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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2만8,000여자, 정조와 다산은 무슨 얘길 했을까
입력 2018.04.19 04:40
정조와 다산의 문답을 담은 5책본 사암선생연보. 붉은 글씨를 보면 균암만필을 지우고, 1인칭 '여(余)'를 3인칭 '공(公)'으로 수정한 흔적이 역력하다. 무엇을 감추고 싶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열수전서’ 총목록에 있는
1책64장 분량의 ‘균암만필’
‘사암선생연보’에만 일부 남아
누가 왜 감췄을까에 관심
유배 당시 제자 이정 거처에서
정조와의 대화 회상하며 기록
천주교 관련 내용 담아
후손들이 드러내지 않은 듯
‘열수전서 총목록’ 속의 ‘균암만필’
다산의 사라진 책 중 ‘균암만필(筠菴漫筆)’이 있다. 1934년 신조선사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는 가장본(家藏本) ‘열수전서(洌水全書)’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현손 정규영 친필의 총목록이 있었는데, 그 끝에 ‘균암만필’ 1책 64장과, ‘연보’ 2책 122장이 더 있다고 적혀 있었다. 이중 ‘연보’ 2책은 그대로 있지만 ‘균암만필’은 간 곳이 없다.
1938년 최익한은 ‘여유당전서를 독함’에서 “‘균암만필’은 ‘목민심서’ 중에 인용한 ‘자균암만필(紫筠菴漫筆)’인데, 서명 및 그 장수(張數) 만은 ‘열수전서 총목록’ 중에 기재되었으니 어찌된 것입니까?”하고 당시 편집자에게 질문했다. ‘균암만필’이 어째서 목록에만 있고, ‘여유당전서’에서 빠졌느냐고 물은 것이다. 1책 64장이면 다산 가장본이 통상 1면에 10행 22자이니, 꽉 채워 썼을 때 2만8,160자의 적지 않은 분량이다. 최익한은 ‘목민심서’ 권 1 ‘부임 6조’ 중에 딱 한 단락이 인용된 ‘자균암만필’이 이 ‘균암만필’과 동일한 책일 것으로 보았다.
균암, 또는 자균암으로 불린 공간은 대체 어딜까?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그리고 왜 사라졌나? ‘여유당전서’ 편찬 당시 편집자들은 이미 이 책을 찾지 못했던 듯하다. 누군가 감추거나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인데 그 이유가 뭘까? 다 궁금하다.
‘다산연보’와 ‘사암선생연보’
다산의 연보는 현재 3종이 남았다. 먼저 나주 정씨 월헌공파 종회에 보관 중인 12장본 ‘다산연보’가 있다. 관력(官歷) 중심으로 간추린 것이다. 이 연보에 실린 이력은 다산이 세상을 뜨기 7년 전인 1830년 5월 기록이 마지막으로, 다산이 살아 있을 때 집안에서 만든 것이다. 성균관과 초계문신 시절 반시(泮試)와 과시(課試)의 등수, 채점관의 이름까지 상세히 적혀 있다. 본인 말고는 알기 힘든 내용이다. 하지만 다산 친필은 아니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는 앞서 최익한이 말한 2책 122장본과, 이와는 별도로 5책본 ‘사암선생연보’가 전한다. 2책본은 현재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를 번역한 것이 송재소 선생의 ‘다산의 한평생’(창비ㆍ2014)이다. 5책본이 더 흥미롭다. 원래 가장본으로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된 김영호 선생 소장본이다. 2책본 ‘사암선생연보’를 간추리기 전 원본이다. 최익한은 2책본을 제자 이정이 작성한 초고를 현손 정규영이 정리한 것으로 보았다. 이정은 일반적으로 ‘이청’으로 읽으나, ‘정’이 맞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한 차례 쓰겠다. 5책본에도 첫 면에 ‘현손 규영(奎英) 편’이라고 적혀있다.
5액본 사암연보 첫 면. 오른쪽 아래 '현손 규영 편'이란 글자가 또렷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5책본 사암연보 중 남은 4책.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이 5책본 ‘사암선생연보’의 존재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다. 5책 중 제 2책이 결락되어 남은 것은 4책뿐이다. 분량이 적지 않다. 도처에 붉은 글씨로 수정 표시가 되었거나 두 줄을 그어 삭제를 지시한 내용이 보인다. 2책본 연보에 그 수정 표시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2책본은 이 5책본을 간추려 축약한 것이다.
‘사암선생연보’에 남은 ‘균암만필’
흥미롭게도 5책본 연보의 제 1책 중 12개소에 ‘균암만필’의 내용이 인용되었다. 규장각본의 해당 면에는 예외 없이 인용 출처를 지우고, 1인칭 ‘여(余)’를 3인칭인 ‘공(公)’으로 수정했다. 제 1책 중 정조 승하 기사에만 ‘균암만필’ 인용이 딱 하나 남았다. 5책본 ‘사암선생연보’에 인용된 ‘균암만필’ 대목을 추출하여 입력해 원문 2,740자를 얻었다. 전체 예상 분량의 약 10분의 1 가량이 5책본 ‘사암선생연보’에 살아남은 셈이다.
사암연보 내용 가운데 일부. 오른쪽 상단에 '균암만필' 글자를 붉은 선으로 지웠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사암선생연보’ 제 1책은 탄생부터 39세 때인 1800년 정조 승하 시까지의 내용을 담았다. 제 3책은 48세 때인 1809년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없어진 제 2책은 1801년부터 1808년 사이를 다룬다. 다산이 유배 와서 다산 초당에 정착하기 직전까지다. 현재 남은 2책본으로 볼 때 정조 사후를 다룬 제 2책에는 ‘자균암만필’의 인용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암선생연보’의 12개소와 ‘목민심서’에 인용된 1개소를 합치면 모두 13개 단락이 살아남았다. 이 13개 단락의 내용은 대부분 정조와 다산 사이에 오간 대화거나, 규장각 시절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균암만필’은 다산이 정조 승하 후 어느 시점에선가 유배지의 균암 또는 자균암이라 불리는 공간에서, 정조와 함께 지낸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려 하나하나 호명해낸 회억록인 셈이다.
‘균암만필’, 언제 어디서 썼나?
5책본 ‘사암선생연보’의 존재를 처음 소개한 조성을 아주대 교수는 균암을 서울 명례방에 있던 죽란(竹欄)으로 보아, 1800년 6월 28일 정조 서거 이후 11월 18일 졸곡제 사이에 다산이 서울 집에서 지은 것으로 보았다. 필자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자균암은 어디인가? 자줏빛 대나무로 둘려있는 초암이다. 균암이란 명칭은 다산이 대둔사 승려 아암(兒菴) 혜장(惠藏)을 위해 써준 ‘장상인의 병풍에 제하다(題藏上人屏風)’란 글속에 한번 더 등장한다. 글 가운데 “맑은 창 소박한 책상에 독루향(篤耨香)을 사르고 소룡단(小龍團) 차를 끓여, 진미공(陳眉公)의 ‘복수전서(福壽全書)’를 읽으며, 싸래기 눈이 내린 균암(筠菴)에서 오각건(烏角巾)을 쓰고 금사연(金絲烟) 담뱃대를 물고서,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신주(水經新注)’를 읽는다”고 쓴 대목이 있다.
