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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스크랩 문경 향토기행
한국의산천 추천 0 조회 111 06.09.12 07:0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문경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굽이마다 사연 넘치는 옛길을 걸어봐요"
역사와 자연이 조화이룬 영남대로의 관문

 

‘느림의 미학’이란 게 요즘 유행하는 화두인가 보다. 출간된 지 몇 년이 지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이 서점가에서 여전히 인기가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느림의 미학을 권하는 시대. 이는 우리가 빠름의 미학이 돋보이는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인간의 절박한 필요성에 의해 태어난 ‘길’은 느림의 미학이 잘 투영된 공간이다. 특히 산으로 가로막힌 고을과 고을, 나라와 나라를 이어주는 고갯길은 느릴 수밖에 없는 현실과 빠르고자 하는 욕망이 교차하고 있는 지점이다.

영남 서북부에 자리한 문경(聞慶) 가는 길엔 터널이 두 개씩이나 뚫린 이화령을 지나게 된다. 중부내륙고속도로와 3번 국도에 각각 하나씩 뚫린 이화령터널은 우리에게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편리성을 주었지만, 그 대신 구절양장 고갯길을 오르내리며 누리던 느긋함을 빼앗아갔다. 다행이라면 이화령 고갯길이 아직도 남아있고, 문경새재 옛길도 흙길을 유지한 채 차량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백두대간 분수령을 등지고 터를 잡은 문경. 맨 오른쪽의 높은 산은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이다.

 

느림의 미학을 즐기기 위해 이화령(548m) 고갯길을 오른다. 차량통행이 뜸하다. 한때 쉬어 가는 차량 운전자들로 북적거렸던 고갯마루의 휴게소는 백두대간 마루금을 종주하는 등산인들만 찾을 뿐 원래의 기능을 잊어버린 듯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화령은 좁고 한적한 길이었다. 대동여지도에 당당히 이화현(伊火峴)이라는 명패를 올렸으나, 영남대로의 가장 큰 고개로서 조선팔도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새재 앞에 감히 명함을 내밀 처지는 못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5년 길이 넓혀지면서 신작로가 뚫리자 순식간에 운명이 뒤바뀌었다. 새재를 넘던 행인들은 명패를 이화령(梨花嶺)으로 고치면서 좀더 빠르고 편하게 바뀐 이 고개로 몰려들었다.  

 

 

▲ 쌍룡계곡 하류에 터를 잡은 사우정. 옥빛 계류와 소박한 정자가 잘 어울린다. 

 

세월이 흘러 이화령은 3번 국도가 되었고, 포장이 되자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1998년 고개 아래로 터널이 뚫림으로써 고갯길은 점차 인적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2004년 12월 경부내륙고속도로 이화령터널이 개통됨으로써 고갯길은 아주 한적했던 이전 분위기로 되돌아갔다. 이렇게 길의 흥망성쇠를 짚다보면 ‘길도 생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화령을 넘어 문경새재로 방향을 잡는다. 이번 문경새재 여행은 일부러 보름 무렵의 오후로 잡았다. 달빛 쏟아지는 고갯길을 느릿느릿 걸으며 옛 조선의 나그네가 느꼈을 법한 정취를 조금이나마 맛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달을 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장대비까지 내렸다. 바야흐로 장마전선이 무시로 오르내리고 태풍도 위세를 떨치는 계절이 아닌가.

그럼에도 길손은 뭐에라도 홀린 듯 제3관문까지 걷고야 말았다. 우산도 없이 흠뻑 비를 맞고 조령관에 도착했을 때 성벽엔 이미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성문은 잠기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옛 행인들처럼 내쳐 수안보까지 갈 입장도 아니었다. 어쨌든 차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되돌아 내려와야만 하는 게 21세기 여행객의 현실이 아닌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칠흑 같은 길을 홀로 되짚어 내려온 두 시간은 조금 무섭기는 했으나, 수백 년 역사가 있는 고갯길의 사연을 자유로이 상상해볼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과것길이나 한양나들이길로 알려진 동남지동래사대로(東南至東萊四大路), 즉 영남대로(嶺南大路)는 조선시대 한양을 기점으로 하는 아홉 갈래의 길 중에서 가장 번듯한 길이었다. 이 길은 충청도 동북부지방을 거쳐 부산 동래까지 이르는 380km. 낙동강 문화권과 한강 문화권을 연결하는 주요한 길목에 자리한 새재는 영남대로 가운데 가장 통행량이 많고 중요한 고개였다. 영남에서 거둬들인 세곡(稅穀)이나 궁궐에 바칠 진상품은 물론,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나선 영남의 유생들도 대부분 이 고개를 넘었다.  

 


▲ 아담한 석교가 돋보이는 대승사의 윤필암

 

문경새재를 읊은 노래도 많다. 잘 알려진 진도아리랑이다. ‘문경 새재는 웬 고개인고 / 구비야 구비구비가 눈물이 난다.’ 평생 문경새재를 볼 일이 없던 호남의 섬에서 불려진 이 노래는 조선 고개의 대표격이던 새재의 상징성을 잘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이런 노래도 있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도 좋아 / 큰애기 손질(길)에 놀아난다 / 문경새재 넘어갈 제 / 구비야 눈물이 난다.’ 장사꾼들이 문경새재를 오르내리며 부르던 노래라는데, 에로틱한 익살이 넘쳐 싱긋 웃음이 나온다. 새재를 넘으며 새로운 세상을 꿈꾼 이는 신경림 시인이다. 

