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송도남(宋圖南)
[본관] 진천(鎭川)
[문과] 광해군(光海君) 7년(161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3위(06/33)
[생원] 광해군(光海君) 1년(1609) 기유(己酉) 증광시(增廣試) (生員) 1등(一等) 4위(4/100)
[생졸년] 1576년(선조 9)~1627년 (인조 5) / 향년 51세
[거주지] 한성([京])
조선 후기에, 병조좌랑, 의주판관, 증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진천(鎭川). 자는 만리(萬里), 호는 서촌(西村). 송세증(宋世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하(宋賀)이고, 아버지는 봉사(奉事) 송응일(宋應一)이며, 어머니는 박응현(朴應賢)의 딸이다.
1609년(광해군 1) 생원시에 합격, 활인서별제·의금부도사를 거쳐 1615년에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근무하였다. 그 뒤 병조좌랑으로 있을 때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한때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뒤에 강원도도사를 거쳐 의주판관에 임명되었는데,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이 때 이조에서는 변방고을에 부임함을 꺼린다고 하여 탄핵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영유현령(永柔縣令)으로 부임하였다.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後金)의 군대가 침입하자 안주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손자 송정필(宋廷弼)의 요청으로 정표(旌表)가 세워졌으며, 숙종 때에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으며, 영조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뒷날 전공이 크게 인정되어 시호를 충민(忠愍)이라 내리었고, 자손도 서용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증 예조 참판 송공 신도비명 병서(贈禮曹參判宋公神道碑銘 幷序)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한 지 5년째 되는 정묘년(丁卯年, 1627, 인조 5)에 오랑캐에게 항복한 장수 강홍립(姜弘立)이 오랑캐를 끌어들여 침입하자, 의주(義州)와 안주(安州)가 차례로 무너졌다. 이때 송공 도남(宋公圖南)이 영유 현령(永柔縣令)으로 있다가 전사하니, 조정에서는 그 충의를 기리고 숭상하여 예조 참판을 추증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하였으며 3년 동안 녹봉을 지급하였다.
숙종 을묘년(乙卯年, 1675, 숙종 1)에 정려(旌閭)하도록 명하였으며, 임술년(壬戌年, 1682, 숙종 8)에 평안도 관찰사 이공 세화(李公世華)의 진언에 따라 안주에 사당을 세우고 당시 국사(國事)에 죽은 여러 사람들을 합향(合享)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충민(忠愍)’이라 사액하고 또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공은 문관으로 절충어모(折衝禦侮)는 그의 소장(所長)이 아니었으나 마침내 분연히 일어나서 인의(仁義)를 방패로 삼았고, 이기지 못하게 되자 들판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여 신하의 적개(敵愾)하는 절개를 바쳐 명성을 천억 년에 길이 드리웠으니, 어찌 굳세고 당당한 열장부(烈丈夫)가 아니겠는가.
공은 평소에 의리를 굳게 지킴이 있었다. 광해군 때에 간사한 정승인 박승종(朴承宗)이 궁중과 결탁하여 기세가 대단하니, 그에게 붙어 있던 자들 중에서 낮은 벼슬로부터 당장에 높고 현달한 자리에 오르는 자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공은 그와 중표형제(中表兄弟)의 가까운 친척이었지만 그를 염병을 피하듯이 하여 끝내 오염된 바가 없었다.
적신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廢母論)을 제창하고 대관(臺官) 정조(鄭造)ㆍ윤인(尹訒)과 유생 이위경(李偉卿) 등이 번갈아 글을 올려 모후의 죄상을 아뢰니, 안팎에서 분하고 원통해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공이 이안진(李安眞) 등과 함께 반대하는 소를 올려서 법에 따라 이들을 주벌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과거에 급제한 뒤에 길에서 흉당을 만나면 번번이 꾸짖어 배척하고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분관(分館)할 적에 흉당들은 공을 교서관에 배속시키고 태상(太常)의 말직을 겸하게 하여 좌절시키고 욕보이고자 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평안도 평사(評事)로 좌천시켰으니, 공이 평소에 수립한 절의가 이와 같았다.