다산은 혜장과 1805년 여름에 처음 만났다. 혜장에게 써준 이 글은 적어도 1806년 이후에 쓴 글이고, ‘균암만필’을 쓴 시기도 같은 때라야 맞다. 다산은 강진 유배 18년간 거처를 네 차례 옮겼다. 처음엔 동문 매반가(賣飯家)에서 5년간 살았고, 1805년 겨울을 혜장의 배려로 고성사(高聲寺)에서 아들 정학연과 함께 났다. 세 번째 머문 곳이 제자 이정의 집이었다. 1806년 가을부터 귤동 초당으로 옮겨가는 1808년 봄까지 이곳에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이 유배시절 혜장 스님 덕에 한동안 머물렀던 전남 강진의 고성사. 제자 이정의 집으로 옮기면서 거처 주변에 대나무를 심은 뒤 '균암'이라 이름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 문화재청
균암, 또는 자균암이란 명칭은 묵재(默齋)란 이름으로도 불렸던 이정 집의 거처 이름이었을 것이다. 1807년 5월 1일에 거처 둘레에 대나무를 옮겨 심고 기뻐서 지은 ‘종죽(種竹)’ 시가 문집에 실려 있다. 대나무에 둘러싸인 집을 다산은 오래 꿈꿔 왔었다. ‘균암만필’은 1807년 5월 이후 1808년 봄 사이에 자균암에서, 자신에게 내린 정조의 특별한 은혜와 사랑의 기억을 하나하나 되살려 써 내려간 기록으로 보인다.
제자 이정은 강진 유배 기간 내내 밀착해서 스승을 도왔던 최고의 제자였다. 하지만 다산의 해배 이후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정은 스승 다산에게서 등을 돌렸다. 다산의 모든 기록에서 이정에 관한 자취 또한 말소되었다. 강진 시절의 기록에서조차 이정 관련 내용만큼은 남은 것이 거의 없다. 다산이 아끼는 제자에게 거의 예외 없이 써 준 증언첩(贈言帖)도 이정에게 준 것만 남아있지 않다.
기록의 편린
‘균암만필’의 내용은 어떤가? 한 단락만 소개한다. 36세 때인 1797년 봄이었다. 다산이 집에 있는데, 임금의 갑작스런 호출이 있었다. 서둘러 비궁(閟宮)으로 들자 임금이 말했다. “내가 내리는 음식을 오래 맛보지 못한 듯하여 오라고 했다. 이리 가까이 와서 먹거라.” 정조는 그저 다산이 불쑥 보고 싶었던 것이다.
상에 토란이 올랐던지, 다산이 음식 먹는 것을 보던 임금이 물었다. “토란(우ㆍ芋)에 별명이 있느냐?” “준치(蹲鴟)입니다.” “속명은 뭐라 하지?” “토련(土蓮)이라 합니다.” “두보의 시에 ‘동산에서 우율(芋栗) 주우니 가난하지만은 않네(園收芋栗未全貧)’라고 했는데 어째서 ‘우(芋)와 율(栗)을 나란히 말했을까?” “우율이 아니라 서율(芧栗)입니다. 작은 밤 또는 도토리란 뜻이옵니다.” “그렇구나. 잘 알았다.”
임금이 다시 물었다. “‘사기’ ‘원앙전(袁盎傳)’에 ‘눈으로 전송한다(目送之)’고 한 구절을 혹 ‘직접 전송한다(自送之)’고도 하는데 ‘혼자서 웃는다(自笑之)’는 말의 잘못이 아닐까?” “아닙니다. 자송(自送)이라 한 것은 한나라 경제(景帝)가 몸소 일어나서 전송했다는 의미입니다.” “네 말이 옳겠다.”
어느 옆구리를 찔러도 기다렸다는 듯이 답이 술술 나왔다. 임금과 신하는 한가한 날의 오후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평소의 궁금증을 이렇게 다 풀었다. 9할이나 없어진 ‘균암만필’의 나머지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서학, 즉 천주교 관련 내용과 이로 인한 조정의 논의에 대한 설명도 상당 부분을 차지했을 듯하다. 후손들이 굳이 감추고 세상에 내놓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었을 것으로 굳이 짐작해 본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조가 문관 꿈꾸는 유생에게 병법책 하사한 까닭
입력 2018.04.26 04:40
1 0
#1
성균관 시절부터 아끼던 다산에
정조, 왜병 방어법 ‘병학통’ 하사
#2
‘무과로 바꿔서라도빨리…’ 속뜻에
낙향하려다 급제하며 해프닝으로
#3
‘새로운 구원자’ 풍문 잦았던 난세
왕조 수호자 간절했던 임금 뜻
유배지에서도 전략서 써내 보은
이런 임금 이런 신하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다산은 정조의 특별한 관리를 받았다. 다산은 반시(泮試)에서 연거푸 우수한 성적을 받으면서 총애가 한 몸에 모였다. 임금은 그를 깊이 아꼈으나 덮어놓고 편만 들지는 않았다.
25세 때인 1787년 8월 23일, 우등 합격 축하선물로 독한 계당주를 단번에 마시게 한 뒤 술기운이 오른 다산이 휘청이자 임금은 내감더러 그를 부축해 물러가게 했다. 잠시 후 그저 가지 말고 빈청에서 기다리라는 명이 다시 내렸다. 얼마 뒤 승지 홍인호가 소매 속에 책 한 권을 품고 나왔다. 홍인호는 혼인 날 꼬마 신랑에게 경박한 소년이란 말을 들었던 다산의 사촌 처남이었다. 그가 그 책을 주면서 임금의 하교를 전했다.
“자네가 장재(將才)를 아우르고 있음을 아신 까닭에 특별히 이 책을 하사하신다고 하셨네. 훗날 김동철(金東喆) 같은 역적이 일어나면 자네가 일어나 나가 싸울 수 있을 거라고 말이지.” ‘균암만필’을 인용한 대목이다.
정조가 다산에게 특별히 하사했던 어정병학통. 정조는 다산을 군인으로 키워볼 생각도 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집에 돌아와 보니 임금께서 하사하신 책은 바로 ‘병학통(兵學通)’이었다.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이 왜병(倭兵)을 방어하면서 진(陣)을 치고 군사 훈련시키던 방법을, 정조가 손수 정리하여 여러 군영(軍營)에 하사한 책이었다. 정조는 문과 급제를 위해 정진 중이던 다산에게 왜 뜬금없이 장재(將才)를 언급했을까?