 

…한양이라 오백릿길 / 찾아가는 황소떼 / 두루마기자락 허리에 찌른 / 터벅대는 소몰이꾼. / 저것이 문경 새재 / 서러운 서른 굽이 // 박달나무 젖은 이슬 / 키장수 체장수 눈물일까. / 봄바람 타고 올라왔다 / 찬바람에 묻어 돌아가는 / 안동 영해 청상과수 한 맺힌 눈물일까. // 저 고개 넘으면 / 새 세상 있다는데, / 우리끼리 모여 사는 / 새 세상 있다는데,…’(신경림 시인의 ‘새재’ 중에서)

 

새재는 여러 뜻을 지니고 있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높은 고개’라는 유래가 가장 흔히 알려져 있다. 조령(鳥嶺)은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새’를 ‘사이’로 풀면, 새재는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고개가 되고, ‘새로운’으로 해석하면 삼국시대 이후 쓰이던 계립령 대신에 ‘새로(新) 개척한 고개’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옛 문헌에 기록된 초점(草岾)은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고도 해석한다. 

 

새재는 조선 태종 때 본격적으로 개척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발굴조사 때 조령관터에서 고려시대 이전의 토기류가 출토되면서 고려시대 전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고개임이 확인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엔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엔 왜군이 북진할 때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이 이 새재를 지키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맞아 싸우다 전멸 당하기도 했던 사연이 있다.

 

 

▲ 문경새재의 제1관문인 주흘관. 역사를 다룬 드라마 전투 장면 촬영지로도 이용된다. 

 

신립이 탄금대전투에서 패하자, 호남을 제외한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새재는 그만큼 한반도에서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고개였던 것이다. 이를 파악한 조정에선 1594년(선조 27) 제2관문인 조곡관을 세웠고, 1708년(숙종 34)엔 조곡관 앞뒤로 제1관문인 주흘관과 제3관문인 조령관을 첩첩으로 세웠다. 

 

이렇듯 영욕의 세월을 보낸 새재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추풍령과 이화령에 신작로가 나고 포장이 되면서 점차 잊혀진 길이 되었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 새재의 유적지를 복원하자 사람들은 조선시대에 한반도의 대표선수로 명성을 드날렸던 문경새재의 실체를 확인하려 하나둘 찾아들기 시작했다. 몇 년 전, 후삼국 영웅들의 권력투쟁을 다룬 드라마 ‘태조 왕건’이 크게 인기를 끌자 문경새재의 촬영장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병사, 백성, 장사꾼 등 옛 복장을 한 엑스트라들과 관광객들이 왕궁과 민가를 배경으로 뒤섞인 광경은 색다른 재미가 있다. 드라마 덕에 문경새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깎아 넓히고 포장하는 게 미덕인 시대에 고갯길이 아직 비포장으로 남아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 덕이라 한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선생 박정희’는 그 해 4월에 문경공립보통학교로 첫 발령을 받아 1940년 떠날 때까지 2년9개월간 문경과 인연을 맺었다.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 최고의 통치자가 된 ‘대통령 박정희’는 70년대 중반에 문경을 순시하다 무너진 성벽 위로 차량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았다. ‘대통령 박정희’는 차량통행금지를 명령했다. 이게 문경새재가 아직 흙길로서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는 이유다. 

 

‘선생 박정희’가 머물던 하숙집은 ‘청운각’이란 이름으로 문경초등학교 옆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흙길과 촬영장 등은 외적인 요인일 뿐, 문경새재의 장점은 무엇보다 풍부한 자체 콘텐츠에 있다. 주흘관(主屹關), 조곡관(鳥谷關), 조령관(鳥嶺關) 이렇게 세 개의 성문과 경상감사가 직인을 주고받았던 교구정, 조령원터 등을 살피며 걷는 맛은 오로지 문경새재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또 한글 고어로 ‘산불됴심’이라 쓰인 조선 후기의 비석을 만나는 재미는 얼마나 쏠쏠한가. 온갖 사연이 서린 바위와 동굴, 폭포, 성황당, 산신각, 약수 등등 정말 느리게 걷자고 맘먹으면 한나절로는 턱없이 부족한 고개다.

 

 

▲ 문경새재 장승공원을 찾은 한 어린이가 소원을 적은 종이를 매달고 있다.

 

문경새재를 내려온 다음, 북쪽 가까이 있는 하늘재가 아니라 남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순전히 영남대로 옛길의 분위기를 좀 더 느끼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다. 문경읍에서 3번 국도를 타고 문경시(점촌) 방향으로 10분쯤 달리면 진남교반(鎭南橋畔)이 반긴다.  

 

▲ 진남교반

 

문경새재를 적시고 흘러온 조령천이 영강에 몸을 섞는 이 일대는 산줄기와 물줄기가 어우러져 태극 문양을 그리는데, 물가에 솟은 높다란 바위벼랑의 풍광이 제법 빼어나다. 강 위로는 가은선 철도, 그리고 구교와 신교가 나란히 놓여 있어 자연과 인공이 잘 어울린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주민들은 경북8경 중 하나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이것도 인공물의 규모가 자연을 위압하지 않을 때 이야기다. 최근 용머리 형상의 진남 강변의 바위벼랑을 싹둑 잘라내고 뚫은 4차선 도로는 진남교반의 정취를 많이 망가트렸다.  

 

 

▲ 토끼비리

 

어쨌든 진남교반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조망처는 강가 벼랑에 세워진 고모산성. 삼국시대 초기에 처음 세워진 이 산성은 위치로 보면 둘도 없는 철옹성이다. 진남교반 주차장에서 진남문을 향하다 오른쪽 성벽 아래로 난 작은 길을 따라 100m쯤 들어가면 토천(兎遷) 또는 관갑천 잔도라고도 불리는 옛길이 나온다. 주민들은 토끼비리, 토끼벼리, 토끼벼루 등으로도 부르는데, 토끼벼랑이란 말의 이 지방 사투리다. 고려 왕건이 견훤에게 쫓길 때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가는 것을 보고 길을 찾아냈다는 사연이 전한다. 토천은 세월이 흐르면서 길손들의 발길에 바닥이 닳아 유리알처럼 반들반들해졌다.

