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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4:1-13 유혹 2006. 12. 23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ㄱ)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ㄴ)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10 기록하였으되 ㄷ)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하였고 11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ㄹ)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사십일 동안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가셨는데도 마귀는 시험한 것입니다. 마귀가 시험하는 것은 유혹입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시험과 유혹을 같은 말로 사용하고 우리 한글성경도 같은 말로 사용합니다만 그러나 시험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훈련하고 연단하기 위한 시험이 있고 하는 유혹하기 위한 시험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1:13-15절입니다.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여기서 시험이란 유혹입니다. 하나님이 유혹하시거나 유혹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이 유혹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서 그런 것입니다. 그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의 현실에서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무안의 화평교회 사모님이 십자가에 마을에 글을 올릴 것을 보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사회책에 인간의 욕망이 무한다는 내용이 있다는 것을 보고 저도 딸의 사회책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어떤 가정이 돈을 많이 들여 이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사를 하고나니 집은 새 집인데 이 아이의 가구가 헌 가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떼를 써서 침대를 구입하였는데 침대를 사고 나니 책상도 새로 사고 싶고 컴퓨터도 언니와 함께 사용하는데 불편하니 따로 구입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가 욕망은 무한한대 자원이 한정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소득은 그만큼 되지 않으니 합리적인 경제생활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만 되어도 자신의 욕망이 무한하다는 것을 아는 세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러합니다. 끊임없는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추구하라고 광고라는 이름으로 불을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아파트 광고를 보면서 화를 내시던데 왜 그런가 하니 좋은 아파트만 들어가면 행복이 거저 주어지는 양 선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보험회사는 보험만 들면 행복이 다 보장되는 것으로 광고합니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에서 행복하고자 하는 욕구, 안전하고자 욕구들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 인간을 유혹한 내용을 살펴봅니다. 창세기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허용하셨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 먹지 말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이 하와를 교묘하게 유혹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되기 때문에 따 먹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유혹을 받고서 선악과를 보니 어떻게 보입니까?
창세기 3:6절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사망에 이르게 할 선악과의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흉측한 것이 아닙니다. 구역질나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침이 꼴깍 넘어갈 만큼 먹음직합니다. 먹음직하려면 보기에도 좋아야 합니다. 그러니 보암직도 하고 그것만 먹으면 지혜로울 것같이 탐스러운 것입니다.
어느 누가 안 따먹고 배길 인간이 있겠습니까? 그 유혹을 받아 하와가 먹고 아담에게 주니 아담도 먹었습니다. 책임은 아담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 때로부터 인간은 사망아래 갇히게 된 것입니다. 사망아래 갇힌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지만 그 선악의 기준은 인간 자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 손해가 되면 악으로 보는 것입니다.
또한 선악과 이후의 인간은 스스로 선을 쌓아서 영생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다는 아는 이야기입니다. 살아서 악한 짓을 많이 하면 죽어서 나쁜 곳에 가고 살아서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죽어서 좋은 곳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문화마다 다른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여도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에게는 모두가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의 성경해석도 의의 기준을 율법을 못 지킨 것보다 지킨 것이 많으면 의롭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떤 신이 좋은 신입니까? 자기를 이롭게 하는 신이 좋은 신입니다.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입니까? 어떤 가정이? 어떤 교회가? 모든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나를 살리면 선한 것이고 나를 죽이면 악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좋은 분입니까? 악한 분입니까?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의 눈에는 예수님을 죽여야 할 정도로 악한 분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하는 것에 목숨을 걸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15-17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창세기의 유혹과 같은 유혹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이 먹음직한 것이 육신의 정욕입니다. 보암직한 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이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입니다(약3:15).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사는 현실이 이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침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난 주 주보 칼럼을 보셨습니까? 자기의 집을 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의 성을 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의 교회를 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완전한 잠은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날마다 죽이기 위하여 십자가를 들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은혜로 받게 된 자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은혜가 어떻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하는 그런 고백이 나올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유혹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이기실 뿐만 아니라 그 이기신 효력을 오늘도 자기 백성에게 적용시키고 계시기에 바울과 같은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유혹을 이기신 모습을 봅니다.