김동철의 역모와 ‘정감록’
한편 정조가 다산에게 말했다는 김동철의 일이 궁금해진다. 두 달 전인 1787년 6월, 제천 사람 김동익, 김동철 등이 정진성(鄭鎭星) 및 신승(神僧) 명찰(明察)과 작당하여 바다 가운데 있다는 무석국(無石國)에 근거를 두고 역모를 획책하다가 붙들려 죽었다. 이들은 장차 팔도에 내응을 심어둔 채 거사의 일시를 적은 암호로 된 시와 거사 계획을 돌리다가 적발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1년 6월 14일 기사에 자세하다.
나라를 원망하고 세상을 미혹시켜, 국운(國運)과 화복(禍福) 운운한 흉언을 담은 내용이 이들 사이에 오갔고, 그들의 조직이 팔도에 퍼져있다는 말에 조정이 아연 긴장했다. 그 글 속에 “청의(靑衣)가 남쪽에서부터 오는데 왜인(倭人)과 같지만 왜인은 아니다. 산(山)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으며 궁궁(弓弓)이 이롭다”는 알 수 없는 내용이 있었다. 관련자의 신문 내용 중에 또 이들의 복색(服色)이 청색이고, 모두 푸른 관(冠)을 썼다는 자백도 있었다. 황건적이 아니라 청건적(靑巾賊)을 표방한 셈이다.
글 가운데 궁궁(弓弓) 운운한 대목은 60년 전인 1728년(영조 4) 무신년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 진압 과정에서 이미 한 차례 등장했던 구절이었고, 또 1748년(영조 24) 5월 23일 호서 역모 때의 친국에서도 똑같이 등장했던 비기(祕記)였다. 이는 모두 당시 조선사회를 뒤흔들었던 ‘정감록(鄭鑑錄)’의 진인(眞人)에 관한 소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해도(海島)에서 정도령(鄭都令)이라는 진인(眞人)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조선을 점령해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아득한 풍문이었다.
이는 일종의 메시아니즘, 즉 구원 신앙의 변이 형태였다. 정(鄭)을 파자하면 유(酋) 대(大) 고을(邑)로, 정도령은 유대고을 도령이 된다. 재림예수의 코드로 읽힐 수 있는 체제 전복의 불온한 은유였던 셈이다. 숙종조부터 시작된 이 같은 풍문이 근 100년 동안이나 조선 사회를 소요케 했다. 김동철 사건은 이들을 사형에 처함으로써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정조는 다산에게 이 같은 일이 훗날 다시 생길 때 네가 앞장서 정벌해서 발본색원하라고 당부했던 셈이다. 이 문제는 당시 남인 세력의 향배와 천주교 문제와도 미묘한 접점을 둔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었다.
실속이 없다
넉 달 뒤인 1787년 12월에 다산은 다시 반시에 응시했다. 이번에는 등수가 형편없이 낮았다. 임금의 말씀이 이랬다. “여러 번 시험을 보아 번번이 1등을 했지만, 화(華)만 있고 실(實)이 없다. 특별히 그를 위해 화(華)를 거두려 한다.” 일부러 등수를 낮춰 정신을 차리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1789년 초계문신과시방. 수석합격자로 다산의 이름이 나온다. 아래 사진은 다산 이름 나온 부분 확대본.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사암선생연보’는 이 기사에 이어 알쏭달쏭한 다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공은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은거하여 경전 공부에 힘 쏟을 뜻이 있었다. 대개 임금께서 무과(武科)로 진출시켜 쓰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公欲廢擧業, 有隱居窮經之意. 盖上有以武進用之意故也.)”
다산은 임금이 자신의 등수를 일부러 낮춘 것을 문과가 아닌 무과로 이끌어 등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병학통’을 하사하며 하신 말씀이 목에 컥 걸렸고, 그 뒤로도 그 같은 낌새가 다른 경로로 전해졌던 것이 틀림없다.
정조는 하루라도 빨리 다산을 곁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대과 급제는 자꾸 늦어지고 있었다. 임금이 보기에 다산은 장재(將才)가 있었다. 그 장인인 홍화보 또한 무과로 급제해서 승지까지 지냈으니, 장인의 뒤를 따른다면 누가 보더라도 구색이 잘 맞았다. ‘병학통’은 무과 응시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였다.
'사암선생연보' 기록 가운데 정조가 다산을 무장으로 발탁하려 했다는 내용이 보이는 기사. 펼침면 우측에 보인다.
이 같은 임금의 의중을 알아차린 다산은 그만 과거를 포기하고 시골로 돌아가 경전 공부에만 몰두할 작정을 했다. 안 그래도 그 해 4월에 장인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 양수리 인근의 문암(門巖)에 집과 전지를 구입해두고 있던 터였다. ‘사암선생연보’는 또 위 기사에 바로 이어 “매문엄향장(買門崦鄕庄)”, 즉 문암의 시골집을 매입했다고 적어, 두 일 사이에 관련성을 높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가족을 이끌고 서울을 떠날 기세였다.
목숨을 바치자 한들
이 소동은 결국 임금이 다산을 무과로 올리려는 뜻을 접으면서 가라앉았던 듯하다. 다산은 1년 뒤인 1789년 정월에 문과에 당당히 급제해 이 일은 애초에 없던 해프닝으로 끝났다. 훗날 1800년 11월 6일, 정조의 장례가 끝나 건릉(健陵)에 묻히자, 다산은 세상을 떠난 임금이 사무치게 그리워 그때 정조가 자신에게 하사했던 ‘병학통’을 꺼내 들었다. 울며 그 책을 어루만지다가 첫 면 여백에 짤막한 글을 적었다.
“옛날 내가 벼슬하기 전 중희당에서 임금을 뵈었을 때, 술을 내려주시고 또 이 책을 주시며, ‘네가 무재(武才)가 있음을 안다. 이후 김동철 같은 자가 일어나거든 네가 가서 정벌 하거라. 너는 돌아가 이 책을 읽어라’고 하셨다. 아! 나는 실로 재목감이 아니다. 설령 그럴 뜻이 있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한들, 이제 와서 어찌 그리 할 수 있으랴. 책을 어루만지며 긴 탄식을 금치 못한다”고 썼다. 여기에 한 번 더 김동철의 이름이 등장한다.
당시 다산은 정조 서거 후 서서히 숨통을 죄어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었다. 마재 집으로 돌아가 머뭇머뭇 두려워한다는 의미를 담은 ‘여유당(與猶堂)’이란 당호를 내걸고 납작 엎드려 지낼 때였다.