 

 

▲ 문경새재의 제2관문인 조곡관. 임진왜란 중인 1594년에 세웠다.

영강 비탈면에 아슬아슬하게 나있는 토천은 영남대로 전 구간 중 가장 험난한 길로 꼽혔다. 게다가 이 길을 장악할 수 있는 산성까지 있으니 전략상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임진왜란 때 영남대로를 따라 한양으로 진격하던 왜군 주력부대의 진격을 군사 한 명 없이 만 하루 동안 지연시켰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씁쓸하게 들린다. 당시 신립이 왜군을 막으러 내려왔을 때 이곳을 염두에 두었는데, 충주에 도착했을 땐 이미 왜군이 이곳을 장악한 뒤였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충주에서 배수진을 친 것이라고도 한다. 

 

토천에서 되돌아나와 성벽을 밟으며 진남관으로 향한다. 성안엔 우리나라 마지막 주막이었던 예천 삼강나루의 주막과 문경 영순주막을 복원한 초가 두 채가 있다. 주막거리를 지나면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호위하고 있는 성황당이 나타난다. 당집 앞의 불에 탄 흔적이 있는 느티나무는 가은 출신 의병장인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1858-1908) 선생이 1896년 일본군과 고모산성에서 전투를 벌였을 때의 흔적이다.

진남관 성벽에 올라서면 절벽을 휘돌아가는 영강 물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남문터 근처의 가장 높은 성벽이 포인트다. 아쉽게도 현재 한창 보수공사 중이라 진남관쪽에선 남문터로 올라갈 수 없고, 동문터나 서문터에서 접근해야한다. 이 산성의 보수공사가 마무리된다면 성 일주는 분명 제법 인기를 끌 것이다. 특히 서문~남문~진남관~성벽~토천으로 이어지는 답사 코스는 남한강의 온달산성에 뒤지지 않는 강변 조망과 영남대로 옛길답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명품이 될 듯싶다. 

 

영남대로는 진남교반에서 점촌(문경시) 방향으로 이어지지만, 서쪽의 가은(加恩)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후삼국 시대 한반도의 한쪽을 장악하고 자웅을 겨루던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견훤(甄萱·재위 900-935)이다.

황간견씨(黃磵甄氏)의 시조인 견훤(甄萱)의 본래 성은 이(李)씨로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다. 892년(진성여왕 6) 반기를 들고 일어나 독자적인 기반을 닦았고, 900년(효공왕 4) 완산주(全州)에 입성하여 후백제를 세우고 왕이 되어 세력을 넓혀 나갔다. 그러나 935년 왕위계승 문제로 맏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멸망시킨 비운의 인물이라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견훤의 내력이다.

그러나 가은이 견훤의 고향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갈천리 아차 마을 금하굴엔 견훤의 출생에 얽힌 유래담이 전한다. 그런데 이 유래담은 견훤출생설화의 또 다른 배경인 광주(光州) 북촌의 유래담처럼 동네의 아리따운 규수가 동굴의 큰 지렁이와 관계를 맺어 태어났다고 한다. 길손도 어릴 적에 그렇게 배웠다. 그러나 요즘의 해석은 좀 다르다. 견훤이 비록 역사의 패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대를 호령하던 영웅이다. 그런데 승자에 의해 역사가 쓰여지면서 용이 아닌 지렁이로 격하되었다는 것이다. 

 

아차 마을엔 견훤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2002년 숭위전(崇威殿)을 세우고 매년 견훤의 향사를 지낸다. 한때 삼한을 호령하던 견훤의 집터는 밭으로 변한 지 오래지만, 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은 견훤의 내력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조항산 동쪽의 궁기리는 견훤이 활을 쏘며 야망을 키웠다는 곳이고, 가은과 멀지 않은 화남과 화북엔 견훤의 이름이 붙은 산성도 여럿 있으니, 이 부근은 견훤과 적지 않은 인연이 있는 셈이다. 

 

문경은 한때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탄광도시였다. 1970년대만 해도 탄광이 40여 개에 이르렀고, 광부만도 1만 명을 헤아렸다. 그중 가은은 문경탄전(聞慶炭田)에 속하는 탄광 고을로서 왕릉리의 은성탄광은 제법 규모가 컸다. 지나는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닐 정도로 호시절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탄광은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1994년 가은의 은성광업소가 마지막으로 문을 닫자 문경의 경제는 급속하게 쇠퇴해버렸다. 23,000명이나 되던 가은의 인구가 5,000명으로 줄었다. 폐선을 이용한 철로자전거, 폐광자리에 들어선 석탄박물관, 연개소문 SBS촬영장 등은 관광도시로 거듭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물론 견훤의 부활에도 기대하는 바가 크다. 

 

석탄박물관을 나와 922번 지방도를 타면 길은 이강년 선생의 생가를 지나 대야산(930.7m)으로 이어진다. 백두대간 분수령인 대야산 둘레엔 넓은 반석과 크고 작은 폭포가 즐비한 계곡이 많다. 이 중에서 최치원이 머물던 선유동과 하트형 기암이 돋보이는 용추계곡은 경관도 수려해 한여름에 하루쯤 머물면서 무더위를 식히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다.

