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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9 - 사우디 아라비아와 요르단 및 이라크, 이스라엘과 이란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및 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는데 독립을 이루게 되는
유형은 전쟁, 협조, 선의등 4가지가 있으니, 전쟁에도 순수 자력은 아이티와 멕시코에 콜롬비아
알제리 등이고 제3국의 협조를 받은 경우는 아라비아 여러나라와 콩고와 앙골라, 쿠바 등
이며 제3국 점령 후에 재침략에 나선 식민지국과 싸워 이긴 경우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등입니다.
오히려 식민지 본국에 군대로 참전해 대신 싸워서 총알받이로 죽은 공로를 세운 덕분에 독립을 허락받은
경우는 인도와 필리핀이 있으며 선의는 독립전쟁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나 독립을 얻는 경우는 식민지
본국이 허락한 말레이시아등 영국 식민지 계열의 나라들이 있고 식민지를 점령한 제3국이 독립을
허락해 주는 예로 한국이 있으며 그외에 식민지 당국이 본국에서 독립을 선언한 브라질의 예가 있습니다.
1.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는 한반도의 10배인 220만km2 에 달하는 영토를 가진 나라로 홍해와 페르시아만 두
해안선이 있으며 영토 대부분은 아라비아 사막과 산맥들로 구성되어 있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세워진 곳은 고대 문명이 번성한 유서깊은 곳으로 이슬람교가 메카 지역에서 7세기초에 생겼으며
무함마드가 632년 세상을 떠나자 후계자들은 영토를 늘려나갔고 이슬람교를 전 세계에 포교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1932년에 이븐 사우드에 의하여 건국되었는데, 그는 1902년부터 원정을 펼쳐
하자즈, 네지드, 동부 및 남부 아라비아 4개 지방을 하나의 국가로 묶었으니 절대 전제군주정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사우드 가문에 의하여 국왕직이 세습되는 구조이며 극보수적 와하비즘과 수니파가
사우디아라비아 주류 문화를 장악하고 석유와 가스 수출을 통해 이 사상을 전세계로 퍼뜨리고 있습니다.
1938년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석유가 발견되었고, 연이어 유전들이 발견되면서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에서
2번째 많은 석유 매장량과 6번째 가스 매장량을 자랑하고 있으며 예멘 내전개입, 이슬람 테러리즘 후원
의혹, 심각한 여성 인권침해와 시민권 탄압, 사형제의 남용, 무신론자와 종교적 소수자에 국가적 탄압,
국가적인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 샤리아법의 엄격한 적용등으로 전세계적인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7세기초 무함마드가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아라비아 반도의 다양한 부족을 통일
하고 동일한 이슬람교 공동체를 창조해내 나가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이슬람교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소수의 부족들이 살던 사막지대였으니 선지자 무함마드가
571년에 메카에서 태어났고, 7세기초 부족들을 통일하고 동일한 이슬람교 공동체를 창조해냅니다.
632년에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난후, 후계자들은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여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동쪽으로는 파키스탄까지 불과 수십년만에 빠르게 영토를 늘렸으니 아라비아는 무슬림 세계의 정치적,
종교적인 중심으로 떠올랐으며 아랍인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하자즈 지방에 라쉬둔 칼리파조에 이어
다마스커스의 우마이야 칼리파조, 바그다드에 아바스 칼리파조, 카이로에 파티마 칼리파조를 세웠습니다.
10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메카와 메디나 지방은 메카의 샤리프라고 하는 토착 지배자가
통치하였는데 대부분의 경우 바그다드(아바스), 카이로(파티마), 이스탄불(오스만투르크)
등에 위치한 제국들의 간접적인 통치를 받았으며, 사우디아라비아가 세워지기 직전
까지도 전통적인 토후국들이 갈래갈래 나뉘어 아라비아 반도를 각자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10세기에는 시아파의 한 부류인 이스마일파 계열의 까라마타파가 페르시아 만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으니 930년 메카를 침공하여 약탈하였고, 메카의 카바에 박혀있는 ‘검은 돌’ 을
훔쳐가면서 이슬람 세계의 공적으로 변해버렸으니 1077년 아랍의 압둘라 빈 알리 알
우유니가 셀주크 제국의 도움을 받아 바레인에서 까라마타파를 꺾고 우유니드 왕조를 세웁니다.
우유니드 제국은 시리아 사막까지 영토를 확장해 전성기를 구가하였으나, 1253년 유스푸리드 왕조가
들어서며 멸망했 유스푸리드조는 1320년 페르시아인의 침공으로 세가 크게 약해졌으며 14세기에
자와니드 왕조가 동부 아라비아를 지배하였는데 15세기에 자브리드인들이 호르무즈에서 전쟁을
벌였으니 1507년에 끝난후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인들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통치 하로 들어갑니다.
