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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의 신앙과 베드로. 행10;1-23. 23-48. 2016. 2. 3/10/17/24
오늘은 고넬료의 신앙과 베드로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것입니다. 행1;8절이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전도의 문을 여는데 백부장 고넬료를 사용하셨습니다. 고넬료를 왜 사용하셨는가는 나중에 고넬료가 한 공동체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에 들어오는 모습과 과정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을 분명하게 나타냅니다. 그런데 여기에 베드로가 아직도 여전히 그 모습 그 생각과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만 그래도 3년간 주님과 함께 동행을 하고 동거동락을 했습니다. 성령의 체험을 했습니다. 사마리아 땅 까지 가서 복음을 확정 시켰습니다. 룻다의 애니아를 고치고 욥바의 도르가를 살렸습니다. 이방 땅에서의 일입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여전히 그 생각과 사고를 떨쳐버리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살지만 참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시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항상 어떤 편견과 판단이 항상 내 자신을 자유하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서에서 자유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어떤 모습이 주님의 뜻에 장애가 되고, 고넬료의 어떤 모습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셨는지, 어떤 사람에게 주목하시는지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그렇다면 고넬료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이방인으로서 로마 군대의 백부장입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먼저 가이샤라는 예루살렘으로부터는 약104km 떨어진 지중해 연안의 해변도시입니다. 여기에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고, 이달리야 부대라고 하는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거기 이달리야 부대에서 100명의 군사를 거느린 백부장입니다. 우리나라 군대로 하면 중대장에 해당됩니다. 가이사라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군대입니다. 이 것은 당시 로마정책의 일부입니다. 유대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전형적인 군대의 장교입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삶을 보면 당시 기독교나 유대교로 설명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독특한 사람입니다. 히브리적인 어떤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고넬료는 언약의 백성이 아닙니다. 로마의 사람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하여 성경은 2절을 읽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이방사람, 고넬료의 삶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삶의 모습입니다.
1-1. 백부장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신앙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경건은 성도의 신앙을 가늠하는 척도입니다. 그 사람이 경건한가 그렇지 아니한가에 따라 그 사람의 신앙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경건해야 됩니다.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모습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경건의 모양처럼 경건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말하고 똑같이 행동하면 그것은 경건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참된 경건은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여러분, 참된 경건은 예배와 함께, 삶으로 드러나는 사람을 살피고 구제하고 도와 주는 것입니다. 이방인, 군인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부하들한테만 잘해도 이름이 오르내립니다. 고넬료는 부하들과 종졸들과 가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어요. 무엇으로 경건하다고요. 여러분, 대단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을 기뻐하시고 받으십니다.
1-2. 백부장 고넬료는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말이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고넬료의 인격을 말씀해 줍니다. 그는 가정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와 자녀가 고넬료를 사랑했습니다. 종들도 그를 믿고 따랐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에서는 천사 같은데 집에 가면 악마로 변하는 사람이 있고, 교회에서는 경건하고 거룩한 것 같은데 집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밖에서 인정을 받는다면 집에서도 똑같이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고넬료는 자기 혼자만 믿은 것이 아니라 온 집안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속한 공동체, 가족을 전도했습니다. 그는 군인으로서 자기 직무에 있어서도 청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절에 보면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의 부하 가운데 경건한 부하가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청렴한 삶을 살았는가를 말해 줍니다. 당시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정직이나 청렴, 신실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이방인 군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청렴한 삶을 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런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1-3. 백부장 고넬료는 백성을 많이 구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있다고 구제하는 것 아닙니다. 구제도 몸에 익숙해야 되요.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기뻐하시고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19:17)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입니다. 꾸면 어떻게 해야 되요? 갚아야지요. 하나님이 갚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은 베푸는데 인색하면 안 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막 퍼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누가6;38‘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비결입니다. 이것은 도움을 주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잠시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을 좀 생각을 해야 되요. 요사이 도움을 받는 사람이 더 당당하게 나와요. 죄송합니다. 기가 막힐 때가 있어요.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요? 훈련을 시켜야지요. 주어지는 은혜를 모르면 도움이 오다가도 나갑니다. 이 것을 깨닫게 합니다. 고넬료는 많이 구제하는 사람입니다.
1-4. 백부장 고넬료는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기도했다는 말은 그가 시간을 정해 놓고 규칙적으로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힘을 믿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직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가 기도한 시간은 제 구시입니다. 이것은 지금 시간으로 오후 3시입니다. 오후 3시이면 한참 일할 때입니다. 그가 바쁜 중에도 기도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삶의 우선순위로 두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신앙이 우선이었습니다. 기도가 우선이었습니다. 이런 그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주목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우선순위로 삼기를 축원합니다. 주일날 예배가 우선이고, 여러분의 삶에 기도가 우선이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주님은 원하십니다.