희양산에 자리 잡은 봉암사(鳳巖寺)는 1,600여 년 간 우리 겨레의 정신을 이끌어온 불교계에선 생명수처럼 소중한 가람이다.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남긴 유명한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인 ‘봉암사지증대사비문’엔 9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내력이 자세히 전한다. 여기서 현대 한국 불교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희양산문의 가풍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광복 후 2년이 지난 1947년 겨울, 성철 스님을 중심으로 청담·자운·향곡·월산·혜암·법전 등 20여 명의 젊은 스님들이 모였고, 이들은 일제 35년 동안 일그러진 불교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한 ‘봉암사결사’로 혁신의 싹을 틔운다. 당시 이들이 내세운 것은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아주 간결한 정신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봉암사결사는 불법에 어긋나는 불공과 천도재를 받지 않고 수좌 자신이 노동하여 생활하자는 방침을 정하였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맹세로서 나무해 오고, 물 긷고, 밭 갈고, 탁발을 일상화하였다. 또한 스님들의 왜색풍 가사·장삼·발우 등의 개선을 시도하였다. 오늘날 삼보에 대한 예로 정착된 ‘삼배’가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천도재 등의 법회에서는 금강경과 반야심경 독송이 보편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 문경의 대표적 절집인 김룡사

 

이러한 봉암사의 선풍은 1982년 6월 봉암사를 조계종의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특별수도원이란 참배객이나 관광객의 출입을 통제하고, 오로지 참선과 정진에만 몰두하는 수행도량이다. 이렇게 소중한 공간인 희양산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자랑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봉암사는 연중 4월 초파일날 하루만 일반인들을 위해 문을 연다. 허나 스님들의 뜨거운 정진을 궁금해하는 중생들은 봉암사도 손쉽게 드나들고 희양산의 여러 산길도 두루 걷고 싶어하면서 가끔 불평 아닌 불평을 하기도 한다. 

 

서암 스님은 생전에 봉암사의 필요성을 이렇게 역설한 적이 있다. “사찰은 수행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부처님에 대한 예경의 공간이기도 하고 중생 교화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로라도 봉암사 같은 도량은 한국불교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아쉽지만 맞는 말이다. 

 

문경 동북쪽의 운달계곡으로 달린다. 문득 수림으로 둘러싸인 고찰이 나타난다. 김룡사(金龍寺)다. 일주문의 이름은 홍하문(紅霞門). ‘붉은 노을 문’이라. 참 감상적인 작명이다. 그러나 감상하고는 거리가 멀다. ‘붉은 노을은 푸른 바다를 꿰뚫는다’는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에서 따왔다. 이는 성철 스님이 평소 즐겨하시던 말씀으로 용맹정진을 통해 얻는 깨달음을 말한다. 일주문 주련엔 이렇게 씌어있다. ‘이 문에 들어오거든 안다는 것을 버려라(入此門來莫存知解) / 비우고 빈 그릇에 큰 도가 가득 차리라(無解空器大道成滿).’

 

김룡사는 신라 588년(진평왕10) 운달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자세한 기록은 없다. 몇 번의 화재로 대부분 불에 탔고 중창을 거듭했으나 1997년에 다시 큰불이 나 대웅전을 제외한 많은 불전이 화마에 사라졌다. 따라서 대웅전 주변의 전각과 당우들은 최근 다시 지은 탓에 예스런 맛이 좀 떨어진다.

대웅전 마당엔 노주석 2기만 서있는 게 특이하다. 야간 행사가 있을 땐 석등이 아니라 노주석 위에다 관솔불을 놓아두고 어둠을 밝혔다고 한다. 이웃한 사불산(일명 공덕산)의 대승사와 봉암사도 역시 노주석이 있다. 웬일인지 탑은 금당 앞이 아니라 응진전 뒤쪽으로 물러나 있다. 대웅전은 공포의 처마밑 장식인 살미가 아름답다. 살미 사이엔 물고기, 다람쥐, 새, 국화문, 연꽃문 등 다양한 동식물이 숨어 있다. 그래서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듯한 즐거움이 있다.


 

 

▲ 과거보러 가는 선비에게 버림 받은 마을 처너에 얽힌 고모산성의 성황당.

 

언덕의 약사여래석불 앞에 앉으면 금강송에 둘러싸인 아늑한 산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풍수가들은 김룡사의 가람은 소가 누운 형국인 와우형(臥牛形)이란다. 그래서 지맥의 흐름에 따라 약사여래석불을 세우고 탑을 두었다고 한다. 이런 지세에선 큰 일을 하는 인물이 나온다. 조계종 종정을 지내셨던 성철·서암·서옹, 그리고 법전 스님이 이곳에서 수행하고 밖으로 나가 큰 이름을 떨쳤다. 고승들은 모두 소의 눈에 해당하는 동쪽 계곡 너머의 명부전에 머물렀다 한다.

절문을 나와 전나무 숲길을 따라 비구니 암자인 대성암으로 간다. 500m도 안 되는 짧은 길이지만 예쁘다. 저 유명한 월정사나 내소사의 전나무 숲보단 길지 않고, 길가의 전봇대가 거슬리긴 하지만 제법 품위가 넘친다. 숲엔 단풍나무, 느티나무, 떡갈나무가 짙다. 숲도 불법도 울창한 김룡사의 으뜸은 바로 자연의 후광이다. 이 길을 느릿느릿 걷다보면 욕심은 버려지고 대신 자연이란 신선한 공기에 마음은 한없이 평화스러워진다.

 

김룡사 숲이 이렇게 잘 보존된 이유는 운달산이 능묘의 제사에 쓰이는 향목과 목탄을 조달하기 위해 수목을 보호하던 향탄봉산(香炭封山)이었기 때문이다. 손이라도 씻을 겸 대성암 앞의 개울로 다가가니 냉기가 철철 넘쳐난다. 금세 한기가 돈다. 과연 운달계곡을 냉골이라고 일컫는 까닭을 알 것만 같다. 

 

문경의 마지막 답사 코스로 잡은 하늘재로 간다. 조선 태종 때 새재가 개척되자 역사상 백두대간 최초의 고갯길이었던 하늘재는 한갓 샛길로 전락하고 말았다. 포졸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새재를 떳떳하게 지날 수 없는 신분의 사람들이나 검문이 번잡스런 부보상들, 그리고 길을 더럽히는 말이나 소를 동반한 천민들은 간섭 없는 이 고개를 넘었다. 

