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직필(洪直弼, 1776 ~1852) 찬(撰)
군자의 행실이 평소 환난(患難)에 처하여도 그 바름을 잃지 않음은 오직 죽음뿐이다. 마땅히 죽어야 할 때에 죽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덕이 완전해지니, 이를 일러 ‘죽음이 태산(泰山)보다 더 무겁다’라고 한다. 또 시기로 보면 반드시 죽어야 하나 처지로 보면 굳이 죽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으며, 삶을 구하기 위해 인(仁)을 해치지 않으나 사는 것이 죽음보다도 더 어려운 경우도 있다.
혹은 살고 혹은 죽는 것이 길이 다르나 같은 곳으로 돌아가니, 요컨대 의가 지극한 바를 다하여, 난을 당하여도 그 바름으로써 행함은 똑같으니, 이와 같은 경우는 진실로 어디로 들어가던 반드시 스스로 만족하게 된다. 옛날 장릉(莊陵,단종을 말함)과 광릉(光陵,세조를 말함)의 시대에 옛 임금을 위해 죽은 자가 전후로 수백 명이지만, 이중 사육신이 가장 이름이 드러났다.
그러나 몸을 온전히 보존하고 그대로 생존하여 곤강(崑岡)의 불길에 해(害)를 입지 않았으나, 능히 철석(鐵石)과 같은 곧은 충정(衷情)을 지키고 송백(松柏)과 같은 고조(苦操)에 힘써서 솥과 가마[鼎鑊] 보기를 마치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편안히 여기며 삼족을 멸하는 형벌을 범하면서도 근심하지 아니하여 사육신과 몸은 다르나 그 마음은 똑같은 분들이 있었으니, 바로 이른바 생육신(生六臣)이다.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원호(元昊, 號는 觀瀾) 선생이 바로 생육신 중의 한 분이시다. 선생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의 변란이 있음을 알게 되자 병을 핑계로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로 돌아갔는데, 단종께서 나라를 선양(禪讓)하고 영월(寧越)로 가시자, 선생 또한 영월부의 서쪽 사라평(沙羅坪)에 집을 짓고 은둔하였다.
집 앞에 두 물이 합류하고 그 물가에 석벽(石壁)이 우뚝 서있는데, 선생은 바로 그 자리에 대(臺)를 짓고 또 대 옆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관란(觀瀾)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묵묵히 조종(祖宗)의 의리를 붙인 것이다. 매일 새벽마다 정자에서 대로 나아가 행재(行在)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울음소리를 삼키며 흐느끼다가 해가 지면 돌아와서, 비바람이 불고 춥거나 덥다고 하여 그만두지 않았다.
향리에 청상과부가 있어 날마다 냇가에서 솜을 빨았는데, 갈 때마다 선생이 냇가에 나와 있었다. 과부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사연을 묻자, 선생이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열녀(烈女)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오. 나의 임금이 지금 영월에 계시기 때문에 나와서 미인(美人)을 바라보는 회포를 펴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 과부가 울며 말하기를 “천첩이 불원간에 개가(改嫁)할 예정인데, 흐르는 물에 나와 옷을 빨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천첩이 비록 비천(卑賤)하나 공의 말씀을 듣고 자연히 감격하게 되니, 차마 개가를 결행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고, 끝내 눈물을 비처럼 쏟았는데, 이 과부는 수절(守節)한 채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정축년(丁丑年)의 변란에 선생은 방상(方喪) 삼년복을 입었고, 이후 앉을 때에는 반드시 영월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앉고 누울 때에는 반드시 머리를 동쪽으로 누우며 지냈는데 마침내 호정(戶庭) 밖을 나가지 않다가 삶을 마쳤다. 나는 영월을 유람하던 중에 이 일을 매우 자세히 알게 되었다.
고택이 허물어진 것이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원선생의 유허(遺墟)는 여전히 전해온다. 오래된 바위는 푸르고 수려(秀麗)하며 그림자가 물속에 잠겨 있었다. 상상하건대, 선생의 영령(英靈)이 혁혁하게 정자와 대와 숲과 골짝 사이에 계시어 구름을 타고 바람을 몰고서 아침마다 선침(仙寢)에 조회하여, 사육신과 함께 주구(珠丘)의 옥난간 곁에서 나란히 단종을 모시고 있을 것이다.
아, 동시대의 동봉(東峰)과 추강(秋江) 제현이 신체를 훼손시키고 세상에서 도피하고 산에 올라 고사리를 캤으나, 이는 모두 위포(韋布 벼슬하지 않은 미천한 선비)의 젊은 분들이었으니, 그 출처(出處)와 행장(行藏)이 자신에게 달려 있고 남에게 달려 있지 않았다.
선생과 같은 경우는 이미 현달한 벼슬에 올라 아름다운 명성을 날렸는데, 병자년(丙子年)의 사화(史禍)에 같이 죽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좁은 길에 궁색한 행보였는데, 스스로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능히 기미를 보고 일어나서 하루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았고 이어서 남몰래 형만(荊蠻)으로 가는 행차를 따라가 해와 달의 광명을 바라보고 의지하여 스스로 군주가 있는 곳에서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폈으니, 이는 이른바 멀리 있어도 임금의 뜻을 어기지 않고 죽어도 나라를 잊지 않는 분일 것이며 평탄한 길을 가든 험한 길을 가든 절개를 한결같이 하는 분일 것이다.
