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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하여
성경본문 : 로마서 11장32절-36절
설 교 자 : 박 한 서 목사 <2015년10월18일 주일 오후>
사랑하는 행복 가족 여러분 !
본문 <로마서>11장 32절 말씀은 지금까지의 결론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것의 결론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11장25절 말씀이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받은 자의 수에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어떤 것을 하시기 위하여
어떤 것을 잠시 기다리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문 <로마서>11장 32a절 말씀은
<로마서>1장 18절-3장20절의 간단한 요약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로마서>1장 18절-3장20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었다”는
것에 대하여 말했다는 것입니다.
순종치 않은데 가두어 두었다는 것은
그들을 구원 했다는 것인가?, 아직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아직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죄인의 상태입니다.
여기에서 “가두어 두었다”는 말은
슁클레이오(συγκλειω)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KJV - concluded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 모두를
불순종의 사람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불순종의 자식이라고 낙인을 찍었다는 것입니다.
RSV - consigned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 모두를 불순종에 맡겼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의 번역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러면 이런 말을
<로마서>1장 18절-3장20절 어디에서 했는가?
<로마서>1장 28절 말씀에
28절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 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이것이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불순종에 가두어 두었다는 것은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
그들을 불순종에 가두어 두십니다.
이 상실한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못한 일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한 자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중에 회개하지 아니한 자들도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차별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로마서>11장 32b절
32b절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 로다”는
<로마서>3장21절-8장39절의 요약입니다.
그러면 <로마서>3장21절-8장39절에서
사도 <바울>은 무슨 말을 했는가?
<바울>은 여기에서
의롭게 하시는 일(justification)과
구원하시는 일(salvation)에 있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mercy -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즉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로마서>11장 32b절 말씀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 얻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1장18절-3장20절에서는
<유대인>의 불순종이나, 이방인의 불순종을 똑같이 다루었습니다.
즉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똑 같이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정죄하는 문제를 이야기 할 때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을 똑같이 정죄했으나,
그러나 구원하는 문제는
<로마서>3장21절-8장34절에서 다루었는데,
여기에서는 구원의 문제를
<유대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다루지 않았습니다.
즉 <로마서>3장21절-8장34절에서는
이방인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었고,
유대인의 구원의 문제에 대한 부족한 부분은
<로마서>11장 9절-11절)말씀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3장21절-8장39절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이것을 은혜(grace)라고도 이야기하고,
사랑(love)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로마서>11장9절-11절)의 목적은
이 긍휼은 모두에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베푸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긍휼은 이방인에게만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유대인>에게도 베푸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로마서>1장16절에서는
복음이 구원을 주는 능력이 되는데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다음은 <헬라인>에게 라고 했습니다.
즉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유대인>에게 먼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문제를 다룰 때는
이방인의 구원을 먼저 다루고
다음에 <유대인>의 구원을 다루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참고 성경 본문<로마서>11장32절)
구원을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는가?
(참고 성경 본문<로마서>11장32절)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본문<로마서>11장32절에서 말하는
“모든”은 누구를 이야기 하는 것인가?
① 본문<로마서>11장26절을 보면
유대인의 구원 얻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오직 <유대인>만 구원 얻기를 원하시는가?
② (참고 성경 본문<로마서>1장16절)말씀을 보면
<유대인>과 <헬라인>이 구원 얻기를 원하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③ (참고 성경 본문<로마서>11장13절)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라면 이방인이 구원 얻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참고 성경 본문<요한복음>3장16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 하실까요?
여기에서 생기는 문제는
그러면 사도 <바울>은 온 인류는 결국은 전부 구제 받는다는
보편 구제설(universalism)을 믿었느냐는 것입니다.
보편 구제설(univeralism)은 -
결국은 전부가 구원 받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로마서>11장11절 말씀만 가지고 대답을 하면
사도 <바울>이 보편 구제설을 이야기하려고
했다는 대답을 피할 수 없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신학을 보면
이 보편 구제설에 어울리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직 은혜로만(pure grace)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참고 성경 본문<로마서>3장24절)
이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예정설로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참고 성경 본문<로마서>8장29절-30절)
그리고 이 예정설은 보편 구제설로 넘어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도 완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게 됩니다.
<로마서>11장25b절에 나오는 것과 같이
잠시 시간이 지연될 수는 있으나 모든 사람을 구원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리고 긍휼을 모든 사람에게
거저 베푸신다면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겠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의 사상은
자연스럽게 보편 구원설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보편 구제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국에 가서는
마귀들의 세력과 화목 할까요? 아니면 멸망시킬까요?
