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숙(安璹)
1572년(선조 5)~1624년(인조 2) / 향년 5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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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 안공 묘갈명 병서(刑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安公墓碣銘 幷序) - 성호 이익(星湖 李瀷)
공의 성(姓)은 안씨(安氏), 휘는 숙(璹), 자는 대이(待而)이고, 낙원(樂園)은 그의 호(號)이다. 관향은 광주(廣州)이니, 광릉군(廣陵君) 방걸(邦傑)이 그 비조(鼻祖)이다. 공은 사간원 사간 구(覯)의 현손이다. 사맹(司猛) 순(峋), 하양 훈도(河陽訓導) 응운(應雲), 생원 옥천(玉川)선생 여경(餘慶)은 증조 이하 3세인데, 참판에 추증된 본 생가의 선고(先考) 광소(光紹)는 옥천과 재종형제간이다.
옥천(玉川)은 학문이 깊은 경지에 이르러 한강(寒岡: 鄭逑,1543~1620) 선생으로부터 크게 인정받았으니, 바로 관산사(冠山祠)에서 제향하고 있는 분이다. 모친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참봉 양(洋)의 따님이니, 융경(隆慶) 임신년(1572, 선조 5) 9월 기해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14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한강의 문하에서 수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 25)과 계사년(1593)에 연이어 부친상과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당시 비록 병란 중이었으나 거상을 삼가서 하니 사람들이 어질게 여겼다. 정유년(1597년 선조 30)에 왜구가 다시 쳐들어왔는데, 공이 제독(提督) 유정(劉綎,1558~1619)을 옥야촌(沃野村)으로 찾아가니, 제독이 기특하게 여기고 말하기를, “소년이 화기(和氣)가 흘러넘치니, 덕이 있는 선비이다.” 하였다.
뒤에 호남의 익산(益山)에서 명나라 장수와 창화(唱和: 시나 노래 따위를 한쪽에서 부르고 다른 쪽에서 화답함)하였는데, 명나라 장수가 칭탄(稱歎)하고 문방구를 후하게 주어서 보냈다. 난리 통에도 학문에 더욱 힘쓰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남토(南土)의 선비들이 많이 와서 청강(聽講)하였는데,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1533~1592)이 말하기를, “나이 젊은 스승이요, 머리 허연 문생이다.〔靑年師長 白首門生〕” 하였다.
을사년(1605, 선조 38)에 진사가 되었고 5년 뒤인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등제(登第)하여 저작, 박사를 거쳐 사헌부 감찰, 경상 도사, 형조 정랑, 초계(草溪)와 영천(永川) 두 고을의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 2) 7월 10일에 졸하였으니, 무덤이 창녕(昌寧) 사포(沙浦) 오향(午向)의 산에 있다. 부인 현풍 곽씨(玄風郭氏)는 참봉 재지(再祉)의 따님으로 공보다 37년 뒤에 졸하니, 향년 82세였다. 공의 무덤에 부장(祔葬= 合祀)하였다.
공은 성품이 관대하고 과묵하였다. 일찍이 이이첨(李爾瞻,1560~1623)과 시원(試院)에 함께 있었는데, 시험이 끝나고 이이첨이 사람을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거절하고 가지 않았다. 본도의 도사로 있을 때에 정인홍(鄭仁弘,1560~1623), 박종주(朴宗胄,1591~1623)의 기세가 대단하였다.
전언(傳言)하여 이익으로 공을 꾀었는데 공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정인홍이 또 혼인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초계(草溪)의 군수가 되었을 때에 수채(水菜,미나)를 요구받았는데, 아전(衙前)이 으레 그랬듯이 대그릇에 한가득 실어 보내려고 하자, 공이 거절토록 명하고 단지 1포(苞)만을 보냈다.
박종주(朴宗胄)가 부모의 수연(壽宴)을 베풀자 온 도(道)의 관개(冠蓋)들이 거의 다 참석하였는데, 공만 홀로 부조(扶助)도 하지 않고 참석도 하지 않았다. 강원도 경차관(江原道敬差官)이 되었을 때에 상신(相臣) 박승종(朴承宗,1562~1623)이 그 문객을 데리고 함께 가 줄 것을 부탁하자 공은 더불어 말하지 않았고 또 요구를 들어주지도 않았는데 백사(白沙) 이상(李相: 이항복(李恒福)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안모(安某)의 심사(心事)는 사람들이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계해반정(癸亥反正,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나 권흉(權凶: 권력을 제멋대로 행사하는 흉악한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우복(愚伏) 정 선생(鄭先生,정경세(鄭經世,1563~1633)이 맨 먼저 공을 천거하기를, “북당(北黨)이 더럽힐 수 없었던 분이고, 남주(南州)의 명절(名節)을 온전히 한 분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의 논의가 바야흐로 공을 높이 발탁하려고 하였는데 공은 이미 별세하였으니, 운명이다.