그러다가 영유현(永柔縣)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오랑캐들이 서관(西關)으로 대거 침략해 들어와 안주(安州)에 이르렀다. 평안도 병사 남이흥(南以興)과 안주 목사 김준(金浚)이 당시 머물러 주둔하면서 적을 막고 있으니, 온 도의 수령들이 각기 병력을 인솔하고 일제히 달려갔다.
이런 경우에 문관(文官)인 수령은 의례히 장교(將校)를 대신 보내기 마련이라서 관리가 예전의 규례를 가지고 말하자, 공은 말씀하기를,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큰일이다. 장교로 하여금 대신 군대를 거느리고 달려가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고, 마침내 직접 거느리고 달려갔다.
남공(南公)은 공이 헛되이 죽을 것을 애석히 여겨 매우 강력히 돌아가라고 권하였으나 공은 개연히 말씀하기를, “국난에 임하여 자신의 안위를 잊는 것이 유독 무신들만의 일인가.” 하였다. 남공은 공의 의지가 확고함을 알고 겸종사관(兼從事官)으로 삼아 격문(檄文)을 초하여 오랑캐들에게 유시하게 하였다.
그러자 공은 붓을 잡고 당장 완성하였는데 글 뜻이 격렬하니, 보는 자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남공 또한 희색(喜色)을 보였으나 저들의 노여움을 살까 걱정하여 공에게 약간 고칠 것을 권하기까지 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627, 인조 5) 1월 21일 새벽, 적들이 나무 사다리를 가지고 성을 침범하였다.
남공은 이미 성이 반드시 함락될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성의 남쪽은 낮고 성의 북쪽은 높으니 반드시 남쪽으로부터 함락될 것이라 판단하고, 공에게 북쪽을 지키게 하고 또 철갑옷을 보내 주었다. 공은 철갑옷을 나무 위에 걸어놓고 말씀하기를, “성이 장차 함락되려 하는데, 철갑옷을 입고 몸을 보호하여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처음에 공이 안주로 달려갈 적에 두 아들을 불러 대면하고도 집안일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손수 ‘남아의 사업이 오늘 결판난다〔男兒事業今日决矣〕’라는 여덟 글자를 써서 집에 보내었다. 이날 저녁에 적들이 사다리를 타고 개미 떼처럼 성에 붙어 올라오자, 우리 병사들이 창검을 가지고 대적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잠깐 사이에 적이 이미 성안에 가득하여 사람들을 마구 죽여서 시신이 낭자하였다. 남공과 김공은 일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염초와 유황에 불을 질러 스스로 불타 죽었다. 군사와 백성들이 어지럽게 달아나자 적들이 모두 몰아 어육(魚肉)을 만드니, 항복하는 자들이 서로 이어졌다.
공은 전포(戰袍)를 입고 성 머리에 서서 활을 당겨 적을 쏘고 있었는데, 적이 쏜 화살이 공의 볼에 맞아 피가 줄줄 흘러 얼굴을 뒤덮었다. 그러나 공은 얼굴빛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천천히 차고 있던 패도(佩刀)를 뽑아 옷을 찢어 상처를 싸매고는 죽을 때까지 활을 놓지 않고 싸웠다.
적의 화살이 고슴도치 털처럼 공에게 쏟아져 마침내 성가퀴 위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는데, 겸인(傔人)인 김승리(金承李)와 현속(縣屬)인 위전(韋典) 등이 공의 시신을 수습하여 화살을 가지고 복(復)을 부르니, 향년이 52세였다.
공은 자가 만리(萬里)이고 호가 서촌(西村)이며 계통이 진천(鎭川)에서 나왔다. 먼 선조인 순공(舜恭)은 신라 때 아찬(阿餐)이었고, 본조에 들어와 휘 우(愚)는 좌사간(左司諫)으로 호가 송정(松亭)이고, 증조 휘 세증(世曾)은 사직서 영(社稷署令)이다.