16세기에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홍해와 페르시아 만까지 영토를 확장하였고 술탄제를 선포해서
포르투갈인들의 홍해와 인도양 침입을 막아냈으며 400여년 동안 중앙정부의 권력이 세거나
약해짐에 따라 아라비아 반도에 다양한 정책을 실시했으니 이러한 일관적이지 못한 정책
들은 이후 20세기 아라비아 반도의 불확실성과 부족들간 분쟁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인 사우드 가문은 1744년 중앙 아라비아의 네지드 지방
에서 발흥했으니 시조인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는 종교 지도자이자 이슬람
극단주의 운동인 와하비즘의 창시자인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와 힘을 합칩니다.
18세기에 맺어진 이 동맹은 사우디아라비아 후대 팽창정책과 현재의 엄격한
전제군주정의 토대가 되었으니...... 사우디 제1왕국, 다른 이름으로
디리야 토후국은 1744년에 리야드 근처에 성립되었고, 빠르게 팽창합니다.
디리야 토후국은 1803년에는 메카를 공격할 정도로 번성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
지방 대부분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이 위협을 느낀 오스만 제국에
의하여 1818년에 이집트 총독인 알리 파샤의 공격을 받고 1818년에 멸망합니다.
19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영광을 잃고 쇠퇴하자 사우드 가문은 1824년에 또다시 국가를 세워
사우디 제2왕국이라 칭했으니 훨씬 작은 규모로 네지드 지방에 위치하였는데, 19세기
내내 사우드 가문은 아랍에미리트의 왕실 가문인 라시드 가문과 내분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사우드 가문은 결국에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은 아랍에미리트의 라시드 가문에
패배하니 사우드 가문과 알 사우드는 1891년에 쿠웨이트로 피난을 가야 했는데
20세기초 오스만 제국은 아라비아반도 대부분에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독립 움직임이 강해져 아라비나 부족장들이 모여 조직적
으로 대항하였으니.... 1902년에 압둘 라흐만의 아들인 아지즈 후에 이븐 사우드라 불리는
인물이 리야드의 통치권을 다시 되찾았고 사우드 가문을 네지드로 귀환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이후 이븐 사우드는 사우디 제3왕국을 세웠으니 와하비즘 영향을 받은 부족
군대 이크완의 지지를 받았고, 이븐 사우드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1913년에 알 아샤 지역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강탈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1916년, 메카의 샤리프였던 후세인 빈 알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영국의 도움(아라비아의 로렌스)을 받아 범아랍적인
반오스만 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고, 통일된 아랍 국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
했으니 오스만 제국이 패하자 후세인 빈 알리는 헤자즈 왕국의 왕으로 등극합니다.
이븐 사우드는 명나라 주원장 처럼 아랍에서 일어난 반란에 참여하기를 꺼렸고 대신 아랍에리리트의
알 라시드 가문과의 투쟁을 계속해 꺾은후 이븐 사우드는 1921년에 네지드의 술탄직을 얻어냈고
이크완의 지지를 등에 업고 후세인 빈 알리의 헤자즈 왕국을 1925년 복속시켰으며 1926년 1월에
스스로를 헤자즈의 왕으로 선포하였으며 네지드의 국왕도 겸해 5년간 두 왕국구을 따로 다스립니다.
헤자즈 왕국을 정복후 이크완들의 목표는 와하비즘을 영국의 보호령인 쿠웨이트, 이라크, 요르단으로
확장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점차 영국령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니 이는 이븐 사우드의 급격한 반대를
불렀는데 이븐 사우드는 영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크완과 이슬람 과격주의 세력들은 현대화와 외국인들의 이주를 장려하는듯한 이븐 사우드왕
의 국내 정책에 실망하였고, 결국 이븐 사우드에게 등을 돌렸지만 이들은 1929년에
사빌라 전투에서 진압되었고 지도자들은 모두 처형되었으며 1932년 9월 23일 헤자즈
왕국과 네지드 왕국은 서로 통합되어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습니다.
왕국은 제한된 농업과 일부 산업에만 근근히 의존하고 있던 형국이었는데 1938년에 초대형
유전이 알 아샤와 페르시아만 인근 지방에서 발견되었고, 1941년에는 미국 계열회사인
아람코의 주도 하에 대대적으로 석유가 시추되기 시작햇으니 석유는 사우디아라비아
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고....... 국제적인 위상을 한순간에 엄청난 규모로 드높였습니다.
1938년에 발견된 대유전으로 석유산업이 발전하니 수많은 외국인들이 사우디아라비아로
쏟아져 들어오자 만연하였던 제노포비아가 사우디아라비아 국민들 사이에서 더욱 심화
되었고, 그 와중에 정부는 막대한 국가 부채로 외국에서 어마어마한 빚을 내기 시작합니다.
1953년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직을 물려받았고,
1964년에 이복형제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쫓아내고 3대 국왕
으로 즉위했으며 1972년에는 정부가 아람코의 지분 중에 20% 를 소유하게 됩니다.