사육신의 죽음은 부득이한 것이요 선생의 삶 또한 합당한 것이니, 그렇다면 죽음이 진실로 삶보다 무겁지 않고 삶이 또 죽음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이는 모두 그 심중에 진실한 이치를 얻은 것으로 하나의 옳음을 성취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사육신이 일시(一時)에 순국한 것은 바로 이른바 비분강개하여 몸을 죽인 것이요 선생이 몸을 숨기고 자정(自靖)한 것은 바로 이른바 조용히 의를 취한 것이니, 선생이 행하신 바가 더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천지가 변화하더라도 자신은 그 바른 이치를 얻었으니, 어찌 진정한 대인이 아니겠는가.
시골 아낙이 지극히 무지하였는데도 선생의 한마디 말씀을 받아들이자마자 곧바로 선심(善心)을 내어 개가를 앞두고 스스로 뉘우쳐 한결같은 절개를 완전히 하여 다른 뜻을 갖지 않았으니, 이는 진실로 공의 성기(聲氣)를 듣고 감동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남의 마음속에 깊이 들어가서 남을 빠르게 교화시키는 것이 거의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빠를 뿐만이 아니니, 이는 아마도 말로써 하지 않고 실천으로써 하여서 일 것이다. 아, 계유정난을 일으킨 여러 신하들이 혹시라도 이 과부의 행실을 들은 자가 있었는가. 일찍이 조정의 군자라는 분들이 하읍(下邑)의 천한 아낙만도 못하단 말인가.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김창효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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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觀瀾亭記 - 庚辰(1820년(순조 20)
君子行。素乎患難而不失其正者。死而已。當死而死則心安而德全。是之謂有重於泰山也。亦有以時則必死。而以地則不必死。不求生以害仁。而生有難於死者。或死或生。殊塗而同歸。要盡其義之所至。而蒙難以正則一。是固無入而不自得者也。粤若莊 光之世。爲舊君死者。前後數百人。而六臣最著焉。有全身自在。不被崑岡之炎。而能守鐵石之貞衷。勵松柏之苦操。視鼎鑊其如歸。蹈參夷而不恤。與六臣異體而同腸者。卽所謂生六臣也。集贒殿直提學元先生昊。乃生六臣中一人耳。先生知有靖難之變。謝病歸鄕。逮端廟遜國于越。先生亦竄身於越之府西沙羅坪而宅焉。前臨二水合流。有石壁特立于其上。卽其地而臺焉。又亭于臺傍而曰觀瀾。默寓朝宗之義。每晨自亭而臺。東望行在。呑聲歔欷。隨日而入。不以風雨寒暑而輟焉。里中有孀婦。日洴澼于川邊。每往先生已出臨矣。其女怪而問。先生泫然曰烈女不更二夫。忠臣不事二君。吾君方在越中。故出而展望美之懷耳。其女泣曰妾將不日改適。臨流浣衣者。卽爲此也。妾雖卑賤。聞公言自然激感。不忍爲此行。遂泣下如雨。全節以畢生云。逮丁丑之變。先生服方喪三年。坐必東向。卧必東首。遂不出戶庭而終焉。余遊越中。得其事甚悉。屋毁已久。而尙傳爲元先生遺墟。老石蒼秀。蘸影于水心。想像先生英靈。赫赫在亭臺林壑之間。乘雲御風。日朝于仙寢。與六臣者列侍珠丘玉欄之傍也。嗚呼。幷時之東峯秋江諸賢。毁形以逃世。登山以採薇。而俱是韋布少年耳。其出處行藏。由己而不由人。若先生者。已登顯仕。蜚英聲矣。旣不同死于丙子之禍。則窄逕窘步。不自蹎跌者。斯已難矣。而用能見幾而作。不俟終日。因之潛隨荊蠻之行。瞻依日月之光。自伸其所在致死之義。是所謂遠不違君。死不忘國者歟。經夷險而一節者歟。六臣之死。死非得已。先生之生。生亦得所。然則死固不重於生。生且無愧於死。俱得實理于心。而成就一箇是而已。然六臣之一時殉國。卽所云慷慨殺身。先生之沒身自靖。卽所云從容取義。如先生之爲者。詎不尤難哉。天地變化而我得其正。豈不誠大人哉。村婦至無知也。纔服一言。卽發善心。臨再嫁而自悔。完一節而靡他。苟不固得聲氣之相感者。孰能與此。其入人深而化人速者。殆影響不翅。其非以不以言而以身歟。嗚呼。靖難諸人。或有聞此寡婦之行者乎。曾謂朝廷之君子。不如下邑之賤女乎。<끝>
매산집 제28권 / 기(記)
관란선생 묘소 /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 산72번지
●원호(元昊)
[생졸년] 1396년(공민왕 8)~1463년(세조 9) / 향년 67세
조선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자허(子虛)이고 호는 관란(觀瀾), 무항(霧巷)이다. 1423(세종 5)년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으나, 1453(단종 1)년 계유정난이 일어나 단종의 숙부 수양 대군이 권력을 장악하자 고향 원주에 은거하였다.
1457(세조 3)년에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영월 서쪽에 관란재(觀瀾齋)를 짓고 단종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지내다가 단종이 살해된 후에는 원주에 칩거하며 세상과 접촉을 끊었다.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