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면서 - )
경기수산고등학교 41 회 정진백 이것이 나의 고등학교시절 명함이다.
1973 년 1 월 그때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까 무려 33 년전의 일이었다.
당시 누구나 사정은 비슷하였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에 대학교육은 시키지 못할바에야 실업계고등학교는 졸업시켜서 보란듯 취직이라도 잘 시켜볼 요량이 부모님들의 간절하신 소망이셨다. 최소한 내자식이 농사업은 대물림 하지않게 해주고 싶으셨고, 거칠고 배고푼 섬생활만은 벗어나게 해주고싶은 그 마음말이다.
그런 친구들이 이곳 월미도에 모여왔던것이다. 멀리 충청도에서, 제주도에서, 백령도에서, 강화도 더들어가 교동도에서, 덕적도, 영흥도, 대부도, 가까운 영종도에서 .... 그중에는 나도 끼어있었다.
자갈논 7 배미 농사로 겨우 7 자식 기근이나 면하고 계셨던 아버지께서는 나를 학교에 들여보내주신후 60,000 원짜리 전세방을 동구 화평동에 얻어주시고 자취를 시켜주셨다. 그 1 학년 첫날부터 매일새벽 딸랑대는 쓰레기를 버리는것으로 시작해서 아침밥을 하고 점심도시락을 싸며 저녁을 해먹었으며 토요일이면 시장에서 배추와 소금등 반찬거리를 사서 반찬을 만들어야했다.
불쌍한 우리 어머니는 한달이면 1 - 2 번 농사일에 틈을 내어 섬에서 쌀 몇되와 무말랭이반찬꺼리등 돈되는것을 만들어서 당신보다 더 큰 통으로 머리에 이고 20 리 뱃길 인천시내에 나오셔서 가가호호 민가를 돌아다니며 좌 팔아 돈으로 바꾸어 자취방이불밑에 돈으로 몇천원을 만들어두고가곤 하셨다. 행운이 닿는날이면 두세달에 한번 일요일, 동태찌게를 끓여놓으시고 먹는 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는것이었다.
그렇게 살아가던 학창시절 3 년이 지난지도 이제는 너무 오랜날이었다. 지난날들을 생각해보니 세상에 휩쓸려 나로서 서기위해, 닥쳐오는 세상풍파와 나에게 지어진 짐추스르기에 그 소중한 날들을 너무 멀리 잊고있었다. 살아생전에 정말 잊을수없는 그날들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나는 소홀했는데도 나의 모교는 그동안 한번도 나를 욕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를 키워준 어머니처럼 나를 바라만보고 있었다. 우리 모교는 그동안 내가 그 학교의 졸업을 자랑하지않았어도 나를 탓한적이 없었다. 여전히 나를 품안에 두고 있었다................
그렇다.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내가 나를 키워준 우리 모교를 모른다고해도, 잊고살아간다해도, 내가 죽는 그날까지 모르는 학교라고 말해도 우리모교는 여전히 말이 없을것이다. 욕하지도 않을것이다. 어머니처럼 여전히 바라만 보고 서있을것이다. 나의 이름을 당신의 학적부에 영원히 기록해둔채 말이다.
이제 무심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반성한다. 그래야지, 그럴꺼야, 앞으로는 그럴꺼야. 아무리 어렵더라도 가끔은 모교를 생각하고 최소한 내가 할수있는 무엇인가를 해나갈꺼야.
독백과 대화의 형식으로, 나를 주체로 하여 글이 지루하지않도로 써 나갔다. 그리고 내용중에는 소설적인 내용도 있을수있음을 미리 알려둔다
오늘은 2006년 1 월 28 일 (토요일),
그러니까 내일이 나이 한살 더 먹는다는 구정 아니겠어?
좋으나 싫으나 또 한살 울며 삼켜야지. 그래서그런지 요사이는 해저무는 냉기가 무릅팍에까지 느껴지게 되더라구. 또 마파람에 눈물은 왜이리 질질 흐르는지, 스바.
내일, 자식들 세배 받으며 한탄하며 중얼댈꺼야. 너는 뜨는해, 나는 지는 해라고, 이제 더이상 이 애비헌테 기대허지 말라구 ..... 내도 이제는 노후 대비 허여잖여 -
어릴때는 천년 젊은채로 있을줄만 알고 깨불었지만 아마 우리 아부지도 내절받으시며 그러셨을꺼야. " 이 눔아. 내 나이만 되 부아라 ......... "
남들은 꾸레미 꾸레미 들고 고향간다고 어제부터 안절부절못하며 오후를 넘기자마자 없어지는 모습이 그래도 보기 좋더구만 나는 갈데없이 집구석에 있다가 새벽 6 시 눈이 뜨는바람에 이른 달밤 나가서 체조좀허고 들어와 아침먹고나니 짜논 오늘 계획표가 없더라구...... 집안을 둘러보니 만두 만든다고 밀가루 반죽시킬 마누라관상 훤히 보이고 그거 끝나면 오늘이 올해 마지막날이라구 밀려논 집안청소에 마대꼬챙이 내 꽁무니뒤에 가져다 놓고 붙들릴 내 관상이더라구.