1973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제4차 중동 전쟁인 욤키푸르 전쟁에서 이집트와 시리아
에 맞서 이스라엘을 지지한 서방국가들에 대한 보복으로 오일 대란을 일으켰으니
유가는 즉시 엄청난 가격으로 상승하며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오일 파동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두해 후 1975년에는 파이살 국왕이 조카인 파이살 빈 무사이드에 의하여 암살당했으며
그의 이복형제 칼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사우디아라비아의 4대 국왕으로 즉위합니다.
2. 이라크와 요르단
이라크는 고대에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메소포타미아로 남부 수메르지역에서
기원전 3천년경에 도시국가들이 출현했으니 이집트와 더불어 세계최초의 문명이 발생
한 나라인데 아카드,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를 거쳐 사산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수도 바그다드는 페르시아어로 신의 선물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메카에서 일어난 아랍인들이 바그다드에 압바스왕조를 세웠으며 그후 셀주크투르크 제국이
들어서고 티무르를 거쳐 이후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이라크는 초토화 되고, 바그다드
의 칼리프도 시해당한후 황폐화된 이라크는 일 칸국의 지배 아래 들어가며 이후
몽골계 잘라이르 왕조, 튀르크계 흑양 왕조와 백양 왕조가 이 지역을 차례로 지배하게 됩니다.
시아파 12이맘파를 국교로 하며 수니파 무슬림들을 시아파로 개종시키는 정책을 펴던 사파비 왕조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놓고 수니파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와 전쟁을 벌였으니 1천년전 동로마 제국
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이라크와 캅카스 지역을 두고 전쟁을 벌였던 것과 이유는 동일했으니
이란고원은 생산력이나 인구 부양력이 약하니 사파비 제국 입장에서는 메소포타미아가 필요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이라크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보급문제로 메소포타미아를 완전 석권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는데, 사파비 왕조의 영향으로 인구의 60%인 이라크 동남부의 아랍인들은 시아파가
되어 후대 이라크 내전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니 사파비 왕조와 아프샤르 왕조 몰락후 오스만
제국이 이라크 대부분을 정복하였으나 지역 인구를 다시 순니파로 개종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슬람교의 예언자인 무함마드의 후손 가문인 하심 가문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
후세인 빈 알리는 1908년 청년 튀르크당 혁명의 결과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 압뒬하미트 2세에 의해서 아라비아 메카의 샤리프에 임명되었습니다.
후세인 빈 알리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에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통해 아랍 독립
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약속받으니 '맥마흔 선언' 으로 이에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아랍의 반란을 선언했으며 통일 아랍왕국의 왕임을 선언했지만 연합국에 의해 받아
들여지지 않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서쪽 지역인 헤자즈의 국왕으로만 인식되었습니다.
영화화 되기도 한“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로렌스는 좀 엉뚱해서 상관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
다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영국과 오스만 제국
이 대치하고 있을 무렵 영국은 로렌스의 아랍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높게 사
아랍인들의 참전 및 지원을 요구하기 위해 정보국 소속의 로렌스 중위를 중동에 파견합니다.
로렌스는 파이살 왕과 접촉하기 위해 사막을 건너는데 같이 동행하는 베니사리 부족 베두인
조차 너희 나라도 사막이냐고 물을 정도로 고된 여정이지만 그에게 자신의 총기를 선물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지게 되는데 도착하기 직전 셰리프 알리의 부족소유 우물에서 물을
마시다가 셰리프에게 들키니 베니사리인을 쏴죽인후 로렌스가 선물로 건낸 총을 강탈합니다.
로렌스는 분개한후 홀로 파이살왕을 찾아가는데 계곡에서 해리 브라이튼이 그를 발견해
파이살왕에게 데려가려고 하는데, 터키 공군의 전투기 두대가 나타나 파이살왕의
군대를 공습하니 브라이튼은 파이살왕과 아랍인들은 현대 무기체제를 전혀 이해
하지 못해서 자신이 남쪽의 영국군 주둔지로 옮기자는 제안을 무시한다고 불평 합니다.
파이살왕은 아랍인들에게 대열을 갖추고 전투기에 대공사격을 하라고 말하지만 아랍군은 폭격
과 기관총 세례에 혼비백산하여 저항은 커녕 도망치고 숨기에만 급급했으니 전투기들이 지나
가고 체념한듯 한숨을 내쉬던 파이살왕은 전투가 잦아들자 브라이튼과 로렌스를 만나게 됩니다.
텐트 안에서 파이살왕은 쿠란 낭독을 들으며 브라이튼과 로렌스와 접견하는데 이때
로렌스가 쿠란의 구절을 읊는 모습을 보고 흥미로워 하는데 브라이튼은
현대적인 훈련이 필요함과 더불어 터키공군의 폭격거리로 부터 멀어져야 하기
때문에 남부로 이동하여 영국군에게 체계적인 교리를 교육받을 것을 요구합니다.
