었다. 맥아더는 군생활 초기 필리핀 ·일본에서 그의 아버지의 부관으로 근무했고 일본에서 러일전쟁(1904~1905)을 현장 관찰하기도 했다. 1906년 그는 잠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군사부관 직책을 맡았고 1914년 대위 때 멕시코 베라크루스를 점령한 원정에 참가했다. 맥아더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사단을 지휘한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 지역에서 연합군을 지휘했고 한국전에서는 유엔군 총사령관직을 수행했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 `42 무지개 사단이 프랑스 전선에서 싸울 때 맥아더는 사단참모장에 이어 여단장 ·사단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그는 전투 때 적이 자기에게 절대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작전 때마다 선두에서 부하들에게 대담성을 갖고 전진하라면서 쉬지 않고 명령하곤 했다. 맥아더는 전투 때 헬멧과 가스 마스크를 쓰지 않을 만큼 늘 용감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그는 은성무공훈장 네 개를 받았고 제1차 세계대전 영웅 존 퍼싱 장군으로부터 “맥아더 장군은 우리 부대에서 일찍이 없었던 위대한 지휘관”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맥아더는 두말 할 나위 없이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대통령의 문민 우위 권위에 도전, 가장 많은 논란을 빚은 장군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그는 전략·전술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할 정도였으며 높은 학식과 교양을 갖춘 데다 보기드문 웅변가였다. 우뚝한 키와 귀족적 미남형의 풍모는 그를 더욱 당당하고 돋보이게 했다. 그는 대담한 군인이면서 동시에 멋을 즐긴 멋쟁이이기도 하다. 꾸깃꾸깃한 작업모·작업복 차림에 옥수수대 파이프와 라이반 안경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하다. 그는 작업복에 훈장을 다는 일이 없지만 5성 계급장만은 반드시 달고 다녔다. 1950년 트루먼 대통령과 태평양 상 웨이크 섬에서 만날 때도 그는 이런 복장을 하고 나가 은연중 트루먼 대통령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출중한 능력과 준수한 외모, 군인 명문가 출신인 맥아더 장군은 군생활에서 항상 남보다 월등히 앞섰기 때문에 부러울 게 없었다. 그의 부하들은 그를 존경하거나 증오했지만 적들을 포함, 모든 사람들이 그의 전략적 독창성 ·우수성, 수륙 양용 상륙작전 전술의 대가, 최소한의 사상자로 승리를 쟁취하는 백전백승의 능력을 이구동성으로 칭송했다. 맥아더는 1922년 잠시 필리핀에 부임했다가 1930년 대장으로 승진, 육군참모총장으로 발탁되었다. 1935년 다시 필리핀에 부임해 독립에 앞서 필리핀 군대를 조직 ·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1937년 12월 31일 전역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외에 그는 대부분 군생활을 모두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무대로 활동했다. 그가 미국에서 극동통(極東通)으로 알려진 이유다. 그러나 미국 전쟁성(戰爭省 ·오늘의 국방부)은 일본의 잇따른 아시아 침략 전쟁과 대미 침략전 조짐에 대비, 1941년 7월 26일 그를 다시 현역으로 재소집했다. 그는 극동 미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그의 임무는 필리핀에 대한 일본군 침공에 대비, 필리핀을 방위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그해 12월 8일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했으므로 그의 현역 복귀 시기는 절묘했다. 맥아더 장군은 1942년 초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 공격으로 마닐라를 빼앗기고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남서태평양 방면 사령관으로서 45년 필리핀 수복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을 때까지 대일 작전을 총지휘했다. 그는 필리핀을 일본군에 빼앗기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필리핀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맥아더 장군은 45년 7월 필리핀을 완전 탈환함으로써 이 약속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45년 9월 2일 65세 때 도쿄만(灣) 미국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문서를 받아냈다. 맥아더는 전후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6년간 일본의 전후 복구와 민주 헌정 수립을 지원했다. 전후 일본은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고 국민들은 기아와 질병의 고통 속에서 신음했다.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을 도와준 맥아더는 옛날 원수였던 일본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고 많은 일본인들은 그를 `『왕관을 쓰지 않은 황제』로 불렀다. 맥아더는 전승국 군인으로서 점령지역에서 어떤 정치를 해야 하며 이를 위해 누구와 손잡아야 하느냐에 대한 모범적 해답을 제시했다. 그는 요시다 시게루 전직 외교관 출신 정치인과 협력, 전후 일본 부흥을 이끌어냈다. 그는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이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한국전쟁도 진주만 기습 공격처럼 북한 공산군에 의한 기습적 남침이었다. 맥아더는 우선 전투부대(스미스 대대)를 일본에서 한국전선에 급파했고 50년 7월8일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북한군 보병부대는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하,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한국군은 그때 북한의 위장 평화 공세에 속아 북한의 선의만 믿고 준비를 게을리했다가 속절없이 당하고 만 셈이다. 