 

불교문화가 전해지는 길목으로의 역할도 컸다. 하늘재를 중심으로 충주쪽의 ‘미륵’과 문경쪽의 ‘관음’이라는 지명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고갯마루 양쪽엔 제법 큰 도량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길목이었기에 오히려 외세에 의해 모두 불타버리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문경쪽에서 하늘재로 오르는 길목인 관음리 일대엔 반가사유상·약사여래입상·오층석탑·석불좌상 등 여러 점의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하늘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불교 흔적은 고갯마루에서 2km쯤 내려간 관음마을 안쪽에 자리한 반가사유상이다. 작은 바위면에 새겨져 있는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머리에 삼면화관(三面花冠)을 썼으며, 원만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입술도 예쁘다. 다만 몸에 비해 오른팔이 너무 짧고 무릎 아래쪽이 명확하지 않아 미적으로는 그리 높은 점수를 받지는 못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하늘재를 넘어 다니는 길손들의 소원을 들어주며 다정히 바라보았을 것이다. 

 

마을의 지명으로 하늘재 부근서 짚어야 할 게 하나 더 있다. 미륵리의 ‘점말’과 관음리의 ‘사점’이다. 지명에서 둘 다 사기그릇을 굽는 마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충주쪽 점말 가마터에선 청화백자·철화백자·초문철화백자 등이 많이 출토되었고, 일제 때 일본인이 자리를 잡고 자기를 굽던 가마터도 발굴되어 한국과 일본의 도자문화 교류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충주 점말의 가마에선 연기가 끊긴 지 오래되었지만, 문경 사점 마을의 가마에선 아직도 연기가 솟아나고 있다. 사점 마을뿐만 아니라 하늘재 아래의 관음리·갈평리 일대엔 문경 도자기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도요지가 널려 있다.

 

문경은 도자기의 고을이다.

이곳에선 경기도 광주·이천 등에서 고급 도자기를 굽던 관요(官窯)와 달리, 소박한 멋을 담고 있는 막사발류의 생활자기를 굽던 민요(民窯)가 발전해왔다. 그런 문경에서도 하늘재 주변이 도자기로 유명하게 된 까닭은 흙·불·물의 자연조건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도자기의 몸체가 되는 고운 흙인 태토(胎土)다.

 

문경의 태토는 끈기가 있고, 철분 함유량이 많아 민기(民器)를 빚는 데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문경 일대에 널려 있는 회황색 사토는 고급스런 청자류보다는 투박한 분청사기를 만드는 데 적합했다. 분청사기는 분방한 형태와 빛깔로 우리 민족의 소박한 심성을 표현하기도 한다. 백두대간 분수령의 첩첩산골에 있으니 땔감으로 쓸 소나무도 넉넉했다. 흙을 물에 넣고 휘저어 잡물을 없애는 수비(水飛)작업엔 맑은 석간수가 반드시 필요한데, 하늘재 주변은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질 좋은 석간수도 지천이었다.

이런 세 가지 조건이 잘 갖춰져 있다 해도 판로가 마땅치 않으면 도자기 산업이 발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문경은 백두대간의 험한 산줄기로 첩첩산중이면서도 남한강과 낙동강이 인접해 있어 영남대로의 육로와 수로를 이용하기 편리했다. 관음리에서 백두대간의 하늘재를 넘어 달천을 따라 내려가면 남한강의 황강나루에 이르고, 동로면쪽에서 차갓재나 벌재를 넘어 단양천을 따라 가면 남한강 하진나루가 나온다. 이렇게 남한강에 도착하면 배를 타고 한양을 비롯한 경기도 등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낙동강 수계는 문경에서 영남대로를 이용하거나, 문경의 산북과 산양을 거쳐 금천을 따라 가면 영순의 삼강나루에 이를 수 있었다. 낙동강 뱃길은 상류의 안동이나 하류의 상주·선산을 지나 부산의 동래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향토사학자들은 문경 도자기가 조선 초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16세기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발굴된 가마터로 살펴보면, 문경지역에서 최초로 시작된 곳은 동로면 인곡리 사기점에 있는 도요지라 한다.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동로면 적성리·노은리를 거쳐 하늘재 아래의 관음리로 확산되었다. 현재 적성리·노은리 지역에는 민간에서 사용하던 소박한 백자편이 발견되었으며, 관음리엔 조선 중기 이후의 가마터가 57개소나 있다고 한다.

관음리의 경우 16세기 이후 번창하면서 생산공정이 분화되어 사발대정과 불대정 등의 전문화된 숙련도공이 있을 정도였다. 또한 유능하다고 인정을 받으면 나라에서 운영하는 광주분원으로 뽑혀가서 일하다가 계약기간이 끝나면 귀향하곤 하였는데, 이런 기술적 교류가 관음리 도자기를 한층 더 번창하게 했다. 일제 때도 불이 꺼지지 않던 가마였지만, 6·25전쟁 뒤에 생활 용기의 재료가 양은·플라스틱·스테인리스스틸 등으로 바뀌면서 문경의 도자기는 심한 타격을 입었다. 사기그릇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겼고, 불을 지피지 않는 가마도 하나둘 늘어갔다. 남은 도공들은 단지나 요강 등을 구우며 겨우겨우 연명해갔다.

이런 문경 도자기가 다시 재기하게 된 것은 1960년대 중반 이후였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과 국교가 정상화되자, 조선 도자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일본인들이 문경을 찾아왔던 것. 임진왜란 때 강탈해간 뒤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찻사발인 이도다완(井戶茶碗)의 기술적, 정신적 뿌리를 문경에서 발견한 것이다. 