2. 찾아오심입니다. 경건하고, 경외하고, 구제하고 기도하는 사람, 고넬료를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3절 4절을 읽겠습니다.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하나님은 고넬료를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를 늘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음성을 못 들어요. 왜 못 들을까요? 여러분, 내 고집, 내 아집, 내 생각, 내 판단 내 편견이 있기 때문에 못 듣습니다. 너무나 내 삶에 분주해요. 그래서 주는 음성, 찾아오는 음성 잘 못 들어요. 그런데 고넬료는 이 환상, 이 음성을 들어요. 특별히 기도할 때 많이 들려오고, 말씀을 보면서 주님이 보이게 됩니다. 오늘 고넬료가 주의 천사를 봅니다. 그리고 그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어느 때에 듣습니까요?
2-1. 기도할 때 천사의 음성을 듣습니다. 기도할 때 꿈과 비전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환상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알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꿈과 비전과 환상을 보여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습관이 중요한데 예배, 기도, 경건의 삶, 이런 것은 몸에 익숙할수록 좋습니다. 물론 내용이 중요하지만 내용이전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규칙적인 삶이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삶, 예배의 삶이 중요합니다. 실수와 허물 가운데서도 기도하려고 해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 때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고넬료의 모든 내용을 다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무엇을 볼까요? 행10;34절을 봅니다. 우리의 무엇을 봅니까요? 중심을 봅니다. 고넬료의 중심을 다 보았습니다.
2-2. 두 번째로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성도의 기도가 천사의 손에 의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지라”(계8:3-4) 성도가 드린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억해 두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스가랴는 결혼을 하였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아이를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잊혀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늙었을 때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눅1:13, 18) 이것을 보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반드시 응답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저축과도 같은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사람은 살면서 계속해서 기도 응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게 되면 반드시 기억하시고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2-3. 그러면 왜 찾아 오셨습니까요? 지시하실 내용이 있습니다. 5-6절을 읽겠습니다.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왜 이렇게 지시를 할까요? 고넬료의 기도의 내용에 그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고넬료는 더욱 사모하는 것이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모든 육체에 부어지는 성령입니다. 주님의 입장에서 고넬료에게 무엇인가 더욱 필요한 것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가르침을 줍니다. 천사가 고넬료를 찾아와서 고넬료의 행적을 이야기 합니다. 이 소리만 들어도 기쁘잖아요. 그런데 천사는 가르침까지 줍니다. 고넬료에게 주는 것은 객관적인 환상입니다.
고넬료는 구체적으로 천사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피장, 시몬의 집에 유숙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산으로 갈까봐 그 집은 해변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자상하게 세밀하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는 구체적이라는 것입니다. 모호하지 않습니다. 받는 사람이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체적으로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시32;8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발의 등이고 빛이래요. 자상하고 구체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3. 고넬료의 순종입니다. 순종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7절 8절을 읽겠습니다.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고넬료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청하기 위하여 하인 둘과 경건한 부하 한 사람을 욥바로 보냈습니다. 고넬료가 즉시 순종할 결과 베드로 사도가 오게 되었고 베드로 사도가 전해 주는 복음을 통해 그의 모든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순종하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4.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 모든 민족, 모든 나라에 전파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아직도 유대인들에게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도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과는 아예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복음이 앞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유대인들에게만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가이샤라에 있는 이방인이었던 로마 군대 백부장 고넬료를 이방인 전도의 문을 여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고넬료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경건한 사람이었고 또한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고넬료는 즉시 순종하여 종 둘과 경건한 부하 하나를 욥바에 보내게 됩니다.
4-1. 주님은 욥바에 있는 베드로 사도를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9절에서 16절까지를 읽겠습니다.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시더라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대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이 말씀에서 얻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고넬료가 언제 환상을 보고 천사의 지시를 받았습니까? 제 구시 즉 오후 3시에 기도하다가 받았습니다.(10:3) 베드로 사도가 언제 또 환상을 보았습니까? 제 육시 즉 정오에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9절)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 기도하는 여러분 다 되시기 바랍니다.
