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탓일까??
오랜만의 문화동행에 참가하기 위하여 여느 때 보다 더 일찍 약속장소(現용상식자재마트)로 갔다.
그래서 그런지 회원들이 나타나질 않는다.
한참을 기다린후에야, 일부회원들의 모습이보이고....
우리 동아리 살림꾼이신 공주님과 학주선생님이 늦은 이유를 들을수 있었다
시간은 약간 지체되었지만, 계획한 대로 임하면 신덕리 운암(雲岩)종택으로 향했다
종택은 입구엔 빨갛게 익은 앵두와 탐스런 보리둑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먼저 종택의 주인께 관람을 승낙받고,
사랑채 대청마루난간에 옹기종기모여서 학주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운암종택은 청계 김진의 셋째아들인 운암 김명일의 종택이다
운암종택의 특징은 조선시대 기본건축양식인 'ㅁ형'을 띄고 있으며,
사랑채의 대청마루를 높이 올려 밖에서 보기에 웅장하게 건축하였으나,
바깥이 높고 안채가 낮으면 습해지는것을 방지하기위하여,
다시 안채에 단을 쌓아올려 채광과 통풍을 도모한
조선(영 · 정조)시대의 실용주의적인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운암종택에서는 건축의 아름다움과 실용적인 것은 말할것도 없고
이 종택의 주인이신 운암 김명일선생의 부친인
청계 김진선생의 자녀교육에대한 일화를 설명해 주셨다
청계는 다섯 아들 모두를 과거에 급제시켜 가문을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 반열에 오르게 했다.
약봉(藥峯) 김극일,
귀봉(龜峯) 김수일,
운암(雲岩) 김명일,
학봉(鶴峯) 김성일,
남악(南嶽) 김복일이 그들이다.
조선시대에 다섯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며,
아들 다섯이 과거에 합격한 부모에게는
임금께서 해마다 쌀과 과자(약식과 비슷)을 보내주고,
부모가 죽으면 벼슬을 추증하고 제사를 지내주며 각별한 대우를 한다
5형제가 과거에 급제한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모두가 학문이 뛰어나고 강직한 선비로서 각각 일가를 이루었다는 점은
특히 청계가 어떻게 자식을 교육시켰는지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한다.
청계는 아내가 어린 자녀들을 남겨두고 일찍 사망한 뒤,
자녀 양육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했다.
그가 자녀 양육과 교육에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는 다음과 같다.
큰 형(약봉)이 과거에 급제한 뒤 바로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슬하에 아이들이 여덟인데 대부분 나이가 어리거나 갓난쟁이였다.
밤에 어린 자녀를 청계선생께서 손수 좌우로 안아 재우시는데,
아이들의 젖 달라는 울음에 선생께서 몸소 젖을 물리시니,
비록 단 젖은 나오지 않았으나 젖을 빨면서 울음을 그치곤 했다고 한다.
이처럼 청계는 엄마 역할까지 대신하면서 자식들을 헌신적으로 길러냈다.
청계는 자식교육을 위해 자신의 입신양명도 포기했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있는데,
청계가 젊은 시절 서울 교외의 한 암자에서 대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
우연히 한 관상가를 만났는데 “당신이 살아서 벼슬을 하면 참판에는 오를 수
있을 것이나, 벼슬 생각을 버리고 자식 교육에 힘쓰면
죽어서 판서에 오를 것"이라고 이야기했다한다.
청계는 관상가의 조언을 받아들여
대과(문과) 시험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녀교육에 전념했다.
청계가 이처럼 자녀교육에 헌신적이었지만,
요즘의 많은 부모들과 같은 입시를 위한 맹목적 헌신이 아니었다.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바람직한 인성을 함양하도록 하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확고한 교육철학을 가지고 가르쳤던 것이다.
날씨가 더운 관계로 오늘은 한가지 학습(?)만 하고 신덕교밑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의 틈에 자리를 잡고,
어린친구들은 물놀이로, 어른들은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로 휴일오후를 만끽했다.
부랴부랴 준비한 맛있는 밥과 돼지불고기, 채소쌈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통~통~ 소리나는 맛있는 수박으로 더위를 식혔다..
더운여름날의 즐거운 나들이였다.
P.S 특히 오늘은 방앗간(밥집)의 착오로 많은 사람들의 밥을 짓느라 고생하신
공주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첫댓글 바쁘신데 이렇게 후기까지 올려주시고 감사합니다. 매번 느끼지만 답사를 하면서 정말 꼼꼼하게 들으시네요.♡~~^
인선샘 다시 한번 공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