내고향은 너무도 가까웅께 내일 아침에 헹허니 다녀와도 조상님들 오셨다 가실시간까지 만나뵙는데 문제없기에(허기사 요새는 어른이 자식들집으로 찾아오게 법이 바뀌었다문서?) 생각하다가 내 가방끈 길게 이어주었던 월미도에 있었던 우리가 다니던 고등학교를 고향삼아 다녀오리라 마음먹었지. 그동안 사실 너무 소홀했거든. 헌데 왜 연수구 옥련동 에있는 학교가 아니고 떠나간 월미도냐구 ? 난 거기서 졸업했거덩. 나의 흔적은 그곳에 있기때문이여.
헹허니 나갔다오면 모든거 다 끝나있겠지 ....... 내가 누군데.
그때 우리 고등학교는 학교뒷편에서는 월미산 지하에 매설된 미군기름창고를 통해서 기름도 나는 전국 유일의 쿠웨이트와같이 만인이 부러워하던 산유고(産油高)였고 미합중국의 국민의 군대가 함께 울타리를 접하고 우리와 동맹관계를 맺고 살던 국제고(國際高)였었지 지금도 어느 전국의 고등학교와 비교한다는것조차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잔여. 또 역사적 전통은 또 어디와 비교할 대상이 없어서 1 등인지 꼴등인지를 평할수도없고 -
이왕 말이 나왔으니 내력을 한번 돌아보자구. 족보는 알아야잔여. 우리학교는
우리학교는 다시말해 애시당초 월미도에 있었잖여 ?
지금은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사간 인천해양과학고등학교 지만 말여.
그래도 나는 지금도 여전히 월미도가 우리고등학교 있는곳이여. 나의 발때와 머리때가 다 묻어있는 고향과도 같은 그런곳 말여 오늘 내가 가본다는 고향학교는 월미도에 있었던 " 大 경기수산고등학교 " 여. 지금 옥련동 모교에를 가 보았지만 정이 들지않더라고. 지난번에는 동문체육대회 갔다가 중간에 슬며시 와버리고 말았다니까........
그래도 3 년이란 긴 시간동안 그 어린나이에 부모님곁 떠나와서 연탄불에 자취생활하면서 지각한번 안하고 개근상 받으며 공부했잖여. 그것뿐이 아니지. 장학생으로 까지말여. 우리 동창들 말고 장학생으로 학교 다닌눔 몇눔있는지 나와보라 그래 ... 우등상은 원래 내 천성이 나서지를 못허는거라 답안지를 항상 엇답으로 써내 항상 4등이었지만 -
주절대는게 심해질수록 늙은거라지. 아마. 몸도, 마음도 사실은 아직 청춘이야. 조금 엄살을 해서 그렇지.
월미도를 그리면서 모교로 향했어. 이제는 건물도 남의 이름으로 남아 있지만말여.
영종도쪽에서 바라본 월미도의 모습이여. 부산갈매기가 다 이리 왔나 ? 원.
그시절 이 월미도 바다로 나와 목깐 헌 눔들 자랑좀 해봐. 수영부애들이었지 아마 ? 난 물 근처가문 안된다고 매년초 아부지가 봐주신 토정비결에 나와서 근처에도 안갔지만 말여. 지금 그 시절 수영친말 허문 믿을사람 누가 있겠어?
1950년 9 월 15 일 인천상륙작전에 맥아더장군과 한미연합군이 들어왔던곳이기도하지. 그때 저 월미도는 난장판이었다잖여 ? 함포로 디져라고 쏴대가지고말여.
그때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미국사람대포는 대단히 크더라더구먼. 우리나라 사람대포는 그 반에 반만밖에 못헌데..... 학교다닐때 그래서 월미도미군기지에 우리 한국 여인들이 모여들고있는거라고 생각했었지. 무조껀 크고많으면 우리나라 배고팟던 사람들 다 좋아하는것으로 난 생각했거덩. 헌데말이여, 아주머이 말들 들어보니께 작은 비짜루가 구석구석 더 잘쓸린다더라구.
이거 말허다보니께 딴말이 나왔네. 이왕 나온말잉게 기냥 들어둬 잉.
인천역 이여, 그 시절말로 하인천역 말여.
학교다닐때 우리들의 관문이었어. 이곳을 통과하지않고서는 학교엘 오갈수 없었으니까말여. 아마 여기 모르는 친구 있다면 뒷문으로 우리학교 왔던 눔일꺼여.