조고 휘 하(賀)는 좌승지로 그 형인 판돈녕부사 찬(贊)과 함께 모두 목묘(穆廟 선조) 때에 명성이 있었다. 선고 휘 응일(應一)은 사섬시 봉사(司贍寺奉事)이고 선비(先妣)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별제(別提) 응현(應賢)의 딸이자 이조 판서 충원(忠元)의 손녀인데, 만력(萬曆) 병자년(丙子年, 1576, 선조 9)에 공을 낳았다.
공은 기유년(己酉年, 1609, 광해군 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계축년(癸丑年, 1613, 광해 5)에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에 제수되었다가 의금부 도사로 전직하였다. 을묘년(乙卯年, 1615, 광해 7)에 문과에 급제하고 천계(天啓)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1)에 인조가 왕위를 바로 세우자 평안도 선유 어사(平安道宣諭御史)가 되었고 강원도 도사에 제수되었다가 체직하고 호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며, 병조 정랑으로 옮겼다.
얼마 후 의주 판관(義州判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는데, 당시 의논이 공이 의주로 부임하는 것을 싫어하여 피한다고 의심하여 의주로 유배되었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기개가 있다고 자부하였으니, 어지러운 세상에 처하여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을 배척하고 관계를 끊은 것은 진실로 당연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좋아져 여러 현자들은 무리지어 조정으로 나갔으나 공은 여전히 문을 닫고 사람들과 교유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공을 아는 자는 적고 좋아하지 않는 자는 많아서 오랫동안 한직(閑職)을 전전하고 간혹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공이 귀양지로부터 돌아와서 우연히 명류(名流)를 찾아갔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자네가 이미 서용(叙用)되었는가?”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내가 만약 서용되었다면 어찌 그대를 찾아왔겠는가.” 하니, 그 사람이 무안해하며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공은 풍모가 훤칠하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활쏘기를 잘하고 문장에 능하니,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공의 격문을 보고 감탄하기를, “송공이 이와 같이 문장에 능하구나.” 하였다.
공은 사람을 대할 적에 너그럽고 공손하며 집안에 있을 적에 엄격하면서도 소탈하였다. 언제나 여러 아들들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죽거든, ‘사람됨이 강하고 꼿꼿하여 남에게 굽히지 않았다’고 묘의 비석에 써주면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아, 둘 다 취할 수 없다면 어물(魚物)을 버리고 웅장(熊掌)을 취하는 것은 진실로 창졸간에 갖출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공이 패륜한 적을 처벌할 것을 청하고 권세를 휘두르는 재상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비록 선류(善類)라도 요직에 있으면 발을 끊고 만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본다면 그 탁월한 의지와 절개가 어찌 후일에 의리를 지키기 위해 순절할 수 있었던 근본이 되지 않았겠는가.
공에게는 아들 셋이 있으니, 장자인 섬(暹)은 일찍 요절하였고 차자 경(炅)과 삼남 민(旻)은 모두 공 때문에 참봉에 제수되었다. 후손들이 자못 침체하여 떨치지 못하였는데, 숙종 말년에 민의 손자인 국위(國緯)가 문과에 올라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얼마 후에 또 그 형 국경(國經)이 뒤이어 급제하여 예조 정랑이 되었다.
