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8世 경산처사 이용우선생 세계:
경주이씨 익재공파후 再思堂 黿 -> 25세 獨醉亭 수(洙) -> 26세 종윤(悰胤) 후손으로 경산유고(耕山遺稿)의 저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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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우(李用雨, 1875~1963)는 조선후기 전라북도 무주 출신의 유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 익재공후 재사당(再思堂) 원(黿)의 후손으로 자는 몽필(夢弼), 호는 경산(耕山). 동림(東林)으로 28世 이이순(李以恂: 활계공 대유의 아들임)의 후손이다.
할아버지 향사(香沙) 이규탁(李圭鐸)은 학행(學行)이 있었으며, 아버지 운촌(雲村) 이종익(李鍾翊)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이 났다. 어머니는 정극순(丁克舜)의 딸 창원 정씨(昌原丁氏)이고, 부인은 박희양(朴熙陽)의 딸 반남 박씨(潘南朴氏)이다.
그는 향리에 은거하면서 대산정사(臺山精舍)를 지어 학문을 연마하고 자식들을 훈육하는 한편 마을의 자제들을 가르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용재(龍齋) 박승희(朴勝熺) 등 10여 명과 의논하여 기왕의 향약을 손질하여 새롭게 만들어 시행하는 등 지역의 풍속을 바로 세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간재(良齋) 전우(田愚)와 담재(澹齋) 김진명(金振明) 등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다. 또 만사(晩沙) 장병조(張炳祚)와 후암(後庵) 송증헌(宋曾憲)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이기(理氣)와 예학(禮學)에 깊은 조예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문집으로『경산 유고(耕山遺稿)』10권 4책이 전하는데, 1971년 송재성(宋在晟)의 서와 신종명(愼宗溟)의 발(跋)을 붙여 아들 상도(相璹) 등이 석판본(石板本)으로 간행되었다. 내용은 시(詩), 소(疏), 서(書), 잡저(雜著)를 비롯하여 서(序), 기(記), 발, 잠(箴), 명(銘), 상량문(上梁文), 제문(祭文), 축문(祝文), 경장(慶狀), 행장(行狀), 묘표(墓表), 전(傳), 부록(附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묘는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고창리 용담(龍潭) 지장산(智藏山) 감토봉(坎土峰) 아래 손좌원(巽坐原)에 있다.
[출처] 디지털무주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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耕山處士 李用雨 行蹟碑
公은 茂宋郡 安城面 方垈里에서 生長하셨다. 公의 諱는 用雨(1873~1965)요 字는 夢弼이요 號는 耕山이니 山中에서 밭 갈고 山中에서 글 읽는다는 뜻이다. 慶州李氏의 家系는 新羅 佐命功臣인 알평(謁平)이 始祖요 麗末의 益齋 李齊賢과 我朝의 再思堂 黿 및 活溪 大甹(대병)가 그 顯著한 분들이다.
公의 高祖는 參判 集道요 曾祖는 嘉善大夫 處榮이며 圭鐸, 鍾翊은 祖考이시고 昌原丁公 克舜의 따님이 夫人이시다. 公은 高宗 乙亥年 서기 1875年) 三月二日에 태어나시니 어려서부터 才質이 特出하여서 伯父이신 蕉齋公께서 글을 배울새 勤勵치않아도 스스로 勤學하시고 일찍 文理를 터득하시니 蕉齋公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祖上을 빛낼 아이다 하셨다.
公이 十歲때 慈親께서 重患으로 누워 계실 때 暫時도 곁을 떠나지 않고 看護 하심을 어른같이 하셨으며 臨終때에 가슴쥐어 뜯으며 哀痛하신 모습은 옆에 사람들을 感動케 하였다. 그 뒤 홀로 계신 父親을 孝道로서 奉養할새 養志養體를 다하고 昏定晨省을 極盡히 하시였다.
親患이 危重하매 百方으로 醫院을 찾아 다녔고 喪禮에는 初終喪禮를 朱子家禮에 어긋남이 없이 曲盡하였다. 每年 忌日이 되면 그 슬퍼함을 臨終때 같이 하였고 초하루 보름이면 三十里이나 떠러진 山所를 비바람 가리지 않고 省墓하셨다. 各居하던 조카가 요절하여 家産은 무너지고 兄님은 風症으로 起居의 自由조차 잃으니 公은 집을 합처 十年을 하루같이 兄님을 모시였다.
公이 일찍이 圓通寺에 들어가 數年間 讀書하고 나으니 當時 名望이 높던 朴奉壽 李豊□희 두분이 公과 經書를 討論하고 나서 그대의 學問이 이토록 精詣했음은 斯文의 多幸이다 하고 嘆服하였다 한다. 丙申年(서기1896년)에 宋淵齋 宋心石 두분을 찾아 多年間 學問을 硏究하여 道學의 眞隨를 얻었다.
公은 또 鄕俗이 刻薄해짐을 걱정하여 鄕人들을 모아 呂氏鄕約을 기초로 時俗에 힘쓰며 힘을 모아 斗文里에 鄕會堂을 세워 斗藍齋라 命名하였다 그리하여 美風良俗을 內容으로 하는 冊子를 만들어 서로를 일깨우고 鄕□觀善稧에 領布하여 淵齋先生이 講學하시는 資料로 삼았다.
先生 歿後에 稧가 廢止되니 公은 朴成玉 宋後庵 姜渭石 諸氏와 相議하여 稧를 이어 나가 文風을 일으키고 同志 몇분과 함께 德裕山 밑 시내가에 亭子를 짖고 晩碧亭이라 이름하고 좋은 風景속에서 情懷을 읊기도 하고 한 庵子를 지어 놓고 孝悌忠信으로 日常行動의 道를 삼었으며 子□妵와 鄕里 英才를 가르침을 畢生의 計로 하시였다. 公은 癸卯年(1963년) 3월 21일 享年 八十九歲에 逝去하시였다.
嗚呼 자랑스럽다 公은 일찍이 道學의 淵源을 터득하여 事物의 이치를 깊이 이해함을 根本으로 하고 實踐躬行을 生活信條로 삼아 鄕黨을 敎化하였으며, 옛날의 良俗과 文風을 불러 일으키어 鄕人들이 지금도 稱頌하고 敬慕하고 있다. 公은 實로 이 고을이 자랑하는 분이다. 公의 令孫 善熙君이 그 아름다운 德을 잊을까 걱정하여 글을 지어 金石에다가 오래 남겨두고 싶다하면서 나에게 글을 청하므로 내 그 뜻을 가상하여 서툰 글이나마 사양치 않고 이렇게 적었다.
서기 1978년 월 일
居昌 愼宗溟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