잠깐 옆으로 새서 말하고 넘어가겠지만 그때 시절에 저건너 어떤 핵교였든가 그핵교는 졸업장 막 사고팔았다고도 소문이 자자했잖여. 유언비언진 모르지만 굼불 안지핀 굴뚝에 연기 나겠어? 뭐? 그래도 우리핵교는 국가가 공인한 핵교라 100 % 신분은 보증했었지. 뒷문으론 어림도 없었구. 을왕해변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에게만 국가가인정한 졸업장 주었잖여. 국가공인 자격증도 하나씩 취득했었구 -
저멀리 플라타나스나무가 그때에도 서있었어. 누구누구가 농땡이치고 수업빼먹고 도망간거허며 오전 2 시간후 거짓말시키고 배 아프다며 딴짓하러 간거 다 알고있을꺼여.
그것뿐이 아녀. 철도통학허는 애덜이 누구누구이며 부평역 통학반 결사대가 누구인지두, 송현동,화평동, 신흥동 저 멀리 용현동 독재이고개에서부터 걸어다니던눔들이 누구인지 다 구분해서 알고있을꺼라구.
누가 지 엄마 생선장사 아니랄까봐 모자에 수건넣고 빵처럼 만들어 지 엄마 생선다라처럼 머리에 얹어 쓴눔허며 나팔바지 12 인찌가 누구 나발통인지도 몰고 나팔대며 깨분눔이 누군지 다 안다구, 다알아.
그래도 저 나무는 지금껏 말이 없구먼.
요새 한물가서 주위사람들에게서 약발 오르지못허는 일부 사회지도층어르신들 그래도 욕심은 남아 내 조동아가리 춤추면 뭐가 지랄이 난다더라커문서 깨부는거보면서 정말 저 무던함은 우리 모두 배워야 되야. 배워야돼야. 나이만 먹으면 뭐허냐구, 한때 잘나갔으면 뭐허냐구, 결국 그렇게 저물거 애초 몰랐나.......
인간은 자고로 지 끝날날을 헤아려 볼줄 알아야혀. 그래야 진작 큰 사람이여. 겸손해야 허는거여.
예슨살이상 넘으믄 그눔이 그눔이구 그년이 그년이라는 명언 뼈아프게 새겨들어야되야. 그래야 되야.
인천역 맞은편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 페루 " 가 서있고 온갖 중국풍의 붉은 색으로 덮혀있어 야.
저것봐, 불길한 징조라고 꺼려하는 붉은 색을, 저 건물의 색깔도 저렇게 다 피로 시뻘겋게 물들였구먼.
어디, 옛날 우리 젊었던 30 년전 그시절에 이런거 생각이나 해 보았겠어? 기껏해야 " 호떡집에 불났냐?" 라는 말한마디 들었을 정도였잖여. 그러나 이제 알고보니 그 말의 기원도 이곳에서 자장면과 호떡장사를 시작하던 그 일제시대에 나왔던 토종 인천역과 북성동 때놈들 얘기였더라구. (때놈은 욕이 아녀.)
여기가 어딘줄 아는감. 인천역에서 조금 지나면 만나는 그때는 없었던 고가교 밑이여. 철도통학하는 친구들은 여기를 거쳐 걸어서 학교까지 10 여분을 걸었쟈.
그리고 송현동, 화평동쪽에서 다니는 친구들은 가방덜렁대며 철길을 따라 이곳을 통해 걸어서 학교에 갔잖여. 그때 그 화물열차가 길을 막아서서 잠자고있을때는 언제 다시 움직일지도 모르는데 그 열차밑구녕을 낮은포복으로 횡단했었지. 정말 지금 생각허면 위험천만이었고 그 당시에는 스릴만점이었잖여? (지금도 늦지않았으니 아부지헌테 말씀드리고 용서받어.) 열차운전사가 보이는곳은 그래도 덜 위험했었겠지만 열차라는것이 길게 휘어있어서 다 보일리가 만무했었지. 허기야 그거 보면 열차에서 가만 두었겠어?