북한군은 그후 낙동강 지역까지 밀고 내려와 한국의 마지막 교두보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9월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대한민국을 구출했다. 그는 북한군 남침 직후 급거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돌아갔다. 인천상륙작전 구상은 이때 맥아더의 머리를 섬광처럼 스쳐갔고 그는 이 기본 구상을 2개월 반 동안 참모들과 수십 차례 토론 끝에 마침내 실전 작전개념으로 굳혔다. 그는 북한군이 저항없이 남하를 계속한다면 보급로가 감당할 수 없이 길어질 것이고 유엔군이 배후에서 공격, 보급로의 허리를 끊으면 서울 이남에 있는 북한군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의 이런 거친 구상이 극비리에 작전개념으로 다듬어져 일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감행된 성공한 작전인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은 수도 서울을 재탈환함으로써 상당한 심리적 장점도 살릴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은 적중했다. 이 상륙작전은 그의 충성스러운 애국심과 최고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지도력·정의감·반공정신·동맹국에 대한 의리가 어우러져 일궈낸 찬란한 승리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하였고 맥아더는 최소한의 사상자로 승리했다. 뒤이어 계속된 수도 서울 탈환작전도 성공, 한국군은 그해 9월 28일 중앙청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았다.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과 나란히 세단을 타고 총탄 구멍으로 만신창이가 된 중앙청 건물 행사장에 도착, 서울 수복 축하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로… 유엔군은 대한민국 고도(古都) 서울을 공산 전제정치로부터 해방함으로써 서울 시민들은 불가침의 개인 자유와 존엄성을 으뜸으로 하는 생활방식을 변함없이 누릴 기회를 회복하게 되었다”라고 역설했다. 맥아더가 자기 옆의 이(李)대통령을 향해 “각하, 장병들과 저는 이제 군사작전 임무 수행을 위해 민간 행정 책임을 각하에게 넘깁니다”라고 말하자 노(老)대통령은 장군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우리는 장군을 우리 민족의 구세주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라고 감동의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그후가 문제였다. 38선 이북으로 진격한 국군과 유엔군이 그해 10월 완전 승리를 앞두고 돌연 중공군 개입이라는 복병을 만난 것이다. 압록강까지 쳐올라간 국군은 통일을 바로 눈앞에 두고 휴전으로 타협해야만 했다. 맥아더는 한국전 승리를 위해 중공 폭격 등 여러 가지 확전론을 제시했다가 51년 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고 말았다. 맥아더 장군은 1937년 이후 14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뉴욕 환영 퍼레이드에서 700만 군중의 열광적 환영을 받았고 상 ·하원 합동회의에서는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라는 감동적 명연설을 남겼다. 그의 대통령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부터 핵시대 ·냉전시기를 출중한 장군으로 살아 온 그가 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저명한 장군의 한 사람이라는 점에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3. 한반도의 위기 상황과 수륙양용작전의 진가
1950년 초에 모택동은 김일성이 남한 해방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했을 때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들어 처음엔 반대했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허락과 지원 약속을 먼저 받아낸 김일성이 거듭 지원을 요청하자 마지못해 양해했던 것이다. 중국의 ‘6·25’참전 과정을 분석한 일본 이와나미(岩波)서점 발간 ‘모택동의 조선전쟁-중국이 압록강을 건너기까지’에 의하면 모택동은 북한군이 승승장구하던 1950년 8월 4일 “조선인민군이 낙동강까지 압박, 국토의 대부분을 해방시켰지만 미군은 우세한 해, 공군력으로 충분히 반격할 수 있다. 조선 인민군은 고군돌출(孤軍突出)하여 후방이 엷다. 전황의 일대 반전(反轉)이 예상되는 바, 중국 인민해방군은 8월 중 모든 준비를 끝내고 언제든지 출동할 태세를 갖추라”고 지시하였음에도 맥아더는 이를 알지 못하고 있다. 동년 8월 하순 중국군 총참모부는 전황 분석 결과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판단한 나머지, 미군의 상륙작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서해안의 인천이 상륙 지점일 가능성이 높다는 보고서를 주은래를 통해 모택동에 제출했고 이 보고를 들은 모택동은 “일리 있다.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모는 이 같은 미군의 인천 상륙 가능성에 대해 소련과 김일성에 통보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모의 우려와 권고를 묵살했다. 당시 소련 장비로 무장하고 승승장구하던 김은 8월 중에 남한을 완점 점령한다고 장담하고 있던 터여서 모의 제보를 도외시한 우를 범했지만 실제로 전 병력이 낙동강 전선에 집결 투입되어 있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9월 15일 결행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역전되고 유엔군의 일사천리 북진으로 한반도 통일이 임박한 사태 하에서 중공군의 대거 개입으로 말미암아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밀고 밀리는 3년 간의 혈전 끝에 수백만 명의 사상자와 한반도 황폐화를 가져왔을 뿐 결국 38도선과 비슷한 현 휴전선에서 1953년에 정전이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결국 인천상륙작전은 대한민국을 공산화의 위험에서 구해 준 반면 남한의 적화통일을 기도했던 김일성에게는 통탄스러운 실패와 좌절의 충격이었다. 우리에게는 6·25 개전 초의 패퇴에서 전세 역전의 계기를 잡게 한 쾌거인 반면 김일성과 그 추종자들에게는 천추의 한을 품게 한 것이다. 