아들 알리가 텐트에 들어와 훈련도 훈련이지만 터키군에게 맞설수 있는 현대적 장비를 요구하며 왕
또한 동의하니 브라이튼은 머뭇거리다가 기존의 입장만을 반복할 뿐, 장비를 내준다는 말은
하지 못하니 사실상 영국군 산하로 아랍 반란군을 넣고 싶다는 것과 원활한 통제를 위해 영국군
에게도 피해를 입힐 좋은 무기는 주기싫다는 영국군의 의중을 브라이튼은 숨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듣다못한 파이살왕은 로렌스에게 의견을 물으니 로렌스는 만약 아랍군이 남부로 이동하면
사실상 영국군에게 예속되는 것이며 아랍 독립은 물건너 간다는 입장을 표명하니
파이살은 브라이튼과 알리를 내보내는데... 아랍인들이 어째서 물에 그토록
예민한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히며 또 아랍인을 위하는 듯이 행동하는 로렌스에게
자아도취적 자아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니 파이살왕의 통찰력이 정확한 것이기도 합니다.
로렌스는 이 말에 충격을 받아 자신이 진짜 아랍독립을 위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알리
에게 50명의 아랍반란군으로 네푸드 사막을 건너서 육지로부터 항구 도시 아카바를
기습할 것을 제안하는데 아카바를 점령하면 아랍반란군의 단합의 계기에다가 영국군
의 지원을 받을수 있게 되며, 아카바의 터키군들은 해안포를 바다방향쪽으로 고정해
두었고 사막으로부터 공격은 예상하고 있지 않기때문에 허를 찌를수 있을거라고 주장합니다.
알리가 50명으로 뭘 어쩌겠냐고 하자 네후드를 건너 아카바를 아랍독 립이라는 대의로 점령
한다는 것을 알리면 다른 아랍부족들을 규합할 단초가 될수 있다고 말하는데, 대단히
무모한데다가 사실상 따로 노는 부족들을 고작 대의명분으로 설득한다는게 말이
안된다는 것이 상식이지만 홀린것인지 파이살왕에게 알리니 의외로 파이살은 허락하고
로렌스는 알리와 50명을 이끌고 베두인들조차 건너지 못한다는 네후드 사막을 횡단합니다.
네후드 사막을 건너며 낙오된 가심이란 남자를 알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혼자 돌아가서 구해내니
그는 알리와 아랍군의 지지를 받으며 아랍족장의 옷을 선물받고 명예아랍인으로서 받아들여지니
로렌스의 자아도취가 시작되는데, 로렌스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할때 모세도 이를 했다며 자신
을 신화적인 인물과 비유하기도 하고 아랍족장의 옷을 입고 유아적인 기쁨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사막을 기적적으로 건너고 부족의 환심을 산 로렌스가 마시던 우물은 터키군에게 돈을 받으며 수족역할
을 하는 부족 호와이타트의 소유였으며 이에 총을 들고 어린 아들과 캠프로 달려와 격하게 항의하니
자신의 허락도 없이 물을 사용한 알리를 매도하고 충돌하니 로렌스는 타이에게 지금 당신은 흥분하는
것은 좋지 않고, 부족의 지도자답게 네후드를 건너온 자신들을 손님으로 받아들여 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타이는 어이없어하면서도 계속 시비를 이어가면 죽는건 자신이니 로렌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만
다음날이 되면 너희를 터키군에게 넘길지도 모른다며 비꼬면서 초대하는데, 로렌스는
초인적인 태연함과 당당함으로 타이에게 자신들의 편에 서서 아카바를 함락시키자고 제안합니다.
호와이타트의 본진에 있음에도 기죽지 않고 일개 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랍인들을 위해,
그들에게 자신이 자유를 주기위해 싸우고 있으니 함께 하지않겠냐고 하지만 타이는 아랍
이라는 부족명 따위는 못들어 봤다며 코웃음치자 로렌스는 그가 터키군에게 받는 금액중
상당수를 부족원들에게 돌리지 않고 착복하고 있음을 지적해 난처하게 만들고, 아카바
에는 많은 황금이 있으니 함께 아카바를 함락시키자고 말해 결국 타이의 동의를 받아냅니다.
아랍 반란군은 아카바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항구도시를 차지하는데 성공하니 이 승리를 알리기 위해
로렌스는 알리에게 왕에게 전달해줄 것을 부탁하고 자신은 두 시종과 함께 카이로로 가서 영국군
에게 보고하겠다고 하는데, 이때 타이가 아카바에서 황금을 찾지 못했다며 로렌스에게 항의
하자 로렌스는 영국군으로부터 보수를 지급해줄 것을 약조하여 불만을 잠재우고 카이로로 떠납니다.