나도 언제인가 증식과 동길 이와 함께 운명이 바뀔뻔한적이 있었어. 2 학년이 시작되는 봄이었어. 집에서 늦잠을 자고 서둘러 아침을 해먹고 학교엘 이길을 횡단해 가는데 시커먼 화물열차가 석탄을 잔득싫고 길을 막고있는것이 아니겠어? 빨리 핵교는 가야허는디 말여. 나는 친구와 평시 연마한 낮은포복 실력으로 냅다 열차밑구녕을 기어들어갔어. 그순간 " 철커덩" 허문서 쇠바퀴가 움질허는거야. 눙깔이 확 튀드라구. 그때는 방법이 없잖겠어? 나머지 레일을 건넜지. 정말 순식간이었어. 워낙 내가 빨랐거덩. 다들 나보고 제비라고 들 했잖아. 태권도 교관이었던 광선이 헌테는 근처도 못따라갔지만 나도 태권도헌다고 1 학년 2 학기때부터 얼마나 깨불었냐구. 그래도 그 실력이 있어서 순발력으로 산거지. 화물열차를 순식간에 건넜는데 그때도 움직이지않더니 다섯발자국을 갔을때 그때서야 화물열차가 구르기 시작하는거여. 그래. 열차라는거는 한번에 바로 구르는게 아니더라구. 이럴때는 무조건 고야. 바로 가는게 아냐. 사실 또 이판사판 아니겠어 ? 그날밤에는 귀신꿈까지 꾸었다니께.
애들은 이글 못보게해야. 흉내낼지 모릉께.
사실 그때 액땜해서 나 아직 사는지도 몰라. 벌써 죽을뻔헝게 미뻔인지 몰라 야.
그 이후 나는 무슨 물건이든, 누구 밑창이든 절대 밑으로는 안들어가 야. 항상 위에 올라타면 탓지말여. 그때 큰 산 교훈을 얻었거든.
나는 그래도 그만허지만 동길이 친구는 그때 놀래서 밑창아니라 어느 무엇 위에도 올라타는일이 업디야. 아직말여. 그래서 마누라와 아직 둘뿐이라지 아마.
야들아. 어쨋거나 말여. 나이먹어 이제 힘들다고해도 절대 집이서든 어디서든 누구 밑창엘랑은 안되야. 알았제? ....
바로 저기보이는 저 화물열차였어. 시커먼스 말여.
그때는 보이는 앞이 바다였고 배가 접안하는 해변의 정취가 좋았는데 이제 저렇게 입구부터 막혀 답답하잖여.
이제 위는 고가교로,
아래는 관세자유구역 울타리로 .......
잠시후 내가 저 울타리옆을 지나가는데 경찰견을 한마리 대동하고 관세청경찰아저씨가 지나가는 나를 위아래로 훓어보면서 안에서 가시찰망을 흔들어보며 지나가더라고.
다들 삐까번쩍 차들 끌고 탱자탱자 지나가는데 웬 으저리같은 눔이 두리번대며 카메라하나들고 이길을 걷고있응께 이상허게도 보였나부지.
이곳이 대한제분 가기전 , 동일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관세자유구역 경계울타리 잖여. 우리가 핵교다니던시절 여기는 바다와 통했었구. 저 끝자락에는 냉동공장도 있었지.
잘사는 동네는 아니었지만 정겨웠다는 기억이 나. 뱃사람들의 애환도 많았겠지. 아련히 떠오르는 그 바다정경도 생각날듯 해. 이곳에도 흔히 말하는 뱃사람들의 " 풋사랑 18 번지 "가 있었어 야.
동일아파트 방음벽이여. 그당시에는 민가였었지.
이 길을 따라 , 아니면 아까 철길옆의 우회도로를 따라 학교를 갔었어.
우리가 바라보던 그 흔적이 아직도 서려있는듯해. 시간을 갖고 주변을 둘러보았어. 어디엔가 나의, 우리학교의 흔적이 남아있진 않을까 하는 기대때문에 말이여.
저기 보이잖여. 항구여인숙이라는 간판말여. 얼마나 오래되었느냐고 물어보니까 50 여년 되었다더군. 대답해주시는 일흔은 됨직한 할무니 曰 " 왜 혼자 여 ? .......... " 무신뜻인지도 모르고 있다가 한참후에서야 해석이 가능했어. 이제 나도 늙었나봐. 응답이 금방 안오니말여. 말만들어도 버쩍 일어서야 일볼텐디말여.
이곳이 해변이었고 인천항의 주항은 아니었지만 어선이 들어오고 어물시장이 서며 주막이 있고 풋사랑이 있었던 바로 그곳이라는 산 증거아니겠어? 이름도 그 아련한 " 항구 여인숙 " 말여.
양쪽의 건물 또한 그렇게 오래된 건물 흔적이더라구. 어쩌면 그당시는 불나와라 총나와라 하며 돈잘벌며 살아가던 집들이었을꺼여.
하지만 지금은 말이 없더라구. 피곤한 오늘의 역사적 순간을 저렇게 말없이 몸으로 보여주고있더라니까............
우리는 역사를 통해 오늘의 내가 해야할, 가야할 길을 볼줄아는 지혜가 필요한거여. 사실 그래서 지혜로운이들은 역사를 항상 되새기는거 아니겠어.
한때 잘나가던 저 집들 주변의 흥망성쇠, 나도 오늘 이곳의 방문을 통해서 내 인생길 에서의 배움의 한수를 얻기위해 넋을 잃고 한동안 서있었어.