 

문경이 이도다완의 본 고향은 아니다. ‘우물’이라는 이도(井戶)의 어원은 경남 하동의 ‘샘골가마’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현재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 단절되었던 이도다완의 생산기법을 근래에 발견해 이를 재현한 곳은 하늘재 아래의 관음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신정희·천한봉·서선길·김정옥 같은 도공들이 이도다완 재현에 매달린 지 수십 년. 이제 이곳은 우리나라 찻사발의 요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글·사진 민병준]
 
충주-문경을 잇는 하늘재
산이 많은 우리나라엔 산줄기 사이로 수많은 고갯길이 뚫려있다. 우선 인제와 양양 사이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개로 꼽히는 한계령이 걸려 있고, 전통적인 유명세에선 조령으로 불리는 문경새재가 빠지지 않는다.

통행량으로는 국도ㆍ철도ㆍ고속도로가 나란히 지나는 황간과 김천 사이의 추풍령이 으뜸이요, 남한의 지붕으로 불리는 대관령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동해 바다로 갈 때면 반드시 넘어야만 하는 고개다. 이렇듯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개는 모두 한반도의 근간을 이루는 백두대간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백두대간에서 가장 먼저 개척된 고개는 어디일까. 바로 충주 미륵리와 문경 관음리를 잇는 하늘재(525m)다.

 

서기 156년에 신라가 처음으로 개척
계립령(鷄立嶺)ㆍ마목현(麻木峴)ㆍ지릅재ㆍ한훤령(寒暄嶺) 등으로도 불렸던 하늘재를 처음 연 나라는 신라. 삼국사기에 ‘아달라 이사금 3년(156)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고 적고 있다.
죽령은 이보다 2년 뒤에 개척되었으니 기록상으로 볼 때 하늘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두대간 고갯길인 셈이다.
낙동정맥 동쪽의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나라였던 신라는 험준한 백두대간 등줄기에 하늘재를 개척함으로써 비로소 한강 이북으로 향하는 숨통을 열 수 있었고, 이를 삼국통일의 디딤돌로 삼았다.

하늘재는 삼국의 북진과 남진의 통로였기에 각국은 서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고구려 온달장군은 “계립령과 죽령 서쪽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가지 않겠다”는 출사표를 던지기도 했다.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상주를 칠 때도 이 고개를 넘었고, 망국의 한을 품고 길을 떠난 마의태자도 이 고갯마루에서 쉬어갔다.
그리고 1362년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공민왕의 피난행렬도 이곳을 넘어 봉화 청량산으로 갔다. 그러나 조선시대인 1414년(태종 14) 새재가 개척되면서 하늘재는 점점 잊혀진 고갯길이 되어갔다.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 나들목으로 나와 597번 지방도를 타고 수안보온천을 지나면 하늘재 서쪽 아랫마을인 미륵리다.
지금은 민박과 식당 몇 집만 자리잡고 있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지만, 신라와 고려시대의 하늘재는 길손도 많고 제법 번성한 마을이었을 것이다.
매표소를 지나 5분쯤 걸으면 미륵리 절터가 나온다. 이곳은 석조와 목구조를 결합한 석굴사원으로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라고도 한다.
현재 석굴 상부의 목구조는 남아있지 않으나 하부 석굴 구조물 가운데는 주존불인 미륵대불(보물 제96호)이 서있다.
그 앞쪽엔 석등을 비롯하여 5층석탑(보물 제95호)ㆍ돌거북ㆍ당간지주ㆍ불상대좌 등 많은 석조물이 남아있어 창건당시의 사격을 말해주고 있다.

큰 바위를 다듬어 만든 돌거북은 머리 부분이 사실적이다. 등에 얹혀있던 비석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려 그냥 지나칠 수도 있건만, 절묘한 석공의 솜씨는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돌거북 왼쪽 어깨쯤에 주먹만한 아기 거북 두 마리가 뽈뽈뽈 기어오르는 모습을 새겨놓은 것이다. 관광객들은 누구나 아기 거북을 보고 한마디씩 거든다. 

 

“저기 아기 거북들좀 봐!”
“아유, 녀석들 참 귀엽네! 

 

괜히 쓰다듬고 싶어지는 돌거북을 지나 5층석탑과 4각석등을 지나면 미륵대불이 미소를 짓는다. 고려 초기 새로 일어난 국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불상답게 대담하고 거대하다.
둥근 얼굴에 활모양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넓적한 코, 두꺼운 입술 등은 대불이 고려 초기에 지방화한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평이다.
이 절집은 몽골군 침입 때 대부분 불타버린 탓에 창건에 관해서는 많은 부분이 베일에 쌓여있는데, 가장 큰 비밀은 미륵대불의 시선이 북향이라는 점이다. 미륵대불의 시선을 좇아 북녘을 바라보면 월악산 영봉(1,094m)이 올려다 보인다. 

 

미륵불이 북천을 바라보는 까닭은?
민초들은 여기서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 전설을 길어냈다.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 남매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하늘재를 넘다가 이 대불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불입상은 마의태자 상이요 월악산 덕주사 마애불은 덕주공주 상이라고 했다.
마애불은 남향이고 석불이 북향인 까닭은 두 남매가 마주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이곳이 신라 부흥운동의 진지였다고도 한다. 


몇 차례 발굴조사에서 절이 고려 때 세워졌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번엔 태조 왕건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왕건이 새로운 나라를 열기 위해 이곳 월악산 자락에서도 불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리곤 북천을 향하는 대불의 시선은 대륙을 넘보고자 했던 고려 왕조의 넘치는 기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백두산과 옛 고구려 땅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상징으로 여기에 세웠다는 것이다. 허나 그 피끓는 의지에 비하면 대불은 한없이 소탈하다.
북천을 향한 미륵대불의 비밀스런 눈빛을 뒤로하고, 새끼 거북과도 헤어지면 길은 하늘재 고갯마루로 이어진다. 낙엽으로 뒤덮인 길은 아이들과 손 붙잡고 휘파람 불며 산책 삼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완만하고 널찍하다. 