이 위대한 작전을 구상하고 지휘한 사람이 바로 맥아더 장군이다. 하여간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틀림없이 공산화 됐을 것이다. 노무 현 대통령도 집권 초 미국을 방문, 미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지금 정치범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며 고마움을 표시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쨌든 맥아더는 한국의 은인이다. 그런데 최근 친북 좌파세력의 발호와 함께 인천의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를 획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들은 “6·25 당시 맥아더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양키의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고 살 수 있었다”또 “지금껏 우리가 양키들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 상전을 어찌 아름다울 美자를 써 미국이라 부를 수 있는가. 우리는 맥아더를 ‘괴수’라 부른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지난 60년 간 우리 민족은 양키들한테 혼을 빼앗겼다”며 “양키들이 우리 민족에게 기독교를 주입시켜 한집 걸러 교회가 널려 있고 우리 민족 상징인 단군상을 깨뜨려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식민통치 상징인 맥아더 동상을 철거해야 민족의 혼을 살리고 굴절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래야 양키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 통일도 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평양 만경대 방문시 찬양 글을 써 말썽을 일으켰던 모 교수는 지난 6월 30일 통일연대 인천지부가 개최한 맥아더 재평가 토론회에서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남측의 리 장군을 침략자로 부르지 않는 것처럼 김일성 주석을 침략자로 일컫는 것은 자폐증적 사관”이라며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최소한 4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에 대해 은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미국으로부터 목숨을 구한 ‘친일민족반역자’에 불과하다”는 괴변과 악의 논리를 폈다. 이쯤 되면 할 말이 없다. 김일성의 전쟁 도발 범죄엔 침묵하면서 대한민국 공산화를 저지한 인천상륙작전을 저주하고 맥아더가 원수처럼 여겨진다는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필자는 인천 상륙작전 55주년을 맞아 국가안보의 내외부적 위협이 고조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인천 자유공원에 우뚝 서있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우러러 바라보면서 인천상륙작전을 회고하면서 그 역사적 가치를 다시 한번 평가해보려고 한다. 북한 공산주의자가 한국을 침공하기 118년 전에 크라우제비츠는 “민첩하고 강력한 공세이전은 번쩍이는 복수의 칼날로서 방자에게 최선의 기회를 제공한다”라고 역설하였다. 1950년 9월 15일에 결행된 인천 상륙작전은 세계 전쟁사를 통해 볼 때,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한 가장 극적인 사례였었다. 이는 맥아더 장군의 전략적 혜안과 담대한 용기의 발로임은 물론 군사력 사용에 있어서 지략과 전문성을 유감 없이 발휘한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정확하게 말해서 20세기에 있어서 미국의 해상세력 만이 성취할 수 있는 불퇴전의 승전이었으니, 적의 측방을 해상으로부터 강타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다른 공격 방법이 없음을 입증하였다, 미국은 인천상륙작전에 선행하여 많은 유질동형의 작전을 경험한 바 있으나, 단지 하나의 기계적인 작전으로 치부하였으며, 수륙양용작전의 진가와 그 작전능력보유의 효용성을 잘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훨신 전인 1949년 가을 어느 날 오후에, 당시 미 합참의장이던 브레드리 장군은 일단의 해군고위급 장교들에게 훈시를 한 다음, 하원 군사위원회에 출석하여 “본인의 생각으로는 가까운 장래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수행할 사태는 결코 오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이 못되어 미 해병 제1사단이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49년 가을 당시에 워싱턴 당국에서는 아무도 인천에 대하여 관심조차 가진 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 미국의 방위태세는 별로 건전하지 못하였다. 감군과 복원이 휘모라 치고 있었다. 심각한 당시 상황을 웨드마이어 장군은 이렇게 표현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란 축구시합에서 이기고는 경기장을 떠나면서 축배를 덜고 있다.” 군축과 더불어 군종 간 생존을 위한 전략적 논쟁과 갈등이 고조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원자탄이 재래형 폭탄을 무용지물로 만들었고, 전략공군의 중요성이 급부상 하면서 절대전 내지 총력전이 될 장차 전쟁은 항공작전 일변도로 바뀔 것이란 주장에 무게가 실리기도 했다. 필연적으로 그 동안 미국의 역사상 방패와 창의 몫을 해 온 해상세력이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1949년 당시 미 해군전쟁대학 교장이던 코놀리 제독에게 육군 참모총장 출신의 존슨 국방장관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졸업식에서 전함으로서 해군과 해병대를 크게 실망시켰던 것이다. “이제 해군의 전성기는 끝나간다. 더 이상 해군과 해병대를 보유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합참의장이 본인에게 말한바에 의하면, 상륙작전은 과거지사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결코 더 이상은 상륙작전을 수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은 해군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던지 공군이 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군은 별로 볼일이 없게 되고 있다.” 