학자들이 사도 <바울>의
보편 구제 설을 지지하는 근거는 이것입니다.
<골로새서>1장16절-20절 말씀 여기를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1장16절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영적인 권세들도
결국에 가서는 <그리스도>와 화목하게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영들이
<그리스도>와 화목하게 되면
결국은 모든 것이 구원을 얻지 않겠느냐?
그러면 사도 <바울>은
정말로 만인 구제설을 이야기 했는가?
이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1) <바울>은 다른 곳에서는 죄의 실제와 심판을
너무나도 비통하게 의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죄가 있음을 그렇게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으며,
그 죄에 대한 심판을 그렇게 확신하고 있는 자가
어떻게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2) <바울>은 믿음과 불신의 문제를
너무나도 많이 그리고 중요하게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된다면 구원을 얻는 믿음과
구원을 얻지 못하는 불신을 왜 그렇게 강조하겠는가?
3) <골로새서>1장16절-20절 말씀에서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영적인 권세 자들이
<그리스도>와 화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고린도전서>15장24절-26절에서는
<그리스도>는 그런 악마의 세력들과 화목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심판하고 멸망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악마의 종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보편 구제설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로마서>11장33절-36절
이 부분은 지금까지의 <바울>의 주장의 결론입니다.
즉 인생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인생의 결론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본문 <로마서> 11장33절
이 구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다 알 수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왜 <하나님>의 지혜를 다 알 수 없다고 했을까요?
<바울>은 지금까지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어 왔습니다.
즉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참고 성경 <로마서>1장16절)
그래서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을 하고
(참고 성경 <로마서>1장18절-3장20절)
그리고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참고 성경 <로마서>3장21절-8장39절)에서는
이방인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었고,
(참고 성경 <로마서>9장-11장)에서는
<유대인>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것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인류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바로 이 구원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설명을 하다가 말고 갑자기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다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본문 <로마서>11장33절-34절
사도 <바울>이 왜 이 결론을 내렸을까요?
<하나님>의 구원의 문제는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알면
우리와 <하나님>은 동격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 비밀은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설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본문 <로마서>11장36절 말씀에 나옵니다.
<바울>은 본문 <로마서>11장36절 말씀에서
<하나님>을 모든 것의 창조자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이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있겠는가?
<바울>의 이 고백은 <욥>의 고백과 같습니다.
(참고 성경<욥기서>42장3절)
<욥>도 처음에는 <하나님>께 따지고 들었으나
나중에는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이것을 깨달다는 것이 인간의 최고의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로마서> 11장34절
이 말씀은
<이사야서>40장13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가(道家)의 노자(老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불변의 도가 아니요,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이름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안다면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만도 못한 우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모사가 될 수 없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했을까요?
오늘날도 <하나님>을 가르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즉 자기의 생각에 <하나님>을 맞추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본문 <로마서>11장35절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복을 받기 위하여 드리는 것일까요? 아닐까요?
이것은 (참고 성경<욥기서>35장7절.41장11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것은 적절한 인용이 아니라고 합니다.
물론 내용적으로 얼핏 보면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뜻은 분명합니다.
본문 <로마서>11장35절을
<욥기서>35장7절.41장11절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살펴보면 이런 뜻입니다.
본문 <로마서>11장35절에서 중요한 말은
① 먼저 ② 갚으심을 받다 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 중에
우리 것은 하나도 없고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은
먼저 우리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이 그 대가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을 감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는
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다음 본문 <로마서>11장36절에서
나오는 논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본문 <로마서>11장36절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①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가 되신다.(creator)
②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신다.(source)
③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유지자가 되신다.(sustainer)
④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목표가 되신다.(end)
<바울>은 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요?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까지 유지하시는 것을 볼 때
그 지혜는 우리가 알 수 가 없습니다.
본문 <로마서>11장33절
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지혜에 영광을 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비록 우리가 구원을 이해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지혜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지혜 떄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참고 성경<시편>73편16절-17절)
믿음으로 성소에 들어가서 알게 되었습니다.
즉 구원의 비밀은 믿음으로 순종할 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우리가 이해하고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본문 <로마서>11장35절 말씀에 나오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이 그 대가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도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로 먼저 가르쳐 주실 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믿음으로 순종할 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알고 믿는 종교가 아니라,
믿고 순종함으로 알게 되는 종교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