로렌스는 파라지와 함께 사막을 건너 카이로에 도착했을 때는 거지꼴이 되어 주변사람들의 눈빛세례를
받는데, 말도 안되는 승리를 알렌비에게 보고하자 알렌비는 그에게 특진과 함께 공작을 계속할 것을
요구하니 분열돼있던 아랍인들을 규합해 무모한 작전을 성공시켜 터키군을 아랍인들의 힘으로 몰아
내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평소 평판과는 별개로 매우 유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로렌스는 알렌비에게 아랍인들에 대한 군사적 지원과 독립보장을 대가로 아랍반란군을 계속해서 이끌
것을 약속하는데, 로렌스가 아랍민족의 독립을 보장할수 있냐고 묻자 알렌비가 거짓말로 그렇다고
한 점을 생각해 보면, 이들도 로렌스를 통해 아랍반란군을 통제해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사용후 아랍지역을 집어삼키기 위한 공작을 위해 철저히 장기말로서 로렌스를 사용할 생각이었습니다.
로렌스는 영국의 기대 이상으로 아랍인들을 위해 헌신해 분열된 아랍군을 통합하고 마침내 오스만제국
의 중동 거점인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이로 인해 아랍인들에게서 "아라비아의
로렌스" 라는 별칭으로 불리는데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며 로렌스의 심신은 점차 피폐해지고 잠입한
도시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포로로 잡혀 고문 끝에 무느지며 오스만 제국의 몰락이 가시화
되면서 중동 독립을 논의할 때가 다가오자 열강들은 독립약속을 내버리고 분할 점령의 음모를 합니다.
이에 로렌스는 영국 정부에 항의하며 아랍 민족들에게 단결을 호소하지만, 그들 또한 탐욕에 눈이 멀어
다툴뿐 단결하지 않으니 결국 소환 명령을 받고 영국으로 돌아가지만, 로렌스는 계속해서 자신을 중동
으로 다시 보내줄 것을 청하나 중동 문제는 이미 열강들과 현지 기득권들간의 정치적 합의가 끝나
버려 로렌스가 돌아갈 자리는 어디에도 없으니결국 로렌스는 오토바이를 타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합니다.
영국은 1916년 아랍의 독립을 약속한 '맥마흔 선언' 에 이어 1917년에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독립국
을 건설해준다는 '밸푸어 선언' 을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2가지 약속을 모두 헌신짝처럼 저버
리고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을 프랑스와 함께 위임통치하기로 명시한 베르사유 조약을 맺었습니다.
후세인 빈 알리가 이에 항의해서 조약의 비준을 거부한 후 연합국의 지원이 중단되었으며 또한
1920년 산레모 회의와 세브르 조약으로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분할하여 메소
포타미아 위임통치령이 세워지니 이듬해인 1921년 영국은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를 요르단
국왕으로 세웠고, 다음해 1922년에 후세인의 셋째 아들인 파이살을 이라크(메소포타미아)
국왕 파이살 1세로 하여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는 형식적인 왕국으로 독립을 시켜 주었습니다.
1차대전후 위임통치령은 승전국인 영국이 이라크,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서카메룬, 사토고 및 탕카니카
이고 프랑스는 시리아, 레바논, 남카메룬, 동토고 이며 벨기에는 루안다와 우룬디, 일본은 남양군도
(구 독일령), 남아공은 나미비아, 영연방은 나우루, 사모아와 뉴기니를 위임통치령으로 손에 넣었습니다.
새로운 이라크 왕국의 영토는 과거 오스만 제국의 무술, 바으다트, 바스라 빌라예트 3개
를 통합시켜 세워졌는데... 산레모회의에서 독립을 약속받았던 쿠르드족은
그후 오스만의 영토가 대폭 줄어든데 항의해 군대를 일으킨 터키의 국부 케말 파샤
가 그리스군과 프랑스군을 격파해 새로 맺어진 세브르조약으로 철저히 소외되었습니다.
이후 이라크는 1932년에 11년간의 영국의 위임통치령에서 벗어나 정식으로 이라크 왕국으로
독립을 했으며, 요르단은 1921년에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 1세가 영국의 위임통치령
인 트란스요르단을 세웠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6년에야 영국으로부터 독립
하였으며 팔레스티나 전쟁이 일어나 압둘라 왕은 1946년 팔레스티나 동부를 점령했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영국의 위임통치령에서 독립하면서 이에 반발한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등과 1차 중동전쟁이 벌어졌고 1950년에는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 강 서안
지구를 요르단 영토에 추가하였으나,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빼앗겼습니다.
아랍인들이 3차 중동 전쟁에서 작지만 강한 나라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에
패배하니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으로 부터 팔레스타인인이 대거 요르단으로 유입되었습니다.