‘아동비어고’와 ‘민보의’ 저술
다산은 자신에게 장재(將才)를 기대했던 임금의 바람을 끝내 저버리지는 않았다. 귀양지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임금과의 생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꾸준히 ‘아방비어고(我邦備禦考)’와 ‘민보의(民堡議)’의 저술에 힘을 쏟았다. 외교 관계 대응 사례를 주제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 편집한 ‘사대고례(事大考例)’ 또한 임금과의 해묵은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들 책은 모두 국방 및 외교와 관련된 예민한 정보를 취급한 것이어서, 유배 죄인의 처지에 함부로 접근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특별히 ‘아방비어고’ 같은 국방 관련 저작은 많은 군사기밀을 포함하고 있어, 자칫 문제를 삼기로 하면 엮기에 따라 곤란한 처지에 놓일 수가 있었다.
정주응의 저술로 알려진 '미산총서'. 다산이 엮은 ‘아방비어고’의 미완성 상태를 보여준다. 국민대 성곡도서관 제공
결국 ‘아방비어고’는 유배 당시 강진에 병마우후(兵馬虞候)로 내려와 다산과 가깝게 지냈던 이중협(李重協)과, 해배 뒤 다산에게 수학한 제자 정주응(鄭周應)의 이름을 빌려 ‘비어고(備禦考)’와 ‘미산총서(眉山叢書)’ 등의 이름으로 흩어졌다. 이중협이 엮은 것으로 되어 있는 규장각본 ‘비어고’ 10책과, 정주응의 저술로 국립중앙도서관과 국민대학교 성곡도서관에 나뉘어 소장된 ‘미산총서’ 각 6책, 8책은 모두 다산이 직접 진두지휘해서 엮은 ‘아방비어고’의 미완성 상태를 보여준다.
특별히 ‘아방비어고’는 본격적인 국방 관련 저작으로 이전에 누구에게서도 나온 적이 없던 놀라운 규모와 세밀함을 갖춘 국방전략 종합 보고서였다. 다산의 저술이 분명하므로 이제라도 제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민의 다산독본] 정조 “필체 괘씸” 다산 좌천시킨 까닭은
입력 2018.05.0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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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글씨란 것은 마음의 깃발”
다산, 자투리 종이에 쓴 메모조차
필획 하나 흐트러지는 법 없어
정조도 단정한 필체 알고 있지만…
서학 문제로 노론 연일 공격하자
천주학 대신 글씨 트집 관직 강등
다섯 달 만에 중앙에 복귀시키며
“이제는 필체가 훌륭하게 변했다”
다산이 1808년 유배지인 다산초당에서 9×6㎝ 크기의 작은 쪽지에 적은 메모. 유배지에서 쓰는 간단한 메모조차 다산은 아무렇게나 쓰지 않았다.
글씨는 마음의 깃발
다산은 ‘심경밀험(心經密驗)’에서 이렇게 썼다. “옛 사람의 편지 글을 보면 이름과 덕망으로 다른 사람의 사표(師表)가 되는 사람은 글자의 획이 반드시 모두 장중해서 거칠거나 들뜬 기운이 없었다. 내가 평생 배우고 싶었지만 매번 글씨를 쓸 때마다 겨를이 없어 또 능히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무릇 글씨란 것은 마음의 깃발이다. 정성스런 마음이 밖으로 드러남이 이처럼 분명한 것이 없다. 하물며 한번 종이에 쓰고 나면 100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산이 유배지에서 읽던 책의 여백과 자투리 종이에 쓴 메모나, 헌 옷을 가위로 잘라 만든 천에다 쓴 글씨를 보면 어쩌면 그렇게 정성스러울까 싶다. ‘승두문자(蠅頭文字)’, 즉 파리 대가리만한 글자조차 필획 하나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다산은 글씨를 절대로 날려 쓰지 않았다. 그 바탕에는 정조의 엄한 독책이 있었다.
필법이 해괴하다
제자를 가르칠 때도 다산은 글씨체를 대단히 중시했다. 강진 주막집에 살 때 마을 뒤편 고성사(高聲寺)에 은봉(恩峰)이란 승려가 있었다. 은봉은 시를 배우자마자 천재적 소질을 발휘했다. 제자 황상(黃裳)에게 쓴 편지에 다음 내용이 나온다.
“은봉의 시재(詩才)는 사람을 정말 놀라게 한다. 다만 그 필법이 해괴하구나. 반드시 글자마다 획마다 단정하게 하기에 힘써 묵은 버릇을 깨끗이 씻어내야 할 것이다.” 이어 글씨 연습용 서판(書板)과 붓까지 보내 그의 글씨 연습을 독려했다.
또 강진 시절 제자 정수칠(丁修七ㆍ1768~?)에게 친필로 써준 ‘교치설(敎穉說)’에서는 글씨 공부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좋은 종이에 큰 붓으로 목판에 새긴 필진도(筆陣圖)를 흉내 내어 쓰는 것은, 얇은 백지를 잘라 만든 작은 공책에 중국에서 간행된 잘 쓴 해서로 된 책을 가져다가 모눈종이처럼 글자판을 만들어 세심하게 베껴 쓰며 익히는 것만 못하다.”
또박또박 활자체를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이, 행초서 익힌다고 흐름도 끊긴 목판 글씨를 흉내내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말한 내용이다.
엄한 처분
다산은 필체가 좋았지만, 처음부터 글씨를 그렇게 잘 썼던 것은 아니었다. 1795년 가을, 중국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몰래 입국하여 여러 해 천주교를 전파하다가 적발되었다. 당시 천주학과 밀접하게 얽혀있고, 영세까지 받은 교인이었던 다산은 온갖 구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정조는 다산을 막 크게 기용하려던 참이었으므로 이 상황이 몹시 난감했다. 우선 급한 비를 피하게 하려고 정3품 당상관이던 그를 정6품의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시켜 내려 보냈다.
1784년 결성된 죽란시사 시절 다산의 글씨. 유배 이후의 글씨 보다 필획이 찰지지 않고 다소 버성긴 느낌이 있다.
당시 정조는 정작 문제가 된 천주학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좌천의 이유로 댄 것은 뜻밖에도 다산의 글씨체였다.
“그가 쓴 글자의 획을 보니, 내가 엄하게 내린 교서를 따르지 않고 삐딱하게 기운 글씨체(斜欹之體)를 여전히 고치지 않고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엄한 처분을 내려서, 설령 이미 선(善)을 향해 가고 있더라도 더욱 선을 향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 혹 이번 일로 스스로 몸을 뺄 수만 있다면 그가 더 훌륭하게 변모할 기회가 되리라.”
그리고는 따로 인사도 하지 말고 당장 길을 떠나 바로 한강을 건너라는 전교를 내렸다. 들끓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짐짓 내치는 모양새를 연출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 든 핑계가 다산의 글씨체였다. 1795년 7월 25일의 일이다.
‘삐딱이’ 서체에 대한 정조의 혐오
삐딱하게 기울여 쓴 서체에 대한 엄한 전교(飭敎)란 실상 다산의 글씨를 겨냥해서 내린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정조는 이른바 문체반정의 드라이브를 건다. 정조의 반대편에 서있던 노론 벽파들은, 정조의 비호 아래 나날이 커가는 남인 세력의 제거를 위해 서학(西學), 즉 천주교 신앙 문제를 여러 차례 정면으로 제기했다.