그리하여 1945년에 610척의 상륙함정을 가졌던 미 해군이 4년 후엔 배가 91척으로 줄여 덜었고, 1948년에는 510척의 상륙주정을 폐품처리 하면서 단 1척을 신규 건조하였을 뿐이다. 한편 미 해병대도 포레스탤 국방장관 시절엔 병력이 35만 여명이나 되었지만, 1949년에 존슨 장관이 들어서자 23만 명으로 격감되고 말았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에 와서는 미 해병대를 전면 개편하여 함대해병대(FMF)를 6개 보병대대와 1개 비행대대로 축소시킴과 동시에, 미 해군항공세력 역시 전후에 첫 신형 항모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이것마저 국방장관이 취소시켜 버림으로서 해상기지를 잃게 되었다. 아무튼 미 해병대는 6개 대대로 명맥만 유지하느냐, 아니면 욱군으로 전군하느냐 하는 기로에 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국내상황과는 달리 극동지역에 있어서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미 극동군 사령부는 미국의 군사적 입지를 강화시킬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었다. 중국이 공산화되자, 독일처럼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체제의 두 정부로 나누어 있었으며, 1948년 이후 한반도 역시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대만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한반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1949년 초에는 주한미군마저 소수의 고문단만 남한에 남겨둔 체 전원 철수해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이때 맥아더 사령부가 위치한 일본에는 상당규모의 주일미군이 존속해 있었다. 한국에 대한 전략적 평가절하는 당시 브레드리 미 합참의장의 비밀등급이 표시된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을 정도였다. “미국의 군사안보적 관점에서 볼 때, 한국에 군사력을 유지하고 군사기지를 존속시킬만한 하등의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한국에 군사원조를 계속한다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다고 생각된다.” 같은 맥락에서 에치슨 미 국무장관이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이 제외되어 있음을 외신기자회견에서 공식 발표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국군은 사실상 중화기나 기동장비가 전혀 없는 경 무장한 몇 개의 보병사단 밖에는 더 가질 수가 없었다. 미국이 군사력 증강의 필요성을 부정하여 현대무기나 장비획득을 억제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미 북한군은 소련의 장비지원과 중공의 병력지원으로 잘 무장된 막강한 인민군 14개 사단을 중심으로 다수의 전투기와 함정이 갖추어져 남침작전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어수선한 상황하에서 드디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이 소련과 중공의 배후 지원 및 조종아래 남침을 개시한 것이다. 그 당시의 사태를 맥아더 사령관은 “아프리카의 독사 코브라에게 갑자기 물린 것 같았다”고 후일 술회한 적이 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에 못 당하여 한국군과 급거 투입된미 육군과 미 해병대 그리고 영국 해병대는 남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을 둘러싼 조그만한 영토를 제외하고는 남한의 전 국토가 적에게 점령당한 처절한 상황이 1950년 8월 중반이었다. 이때 북한군은 총 전력을 집중 투입하여 낙동강최후 방어선을 돌파하려고 집요한 공세를 폈던 것이다. 문자 그데로 백척간두의 위급한 상황이었다. 미 해군 제7함대가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기는 해도, 적의 육상 병참선은 서울을 통하여 남쪽으로 완강하게 중단없이 유지되어 왔으며 코브라의 주둥이 같은 적 전선부대들의 돌파 추진력은 날카롭고도 강력하였다. 그러나 적의 측방과 후방은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이보다 앞서 같은 해 7월 4일, 맥아더는 트루만 대통령의 참전결정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우선 1개 대대의 전투부대를 급조하여 준비 안된 상태에서 한국전선에 최초의 지상군전투부대로 투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오산부근에서 북한군에게 박살 당하여 일시에 전투력이 상실되는 심한 피해를 입고 말았으니, 이 부대가 유명한 스미스 특수기동부대였던 것이다. 바로 이날 동경의 제일생명회사 빌딩에 있는 맥아더의 사무실에서는 북한군의 지상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한 해상공격작전을 실시하려고 회의가 열리었다. 맥아더는 일본에 있던 육군 제1기갑사단을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을 점령하고 적의 병참선을 차단함으로서 그가 늘 말했듯이 북한군을 망치로 때려부수는 작전을 하려는 복안을 발표하였다. 물론 이때 인천 외에 진남포, 주문진, 군산 등도 상륙지점으로 고려되었다. 그는 이 작전을 위한 상륙군을 포함한 요구사항을 워싱턴 당국에 타전하였다. 제1수륙양용단 사령관인 도일 제독은 태평양전쟁시에 동태평양에서 지휘관과 참모를 역임한 상륙작전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깊은 전문성을 가진 몇 안 되는 해군 장성중의 한사람이었다. 도일 제독은 당시 동경만에서 상륙작전 연습을 실시하고 있던 중 맥아더의 요청에 의해 제7함대의 수륙양용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됨으로서 맥아더의 핵심 예하부대장이 된 것이다. 도일 제독을 중심으로 한 해군 해병의 핵심요원들은 그들이 가진 경험과 전문지식으로 맥아더가 시급히 필요로 하는 바를 충족시켜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불확실한 계획지침을 갖고서도 1950년 7월부터 인천상륙작전계획이 본격적으로 착수된 것이다.
4. 인천 상륙작전계획의 진전과정