4-2. 베드로의 환상입니다. 베드로의 환상은 주관적인 환상입니다. 비몽사몽간에 주어졌습니다. 고넬료하고 다릅니다. 15절의 말씀에 나오는 보자기 같은 그릇에 담긴 땅의 각종 짐승은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짐승들입니다. 혐오감을 갖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일어나 잡아 먹어라. 라는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베드로는 거의 반발적으로 그럴 수 없나이다. 라고 합니다. 여러분, 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주여 당신에게 이일이 결단코 미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내 발을 씻길 수 없나이다. 했던 사람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런 사람입니다. 주여 결코 속되고 깨끗지 못한 물건을 먹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표현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인의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성령의 능력을 받았을 때에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을 어떻게 설교를 합니까요?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질 것이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모습에서 모든 육체가 적용이 됩니까? 안 되지요. 적용을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속 된 것으로 만들지 말라.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자세이어야 할까요? 늘 민감하고 늘 성령 안에서 자유하고 늘 성령 안에서 열려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속되고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깨끗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이방인들은 누구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세상 사람들이 꺼리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차별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교회는 품어야 합니다. 우리 비전교회가 이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4-3. 두 가지 결과입니다. 백부장이 본 환상은 객관적인 환상으로 설명이 필요없는 환상입니다. 단지 고넬료가 순종하고 복종하여 계시의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이사라의 백부장은 그가 신임했던 종들, 두 명의 하인과 한명의 종졸들에게 행할 것을 분부했습니다. 이들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충실하게 복종을 합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데리러 욥바로 떠났고 그 이틀 동안 고넬료는 그 들이 돌아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고넬료의 순종처럼 그 종졸과 부하의 순종을 봅니다.
그리고 욥바의 베드로입니다. 아직도 당혹해 하면서, 긴가민가하면서 성령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으려합니다만 그럼에도 확실히 이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직도 의심을 하면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는 음성을 듣습니다. 베드로에게 이 음성이 들렸지만 아직 그 가 본 환상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미지의 세계로, 새로운 계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본 환상에 대하여 당혹감이 있었지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이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7절에서 23절까지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 말씀이 무엇 입니까? 하나님의 응답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19-20절에 하나님은 고넬료에게도 응답하시고 베드로에게도 응답하셨습니다. 만약 고넬료 한쪽만 응답하셨다면 베드로와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양쪽 다 응답을 주십니다. 그래서 서로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이사라에는 천사를, 욥바에는 사람을 보내시도록 만드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도착하여 이루어진 모든 상황을 보고나서야 환상의 의미를 이해하데 됩니다.
4-4. 그런데 이런 일련의 일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을 통하여 진정한 복음으로 영혼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22절입니다. 만약 천사가 복음을 전하면 얼마나 잘 전하겠습니까? 실수 없이 완벽하게 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세우신 주의 종을 통하여 말씀을 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전한 말씀을 통하여 영혼이 구원받고, 은혜 받게 하십니다.
감리교 창시자요 18세기 위대한 부흥 운동의 주역으로 쓰임 받은 요한 웨슬리를 회심시킨 것은 작은 모임의 이름도 없는 무명의 설교자입니다. 그가 강단에서 종교 개혁자 루터가 쓴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을 때에 요한 웨슬리의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 이후로 요한 웨슬리는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요한 웨슬리를 회심 키시는 일에 이름도 없는 무명의 설교자를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 것 또한 경륜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의 손길과 함께 작은 것들이 모여 전체적인 그림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만 보면 아니 됩니다. 끝에 가봐야 전체적인 윤곽이 확연하게 들어납니다.
5. 23절에서 43절까지인데 먼저 23절에서 33절까지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 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에 이 맘 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였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23-43절까지 본문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베드로의 설교인데 이 설교는 끝을 맺지 못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신 내용입니다. 욥바에서 가이사라로 떠난 사람은 모두 열명입니다.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 사도자신, 그리고 할례자인 유대 그리스도인 형제 6명, 모두 열 명입니다. 여기서 무엇이 느껴집니까? 여기서 베드로가 얼마나 당혹해 했으며, 얼마나 불안해 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어떤 빛이 도래했지만 마음 속에 무엇인가를 느끼지만 이방인의 집에간다는 것이 새로운 것이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6명과 함께 갔습니다. 그러면 백부장 고넬료의 태도와 베드로의 태도입니다. 무슨 태도입니까?