이때마다 정조는 못 들은 척 딴청만 했다. 신하들의 상소에 답변을 내릴 때도 서학이란 두 글자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 대신 노론 자제들을 중심으로 당대 유행했던 청대 소품 문체의 수용과 겉멋이 든 삐딱한 글씨체를 함께 거론함으로써, 쟁점을 흐려 상쇄시키는 전략을 구사하곤 했다.
1795년 8월 23일에 교리 박길원(朴吉源)이 문체가 점점 강팔라지고(噍殺) 서법(書法)도 기우뚱(傾斜)해지니 엄금해달라고 하자, 시험을 주관하는 사람들이 유념해서 바로 잡을 것을 명했다. 또 1797년 11월 20일 기사에도 동지성균관사(冬至成均館事 성균관 종2품 관직) 이병정(李秉鼎)에게 “문체를 가볍고 어여쁘게 쓰거나 들뜨고 꾸미는(輕姸浮巧) 것과, 필법이 뾰족하고 기우뚱하거나 비스듬하고 날리는(尖斜欹飄) 것을 일체 엄금하라”고 명하고, 따르지 않는 자는 바로 낙방시킬 것을 강하게 주문했다.
삿된 학문인 천주학을 믿었으니 큰 죄를 주어야 한다는 신하들에게 정조는 천주학 언급은 쏙 뺀 채, 쓰지 말라는 뾰족하고 비스듬한 글씨체를 종내 안 고치니 괘씸해서 내친다고 말했다. 공격 지점을 교란시켜 상대의 힘 빼기를 시도한 것이다. 다산은 고작 글씨체 때문에 금정찰방으로 쫓겨났다.
과연 빠르구나
정조의 말이 억지로 찾은 핑계인 것은 이 일이 있기 전인 1795년 3월에 있었던 일화로 알 수 있다. 정조는 신하들과 함께 세심대(洗心臺)로 행차해 꽃구경을 했다. 술도 몇 순배 돌고, 활쏘기도 끝났다. 임금이 먼저 시를 짓고, 신하들이 화답했다. 이때 내시가 오색의 종이를 이어 붙인 채전(彩箋)을 가져왔다. “누구의 글씨가 가장 속필(速筆)인가?” “정 아무개이옵니다.” “화답한 시가 들쭉날쭉하니 네가 이 종이에다 가지런히 옮겨 적어라.”
다산이 명을 받들고 임금이 계신 장막 앞 바닥에 종이를 펴고 붓을 들었다. “아니다. 거기는 땅이 고르지 않으니, 들어와 어탑(御榻) 위에 올려놓고 쓰거라.” 다산이 황공하여 머뭇대자 임금이 다시 재촉했다. 결국 임금이 위에 앉아 내려 보시고, 다산이 어탑을 사이에 두고 임금 앞에 마주 앉아 글씨를 썼다. “음, 과연 빠르구나.”
군신 간에 지은 시가 많아 이날 다산은 두루마리 4축을 써야만 했다. 그 앞뒤의 사연은 ‘다산시문집’ 권 14에 실린 ‘발갱재첩(跋賡載帖)’에 자세하다.
정조는 전부터 이미 다산의 필체를 익히 알고 있었고, 그의 글씨체는 특별히 탈잡을 것이 없는 단정한 글씨였다. 그런데 금정찰방으로 쫓아내면서 일부러 글씨를 구실 삼았다. 다산을 ‘천주학쟁이’로 내몰아 아예 매장시키려는 무리들에게 의도적으로 그것으로는 문제 삼지 말라는 자신의 의사를 시위한 셈이었다.
필체가 훌륭해졌다
다산의 금정찰방 직임은 불과 다섯 달 만에 끝났다. 그는 1795년 12월 20일에 다시 용양위부사직(龍驤衛副司直)으로 중앙 관직에 복귀했다. 1796년 10월에 정조는 다산을 규영부(奎瀛府)의 교서(校書)로 불러들였고, ‘팔자백선(八子百選)’ 등 여러 책을 내려주며 제목 글씨를 써서 올리게 했다. 다산이 쓴 글씨를 본 임금은 “이제는 필체가 훌륭하게 변했다”고 칭찬했다. 앞서 탈 잡았던 글씨체마저도 면죄부를 준 것이다. ‘사암선생연보’에 나온다.
다산은 그 뒤에도 서학 문제로 다시 비방을 입어 2년간 곡산부사로 나가 있어야 했다. 돌아와 잠시 직분을 놓고 있었던 1799년 겨울, 임금이 다산에게 사람을 보냈다. 전한 명령은 이러했다. “육유(陸游)의 시 1권을 베껴 써서 올리라.” 책을 베껴 바치자 임금은 다시 주자시(朱子詩) 한 권을 써서 올리게 했다. 이 또한 부지런히 써서 바쳤다.
10여일 뒤에 임금의 명을 전하러 온 심부름꾼이 다산의 집을 다시 찾았다. “전하께서 지으신 ‘독춘추시병서(讀春秋詩並敍)’를 10벌 깨끗이 베껴 쓰고, 전하께서 지은 시에 화답하여 함께 올리라십니다. 참 그리고 따로 한 부를 베껴 책으로 만들어 집안에 간직해두라는 분부십니다.”
다산이 어명을 받아 쓴 '세서설' 부본의 첫 면. 김영호 소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다산이 이때 써서 올리고 따로 보관해둔 친필 부본이 지금도 남아있다. 다산은 임금의 글을 옮겨 적으면서 그 효성과 학문을 기리고, 내각에 훌륭한 사자관(寫字官)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료할까 봐 위로하려고 이 일을 시키신 것이라며 성은을 헤아렸다. 문집에는 정조의 글이 빠진 채 다산의 글만 ‘세서설(洗書說)’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어찌 보더라도 다산은 정조에게 분에 넘치는 총애를 받았다. 군신간의 은정이 넓고도 깊었다. 정조의 그늘이 아니었더라면 다산은 진작에 죽은 목숨이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800년 6월, 정조가 급작스레 승하하자 다산은 더 이상 기댈 곳 없는 신세가 되어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민의 다산독본] 정조가 내린 800개 질문에 완벽하게 답한 다산
입력 2018.05.1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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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쏘기 과녁 못 맞춘 핑계 삼아
한꺼번에 수백개 깊은 질문 받자
챕터별 정밀히 분류해 메모 정리
질문도 답변도 완벽 ‘군신간 일합’
책 읽다 떠오른 생각 습관적 메모
여백에 쓴 글 모아 책으로 엮기도
메모는 다산 학술의 거의 모든 것
규장전운의 시작부분. 여백의 빨간 글씨는 다산이 쓴 글이다. 哭(곡)자가 뒷면 첫 줄 아래로 배치된 것은 정조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김영호 소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끊임없는 메모
다산의 작업량과 진행 속도, 그가 다룬 분야의 폭과 깊이를 보면 마음이 먼저 아득해진다. 어떻게 이런 작업이 한 사람의 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을까? 다산 학술의 바탕을 이루는 공부와 학습의 방법에 대해 몇 차례 살펴보겠다.