이미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있던 미 육군 제1기갑사단을 상륙작전에 전환 투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맥아더가 이해했으나, 인천 외에 군산을 상륙지점의 대안으로 주위에서 꾸준히 권고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그렇다면 맥아더는 왜 인천을 고집하였는가 하는 것은 자명하다. 인천은 한국의 역사적인 도읍지이며 최대의 도시인 서울에 이르는 항구이고, 또한 서울은 가장 중요한 교통의 중심지로서 과거 일본이 부설한 철도망이 서울을 중심으로 남북한을 연결하고 있으며, 잘 포장되지는 않았지만 고속도로가 이 곳을 중심으로 사방에 연결되어 있고, 국가 전신 전화망도 서울에서 발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략적 이점이 있다 할지라도, 상륙작전을 위한 전술적 조건은 이와 정반대였었다. 몇 가지 수로조건을 보면, 간만의 차이가 32피트나 되고 접근수로의 조류속도가 7 내지 8 놋트로서 상륙주정(LCVP)의 속력을 능가할 정도이고, 협수로는 함정과 주정의 선회나 기동을 위한 공간이 불충분하여 막다른 골목길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러 곳에서 파손되거나 좌초되는 함정과 주정들이 통로를 가로막게 될 것인 바, 적의 해안포나 지상포화의 표적이 되고 말 것이란 우려도 제기되었다. 뿐만 아니라 상륙지점도 상륙군이 전개할 수 있는 공간이 불충분한 것은 물론이고, 내륙진출에 장애가 되는 밀집된 건조물이 해안선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상륙함정과 상륙주정이 접안 할 수 있는 경사도의 수심인데, LST는 29피트, LCVP는 23피트가 요망되는데 이러한 조건을 갖출 수 있는 경우는 월 3회나 4회에 불과하였다. 알몬드 장군은 상륙돌격을 실시하기에는 최악의 조건을 가진 상륙장소라고 하면서도, 맥아더의 뜻을 헤아려 “그러나 최악의 상륙가능 해안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최선의 해안이 될 수도 있다. 중국의 옛 격언에 현명한 장수는 불리한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바꿔 놓을 수 있는 자란 말이 있지 않으냐”고 말하였다.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물리적인 장애 외에도, 인천상륙과 관련하여 다른 두 가지 장애물이 가로 놓여 있었다. 이는 맥아더 장군이나 도일 제독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첫 번째 문제는 이러한 대역사(大役事)를 감당할만한 유능한 상륙군과 상륙기동함대를 편성하는 일이고, 두 번째는 상륙작전의 후속 위협으로서 중공의 한반도 개입이나 소련의 동구 침입 같은 공산주의자들의 반격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유능한 자격있는 수륙양용군은 역시 미 해병대 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으며, 미국 시민들은 물론 백악관이나 국방성에서도 해병대의 승전보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 해병대는 축구시합을 끝낸 경기장처럼 팀을 해체한 상황이었던 바 정예 상륙사단을 재건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존슨 국방장관이 잘 알 것이다. 맥아더는 제1기갑사단을 사용하려던 인천 상륙자전계획인 BLUE HEART계획이 취소됨에 따라 고육지책으로, 미 육군 제1기갑사단 대신 낙동강방어선 서측방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던 미 해병 제1여단을 뽑아 상륙군의 주력인 미 해병제1사단의 기간연대가 되도록 한 새로운 상륙작전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병사단 신편을 위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약 7천명의 예비역을 동원보충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타 필요한 요소부대를 창설하기 위하여 대서양 함대해병대의 대부분 요원을 태평양으로 전환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어려운 일을 단 시간 내에 완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한 것은 당시의 케이트 해병대 사령관과 셰퍼드 태평양함대해병대 사령관이었다. 그들의 열성적이고 헌신적인 노력과 함께 하원 군사위원회의 입법 및 예산승인이 맥아더의 아이디어를 실천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7월 19일 동원령이 선포되었으며, 신편된 미 해병제1사단(-)이 드디어 8월 12일 샌디에고를 출항하였다. 그런데 지중해의 제6함대에 배속되어 있던 1개대대는 수에즈 운하에서 출발하여 해상 합류토록 되고 준비가 덜된 제5연대는 인천에 후속상륙토록 하되 부산에서 탑재하게될 낙동강전선에 투입되었던 제7연대는 인천외항에서 합류하도록 계획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부족한 D일 상륙돌격부대로 한국해병대 제1연대가 역시 낙동강전선에서 차출되어 미 해병 제1여단과 함께 부산에서 탑재하여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지난날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인천 상륙작전만큼 격렬한 반대에 부딛친 작전이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다. 특히 그 당시 육군과 해군이 상륙작전은 한물갔다고 공공연히 비난하는 상황하에서, 미국의 군사력은 축소약화 분산되어 있었고, 한국전쟁을 위한 해상병참선은 길게 태평양상에 신장되어 있었던 바, 소련군이 라인강을 건너온다던가,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오도록 구실을 준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맥아더는 극동에 배치된 군사력만으로 싸우라는 충고까지 나왔던 것이다. 1950년 7월까지만 해도 맥아더가 합참에 5회에 걸쳐 작전계획의 승인요청을 한바 있으나, 최악의 성공가능성을 전제로 한 세력투입을 유보하는 입장에서 대통령의 결심을 받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집요한 압력에 못이겨 가용부대의 획득요청을 승인해 주기는 했으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를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아 8월 23일 맥아더에게 셔맨 해군참모총장과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등 막료들을 동경으로 급파하여 맥아더와 만나 담판을 짖도록 하였다. 