미륵리사지에서 고갯마루까지의 거리는 2㎞. 걸어서 30~40분 정도 걸리니 아이들과 함께 천천히 산책한다 해도 왕복 2시간도 안 걸린다. 아쉽게도 고갯마루에서 문경 쪽은 아스팔트 포장길이다.

 

 

 

문경 ~ 충주 잇는 옛길 하늘재  


조상들의 한과 기쁨이 서린 한반도 한가운데의 옛 고개, 하늘재다. 하늘재는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읍 미륵리를 잇는, 신라때 뚫린 오래된 교통로다. 하늘에 닿을 듯이 높다 해서 하늘재라 부른다지만, 실제 높이는 525m에 불과한 평범한 고개다. 그러나 이 작은 고개에 굽이굽이 깃든 사연은 고개보다 훨씬 높고 길다.
문경쪽은 고개 꼭대기까지 포장됐지만, 충주쪽은 옛길 그대로인데다 숲이 울창해 산책 코스로 좋다. 매력적인 옛 절터와 자연관찰로도 있어 가족이 함께 찾아가볼 만하다. 미륵리에서 2㎞, 왕복 1시간이면 충분하다.
  

 

미륵리 절터 입구 주차장에서 한굽이 숲길을 돌아 내려가자니 청아한 독경소리가 골짜기에 가득하다. 최근 들어선 절에서 확성기로 쏟아내는 소리지만, 낮은 목청과 맑은 목탁소리가 산사 분위기를 돋운다.
절터는 산기슭 평지에 우뚝 솟은 석불입상과 5층석탑 등으로 쉽게 눈에 들어온다. 국내 유일의 북향 절터로, 고려 초기에 번창했다 고려 중기 이후 소실된 절로 추정된다. 국내 최대규모라는 거북모양 비석 받침돌, 보물인 5층석탑·석불입상 등 다양한 석조물들이 1000년전 웅장한 절의 모습을 짚어보게 한다.

 

하늘재는 신라 8대왕 아달라 이사금이 북진을 위해 처음 뚫은 길(156년)로, 문헌에 나오는 국내 최초의 고갯길이라고 한다(삼국사기). 계립령(신라), 대원령(고려), 마골점·한티·천티(조선) 등으로 불리다 하늘재로 굳어졌다. 신라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안고 금강산으로 갈때 넘었다는 고개다.
조선 태종때 한양~영남을 잇는 지름길인 문경새재가 뚫리면서 하늘재는 `옛길`이 됐다. 그러나 새재를 지키는 관리들의 횡포가 잦아, 서민들의 발길은 하늘재로 꾸준히 이어졌다고 한다.

들머리부터 널따란 흙길. 왼쪽 나무다리를 건너면 자연관찰로로 오르는 길이다. 비탈을 따라 이어진 오솔길 곳곳에 자생하는 나무와 풀꽃들을 상세히 설명한 팻말이 있어 쉬엄쉬엄 공부하며 걷기 좋다. 500~600m쯤 가면 다시 큰길과 만난다. 길옆에 무더기로 피어난 빨간 물봉선의 자태에 마음을 뺏기며 오르다보면 어느새 울창한 소나무·참나무숲길이다. 고개 꼭대기는 백두대간 종주의 한 길목. 북동쪽 포암산(베바우산)과 남쪽 부봉의 사잇길이다. 포암산·만수봉으로 가는 등산객들이 여기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고개 너머 포장길로 내려가면 문경읍 관음리다. 고개 양쪽의 지명이 모두 불교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흥미롭다. 관음리에도 옛날 큰 절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탑과 석불입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문경 ~ 충주 잇는 옛길 하늘재 [국민일보 2006-02-09]
포암산 ~ 하늘재 

 

상고대(나무나 풀에 눈처럼 얼어붙은 서리)를 활짝 피운 포암산이 푸른 하늘을 스크린 삼아 옛 기억을 더듬는다. 온달 장군이 흙먼지와 함께 달리던 하늘재에 궁예의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다. 천년사직을 뒤로 한 마의태자가 하늘재에 통한의 눈물을 뿌리고 공민왕의 피난행렬은 하늘재에서 거친 호흡을 고른다. 다시 수백 년의 세월이 쏜살같이 흐른다. 문경 도공들이 사과향기 그윽한 하늘재 고갯마루에서 혼을 불태운다.

하늘에 맞닿았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하늘재(530m)는 경북 문경 미륵리와 충북 충주 관음리를 연결하는 옛 고갯길이다. 

 

계립령,마목현,마골산,지릅재,대원령,한훤령 등으로 불려왔던 하늘재를 처음으로 연 나라는 신라. 삼국사기는 백두대간인 포암산(961m)과 탄항산(856m) 사이의 협곡을 건너는 하늘재가 신라 아달라왕 3년인 156년에 개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죽령이 2년 뒤에 건설되었으니 기록상으로 볼 때 하늘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백두대간 고갯길인 셈이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 문경새재가 개척되면서 하늘재는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된다.

하늘재 가는 길은 이름에 걸맞게 하늘과 백두대간의 등줄기가 맞닿은 첩첩산중. 문경온천으로 유명한 문경읍에서 갈평리와 관음리를 거쳐 하늘재에 이르는 한적한 시골길은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1106m)을 비롯해 퇴계 이황이 명명했다는 대미산(1115m),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위치한 성주봉(961m) 등 병풍처럼 펼쳐진 명산의 산세가 한 눈에 들어온다. 