공의 장지는 양주(楊州) 축석현(祝石峴)에 있다.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선교랑(宣敎郞) 응하(應河)의 딸로 공보다 7년 뒤에 별세하여 공과 부장하였다. 공의 명예와 절개는 진실로 이미 서책에 밝게 기록되어 있는데 신도비가 아직까지도 세워지지 않으니, 길가는 사람들도 이 때문에 서글퍼하고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지난번에 지평군(持平君)이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명문(銘文)을 청하였는데, 내가 승낙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평군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서글퍼 눈물이 흐른다. 내가 지금 늙고 병들어 글 쓰는 일이 어려우나 돌아가신 분께 어찌 식언(食言)을 하겠는가. 이에 차례로 서술하고 명문을 짓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내 일찍이 고태헌이 군대를 일으킨 격문을 읽어 보고 / 余嘗讀高苔軒起兵檄
번번이 감개하여 벌떡 일어났었네 / 輒爲之感慨而起立
지금 송공이 초한 격문을 보건대 / 今見宋公所草檄
그 충의로움이 늠름하고 열렬하니 / 其忠義凜烈
아마도 고태헌보다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듯하네 / 殆過之而無不及
화이와 역순의 분별을 논한 것이 / 若夫論華夷逆順之辨
또 지극히 삼엄하여 / 又極森嚴
오랑캐들로 하여금 기운이 절로 꺾이게 하였네 / 使虜氣自懾
그렇다면 공의 죽음은 / 然則公之死
비단 우리 작은 나라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 不特爲偏邦
실로 명나라를 위해 대의를 지킨 것이라오 / 實爲皇明大義是執
또한 굳세고 드높아서 굽히지 않는 절개를 / 亦其亢厲不屈之節
평소에 확고하게 지키고 있었으니 / 確秉於平素
이 때문에 국난에 임하여 성취한 바가 / 故臨難所成就
마침내 이처럼 광명하고 찬란할 수 있었네 / 乃若是光明煒燁
아! 공의 봉분 겨우 몇 자이지만 / 嗚呼公之墳封纔數尺兮
그 누가 태산처럼 높게 생각하여 / 其孰不視若泰山之高
우러러보고 공경하여 읍하지 않겠는가 / 瞻仰而敬揖
-------------------------------------------------------------------------------------------------------------------------------------------------
[각주]
[주01] 강홍립(姜弘立) :
1560~1627. 자는 군신(君信), 호는 내촌(耐村), 본관은 진주이다. 1597년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출사하고 벼
슬이 순검사(巡檢使)에 이르렀으며 1618년(광해 10)에는 진녕군(晉寧君)에 봉해졌다.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광해군은 어쩔 수 없이 강홍립을 오도원수(五道元帥)로, 김경서(金景瑞)를 부
원수로 삼아 1만 천여 군사를 출병시키면서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밀명을 내렸다.
조ㆍ명 연합군의 협공에 차질이 생기자, 강홍립은 바로 “조선군의 출병이 부득이하여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남은 군사를 이끌고 후
금군에 투항하였다. 이후 강홍립은 김경서 등 10여 명과 계속 억류당하다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 후금군의 선도로서 들어
왔다.
[주02] 절충어모(折衝禦侮) :
적(敵)의 예봉(銳鋒)을 꺾어 침입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외적의 방비를 맡은 무관의 책무를 말한다. ‘충(衝)’은 성을
공격하는데 쓰는 전거(戰車)를 이른다.
[주03] 박승종(朴承宗) :
1562~1623. 자는 효백(孝佰), 호는 퇴우당(退憂堂), 본관은 밀양이다. 1586년(선조 19)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벼슬
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1612년(광해군 4)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윤인(尹訒)ㆍ이인경(李寅卿) 등이 경운궁에 난입하여 인목대
비(仁穆大妃)를 죽이려 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 저지하였으며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자 극력 반대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아들인 자흥(自興)의 딸이 1611년 광해군의 세자빈으로 책봉된 뒤부터 일족이 권세를 누려온 것을
자책하여 아들과 함께 목을 매고 자결하였다.
[주04] 공은 …… 친척이었지만 :
송도남의 외조부인 박응현(朴應賢)은 박승종의 조부인 박계현(朴啓賢)의 친아우였다.
[주05] 폐모론(廢母論) :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모후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서인할 것을 주장한 의논을 이른다.