이들을 위한 회의를 준비한 도일 제독은 상륙목표인 인천에 대한 세부적인 연구를 통하여 고무적인 작전성과를 예상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려고 애썼으나, 맥아더 장군의 참모장인 알몬드 장군은 워싱턴에서 오는 분들에게 너무 구체적인 문제까지 언급하지 말고 맥아더의 의중만 개략적으로 보고하면 본인이 그들에게 핵심문제를 납득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귀띔을 해 주었다. 회의 당일 본회의에 앞서 제1수륙양용단의 참모회의에 참석한 맥아더는 80분간에 걸쳐 각 참모들이 정보,항공기상, 해안조건, 상륙주정, 조수, 조류, 수로, 통신, 부교 함안이동, 함포지원 그리고 항공지원에 다한 분야별 보고를 청취하고, 별 다른 질문이나 지시가 없었으며, 도일 제독은 현재 할 수 있는 말은 “인천 상륙작전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다”란 포괄적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합참의장이 보낸 대표단과의 회의에서 맥아더는 도일 제독으로 하여금 간명한 브리핑을 먼저 하게 한 다음, 내방자들에게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도록 하고 나서 조용히 일어서서 약 한시간 동안 자기의 전략을 즉흥적 해설로서 설득시켰다. 그는 결론을 다음과 같이 엄숙하게 맺었다. 아무도 더 이상 이에 반대하지 못하고 분위기는 숙연해 졌다. “상륙작전은 가장 강력한 전쟁수단이다…… 나는 인천상륙작전이 5천대 1의 도박이라고 본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도박에 익숙해 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며, 적을 박살낼 것이다.” 합참의장의 대표단은 만족하여 돌아가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워싱턴에 돌아 간 다음에 맥아더의 제안이 가까스로 승인되었다는 메시지가 날라 왔다. 이날 맥아더는 셔만 제독과 콜린스 장군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이날 미 해병제1사단의 전방지휘소 요원이 항공편으로 동경에 도착함으로서 상륙군사령관 스미스 해병소장이 돋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술과 담배를 삼가며, 온유하고 겸손하면서 자제력이 강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육군보병학교 출신이며 제2차 대전시에 오키나와와 뉴브리태인의 상륙작전에서 전공을 세웠고, 최근까지 해병대사령관 보좌관으로 근무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1950년 8월 12일 미 극동군사령관(CINCFE) 작전계획 100-B로 익명 CHROMITE 란 상륙작전계획이 이미 발표되어 있었는데, 상륙일은 9월 15일이고, 상륙장소는 인천이었다. 이 때가 상륙군사령관이 동경에 도착하기 겨우 23일전으로서 정상적인 상륙작전 계획 수립주기가 최소한도 90일이란 것을 전제할 때 너무도 급박한 일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작전계획이 하달될 당시엔 워싱턴 당국의 최종승인조차 얻지 못한 상태였다. 문제는 이 계획을 발전시키기 위한 가용정보의 불충분이었다. 제2차대전이 끝난 다음 인천의 수로조건은 미 육군에 의해 여러번 조사된바 있어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자료인 조석표 조차 구구각각이었다. 일본과 미국이 서로 다른 수치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도일 제독은 미 해병대의 사진정찰기 F4U 2대를 함재기에서 띄워 일일 13회의 출격임무를 부여하여 4일간에 걸쳐 인천항 일대의 항공사진을 촬영 분석함으로서 D일의 정확한 만조와 간조 시간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당일의 아침 만조시각은 일출후 45분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만조시각은 일몰후 27분이었다. 만조시간은 2시간임으로 이 동안에 당시의 저마력에 단일 스크류의 APA와 AKA가 외항의 수송선 정박구역으로부터 협수로를 통하여 진입 접안 및 이안 하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하며 왕래간 예상되는 일출전과 일몰후의 저시도 조건하에서 항행이 매우 위험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뿐만 아니라 2개의 오전과 오후의 다른 시간대에 상륙군을 지정된 해안까지 함안이동시킨다는 것이 쉽지 않으며, 상륙한 상륙군이 적의 저항이 어느 정도일지는 예상하지 못하지만 해안교두보를 확보하고 진지를 구축하기 위한 시간이 오후 상륙하는 부대에게는 결정적으로 부족할 것이 뻔했다. 또 다른 문제가 다름 아닌 인천항을 감제하는 월미도의 사전 제압 또는 점령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1개 대대가 조조에 월미도에 먼저 상륙을 하고, 오후 만조시에 해병제1사단의 주력이 인천에 상륙하도록 하는 2개 단계작전에 의한 최종적인 상륙돌격계획이 확정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바 있거니와 인천 상륙작전계획이 확정되는 순간에도, 미 해병제1사단의 3분지1이나 되는 세력인 제5연대는 제33해병항공단과 함께 구성된 제1해병원정여단(MEB)의 편성을 갖고 상륙작전이 아닌 지상작전에 투입되어 육군의 지휘를 받으면서 한국의 최후의 보루이던 낙동강방어선의 서측방을 사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맥아더 극동군사령관 예하의 제8군 사령관인 워커 장군은 낙동강방어선을 지키는 책임을 진 입장에서 해병제1여단의 인천상륙작전 전용을 완강히 반대하면서 최후 저지선이 돌파당하여도 책임질 수 없다는 배수의 진을 치기까지 하였다. 이때 상륙작전을 잘 모르고 해병대의 조직문화를 이해할 리 없는 맥아더의 참모장 알몬드 장군은 해병제1사단장인 스미스 장군을 설득하여 제5연대 대신 약 40%가 한국육군신병으로 충당되어 있는 미 육군 제7사단 제32연대로 대치하는 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상륙작전의 경험이나 훈련조차 없는 핫바지부대를 거느리고는 유에서 무를 창조하는 상륙작전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부하였다. 