3. 이스라엘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다가 1914년 1차세계대전이 일어나니 영국은 1916년 아랍의
독립을 약속한 '맥마흔 선언' 에 이어 1917년에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독립국을
건설해준다는 '밸푸어 선언' 을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2가지 약속을 저버리고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을 프랑스와 함께 위임통치 하는 베르사유 조약을 맺었습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가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던 팔레스타인의 강제적인 분할 계획을 채택해
실행을 추진하였으나 이에 동의한 유대인과 달리 동의하지 않은 아랍인은 추후 이스라엘을 침공
하는데 1948년 5월 14일, 세계 시오니즘 단체 경영이사, 그리고 팔레스타인 유대인 기구의 대통령
다비드 벤 구리온은 "에레츠 이스라엘에 유대 국가를 수립하고 이스라엘 국가로 한다" 고 선언합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패전한 오스만 제국은 중동지역 대부분을 영국과 프랑스
에 내주니 트랜스요르단 지역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오스만의 세금 정책에 의해 황무지
가 되었던 지역은 유대인들과 아랍 유민들이 유입되어 여기저기 공동체 마을들이 형성되었습니다.
현대 이스라엘은 19세기의 시온주의 운동과 20세기 제2차 세계대전중 발생한 유대인 학살을 배경으로
1948년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 통치하던 영국은 이중적으로 아랍 측에게
맥마흔 선언을, 샤리프 후세인에게는 아랍인들이 전쟁에 참여하면 칼리프 중심의 아랍인의 나라를
이 땅에 지어주겠다는 보장을 했으니 1916년 6월 5일 봉기를 일으켜 스스로 아랍의 왕임을 자처합니다.
1917년 유대인의 지원을 받기 위해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가 가나안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
하는 밸푸어 선언을 하여 1920년 영국의 공식 외교정책이 되었지만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갈등을
유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영국군이 위임통치령을 철수하기 이전부터 이주 유대인과 아랍인 간
테러와 학살같은 국지적인 충돌이 있었고,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자치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철군이 이뤄진 다음날 이스라엘은 공화국을 선포하였고 동시에 아랍인들의 침공을 받게되니
제1차 중동 전쟁으로 유대인들은 기존 이르군과 하가나등 극우 시온주의 민병대를 확대하여
방위력을 증강시켰으며 서방으로부터 무기지원을 받았다지만 전후 피로감에 영국, 프랑스, 미국
이 무 지원은 커녕 판매조차 소극적이었던 탓에 쏟아지던 전후 물자들을 매입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2차 중동 전쟁(시나이 전쟁)과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차후
중동전쟁에서 서방의 지원을 얻어낼수 있었으며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국가들은 아라비아
지역에서의 유대인 국가 건설에 부정적이었고, 이후 유대인-아랍인 간의 충돌은 지속되었습니다.
한편 팔레스티나 지역(가나안 연안)의 아랍인들은 스스로를 팔레스타인 주민, 그들의 거주 구역을
팔레스타인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니 팔레스타인이라는 공동체가 본래 토착민으로서 거주하던
것이 아니라, 20세기 유대인들의 이주와 동시에 이 지역으로 밀려들어온 아랍인들을 뜻하니
장기간에 걸친 팔레스타인과의 분쟁 결과, 1993년에 PLO와 자치에 합의하여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 세워졌으나 현재까지도 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복수를 다짐하던 안와르 사다트가 이집트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1973년 10월 6일 이집트
는 유대인들의 속죄일 욤키푸르 당일 시나이반도를 기습했는데(제 4차 중동전쟁) 그러나 이스라엘
은 이집트 방면으로는 본토까지 시나이반도 지역이 완충지 역할을 하였으나, 북부 골란고원을
넘어서는 시리아군은 본토로 들어오기 때문에, 전략상 시리아군이 포진한 곳을 공습하면서
전세를 역전하기에 이르렀으며 끝내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까지 승리로 이끌어냈습니다.
4. 이란
오스만 투르크와 싸우던 사파비 왕조가 1722년 아프간 부족장 마흐무드에게 망한후 근대
이란은 잔드 왕조를 끝내고 테헤란으로 천도한 카자르(Qajars) 왕조(1795-1925) 부터
라고 보는데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와 ㅇ여국이 침략해 오니 아제르바이잔과 코카서스
를 러시아 제국에게 빼앗겼고 1857년에 파리조약으로 헤라트와 아프간을 영국에 내줍니다.
나시르 앗딘 샤 시절에 이르어 타키 칸 아미르가 재상이 되어 과감한 개혁정책을 시도하였으나
관료들의 저항과 국왕의 견제로 해임된 뒤 죽임을 당하니 이란의 근대화는 일그러졌고,
영국의 경제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민중의 반외세 운동도 거세졌으니 1890년에는 영국이
담배 독점권을 가져가자 이슬람 지도자가 금연령을 포고해 독점권을 되찾은 일도 있었습니다.