 

사과와 찻사발의 고장답게 하늘재 가는 길은 온통 사과밭과 가마터다. 하얀 사과꽃처럼 순백의 눈꽃을 활짝 피운 사과밭은 어김없이 대미산과 포암산 기슭을 오르다 가마터를 감싼다. 현암요 문경요 심천요 뇌암요 묵심요 조선요 중점요 포암요 금우요 등 문경을 대표하는 가마터가 이곳에 모인 까닭은 도자기의 원료로 이용되는 산토의 질이 우수하고 땔감이 풍부하기 때문. 그러나 문경이 일찍이 찻사발의 고장으로 뿌리를 내린 것은 혼으로 구운 도자기를 하늘재와 남한강 수로를 이용해 손쉽게 한양에 공급할 수 있었던 데서 기인하다.
겨우내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데다 기온이 급강하 하면서 피어난 상고대로 인해 백두대간 겨울산들은 두루마리 동양화를 연출한다. 쪽빛 하늘을 머리에 짊어진 백두대간 봉우리들은 하얀 고깔모자를 쓰고 있고,빛바랜 갈색 산기슭은 저마다 아담한 마을들을 품고 있다. 

 

상고대가 가장 아름다운 산은 하늘재의 지킴이 역할을 하는 포암산. 정상에서 수직으로 흘러내린 붉은 바위가 마치 큰 베를 펼쳐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베배우산으로도 불리는 포암산은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키 작은 소나무의 상고대가 그림엽서처럼 아름답다.
5년 전에 세운 ‘계립령 유허비’가 외로운 하늘재는 이름과 달리 하늘에 맞닿을 만큼 높지는 않다. 고갯마루에 서면 아스팔트로 포장된 문경 쪽은 포암산을 비롯해 대미산 등 백두대간 등줄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월악산국립공원에 속한 충주 쪽은 포장이 안 된 채 자동차 한 대 지나갈 정도의 거친 오솔길만 남아 옛 모습을 짐작케 한다. 하늘재와 포암산 사이에는 지금도 돌로 쌓은 산성의 허물어진 성벽이 남아 있어 옛 향기를 느끼게 한다. 

 

신라 고구려 백제 등 삼국은 북진과 남진의 통로였던 하늘재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움을 벌였다. 고구려 온달 장군은 “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출사표를 던졌고,후고구려의 궁예는 상주를 공격할 때 하늘재를 넘었다고 전해진다.
‘천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년이 지났으니,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정비석의 ‘산정무한’ 중에서)

하늘재는 애환의 고갯길로도 유명하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이었던 마의태자는 하늘재에서 신라의 하늘을 향해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햇빛 한점 스며들지 않는 울창한 오솔길을 걸어 금강산으로 향한다.
그로부터 천년. 고라니 한 마리가 눈 덮인 하늘재 오솔길에 발자국을 남긴다.

 

여행정보  
월악산 국립공원 입장료는 어른 1,600원, 청소년 600원, 어린이 300원. 주차료는 1시간 1,000원, 10분당 200원 추가. 미륵리매표소 전화 043-846-2976

 

교통 

자가운전
전국 어디서든 최근에 완전히 개통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게 가장 편리하다.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 나들목→597번 지방도→수안보온천→597번 지방도→미륵사지.  영동고속도로 이천나들목을 나와 3번국도 타고 장호원~38번국도~하영에서 19번국도~충주~3번국도~수안보~지릅재~월악산 미륵리사지 매표소로 간다. 중앙고속도로의 경우 남제천나들목을 나와597번지방도~청풍~수산에서 36번국도 우회전~송계계곡 597번지방도 좌회전해 송계계곡 따라 미륵리로 간다.
○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새재IC에서 내려 901번 지방도로를 탄다. 갈평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따라 곧장 달리면 하늘재다. 문경IC에서 하늘재까지 약 17㎞. 하늘재에서 충주 미륵리의 미륵사지까지는 약 2㎞. 월악산 국립공원에서 하늘재로 오르면 국립공원 입장료를 내야한다.
 
대중교통
 소요. 동서울터미널에서 매일 9회(06:40~19:40) 운행하는 월악산행 시외버스를 타고 미륵리에서 하차. 1만800원.
동서울·강남·남부터미널에서 수시로 있는 충주행 고속버스로 충주까지 간 뒤, 충주터미널에서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는 월악산(미륵리사지)행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문경시청 문화관광과 054-550-6394
 
숙식
미륵리로 접근하는 길목에 만나는 수안보온천 지구엔 수안보 관광호텔(043-846-2311) 등 10여 개의 호텔급 숙박업소와 궁전파크(043-845-3210), 온천장(043-846-3161), 등 수 많은 모텔급 숙박시설이 있다. 미륵사지 주차장 근처엔 미륵가든(043-848-6612), 뫼악산장(043-848-9478), 월악산민박(043-846-6193) 등이 있는데, 식당은 민박을 치기도 한다.
 
문경새재 입구 주흘산 자락에 위치한 문경관광호텔은 창밖으로 펼쳐지는 대자연의 풍경이 아름답다. 숙박료는 일반실 기준으로 주중 40%(5만4000원),주말 20%(7만2000원) 할인해준다(054-571-8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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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6.09.13 03:10

    첫댓글 한국의 산천님의 작품을 감상하게 되는 복된 자리 입니다. 이미지마다 정감이 묻어 납니다 구수한 글은 한참을 머물게 합니다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

  • 06.09.13 03:24

    산천님의 따뜻한 손길을 맞이 합니다 감사드립니다 문경새재 신립이, 여기에서 천혜의 요새를 지켰더라면 왜군을 섬멸할 수도 있었던 곳이 였습니다 왜군들이 콧노래를 부르며 넘어 갔습니다 애석한 일이였지요...산천님의 숨결이 깃든 영상과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꽃삽 어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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