[주06] 분관(分館) :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들을 삼관(三館), 즉 승문원ㆍ성균관ㆍ교서관에 분속시켜 배치하는 일을 이른다. 문과 급제자들을 성균관의
박사 3명이 채점하고 이것을 다시 승문원의 도제조(都提調)가 검토하여 점수를 확정해서, 3점은 승문원, 2점은 성균관, 1점은 교서
관에 분속시켜 배치하고 이를 이조에서 왕에게 보고한 뒤 각각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실무를 배우게 하였다.
[주07] 흉당들은 …… 하였으며 :
양반의 자제인 공을 일부러 교서관에 배속시켜 욕보인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문과에서 을과와 병과로 급제한 자를, 신분에 따라 양
반의 자제는 승문원에, 향족(鄕族)의 자제는 성균관에, 서족(庶族)의 자제는 교서관에 나누어 배속시켰다.
[주08] 그러자 …… 탄복하였다 :
이때 송도남이 지은 격문의 개략적인 내용은《포암집(圃巖集)》권22〈현령증이조판서송공시장(縣令贈吏曹判書宋公謚狀)〉에
보인다.
[주09] 둘 …… 것 :
생명과 의리를 둘 다 취할 수 없는 경우에는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함을 비유한다. 이 내용은《맹자(孟子)》〈고자 상(告子上)〉
“어물도 내가 원하는 바요 웅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으면 어물을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으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보
인다.
[주10] 고태헌(高苔軒) :
고경명(高敬命, 1533~1592)으로, 자는 이순(而順), 호는 태헌(苔軒)ㆍ제봉(霽峰),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1558년(명종 13) 식
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벼슬이 동래 부사에 이르렀는데 파직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 좌
도에서 의병을 모아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금산(錦山) 싸움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제봉집》과 각처
에 보낸 격문을 모은《정기록(正氣錄)》이 남아 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사경화 (공역) | 2014
-------------------------------------------------------------------------------------------------------------------------------------------------------
[原文]
贈禮曹參判宋公神道碑銘 幷序。
仁祖反正之五年丁卯, 降帥弘立導虜入寇, 義州、安州相繼崩潰。 宋公圖南以永柔縣令死之, 朝廷褒尙其忠, 贈禮曹參判, 遣禮官致祭, 給祿終三年。 旌表門閭。 肅宗壬戌, 以觀察使李公世華言, 立祠安州, 與同時死事諸人合享之。 事聞, 賜額忠愍, 又遣官以祭。