다산이 읽었던 책에는 곳곳에 그의 메모가 남아있다. 읽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이나, 기억해야 할 내용을 그는 책 여백에 습관적으로 썼다. 조금 호흡이 긴 생각은 별도의 공책에다 주제별로 정리했다.
다산가에 전해온 ‘규장전운(奎章全韻)’은 정조가 새로 펴낸 운서였다. 그 책 첫 면 상단에 다산의 메모가 있다. 메모 끝에 ‘신용(臣鏞)’이라 한 것으로 보아, 규장각 시절에 쓴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책 첫 면에 곡할 곡(哭)자가 들어가 상서롭지 못하니 둘째 면으로 밀어내라 한 정조의 지시가 있었다. 그래서 운서에 굳이 안 넣어도 될 어려운 4글자를 일부러 추가해 둘째면 첫 자리에 ‘곡’자가 배치되도록 조정했다는 사연이다.
불쑥 적어둔 이 메모를 통해 당시 정조가 어떤 식으로 신하들을 독려하고, 사소한 문제까지 직접 챙겼는지 알 수가 있다.
논문 한편에 값하는 메모
영남대학교 도서관에 다산의 손때가 묻은 ‘독례통고(讀禮通攷)’란 책이 소장되어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다산의 메모가 빼곡하게 줄지어 나온다. 이 메모들은 해당 본문에 대한 코멘트와 자기 생각을 담았다. 때로는 논문 한편에 해당하는 규모 있는 기록도 들어 있다.
메모마다 어김없이 적은 날짜와 장소, 심지어 당시의 몸 상태까지 적었다. 적소(謫所)에서 병중(病中)에 썼다고 한 메모는 아픈 중에도 붓을 들던 광경이 떠올라 마음이 짠해진다. 책 속의 메모는 1802년 5월 22일부터 1810년 8월 23일까지 8년 넘게 지속되었다. 예학에 관한 다산의 생각이 어떻게 조직되었고, 또 자신의 저술에 반영되었는지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이 가운데 권 49에 실린 1802년 9월 5일의 메모는 분량이 많고 내용도 흥미롭다. 다산은 서두에서 쟁점을 먼저 정리하고, 이에 대한 사계 김장생의 주장을 소개했다. 이어 성호 이익이 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을 자세하게 실었다. 다음 면의 첫 줄은 ‘용안(鏞案)’으로 시작되는데, 앞서 두 사람의 상이한 관점에 대해 다산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놀랍게도 다산은 성호의 비판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성호의 주장이 잘못임을 조목조목 축조 분석한 뒤, 자신은 김장생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겠노라고 썼다.
'독례통고' 본문 위에다 빼곡하게 자신의 견해를 메모해둔 다산. 다산은 급히 메모했던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또 다른 책을 묶어내기도 했다. 영남대 동빈문고 소장
다산은 이렇게 긴 기간에 걸쳐 적어둔 메모를, 해배 후인 1821년 7월에 제자 되기를 청하며 두릉으로 찾아온 이인영이란 젊은이의 손을 빌어 정리했다. 이것이 ‘여유당전서’ 상례외편(喪禮外編) 권 3에 실린 ‘예고서정(禮考書頂)’이다. 이 제목은 ‘독례통고’란 책의 정수리에 적은 적바림을 옮겨 썼다는 의미다. 이렇게 해서 책의 여백에 쓴 메모 묶음이 한편의 독립된 저술의 일부로 재탄생했다.
다산의 이른바 500권 저서 중에는 이 같은 정리의 결과물들이 적지 않다. 보통 고서는 3권을 1책으로 묶고, 이것을 활자로 바꾸면 2책 또는 3책 정도가 오늘날의 책 1권 분량에 해당한다. 다산의 저서 500권은 요즘 식으로 환산하면 70여책 분량쯤 될 것이다.
속필과 속기(速記)
앞서도 보았듯 다산은 속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손이 빠른데다 총기가 뛰어나 대화를 그저 옮겨도 거의 녹취록 수준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1789년, 28세 나던 4월, 다산은 마침내 급제하여 내각의 초계문신(抄啟文臣)으로 발탁되었다.
하루는 정조가 초계문신들을 소집했다. 최정예 신진기예가 한 자리에 모였다. ‘대학’을 주제로 한 즉석 토론회가 열렸다. 임금은 “소학은 무엇이고, 대학은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서두를 열었다. 다산이 대답하자, 다시 질문이 떨어졌다. “대학과 소학은 학교의 명칭이냐, 아니면 학문의 명칭이냐?” 다산이 주자의 서문을 근거로 학교의 명칭이라고 대답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15세에 대학에 들어간다고 하자. 14살인데 소학 공부가 아직 부족할 경우 대학으로 승급시켜야 할까? 그대로 유급시켜야 할까?” 다산은 공부는 단계를 건너뛸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 다음부터 임금은 빠졌다. “이제부터는 너희들끼리 묻고 또 대답하며 토론해라.” 다산은 그 바쁜 문답의 와중에 쉴 새 없이 붓을 놀려 오가는 대화를 붙들어 두었다. 들으랴 말하랴 적으랴 정신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임금은 말없이 오가는 문답을 듣고만 있었다.
챕터 별로 나눠 진행된 긴 토론이 마무리 되었다. 임금은 이들을 다시 한 자리에 모여 앉혔다. 그리고는 ‘대학’ 전체에 대한 총론 격의 종합 토론을 한 차례 더 진행시켰다. 다산은 현장의 거친 메모를 들고 집으로 와서 폭포수처럼 쏟아진 질문과 대답을 수미가 일관된 한 권의 책자로 정리해냈다. ‘희정당대학강의(熙政堂大學講義)’가 그 책이다.
녹취한 것을 옮겨 적어도 정리가 힘들 작업을 그는 기민한 손과 놀라운 암기력으로 완벽하게 복원해냈다. 중간중간 당시 미처 생각지 못했던 대답은 ‘금안(今案)’, 즉 ‘지금 생각해보니’란 말로 구분해서 추가하기까지 했다.
정조의 문답식 학습법
다산이 메모와 카드 작업의 중요성에 눈을 뜬 것은 정조의 이렇듯 매서운 학습법에 훈도된 결과다. 23세 때인 1784년 여름, 정조는 ‘중용’에 대해 80여 조항의 질문을 내렸고, 다산의 답안은 당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또 30세 나던 1791년 겨울에는 ‘시경’에 관해 한꺼번에 무려 800여 조목의 질문이 내려왔다. 임금은 40일의 시간을 줄 테니 답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핑계는 활쏘기에서 과녁을 제대로 못 맞춘 벌이었다. 질문을 보고 놀란 다산이 20일을 더 요청해 겨우 두 달의 말미를 얻었다.