야들아 ! 너희들은 이곳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게 되는거여 ?
지금, 지금을 자랑하지도 말것이며 자만하지도 말일이여. 한 생의 흥망성쇠는 순간이고 지나고나면 허무함만이 남을뿐 아니겠어?. 일장춘몽이란말여. 아무것도 아닌것이여,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것이여......
그리고 우리네 욕심이란 한이 없어서 그 끝을 무작정 좇다보면 정작 내가 살아 생전에 해야할 일들은 줄줄이 남아있는데 기껏 해놓은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후회로움뿐인것이여.
지금, 가지고있는 나의 것이 가장 소중하고 큰것이라는 지혜의 눈을 서둘러 떠야해여.
흔히 하는 말로 " 있을때 잘 하자는 것이여 " 자신에게, 가족에게, 이웃에게,
그 가운데 다 들어있지만 우리 모교와 동창들에게도 말이시 ..................... 우선 동문회 연회비부터 내면서 말여. 올해부터라도 하잔말여.
그 옛날의 소리가 들리는듯 하구먼. 뒤에 동일아파트가 보이고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정말 찌들어 없는 사람들만이 남아 있었어.
지금도 연탄보일러 아궁이가 자연 스럽기만허구.
올챙이적 생각못하고 나는 지금 대궐생활을 아파트에서 하면서도 왠 불평은 그리도 많은건지. 어르신들 말씀 하나도 안틀려. 아래를 보라고말여 . 간사스런게 사람네 마음이라구말여...........
저 끝에 대한제분 새로지은 건물이 보이는구먼. 30 년전 그 시절에는 허연 양옥건물이었었는데 -
우리 친구중에도 핵교졸업하구 저기 들어갔다가 그만둔 친구 있다고 드었는데.. 누구든가 ? 하기야 어느 구석에는 없었겠어? 야꾸샤 , 기방 만 빼놓고 말여.
영종- 월미도간 운항하는 디게 큰배에도 선장, 기간장 ,된장, 간장 다 우리 동창들이 주룸잡았대잖여. 인천 중구청, 인천시청, 관세청, 또 뭐시드라 거기에도 우리동창들이 백혀있대야.
사실 자랑이 아니라 학교다닐때 대학공부하니라고 밤잠 안자던 친구들 말안해서 그렇지 많았어 야. 이름도 댈수있어. 한 40 % 정도는 되얐지. 아마. 아니문 말고.
어찌 되얐든 저 대한제분 공장은 우리 핵교다닐때 머리속에 깊히 입력 되얐었지.
저 출입구로도 핵교를 걸어 댕겼고 - 그땐 웬만헌 친구들은 모두 걸어다녔자녀.
일명 래드 비치, 한미해병연합군이 1950년 9월 15일 새벽 냅다 대포바짝치켜세우고 디민곳이여.
그때 참 대단했다지. 우리 동창들도 그때 월미산전투에 참가했었잖여. 월미도 탈환하문서 친구들 3 명 전사했었든가 ? 가마이써봐. 그건 을왕링가 ? 이젠 가물가물 해서.....
아무튼 그때 먼저 간 우리 친구들의 명복을 빌뿐이여. 내 옆의 화수동 살던 짝도 그때 먼저 갔어..... 나 그때 많이 울었어, 정말이여.
이제 생각해보면 , 모두가 진지하게 참가하여 일어난 일이니께 누구도 원망할일은 아니라고 생각혀. 나는.. 그들의 고귀한 생, 우리 모두가 대신 잘 살아주자말여. 그게 그들을 위한 지금 우리의 최선 아니겠어?
바로 이 갯골이었어. 이리루해서 대한제분쪽으로해서 자유공원으로 냅다 치고 올라갔다지. 바다에서 비오듯 쏘아댄 포탄으로 송월동, 북성동, 신포동 자유공원 주변은 다 콩가루기 되었다지. 거기뿐이겠어 ? ............
기억을 더듬어서 그려본 거여. 한번 옛날 군대있던 생각허문서 지나간 인천상륙작전 전쟁 시나리오를 그려봐봐 .
저끝이 월미도이고 저끝에서 오른쪽으로 20 m 가면 우리학교가 있잖여. 그때 저쪽 끝에서 찍어논 사진이 있지. 다음 장에서 보여주지.
그건 그거고, 이길 말여, 이길을 우리 친구들 아침저녁 걸었잔여. 가방들고 말여.
오늘 혼자 걸으며 그때를 회상해보니 감회가 새롭더라고. 그게 어느새 30 년이 지났으니 말여.
중구의 마스코트 일명 " 월디 " 를 모형으로 가로등이 가로변에 길게 늘어서 나를 반기고 있구먼.
월미도를 주축으로 신포동, 연안동, 차이나타운 을 한 블럭으로 월미도관광특구가 만들어졌지. 저거봐. 한번 와보래잔여.