물론 이때 미 해병제1사단은 갑자기 동원편성되기 때문에 제7연대가 9월 15일까지는 인천에 당도하지 못한다는 조건하에 통영상륙작전으로 명성을 떨친 한국 해병제1연대가 그 자리를 메우도록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맥아더는 미 육군 제10군단을 상륙군으로 하여 그 밑에 미 해병 제1사단과 미 육군 제7사단을 두되 D일의 상륙돌격부대는 미 해병사단과 배속된 한국해병연대가 담당토록 하고 미육군 제7사단과 배속된 한국육군 제17연대는 D일 이후의 후속상륙부대로 지정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해병 제5연대가 영산전투에서 빠저나온 것이 9월 4일이었다. 바로 피로도 회복못한 채 부산에서 재편성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탑재하기 시작하였다. 상륙을 불과 10일 앞둔 시점이었다. 이때 전선은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9월 5일 영천이 뚫림으로서, 대구가 위태롭게 되고, 부산도 안심할 수 없는 상태였다. 미 제8군 본부의 하와이 이동설까지 나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상륙군으로서는 상륙목표지역인 인천 서울 일대엔 얼마나 강력한 적이 포진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만약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에 실패한다면 한국의 운명은 끝장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팽배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상륙이 성공하더라도, 소련잠수함이나 항공기가 개입하여 상륙군의 후속부대 진입을 봉쇄하던지,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압록강을 건너온다면, 비록 맥아더가 항공폭격으로 압록강을 피바다로 변하게 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지만, 미국이 제3차 대전을 무릅쓰고 대항할 것인지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의 정보판단에 의하면, 인천 서울지역의 적 세력은 모두 5천명 내지 1만명 정도로 약간 과소 평가되고 있었다. 특히 상륙지점인 인천 자체엔 아몬드 장군이 말했듯이 경미하게 방어된 해안으로서, 이른바 ‘최악의 상륙가능 해안’이라 할만했다. 북한군 소속의 2개 서해안방어연대가 배치되어 있고, 76미리와 106미리포로 장비된 2개해안포대가 해안방어에 임하고 있다는 정도가 상륙직전의 정보보고였다. 아무턴 칼을 뽑아 던 이상 적을 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CHROMITE 작전계획에 포함된 상륙기동부대의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쭚 인천항 탈취 및 해안교두보선 확보 쭚 신속 전진 및 김포 비행장 점령 쭚 수도 서울 점령 확보 쭚 서울의 북, 북동 그리고 동쪽 차단진지 점령 쭚 인천 서울을 점령한 군사력이 철상(anvil)이 되고 북상하는 제8군이 망치(hammer)가 되어 공산군을 타격 맥아더는 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제7합동기동부대(JTF-7)를 편성했는데 상륙작전 교리에 따라 제7함대사령관인 스터러블 제독이 본 작전에 참가하는 모든 해군과 상륙군을 총지휘하는 합동기동부대사령관이 되고, 상륙군으로 해병 제1사단과 육군 제7사단을 제10군단으로 편성했는데 알몬드 장군이 이 군단장을 맡았다. 합동기동부대의 편성은 인상적이었다. 71,339명의 한 미 육 해군 및 해병대 장병과 7개국의 해군함정 230척 뿐만 아니라, 34척의 일본 LST까지 참여하였다. 그러나 지원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항공지원세력으로서 함재기 외의 미공군부대는 기동편성에 포함되지 않았다. D일전작전으로서는 진남포와 군산 그리고 주문진에 대한 함포사격에 이은 양동 및 양공작전이 실시되었고, 2일간에 걸쳐 치열한 함포사격과 항공폭격이 인천항에 집중되었다. 이는 과거 태평양전쟁당시의 경험에 비추어 5일간의 공격준비지원화력의 필요성도 거론되었으나, 합동기동부대 사령관의 결심에 따라 2일간으로 결정된 것이다.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미 해병 제5연대 제3대대가 배속된 한국해병 1개 중대와 함께 상륙주정에 전재한 다음 5시 40분에 월미도로 향발했다. 기동함대 기함에서는 맥아더와 주요 지휘관 및 참모들이 쌍안경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월미도 일대는 포연에 쌓여 잘 볼 수 없었다. 제1파가 ‘녹색해안’에 상륙한 것은 6시 31분이었다. 뒤이어 6시 59분에는 대대 예비대까지 상륙이 끝났다. 월미도에 배치된 적은 인민군 제226독립연대 예하의 1개 중대와 918연대 예하의 1개 포대로서 총병력은 400명 정도였다. 적의 저항은 경미하였고, 포로 136명에 적 시체 180구를 확인하는 전과를 단번에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는 부상17명에 지나지 않았다. 대대장의 상황보고가 기함인 메킨리호에 탑승하고 있는 맥아더에게 전달되자, 그는 다음과 같이 격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해군과 해병은 오늘 아침보다 더 찬란하게 빛난 적이 없었다.” 제1단계 상륙은 성공하였으나, 오후 만조시간의 제2단계 상륙은 주력부대의 본격적인 상륙으로서 인천 북방 고지대를 끼고 있는 암벽지대인 ‘적색해안’에 제5연대가, 남쪽의 부두를 끼고 있는 ‘청색해안’에 제1연대가 상륙하며, 예비대인 한국해병 제1연대가 역시 ‘청색해안’에 상륙하도록 함안이동계획이 짜여져 있었다. D일 오후 5시 31분에 예정대로 상륙주정으로 적색해안에 도착한 제5연대는 사전에 준비해 간 알미늄 사닥다리를 이용하여 상륙에 성공하였고, 청색해안은 평탄한 해안 조건인바 제1연대가 수륙양용차를 타고서 해안 깊숙히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뒤이어 예비대가 상륙하여 해안을 정리하자 30분 후에 LST가 접안하여 보급품을 양육하기 시작하였다. 우려했던 타라와 상륙작전의 재판은 아니었다. 미 해병 제2사단이 태평양전쟁시 상륙했던 타라와에서는 상륙초일 1,5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최악의 상륙이었던데 비하면 인천 상륙작전은 초일 전사 21명에 전상 175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몰시각까지의 짧은 시간 내에 적의 반격을 무릅쓰고 3,000톤에 달하는 상륙군의 보급품이 양육되고 상륙한 3개 연대가 적 포화 유효사정권 밖으로 진격하여 해안교두보선을 확보함으로서 야간 진지보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급조된 해병사단이지만 그 요원들은 모두 제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역전의 상륙자전 베트랑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12일 후에는 치열한 격전 끝에 서울을 탈환할 수 있었고, 북한군은 병참선이 차단된 상황하에서 제10군단과 제8군의 양익포위공격에 압착섬멸당하고, 반신불수가되어 38도선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전세는 역전되고 말았다. 드디어 맥아더의 도박은 성공했다.