정조는 다산에게 '시경'에 대해 물었다. 무려 800여개의 질문이었다. 정조는 두 달 동안 공부한 끝에 내놓은 다산의 답안에 대해 아주 만족스럽다는 '어평(御評)'을 내린다. 다산은 이 어평을 '시경강의'에 옮겨 적었다. 김영호 소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다산은 먼저 메모용 공책을 몇 권 마련했다. ‘시경’의 체제에 따라 챕터 별로 공책을 달리해서, 사서오경과 각종 고문 및 제자백가, 그리고 역사서에서 ‘시경’이 단 한 구절이라도 인용된 것이 있으면 순서에 따라 해당 대목을 옮겨 적었다. 집중해서 작업하자 몇 권의 서브 노트가 만들어졌다. 중간중간 질문에 대한 답변 메모도 함께 진행해야만 했다.
임금의 질문은 세밀하고 구체적인 지점에 닿아 있었고, 이제까지 모든 ‘시경’ 관련 저술의 총량이 결집된 방대한 분량이었다. 다산은 질문을 앞에 놓고 해당 내용이 인용되었거나 관련 언급이 실린 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미리 꼼꼼하게 정리해둔 서브 노트가 작업 진행에 힘을 실어주었다. 대답도 대답이지만 무엇보다 질문의 내공이 무시무시했다. 학술군주로서의 정조의 면모가 그 질문 속에 다 들어있다. 다산은 꼬박 두 달간 작업해서 답변서를 제출했다. 그의 답변은 질문을 압도하는 꼼꼼한 논증과 해박한 논거 제시로 임금을 다시 놀라게 했다.
문답 순서대로 정리한 책자가 올라가자, 임금은 어필(御筆)을 들어 다음과 같은 평을 내렸다. “널리 백가(百家)를 인증하여 나오는 것이 끝이 없다. 진실로 평소에 쌓아둔 것이 깊고 넓지 않다면 어찌 능히 이와 같으랴. 내가 돌아보아 물어본 뜻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泛引百家, 其出無窮, 苟非素蘊之淹博, 安得有此. 不負予顧問之意, 深用嘉尙.)”
다산은 임금의 비평이 곳곳에 즐비하게 붙은 이 책을 소중히 간직하다가, 18년 뒤인 1809년 가을에 강진 유배지에서 답변을 더 보충하여 이 책을 완성했다. 집안에 전해 오던 가장본 ‘시경강의’ 앞쪽에 다산은 정조의 이 말을 특별히 큰 글씨로 썼다. 무서운 질문에 눈부신 대답으로 군신 간에 일합이 오갔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책 앞쪽에 정조께서 내린 비평을 옮겨 적으며, 돌아가신 임금이 그리워 주르륵 눈물을 떨궜다.
평소의 습관적 메모와 카드 작업의 위력을 잘 보여준 성과였다. 정리 후에도 ‘시경강의’에 질문 항목이 없어 미처 활용하지 못한 카드가 꽤 많이 남았다. 다산은 그것만 따로 추려서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란 별도의 책자로 묶었다. 당시 중풍으로 마비가 와서 몸이 몹시 힘들었는데도 자신의 구술을 제자 이정에게 받아 적게 해서 이 작업마저 마무리 지었다.
메모는 다산 학술의 출발점이자, 거의 모든 것이었다. 다산의 제자들은 메모하는 것으로 그들의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엔 임금이 묻고 다산이 대답했다. 임금이 세상을 뜬 뒤에는, 다산이 묻고 제자들이 대답했다. 공부는 이렇게 문답과 메모를 통해 대물림 되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민의 다산독본] 모든 작업의 첫 발은 “왜 하나” 성찰
입력 2018.05.1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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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뛰어들면 방향을 잃어
‘왜 하나’ 작업 목표가 나오면
‘어떻게’는 저절로 따라와
정조 승하 1년 전의 당부를
21년간 품고 있다가 작업 마쳐
기존 ‘동문휘고’ ‘통문관지’보다
훨씬 검색 쉬운 ‘사대고례’ 펴내
18세기 청 건륭제 연간에 제작된 '만국내조도(萬國來朝圖)'. 여러 나라 사신들이 정초에 청나라 황제에게 조회하는 의식을 그린 그림이다. 화면 하단 코끼리 오른편에 조선 사신들이 있다. 조선에게 대중국관계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데 이 중요한 문제를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해낸 이는 다산이다. 북경고궁박물원 소장
‘사대고례’라는 책
앞 글에 이어 다산의 공부법에 대해 몇 차례 더 살펴야겠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을 말하고 인공지능(AI)을 얘기하지만, 다산의 치학(治學) 방법, 공부에 임하는 태도와 자세 등은 여전히 생산적이고 위력적이다.
다산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펴낸 책 중에 26권 10책 분량의 ‘사대고례(事大考例)’가 있다. 대청(對淸) 외교상 빈번하게 발생하는 각종 실무 접촉에서 효율적인 대응을 위해 이전 사례들을 주제별로 갈래 지워 정리한 책자다. 이 책은 원본이 일본 오사카 부립(府立) 나카노시마도서관(中之島圖書館)에 소장되어 있어 일반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책을 펴면 첫 장에 ‘사대고례찬집인기(事大考例纂輯因起)’가 나온다. 이 책을 왜 편찬하게 되었는지를 밝힌 내용이다. 대뜸 1799년 2월 1일자 ‘승정원일기’부터 인용했다. 정조가 중국 사행에서 종이로 된 패문(牌文)과 나무에 쓴 패문의 차이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자, 그 전례를 캐물었지만 사정을 아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청나라와의 사이에서 발생한 각종 사안에 대한 문서는 129권 60책으로 된 ‘동문휘고(同文彙考)’란 방대한 책자 안에 다 들어 있었다. 다만 이 책은 관련 공문서를 사안별로 모두 파일링한 것이어서 분량만 엄청났지 필요한 정보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다 읽어봐도 맥락이 잘 닿지 않았다.
‘통문관지(通文館志)’도 있었다. 이 자료는 단순히 연대순으로 묶은 것이어서, 특정 사안이 발생했을 때 선례를 찾아 적용하려면 처음부터 일일이 대조해 비슷한 경우를 찾아야만 했다. 일껏 찾아도 경우가 다 달라 정리가 힘들었다.
신하들이 자신의 물음에 벙어리가 되자 정조가 말했다. “‘동문휘고’는 필요한 정보를 찾기가 너무 힘들다. 너희가 편차를 고쳐서 다시 정리하고 ‘통문관지’도 보충해서 정리해두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이듬해 정조가 급작스레 서거하는 바람에 이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 사이에도 청나라와의 각종 민감한 외교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했고, 그때마다 담당자들은 엄청난 자료 뭉치들과 씨름을 해야 했다. 다산은 정조가 살아 생전에 남긴 당부와 이 작업의 필요성을 잊지 않고 있다가, 22년이 지난 1821년 8월에 이 책 ‘사대고례’를 완성했다.