公文吏也, 折衝禦侮, 非其所長, 而乃奮然而起, 以仁義爲干櫓, 不勝則橫屍原野, 以效臣子敵愾之節, 永垂聲於千億, 豈不亦毅然烈丈夫哉?
公雅有操秉, 當光海時, 倖相朴承宗結奧援, 勢焰薰灼, 諸附麗者繇庳仕, 立登崇顯者相望也。 公以其中表近親, 避之若厲, 終無所點染。 賊臣爾瞻倡廢母論, 臺官鄭造・尹訒、儒生李偉卿等, 交章罪狀母后, 中外憤痛而不敢言。 公與李安眞等, 抗疏請按法誅之。 旣登第, 路逢凶黨, 便叱斥不顧而去。 由是分隷芸閣, 兼太常末僚, 以挫辱之, 尋黜爲平安評事, 其平素所樹立, 已如此矣。
及任永柔, 虜大搶西關, 至安州。 兵使南以興、牧使金浚方留屯以扼賊, 一路守令, 各領兵齊赴。 文宰則例代送將校, 吏以舊例白, 公曰: “兵大事也, 以代將領赴可乎?” 乃自領往。 南公惜公徒死, 勸去甚力, 公慨然曰: “臨難忘身, 獨武夫事耶?” 南公知公意堅, 爲兼從事官, 使之草檄諭虜中。 公操筆立成, 辭意激烈, 觀者咸服。 南公亦動色, 恐挑被怒, 至勸公略改。 正月廿一日曉, 賊以木梯犯城。 南公已慮城必陷, 城南低北高, 陷必自南始, 令公守北, 且遺鐵衣。 公掛之樹上曰: “城將陷矣, 衛身何爲?” 始公將赴安州, 招二子面之, 無一語及家, 至是手書“男兒事業今日決矣”八字以貽家。 是夕, 賊攀梯蟻附, 我兵用槍劍相搏, 勢不能敵, 俄頃賊已彌滿, 鏖殺狼藉。 南、金二公知事不濟, 遂放火硝黃自燒死。 軍民散亂, 賊悉驅而魚肉之, 降者踵相接。 公着戰袍, 立城頭, 彎弧射賊, 賊射中公頰, 血淋漓被面。 公色亡變, 徐拔佩刀, 斫衣裹瘡, 至死終不釋弓。 賊矢如蝟集, 公遂枕堞而絶, 傔人金承李、縣屬韋典等, 收公屍, 以矢復之, 享年五十二。
公字萬里, 號西村, 系出鎭川。 遠祖舜恭, 新羅阿餐。 本朝, 有諱愚, 左司諫, 號松亭。 曾祖諱世曾, 社稷令。 祖諱賀, 左承旨, 與其兄判敦寧贊, 俱有名於穆廟時。 考諱應一, 司贍奉事。 妣密陽朴氏, 別提應賢女, 吏曹判書忠元之孫, 以萬曆丙子生。
己酉, 中生員試。 癸丑, 拜活人別提, 轉義禁都事。 乙卯, 擢文科。 天啓癸亥, 仁祖正位, 爲平安道宣諭御史, 拜江原都事, 遞拜戶曹正郞, 移兵曹。 俄除義州判官, 病未赴, 時議疑其厭避, 謫配本州。
公性骯髒負氣岸, 在昏世, 斥絶奸兇, 固其宜也。 洎時淸, 衆賢彙征, 亦閉戶不事交款, 以此知者寡, 不悅者多, 棲遑宂散, 間被齮齕。 其自謫還, 偶過名流, 其人曰: “子已蒙敍乎?” 公曰: “若敍, 何可過君?” 其人憮然有慙色。 公風姿魁梧, 美鬚髥, 膂力過人。 善射工文詞, 李澤堂植見公檄, 歎曰: “宋公能文如是哉!” 接人寬而恭, 居家嚴而簡。 常謂諸子曰: “我死, 以‘爲人强項, 不屈於人’, 書諸墓石足矣。” 噫! 熊魚
取舍, 固非倉卒間所辨。 試觀公請斬斁倫之賊, 不附擅權之相, 雖善類, 在要地則絶跡, 斯其志節之卓, 豈不爲後日殉義之本根也耶?
公有子三人: 長曰暹, 早夭; 次曰炅, 次曰旻, 俱以公任拜參奉。 後頗凌替不振, 肅宗末年, 旻之孫國緯, 登文科, 爲司憲府持平; 已又其兄國經, 繼上第, 爲禮曹正郞。 公葬在楊州祝石峴。 夫人高靈申氏, 宣敎郞應河女, 後公七年卒而祔焉。
公之名節, 固已耿著竹帛, 而羨道之刻, 尙此缺闕, 行路爲之嗟惋。 曩持平君抱狀乞銘, 余諾而未果, 今聞遽歿, 不覺愴涕。 余雖老病倦筆硏, 顧何忍食言於逝者? 遂敍次爲銘。 文曰:
余嘗讀高苔軒起兵檄, 輒爲之感慨而起立。 今見宋公所草檄, 其忠義凜烈, 殆過之而無不及。 若夫論華夷逆順之辨, 又極森嚴, 使虜氣自懾。 然則公之死, 不特爲偏邦, 實爲皇明大義是執。 亦其亢厲不屈之節, 確秉於平素, 故臨難所成就, 乃若是光明煒燁。 嗚呼! 公之墳封纔數尺兮, 其孰不視若泰山之高, 瞻仰而敬揖?.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