왕실은 부패하였고 국가의 권리를 서구에 양도하였으니 이에 상인과 학생, 지식인을 중심
으로 왕권제한 움직임이 분출되기 시작해 1906년 8월 무자파르 알딘 샤는 12월에
근대적 헌법을 제정했으나 왕은 닷새만에 죽으니 뒤를 이은 모하마드 알리 샤는 헌법
을 파기하고는 러시아 장교가 지휘하는 군대(코사크 병단)를 시켜 의회를 폭파해 버립니다.
봉기는 전국으로 확산됐으니 '제헌 혁명' 이라 부르는 제헌파들은 1909년 7월에 테헤란에 입성해 샤를
몰아내고 헌정을 세우는데 1907년부터 러시아와 영국은 이란을 양분해 수탈을 하고 있었으니 1차
대전중 이란은 영국, 러시아, 터키군의 전쟁터가 되어 짓밟혔고 러시아가 1917 볼셰비키 혁명을
거치면서 내정에 정신팔린 사이, 영국은 1919년 이란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조약을 강요해 식민화
하니 이란인의 반영(反英) 감정은 고조됐으니 코사크 부대 사령관인 레자 칸(Reza Khan) 이 부상합니다.
레자 칸은 1926년 '레자 샤 팔라비' 로 등극해 팔라비 왕조를 여니 과감하고 체계적인 서구화
에 들어가는데 부족 중심의 형태로 운영되던 군대를 혁신해 상비군으로 만들어 왕정의
권력을 강화했고 관료제를 뜯어고쳤으며 전국을 포괄하는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근대
적인 대학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세속국가' 를 지향했던 레자 샤의 원대한 야심인 것입니다.
레자 샤는 이슬람 학자들에게서 교육권을 빼앗아 종교적, 전근대적 사고 대신 세속적, 서구적, 합리적,
근대적 국민의식을 고양시키려 했으니, 근대적 교육을 받은 관리들이 생겨나고 경제가 회복되며
중산층이 형성됐으니 교육 뿐만 아니라 사법권도 이슬람 학자들에게서 근대적 사법기구로 넘어
오게 됐는데 문제는 이슬람은 종교라기 보다는 종교- 문화- 사상- 사회- 정치체계의 통일체인 것이라...
꾸란의 말씀은 경전인 동시에 법전에 해당되고,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성직자' 개념이 없는
대신 이슬람 학자겸 율법학자들이 무슬림을 지도하는데 권위있는 율법학자들이 법률적 판단
을 해서 발표하는 것을 파트와(fatwa) 라고 하니, 무슬림들에게는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서구 법체계의 '판례' 에 해당된다고 보면 되니 레자 샤는 근대적 사법 체계를 도입해
성직자들의 자의적인 판결 관행을 중지시키고 1936년에는 여성들의 "차도르" 를 없앴습니다.
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해 반대세력과 언론을 탄압했으니 봉건적 특권을 박탈당한 이슬람 세력은 결국 왕조
의 적이 되어 왕가와 성직자들의 대립은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주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레자
샤의 근대화 정책은 봉건적 토지 소유 제도를 혁파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토대없는 상층부
개혁으로 그쳤고, 개혁에 드는 비용도 농민세금에 의존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스습니다.
레자 샤는 소련과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나치 독일과의 경제 관계를 강화했는데 소련과 영국은
1941년 이란을 침공해 레자 샤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위기감을 느낀 그는 결국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에게 왕위를 넘겨주었으며 레자 샤는 영국군에 체포돼서 영국과
모리셔스 등지를 전전하다가 194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죽었습니다.
팔레비 왕조는 친미 부패 왕조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긴 하지만, 적어도 레자 샤는 "카자르
왕조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개혁을 추진해, 이란인에 의한 근대화를 추진하고 제국
주의에 맞서려 했던 정치가로 평가해야 한다" 고 오늘날의 사가(史家) 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들 팔레비의 즉위 뒤인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을 침공하엿으니 이란은 연합국의 병참기지가
되었고, 영국과 소련의 경제적 침탈도 심해졌는데 소련군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도 가장 늦게
까지 이란에 주둔했으며 이를 배경으로 이란 공산당인 투데당(Tudeh party) 이 세력을 불렸습니다.
반외세 민족주의를 내세운 모하마드 모사데크가 이끄는 국민전선에 1951년 팔레비 국왕은 등떼밀려
그를 총리에 임명하는데 모사데크 총리는 유전 국유화를 단행했으니 이란 유전을 꿰차고 있던
영국은 이란의 자금을 차단하기 시작했고 더욱이 모사데크가 투데당과 협력할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까지 나서 군부 쿠데타를 사주하니 모사데크는 반역혐의로 체포된뒤 죽습니다.
모사데크를 쫓아낸 팔레비왕은 친미, 친영 노선을 노골화하고 비밀 경찰인 국가 정보안보
기구(SAVAK) 를 동원해서 반대파를 탄압했고 BP, 더치 셸 같은 서방 석유 회사들이
이란의 유전을 장악했으며 1955년에는 바그다드 조약이 성립되니 바그다드 조약기구
(중동조약기구 METO)는 터키·이라크·이란·파키스탄·영국으로 구성된 상호 방위 동맹입니다.