공은 6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성한(盛漢), 상한(翔漢), 창한(彰漢), 양한(良漢), 진한(振漢), 문한(雯漢)이고, 두 사위는 유석함(柳昔瑊), 박문잠(朴文潛)이다.
손자가 8인이니, 시태(時泰), 시진(時進), 시퇴(時退), 시준(時準), 시하(時夏), 시행(時行), 시구(時耈), 시지(時止)인데, 시진과 시퇴는 나란히 생원이 되었다. 시태는 종질(從姪) 흠(欽)을 후사로 들였다. 흠은 3남을 두었으니 덕형(德亨), 의형(義亨), 신형(信亨)이다.
덕형은 3남을 두었으니 경윤(景允), 윤희(允禧), 경두(景斗)이다. 신형의 아들 경점(景漸)이 그 종형 경윤의 부탁이라고 하면서 증왕고(曾王考)가 지은 가장 행록을 가지고 와서 갈명(碣銘)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 邦之無道
공은 부하고 귀한 것을 부끄럽게 여겼고 / 富且貴耻也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 邦之有道
사람들은 이미 돌아가신 것을 애석해하였네 / 人惜其已死也
죽은 뒤에도 영명이 남았으니 / 死有餘聞
비로소 군자임을 알겠네 / 方知爲君子也
<끝>
ⓒ 한국고전번역원 | 김낙철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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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刑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安公墓碣銘 幷序
公姓安諱璹字待而。樂園其號。廣州後人。廣陵君邦傑乃其鼻祖。而司諫院司諫覯之玄孫也。司猛峋,河陽訓導應雲,生員玉川先生餘慶。卽曾祖以下三世。而本生考贈參判光紹。與玉川爲從祖兄弟也。玉川學有深造。大爲寒岡先生推詡。享于冠山祠者是也。妣密陽朴氏參奉洋之女。隆慶壬申九月己亥公生。十四通經史遊於寒岡之門。壬辰癸巳連丁外內艱。時在兵難。居喪惟謹。人賢之。丁酉倭再動。公訪劉提督綎於沃野村。提督奇之曰少年都是和氣。有德之士也。後在湖南之益山。與天將唱和。天將稱歎。厚贐以文房之具。離亂之間。學益力。敎授不倦。南士多來聽講。高霽峯敬命曰靑年師長。白首門生。乙巳陞上庠。越五年己酉登第。由著作,博士歷司憲監察,慶尙都事,刑曹正郞。草溪永川二郡守。至甲子七月十日卒。墓在昌寧沙浦午向之山。配玄風郭氏。參奉再祉之女。後公三十七年卒。享年八十二。祔葬于公塋。公寬裕靜默。嘗與李爾瞻同在試院。試罷爾瞻送人邀見。辭不往。爲本道都事時。鄭仁弘,朴宗胄,張甚傳言以啗利。公微哂而已。仁弘又請婚不許。及守草溪。求水菜。吏例輸滿籠。公命卻之。只饋一苞。朴宗胄設壽親宴。冠蓋傾一道。公獨不助需。又不赴。爲江原道敬差官。相臣朴承宗託其客與俱。公不交言。又不聽所求。白沙李相聞之曰安某心事。人莫及也。及癸亥改玉。權匈被誅。鄭愚伏先生首薦公曰北黨之所不汙。南州之全名節也。朝議方將顯擢而公已圽。命矣夫。有六子二女。盛漢,翔漢,彰漢,良漢,振漢,雯漢。二壻柳昔瑊,朴文潛。孫男八。時泰,時進,時退,時準,時夏,時行,時耈,時止。時進,時退聯榜生員。時泰取從姪欽爲後。有三子德亨,義亨,信亨。德亨有三子。景允,允禧,景斗。信亨之子景漸。以其從兄景允之言。持曾王考所撰狀錄來乞銘。銘曰。
邦之無道。富且貴耻也。邦之有道。人惜其已死也。死有餘聞。方知爲君子也。<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