인천 중구지역도 이젠 볼거리도 꾀 많더라구. 회식모임있으믄 신포동, 월미도, 연안부두에 와서 해봐. 옛날을 추억하며말여. 좋다니께.
여기 기억나지. 불조심이라고 붉은 벽돌집에 크게 허연글씨로 써붙힌 창고말여. 이게 무슨 솜 창고락 했든가? 기름 , 까스 창고락 했든가.....
매일 오가며 불조심 공부는 참말로 많이혔지. 와도 가도 불조심 아니였냐고. 그 공부 덕에 친구들 집에 불났다는 말 아직 읍썼잔여. 정말 교육은 중요한거여. 그중에서도 인성교육은 정말 중요헌디 그건 밥상머리교육에서 시작혀야되고 종교교육에서 끝내면 아주 안성맞춤이지. 그란디도 모자라는 놈년들이 지들이 자식들 잘못가르친것은 생각못허고 선생님들만 탓해여.
속쌔기는 새끼들 있으문 한번 새로 시작들 혀봐. 자식농사가 최고여.
돈? 그거 자식농사 잘못지으면 몇조금 못가는 겨. 내 거동못헐때 지멋대로 제대로 배우지못헌 酒色과 事業 지랄허문 혼자만 속으로 끓다 죽게되는기여. 지금 거동헐수있을때 잘 처신혀라구말여. 자식은 돈이 다라고 생각허구 물려주면 한조금 넘기기힘든거여. 잘들 허여.
저 멀리 하얀간판이 한진그릅 간판이지. 그리고 파란색 컨테이너가 덮혀있는곳이 그옛날 한진그릅이 월남서 고철모아다 쌓아논 곳이였잔여. 트럭망가진거허며 하여간 전세계 전쟁터에서 각종 망가진 고철은 다 모여있었어. 우쨋던 그때 월남이 우리나라에는 효자긴 효자였어.
경부고속도로허며 말여...
자. 여기가 아까 저쪽에서 보았던 월미도 끝이여. 이 다리 양쪽은 바다였고 멀리 보이는 건물들은 구녕이 숭숭나서 엉망이었다잔여.
이 앞에서 총을 설치하고 경비하던 그 위치여. 실감이 나지?
왼쪽으로는 이제 우리학교가 바로 옆이구먼. 그런데 웬 검정 방진막이 벽으로 높게 설치되어 있더라고. 그 이유는 가까이 가서야 알았지. 한달만 더 일찍와 보았어야하는건데 아쉬웠어. 그 이유는 다음장에서 다시 말허기루허구.
월미공원 입구에 웬 플래카드가 붙어있더라고. 옛날에 이곳 월미도에 어민들이 살았다는것을 알고는 있었는데 이곳이 그분들 다시 들어와 살게 해달라고요구하는 농성장이더라고.
그냥 그분들의 의사를 기록해보았어. 무슨 소린지 한번 들어보면 월미도역사를 기억하는데 참고가 될수 있겠지.
이분들에게의 답은 나랏님이 법으로 처리혀시것지뭐.
학교정문에 들어서니 대한제당 복장을 한 경비아자씨가 기자아자씨냐구 막더라구. 그래서 아니라구허구 내 월미산 전투특전부대 41 군번이라고 일사천리로 말허구성 여차여차허니 야차야차혔으문 좋캈다고혔드니 건물안은 다들 명절세러가서 잠갔구 밖에서나 들러보구 갔으문 좋캈다고 허드라구.
고맙다고허구 행허니 둘러보았지. 달밤에 체조허듯 혼자서말야.
정문을 들어서며 생각해보았어. 그 옛날 아침 학교갈때 이 정문에서 수도없이 머리에 ,옷에, 모자에, 명찰에 걸렸잖여. 장발머리도 많이 깎였지. 아마 아직도 비오는 밤에는 여기서 귀신 날꺼여.
난 나팔바지 입고 어느날 박의0 선샘에게 걸려들었는데 그날 빤쓰입고갔으믄 영락없이 빤쓰바람에 운동장 돌뻔했지. 바지 벗으라구해서 훌렁 무릅까지 내렸드니 내 물건이 탐스럽게 생겨서 그랬는지 아니믄 팬티를 안입어서 그랬는지 흐믓헌 표정으로 바라보시믄성 " 걷어올리고 교실로 가 " 허시드라고.
아마 내 거시키가 탐스러워서 그러셨을꺼여. 난 지금까지 그날을 흐믓허게 기억허고 살고있어. 내멋에 산다잔여. 그 다음날부터는 내 용체 보호허느라구 빤쓰는 꼭 챙겨입었어.