'가맹국의 안전을 위한 협력' 을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소련의 중동 진출을
막기 위해 결성된 것이었으니 회원국이 아닌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한 미국이
이 기구를 좌지우지했는데 1958년 이라크가 바트당 혁명 뒤 탈퇴하면서 이
기구는 해체되고, 소련에 맞선 군사조약기구인 중앙조약기구(CENTO)가 만들어집니다.
METO 에 반강제적으로 가입한데 이어 팔레비 국왕은 1959년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 미군 주둔을 허용
하고 1963년 6개항의 개혁조치를 국민투표에 부쳐 이른바 '백색혁명' 을 했으니 토지 개혁, 근로자에
회사 이윤분배, 삼림과 목초지 국유화, 국영사업장 매각, 노동자, 농민에 유리하게 선거법 개정, 문맹
퇴치지원등이었으며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했으니 팔레비왕은 왕실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했습니다.
하지만 토지 소유자와 겹치는 이슬람 성직자 층은 이 조치에 크게 반발햇으니 이들은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지도 아래 반(反)백색혁명 운동을 벌였는데 호메이니는 가택연금 됐다가 이듬해 터키
(뒤에는 이라크)로 망명했으며 성직자들의 반대 속에서도 토지 개혁은 진행됐고, 경제도 나아졌습니다.
국정에 자신감이 생긴 팔레비는 1967년 10월 대관식을 거행하고 1971년에는 페르시아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페르세폴리스에서 성대히 거행했는데 내정이 안정되자
중동의 경찰역을 자임하고 군비 강화에 나섰으니 미제 무기 수입으로 국민들은 이런
친미 노선에 굴욕감을 느꼈고, 이슬람 전통을 무시한 서구화 정책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전에 노엄 촘스키가 쓴 글에, 이란이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같은 역할,
즉 '미국의 경비견 노릇' 을 한다고 적었는데 모사데크 국민전선의 한 분파인 이란 자유
운동,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 페다인(민병대)과 무자헤딘(이슬람 전사) 등 무장
단체들이 모두 반 팔레비 전선에 나서기 시작했으니 반 왕정 운동은 점차 조직화되어 갑니다.
과시성 사업과 군비 강화에 예산을 낭비한 결과, 이란 경제는 1976년 후반부터 악화되기 시작
했으며 왕정의 무능과 부패 속에 빈부격차는 커졌고, 1977년 지미 카터는 묵인해왔던
왕정의 인권탄압에 우려를 표하고 개선을 요구하는데 1978년 왕정은 호메이니를 음해하는
기사를 친 정부지에 게재해 국민을 자극하고 쿰 시에서 열린 신학생 데모를 유혈 진압합니다.
이스파한의 바자르가 항의 표시로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자 무자비하게 해산하는등 78년 부터 시위와 유혈
진압의 악순환이 시작됐으니 8월 아바단에서 시위군중이 경찰을 피해 들어간 렉스 시네마에 불이 나서
400여명이 숨지는데, 훗날 조사에서는 광신도의 방화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비밀 경찰의 소행
으로 믿었으니 9월 성난 군중이 테헤란 잘레흐 광장에 운집하자 경찰이 무차별 발포, 유혈극이 벌어집니다.
이라크는 이란의 압력에 따라 호메이니를 추방했으며 프랑스 파리로 망명했는데, 그의
프랑스 망명은 오히려 이란 반 정부운동이 국제적 주목을 받게하는 계기가 됐으니
12월 팔레비 국왕은 온건파인 국민전선 지도자 바크티아르(Bakhtiar)와 협상해,
그에게 총리직을 맡기고 출국하기로 결정하고는 이듬해 1월 팔레비는 이란을 떠납니다.
1979년 바크티아르 정부를 호메이니는 '불법' 이라 선언해 타도령을 내리고 2월 1일 귀국하니 군부마저
호메이니 지지로 돌아서자 바크티아르마저 망명해버리고 2월 12일 왕정은 완전히 종식됐으니 이란
이슬람 혁명인데 1979년 2월 5일 호메이니는 바르자간을 임시정부 수반으로 지명하지만 이슬람
최고 혁명 위원회가 사실상의 정부였고 별도로 이슬람 혁명 수비대가 만들어져 무력으로 뒷받침했습니다.
한편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집권했는데 이라크는 인구의 65%가 시아파이고, 시아파의
종주국은 이란이니 사담 후세인은 이란 혁명의 파고가 넘어올까 두려워 이란을 선제 공격
하였으니 주변 아랍국가들의 명시적, 암묵적인 지지 속에 1980년 7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됐는데 전쟁의 표면적인 이유는 샤트알아랍(Shatt-al-Arab) 수로의 영유권 다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