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룡팔부

[김주학]

홍콩의 무협 작가 김용이 남긴 무협소설은 총 15편입니다. 80년대 <영웅문>이라는 이름으로 고려원 출판사에서 해적 출판한 사조삼부곡(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이 가장 유명하고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많이 읽혔습니다. 김용은 자기의 작품이 나중에 쓰여질수록, 소설의 길이가 길수록 더 뛰어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니여서 사조삼부곡은 일찍 쓰여진 소설이지만 정말 재미있고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들입니다.

김용의 무협소설 중에 후반기에 나온 작품이 소오강호, 천룡팔부, 녹정기입니다. 이연걸과 임청하 주연의 영화 <동방불패>는 소오강호를 일부 각색하여 만든 작품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은 작품입니다. 녹정기는 주성치 주연의 영화도 있고해서 많이 알려진 소설입니다. 그런데 천룡팔부는 책도 읽지 못했는데 영화도 없는 것 같고 드라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천룡팔부가 김용의 무협소설 중에 가장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으로 중국의 교과서에도 실렸다고 했습니다. 사조삼부곡의 경우 번역본이 모두 8권짜리(김영사 출판기준)이지만 천룡팔부는 두권이 더 많은 10권 짜리입니다. 길이가 길수록 더 뛰어난 작품이라고 했으니 천룡팔부가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논산 열린도서관에 천룡팔부 10권이 새로 들어와서 읽어보려고 했지만 어떤 사람이 1, 2, 3권을 빌려가서는 반달이 넘게 반납을 하지 않아 할 수 없이 사조영웅전을 먼저 읽었습니다. 드디어 천룡팔부 1, 2, 3권이 돌아오자 마자 그 세권을 대여받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 2, 3권을 빌려갔던 사람이 4, 5, 6권을 빌려가서 또 늦게 반납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더 이상 천룡팔부를 빌려가지 않아서 무사히 10권을 다 읽었습니다.

천룡팔부는 분량이 많은 만큼 내용이 복잡하고 등장인물도 삼국지 못지 않게 많이 나옵니다. 주인공도 한명이 아니라 세명이나 되고 주연급 조연인 두명까지 합하면 주인공이 5명이나 됩니다. 각 주인공들의 기구하고 복잡한 인연들이 점점 갈등을 고조시키다가 후반부 어느 시점에서 모든 이야기들이 하나로 뭉치면서 주어졌던 모든 떡밥이 풀리면서 정리가 됩니다.

천룡팔부에 나오는 무협의 인물들은 주인공을 포함해서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깁니다. 원래 사마천의 <유협열전>이나 <자객열전>에 나오는 협객들도 그런 경향이 있었고 다른 무협소설의 협객들도 목숨을 우숩게 여기지만, 천룡팔부에서는 주인공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자결하고 맙니다. 이들 협객들은 언제든지 죽을 각오를 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자신의 은원을 갚기 위해, 또는 수치감을 느꼈을 때 아무렇지 않게 "죽으면 그뿐이다"라고 말하고 기꺼이 죽어갑니다. 이 격렬한 성품때문에 대화로 풀 수 있는 일도 해결하지 못하고 깊은 갈등의 늪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천룡팔부의 주인공들은 사랑을 할 때에도 어떤 것에도 상관없이 격렬하고 집요하게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그녀가 또는 그가 다른 남자 또는 다른 여자를 사랑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그녀 또는 그만을 사랑합니다. 기꺼이 그를 위해 또는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주인공인 소봉과 아주, 아자 자매의 사랑이야기는 가슴이 아펐습니다.

주인공들이 겪는 고난과 은원 관계가 거짓 정보를 너무 쉽게 믿고, 철천지 원수라고 생각되는 당사자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대화하지 않아 생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소통 부족으로 비극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러지 말고 서로 대화를 해야지'하고 속으로 응원하지만 소용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빠져나오기 힘든 갈등에 휩싸이게 됩니다.

김용의 무협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가장 뛰어난 무공을 가진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 무협 애호가들의 가장 큰 떡밥 중의 하나인데 천룡팔부에 나오는 소림사의 청소부 승려인데 이름도 안나와서 그냥 무명승이라고 하는 사람과 천룡팔부 주인공인 단예와 허죽의 무공의 근원인 소요파의 창시자인 소요자가 신조협려와 소오강호에 전설 처럼 이름이 전해지는 독고구패와 더불어 가장 뛰어난 고수라고 인정되고 있습니다. 즉 무명승, 소요자, 독고구패가 가장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인데 이들의 우열은 가리기 쉽지 않습니다.

원래 무협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정석인데, 이 천룡팔부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물론 나머지 두 주인공은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슬픈 정서로 채워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