4. 인천 상륙작전 성공의 역사적 교훈과 당면과제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은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승전이었다. 이는 전략적, 전술적, 정치적 그리고 심리적인 승리를 연합군과 한미 두 나라에 안겨 주었다. 역사에 가정법 과거의 표현을 쓰지 말라고 한바 있지만, 그 당시를 회상해 볼 때, 만약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지 않았더라면, 낙동강방어선은 고수될 수 없었을 것이며, 한국은 제주도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 사태가 호전되어 지상군이 북진하여 서울을 탈환하려고 했다면, 엄청난 대가를 치루어야 했을 것이다. 비록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원산 상륙작전이 해상기뢰 때문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작전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미 해병대가 중공군의 대량개입으로 실지회복직전에 사상 최악의 고통과 좌절을 맛보면서도 성공적인 함흥철수작전으로 우리의 수많은 인명을 구출해낸 것 역시 상륙작전의 연장선상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21세기의 탈냉전시대에 즈음하여 우리는 한반도의 전쟁억제와 평화정착을 내다 볼 때, 북한의 대남전략이 변화하지 않는 한 필연적으로 장차전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가장 개연성과 가능성이 큰 한반도의 장차 전투작전은 역시 상륙작전일 것이다. 이는 성공확률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현행 한미연합군의 작전계획5027에 한미연합상륙작전계획이 명시되어 있다. 상륙작전 의지와 능력은 국가생존전략의 차원에서 보존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면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인천 상륙작전의 전략적 교훈을 재음미해본다. ① 방대한 규모와 특이한 복잡성을 지닌 상륙작전은 유자격 전문부대가 아니면 수행될 수 없다. 인천상륙작전에 있어서 도일 제독이 지휘한 함대와 스미스 장군이 지휘한 상륙군은 명실 공히 유자격 전문부대였으며, 두 지휘관은 공히 상륙작전에 대한 누적적 경험과 전문적 지식을 갖춘 권위자였던 것이다. 맥아더는 비록 육군 장성이었지만 태평양전쟁에서 상륙작전으로 승전을 장식했던 신념의 원로 지휘관이었다. 그래서 상륙돌격작전부대의 기동편성에 전문성이 결여된 부대는 배제하도록 했던 것이다. 상륙작전의 교리에 의하면 ‘방어된 적 해안에 대한 해상공격’이 상륙작전의 정의인바, D일 이후의 후속 비전술상륙부대는 해상수송작전에 참가한 것이지 상륙돌격(AMPHIBIOUS ASSAULT)에 참가한 것이 아니란 것을 유념해야 한다. 현재 한국해군은 상륙작전 전문가 양성을 사실상 소흘하고 있으며, 가용상륙군에 걸맞는 상륙함정과 함안이동수단의 확보에 미온적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 해병사단들은 절반은 준 육군과 같은 기능을 맡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② 최악의 작전환경 하에서 도박일 수밖에 없는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최선의 확립된 전술작전교리와 치밀하게 성안 시험된 계획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덜었기 때문이다. 인천 상륙작전계획은 불투명한 맥아더의 최초지시와 사상 최단 계획수립기간에도 불구하고 각급 제대가 동시적이고 병행적이며 협조적인 계획을 발전시킨 것은 평시의 전문적인 교육훈련과 실전경험을 통해 축적된 노하우와 창의 덕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탑재와 목표지역으로의 이동 그리고 함안이동은 물론 내륙기동에 이르기까지 기동함대와 상륙군의 계획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잘 집행됨으로서 도박이 성공한 것이다. 이는 우유부단함이 없는 최고지휘관의 결단과 과감한 리더십이 주효한 전략적 전술적 기습달성의 표본적 사례가 되기도 한다. ③ 해상투사전력의 효용가치와 지해공 작전수단의 시너지화가 거둔 개가였다. 부산최후방어선의 사수에 급급하던 유엔군이 일거에 공세이전으로 역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해상우회기동에 의한 적의 옆구리 가격이었다. 그 당시 핵상황 하에는 상륙작전이 불가능할 것이란 선입관이 팽배해 있었지만, 항모에 의한 해상기지항공지원, 수상함에 의한 함포지원 그리고 상륙군에 의한 수륙양용돌격이 삼위일체가 된 해상투사전력 만이 가장 경제적으로 지상전상황을 뒤집어 놓을 수 있음이 입증된 것이다. 상륙작전은 고도의 입체적 통합작전으로서 해상세력을 중심한 자원과 노력의 통합으로 목표를 성취가능한 해상진공(進攻)인바 상륙군의 타력이 무엇보다 강조된다. 조직구성원의 배수진을 친 물리적 돌파력은 물론 사생결단의 정신력이 그 중핵이 된다. 그래서 해병은 강인해지도록 연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투사전력의 필요하고도 충분한 구비요건이다. 미 해병 제1사단은 그러한 조건을 갖춘 목제부대가 아닌 철제부대였다. 한국해병대는 어떤지 자문자답해보아야 할 것이다. 1950년 9월 24일 상륙군이 서울외곽에서 치열한 공격을 전개하면서 수도탈환에 열을 오리고 있을 때, 모스크바 발 AP통신이 소련의 인천상륙작전 평가를 맥아더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미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인천상륙작전 같은 경우라면, 원수가 지휘하지 않고 병장이 지휘해도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심기가 불편해진 맥아더는 이렇게 응수하였다. “가장 확실한 성공을 보장하는 상륙은 적이 저항하지 않는 곳에 상륙하는 것이다. 그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역시 병장보다는 원수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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