5-1. 일행을 기다리는 고넬료와 가족, 친지들의 모습에서 베드로에 대한 고넬료의 존경을 봅니다. 엎드리어 절하니. worship이 아닙니다. 존경입니다. 예의를 갖추었습니다. 존경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 존경 앞에 베드로는 이 것마저 거절을 합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도 사람이다. 동등함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그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을 합니다. 이방인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설명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기독교를 완벽하게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천사의 방문을 되풀이함으로서 지금의 현장을 보게 되고 예수그리스도의 빛과 성령님의 원하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설교에서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만유의 주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사용하는 표현을 보면서 보다 의미를 깨달아 가는 베드로 사도를 봅니다. 여러분, 구약성경 말씀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입니다. 그 복음의 진정한 뜻을 성령이 조명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만유의 주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면서 우리가 이일에 증인이라고 합니다. 이 것을 2번 사용을 합니다. 반복이지요. 예수님의 삶과 죽음, 기름부음을 받으심과 은혜의 사역의 증인이라고 스스로 밝힙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표현을 사용하는데 선지자가 말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설교가 중단이 됩니다. 왜 중단이 됩니까요? 오순절 성령의 역사와 같은 방언의 은사와 기쁨과 환희에 찬 찬양이 있었는데 고전12장에 보면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니라. 이와 같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조명이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지, 그리고 이탈리아 군대와 베드로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5-2. 고넬료는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24절) 그는 자기도 듣고 그의 친척이나 가까운 친구들도 모이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고넬료의 모습에서 베뢰아 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17:11) 하나님은 말씀을 사모하는 고넬료입니다.
5-3. 고넬료는 말씀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25절) 사실 그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입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입니다. 더더군다나 당시에는 로마가 유대를 식민통치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지배자 신분이고 베드로 사도는 피지배자 신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넬료는 베드로 사도가 들어오자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절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가 말씀 앞에 겸손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 겸손한 자만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넬료가 말씀을 전하는 주의 종을 높였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는 없으시지만 목회자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회자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목회자가 전하는 말씀에 은혜를 받겠습니까?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를 귀하게 여길 때 말씀에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5-4. 고넬료는 말씀을 듣기에 앞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33절. 이것은 고넬료가 베드로 사도가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겠다는 의미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서 발견합니다. 살전2;13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리라” 그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6. 23절에서 43절까지 본문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교훈, 세 가지입니다.
6-1.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 되다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마라. 베드로는 여기서부터 완전히 성령에 사로잡히고, 그리고 완전히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말이 무슨 말입니까요? 이 때부터는 우월적 개념이 없습니다. 유대인의 개념, 하나님의 유일한 선택 받은 사람 이런 개념이 없습니다. 반면 열등적 개념도 없습니다. 이 말은 코이노스입니다. 교제의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에서 나온 코이노스입니다. 이 코이노스는 물건을 서로 통용하다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종교적 계급을 없애고 삶의 unity를 실현시키는 것이 코이노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동등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이루어 졌습니다. 성령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불결하고 속된 것이 깨끗하게 된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주님 안에서의 평등입니다. 갈3;28에 주안에서 같음을 말씀합니다.
6-2.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 이는 첫 번째의 가르침에 포함되어 있는 한 가지 사실을 확대한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라는 표현은 하나의 표현으로 이루어진 매우 암시적인 말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사람의 외모가 하나님의 선택의 척도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유대인입니다. 물론 외형적인 신앙, 삶, 겉으로 드러난 사실이 중요하지만 이런 것에 기준을 두고 살아온 사람들이 바리새인이고 오늘 우리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받으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깨끗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깨끗게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깨끗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속죄의 교리를 안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도움은 됩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함으로서 이루어집니다.
6-3. 설교가 도중에 끝나게 되었다는 사실의 의미? 오늘 본문 이후에 11장에서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 형제들에게 고넬료의 집을 방문 했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하는데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셨다. 라고 합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자세히 설명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 런데 그 의도와는 다르게 중도에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설교는 오직 예수님을 명확하게 전파했다는 점에서 완벽한 설교이었습니다. 내용과 방법에서 완벽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고 지시하신 성령님의 지시에 순종하고 복종을 했던 것처럼 지금도 성령의 역사하심에 복종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에 순종을 하고 복종을 합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신 멧세지이기에 성령의 충만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면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변호하고 옹호하고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멧세지를 전달하고 성령께서 하시도록 비워 두는 것이 은혜일 때가 있습니다.
7. 베드로 사도가 고넬료와 그의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설교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얻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33-43까지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부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7-1.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비록 고넬료가 경건하여 온 집안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를 많이 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을 때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행4;12에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종교 다원주의를 경계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7-2. 성령의 역사입니다. 44-48절까지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의 높임을 들음이러라.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고넬료를 비롯하여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본 베드로 사도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그들은 구원은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증표인 성령을 부어 주심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만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하신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합니다. 고넬료와 모인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비로소 최초로 공식적인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되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의 전도를 계기로 비로소 이방인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혜택을 지금 저와 여러분이 받고 있고 일본이 받고 있습니다. 비전교회가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성령에 민감하며 주의 하실 일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시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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