빤쓰 얘기 나왔으니까 말이지 야. 그때 여자빤스 사서입구다니던 칭구들 여럿 있었잔여. 여자들 빤쓰 참 편하다문성?. 보드랍고 - 나두 한번 사입어보고 싶드래니께. 근데 내가 본디 숙기가 읍서서 시장가서 돌다가만 왔었어. 남새스러서 말두 못끄내구말여. 그때 유행혀서 훔쳐입거나 사입은 친구들 이름까지 내가 알고있다고. 점잔들 떨지말라말여. 솔찍허라고 .
저 3 층에서 1 층까지 나의 흔적이 남아있을텐데.... 들어가보고 싶더라고.
운동장은 야적장에, 주차장에 빈틈이 없고 -
이곳이었어. 아까 들어오며 검은 방진막이 높게 쳐져있던 이유를 말여.
하얀건물에 1 층은 실습실이었고 2 층은 교장선생님 사무실이 있었어. 이 건물이 최근에 철거되었더라고. 아쉽더라고, 사진이라도 남겨두어야하느건데말여.
기우뚱 넘어져가는 나무만이 늦게 찾아온 나를 탓하고있는듯이 보였어.
3 학년때였지. 졸업을 몇달인가 남겨놓고있을때 박의0 선샘께서 친구들 머리에 고속도로를 내놓으셨잔여. 그때 이곳 근엄하신 이영발 교장선샘실을 목전에두고 몰려가 통곡을허며 꺼이꺼이 농성했었지. " 악덕 교사 물러가라 , 박 00 는 물러가라 " 고....... 지금 생각허믄 참 철없는 일이었잖여? 얼마나 선샘께서 우리를 사랑허셨으믄 몇달 있으믄 떠날 우리에게 채칙을 대셨겠느냐말여.
지금은 머리 기르라고 혀도 구찬아 잘라버리잔여.....
이제 자식들도 다 그 당시의 우리 나이 이상 커서 내가 그 선생님이 되어 내 자식을 바라보곤하지. 내 자식도 이제는 마음대로 못허는데 그 선샘의 용기는 정말 우리를 진정 사랑허신모습이었어. 감사드려야할 선생님이여.
박의하선생님, 안봉주선생님, 안교영선생님, 이형숙선생님, 등등 모두 ..... 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신 고맙고 훌륭한 선생님이셨어.
이곳은 학교 뒷편 산과 접하는 기슭이야. 기억나나? 우리학교는 전국유일하게 땅속에서 기름이 나던 그 유명한 産油校 였잔여. 바로 이곳 비탈에서 기름이 흘러 아래 골창으로 노랗게 흘러 모였지. 매일말여. 인근에서 아침이면 기름을 퍼가려고 주민들이 모여들기도 했었어.
알고보니 미군부대에서 시설한 기름탱크에서 새나온 것이었다지. 3 년 내내 나왔으니까 그덕에 돈번사람 있었는가 모르갔어..... 워낙 그나라 부자나라이니께 뭐 그 정도야 고시래떡이지 뭐.
이곳 이었어. 미근들이 껌씹으면서 " 기브미 쵸코렛" 하문 "야스 " 허문서 2- 3 개 던져주곤 했잔여. 한국군인 카츄사와 함께도 있었고 - 매일 울타리넘어 우리 학교 뒤를 경계하고있었어. 당시 북한괴뢰군을 지키는건 아니었을꺼고 뭐 그 쥐새끼들 그런거 지키고있었을꺼야 아마. 그때 한통속이 되어 돈번 쥐들도 많이 있었다고 듣곤했었어. 뭐든 미제는 그 당시 품질이 상대적으로 좋았고 뭐든 받아주었으며 제값을 받기도했어. 동인천 양키시장의 번성기가 그 시기까지도 이어졌잖여.
들어가 보려했으나 모두 사용한지가 몇년되어서 폐허가 되어있더라구.
저 철망은 여전허고..... 보이는 허연건물이 우리학교 뒷부분이여.
학교뒤에 그전부터 보이던 고목과 작은 건물, 가보니 천주교 종교예식이 이어지던 성당이더라구. 해군부대가 나가면서 모두 철거되었고 폐허로 변했더라구.
하지만 저 오래된 나무는 뒤에서 지켜보아 다 알고있겠지. 우리 학교가 이어져온 그날 그날들을 ....... 그리고 그 언제인가 이곳에서의 마지막을 고하고 저 멀리 연수동으로 이사하던 그 날을 ....
천주교 건물벽에 남아있는 이 기도문을 보면서 이건물의 내력을 알수있었어.
싸이랜이 불면 군인들이 우루루 몰려가던곳, 알고보니 우리학교 바로뒤 이곳에 대피소가 있었어.
대피소에서 우리학교를 바라보았어. 생각했어. 아직 저 건물이 우리학교라면 더 좋지않았을까하고말이여.