제일먼저 당한 유혹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리신 것입니다. 이때 마귀가 유혹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 유혹은 오늘 우리에게도 날마다 오는 유혹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줘 봐! 서울의 어느 교회는 실제로 억만장자 되기 세미나를 열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런 유혹들은 지천에 늘린 것입니다.
여기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주릴 때에 어떻게 하였습니까? 홍해를 건넌 것을 바울사도는 세례를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고전10:2). 그런데 홍해 건너고 3일 만에 물 없다고 원망하고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 다 떨어지자 양식 없다고 원망한 자들입니다. 약속의 땅을 40일간 정탐하고 와서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40일을 1년으로 환산하여 40년을 광야에서 다 죽이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행한 일이라고는 원망과 불평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들어간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나가셔서 40일간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는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에 광야에서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이 그대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자신의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신명기 8:3절의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두 번째 유혹은 세상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의 영광을 준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늘에서 쫓겨나서 이 지상과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되었지만 그것이 원래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것 인양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유혹을 받은 예수님이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신명기 6:3절의 말씀으로 이기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성경 말씀을 외운다고 해서 마귀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외우신 것이 아니라 그 말씀하신 바를 친히 이루어내시는 현장입니다.
세 번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마귀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유혹합니다. 시편 91:11,12절의 말씀을 가지고 천사들이 너를 받으러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다 어디서 이단의 이론을 세우는 것입니까? 성경말씀으로 이론을 세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다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시자 마귀가 얼마동안 떠납니다.
얼마동안 떠났다는 것은 계속하여 유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마귀의 시험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처음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베들레헴의 어린아이 까지 학살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십자가로 향하여 가실 때에는 십자가에어 죽지 않도록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 길을 가로막고 나설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십자가 없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마지막 유혹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조롱을 합니다. 네가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하며 조롱합니다. 지금이라도 내려만 오면 믿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로 가시는 길은 주님이 원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가시를 길이기에 십자가로 가셔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 상영이 되느니 마느니 논란이 많았습니다. 저는 20여 년 전에 그 소설을 보았는데 저는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왜 최후의 유혹이냐 하면 십자가상에서 잠시 졸도합니다. 물론 소설이야기입니다. 잠시 졸도할 그때 예수님이 마리아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노년이 되어 쓸쓸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그런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적 상상인데 이 유혹을 이기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으로 그 소설이 끝이 납니다. 그래서 제목이 최후의 유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소설과 영화를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반대한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실하다는 증거 밖에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으로 이끌고 계심을 믿지 못한 발상이라고 봅니다. 며칠 전에는 사학법을 개정하라고 교계의 어른이라고 하는 목사 20여명이 삭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댓 글을 단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개종을 하려고 하는가 보다면 비아냥 거렸습니다.
무엇이 유혹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의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이 세상의 자랑이 될 것들을 준다는 것이 유혹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교회에서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유혹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알고 물리칠 능력이 있습니까? 결단코 없습니다. 사람이 배고프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먹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먹음직 한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보암직한 유혹이 또 따라 붙는 것입니다. 전에는 배만 채웠으면 되는데 지금은 음식이 보암직할 뿐만 아니라 음식점의 분위기와 서빙하는 사람들조차 용모단정 하여야하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의 북경에 한국 사람들이 가서 식당 하는 사람이 많은데 중국의 부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실내장식 비용만 25억을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돈 25억이 중국에서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도 중국에 자본주의가 들어가고 먹고 살만하게 되니 그렇게 해도 손님들이 많이 온다는 것입니다. 먹고 배부르면 보암직한 것을 찾는 것을 가지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보암직한 것만이 아니라 초월적인 신성한 영역에까지 이르고 싶은 것입니다. 결국 신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최초의 유혹이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은 오늘날 경제가 발달하고 먹고 살만큼 되자 더욱 스스로들 신이 되고자 영원한 영광을 꿈꾸는 이 세상을 銖臼?하나님께서 살리시는 방법은 십자가를 들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 나랑 함께 죽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선뜻 함께 죽기 위하여 예수님의 험한 십자가를 붙들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그 승리의 능력을 오늘 성도들에게 부어주셔서 믿게 하시고 주님 오시는 그날에 영광스럽게 변화할 그 내용까지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세상에서 애써서 살고자 하는 것이 죄 임을 알고 그런 자기를 부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붙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맛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