우리학교뒤 정상, 2004년 10월 5 일 해군 2 함대가 잔류병력을 최종철수시키면서 기념물을 만들어 놓았더라구. 미군부대에 이어 해군이 주둔하다가 결국 철수하고 개방된거여.
내용은 이글로 설명을 대신헐껴 -
이건 씨스카우트 기관과 문병철 이었었지 아마.
그때 참 우리핵교 씨스카우트대원들 대단했지. 각종 지역행사에는 불려다녔고 그 헬리콥타돌리기는 정말 일품이였어. 30번이고 10 번이고 말여. 그리고 또 행사끝나고나면 그 몽댕이 전투용으로도 잘 쓰였잔여. 자유공원전투, 숭의동전투, 완승이었지 뭐. 숙달된 곤봉솜씨로 훼훼 돌리믄 다들 도망가기바빴잔여. 무적수고였지 야.
다른야기지만 럭비팀은 또 얼마나 대단혔냐? 인천을 훼 갈았잔여. 지금은 다들 뭐 하시는지 ... 우리 그 동문님들 말여.
뒤에서 3 번째가 나였어. 그전에 나도 정말 대단했어. 무적 방위군으로 말여.
경비정이 여기까지 들어왔네. 어로과 인석 이가 있었으믄 한번 끌고 나가는건데.... 난 잡아온 고기 통조림밖에는 헐줄 몰라서 배앞에서는 송장이거덩.
206 함이면 이건 미사일함이냐? 아니면 통발이배냐? ....
우리학교뒤 산기슭에 웬 흔적이 남아 있더라구. 내가 누구야. 한번 눈에 보이면 그냥 못넘기는 나 알잖아. 냅따 가 보았지.
눈도 어둡고, 영어는 밤에 배워 낮에는 잘 모르지만 1960 년도에 미군 어느부대가 주둔했었다는 기념표식을 그들이 철수하면서 만들어 논거여.
선듯 생각해냈어.
우리도, 우리도 말여. 월미도 학교인근 어디엔가에 표지석하나 만들어 후대에 기념으로 남기던가, 아니면 기념식수하나하던가해서 추억으로 남겨두었으면 어떨까 하는것말여.
역사라는건 말여. 역사는 있는 그대로 의미가 있고 우리가 거기에 서려있고 그래서 소중한 것잉께 말여. 그래서 우리들 마음속에도 깊히 심어두어야하는것이고 남겨놓아야허는것이고말여. 과거없는 현재가 어디 있겠냐구. 뿌리는 항상 소중한 나의 버팀이라는거 생각할 필요가 있다구, 정말이여.
그러나, 이 문제는 긴 숙제로 남겨놓아야지. 이건 심사숙고하고 모두의 정성된 마음이 모이지않으면 의미없는일일뿐더러 한때 장난으로 끝나고마는것이여. 역사는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있잔여.....
저분이 공자님이여.
저어른이 말씀허셨지. 五十而知天命 이라구말여. 50 세에 가서 천명을 알게되었다는,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그러고 봉께 우리가 지금 그나이 일쎄 그려. 남은 생이 얼마남지않은 오후 3 시경의 그 나이말여. 생각헐수록 안타깝고 통탄헐일이여. 세상에 내놓을 그런일 하나 아직 내놓지못허고말여.
헛살았다는 말이시.
우리학교 교훈이 그날이나 오늘이나 誠(정성성)實(열매실)이잔여.
그말이 그말이여. 내실이 있어야 한다는거여.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는거여.
그게 바로 하늘의 뜻이고 그것을 실현해야할 나이가 되얏다는 거여. 우리가 말이여. 그옛날 천방지축 깨불고 부모님께, 선샘께 속쌕이든 우리가 말이여.
떡본김에 지사지낸다구
여기까지 온길에 최근에 새로만들어논 월미산전망대도 한번 들러 본후 집으로 향했어. 나를 바라보면서말여.
너, 이제 나이 50 이 넘은 " 진백" 이는 지금 남은 생을 잘 살아가고 있는거냐고 물으면서 ...
이 글을 먼저 우리곁을 떠난 동창 병훈이를 비롯한 몇명의 친구들 영전에, 그리고 이제는 남의 집이 된 월미도 옛 우리 모교 터에 묻습니다. |
출처: 허허벌판 원문보기 글쓴이: beolpan
첫댓글 진백아 대단하다 기억력도 그렇고 글솜씨등등 말이야 고인이된 친구들에게 그리고 우리모두에게....
정: 정말로 재밌다. 진:진짜로 옛날 생각난다. 백:백번 옳은 말만 썼구나. 진백이 덕에 병수 철 들었다. 고맙다.
진백아 자료수집하고 글올리느라고 고생많이 햇다 너로인해서 옛추억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됫다 고맙고 수고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