서문은 전 사역원정(司譯院正) 이시승(李時升)의 이름으로 썼지만, 실제 이 책을 엮고 글을 쓴 사람은 다산 자신이다. 당시 그가 재야 민간인 신분이어서 국가 외교에 관한 책에 함부로 이름을 올릴 수 없어, 이시승의 이름을 빌린 것일 뿐이다. ‘사암선생연보’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핵심가치가 먼저다
다산은 모든 작업에 앞서 핵심가치를 먼저 살폈다. 왜 이 일을 하는가? 작업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목표를 점검해서 정확한 방향이 나오기 전에는 일에 착수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 것인지는 그 다음 문제였다. ‘왜’에 대한 성찰 없이 막연한 의욕만으로 달려들면 진척이 더디고 방향을 잃기 쉬웠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조금씩 집적거려둔 것이 그의 손을 거치면 전혀 다른 차원으로 업그레이드 되곤 했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않고, 의미 없이 흩어져 있던 것들에 핵심가치를 투여해서 반짝이는 금강석으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다산은 핵심가치에 맞춰 일목요연한 계통성을 갖춘 정보로 재편집하는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다산은 에디톨로지(Editology)의 대가였다.
‘사대고례’ 편찬 작업의 핵심가치는 기존 ‘동문휘고’와 ‘통문관지’에 실린 대청 외교 문서를 주제별 검색이 수월하도록 간추리는 데 있었다. 관련 문서를 다 모아둔 ‘동문휘고’, 연대순에 따라 늘어놓기만 한 ‘통문관지’의 비효율적 정보 제공 능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작업이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그 다음은 작업 매뉴얼
일단 목표가 정해지자, 그 다음은 매뉴얼을 만드는 작업이 뒤따랐다. ‘어떻게’에 대한 고민에 돌입한 것이다. 외교적 사안이 생길 때마다 전례를 손쉽게 찾아 비교해서 대응전략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주자는 것이 작업의 목표였다. 그러려면 사안을 먼저 갈래에 따라 분류해야 마땅하다.
다산은 길흉(吉凶)과 상변(常變)을 두고 각종 사례를 모두 18항목으로 먼저 나눴다. 순서는 사안의 비중에 따라 정했다. 황제가 바뀌거나 조선의 임금이 바뀔 때 양국이 주고받는 절차나 세자 탄생 같은 축하 사절을 보낼 일, 아니면 무역이나 조문(弔問) 관련 사항, 군사적 접촉과 국경 분쟁에 관한 건, 표류민 환송 같은 난민 구호의 처리 방식 등을 사안에 따라 모두 18개 항목으로 배치했다.
청나라와 외교 관련 공문서를 모아둔 방대한 기록 '동문휘고'. 정조는 필요할 때 참조할 수 있도록 잘 정리됐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정조의 당부를 잊지 않고 다산은 정조 사후 21년 만에 '사대고례'로 이 책을 재편집해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이것들은 또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다산은 먼저 ‘사대고례발범(事大考例發凡)’을 썼다. 작업 지침 또는 원칙에 해당하는 범례를 작성한 것이다. 모두 12조에 걸쳐 작업 방향을 지시했다. 각 하위 챕터의 서두에는 그 영역에서 주요하게 다룬 내용과 하위 갈래의 구분 근거를 명확하게 밝혔다.
한 예로 해금(海禁)과 표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해방고(海防考)’는 해금을 위반한 자를 엄하게 단속한 ‘해금엄속례(海禁嚴束例)’와, 섬을 지키는 ‘해도방수례(海島防守例)’, 우리나라 사람이 외국에 표류한 ‘아인표해례(我人漂海例)’, 중국 사람이 우리나라로 표착한 ‘피인표해례(彼人漂海例)’, 중국 표류민을 압송해서 돌려보낸 사례를 묶은 ‘피표압부례(彼漂押付例)’, 그 밖의 국가에서 표류해온 경우를 정리한 ‘제국인표해례(諸國人漂海例)’ 등 6가지 하위 항목으로 세분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가 강남과 대만의 반청 세력을 꺾은 뒤 연안의 해금(海禁)을 풀면서 부쩍 빈번해진 표류선의 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예전의 비슷한 사안을 이렇게 갈래 지워 그때마다의 처리 과정과 결과를 간략하게 정돈하여 보여주니, 한 눈에 처리의 방향이 매뉴얼로 정리되어 나왔다. 그간의 처리 방식이 어떤 식으로 변화되어 왔는지도 일목요연한 파악이 가능해졌다.
범례와 목차로 방향 잡아주기
다산이 한 일은 범례를 정하고, 목차를 정해주며, 하위 분류의 근거를 챕터별 서문에서 밝혀 작업의 전체 방향을 틀 지워준 것뿐이다. 정리의 실무 작업은 다산의 작업 진행 방식을 가장 잘 이해했던 제자 이정이 도맡아 했다. 이정은 스승의 지시가 떨어지자 곧바로 정리 작업에 돌입해서 그 방대하고 호한한 자료들을 간결하게 추려냈다.
이정의 1차 정리 노트가 올라오면 다산은 붉은 먹을 찍어 중간 중간에 안설(案說)로 필요한 설명을 보탰고, 끝에 비교표를 작성해서 한 눈에 상황을 알아 볼 수 있도록 했다. 이정의 항목 정리가 장황할 경우 붉은 줄을 그어 불필요한 부분을 걷어냈다. 많은 수정 표시로 지저분해진 원고를 다시 한 차례 새 공책에 정리하면, 해당 항목이 눈에 쏙 들어왔다.
당시 청나라와 조선 양국 간에는 정해진 규정과 제도가 있었지만, 적용되는 상황은 그때마다 복잡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상황 파악 후 대책을 세우고 절차를 마련하려면 전례 검토를 통한 상황 장악이 먼저였다. ‘사대고례’는 이 같은 구실에 맞춤형으로 설계된 저술이었다. 다산은 정조가 세상을 뜨기 한해 전에 내린 당부를 21년간이나 품고 있다가 이시승의 이름을 빌려서 작업을 마쳤다. 이 ‘사대고례’ 10책은 다산의 저술이 분명하니, 저작자 또한 다산의 이름으로 돌려놓아야 마땅하다.
한결 같은 작업 원리
다산의 모든 작업은 대부분 이와 같은 과정과 절차로 진행되었다. 먼저 작업의 핵심가치를 정하고, 매뉴얼을 작성한 뒤, 항목 카드 작업에 들어갔다. 1차 편집이 끝나면 여기에 다산이 코멘트를 하고, 항목의 배열과 첨삭을 검토한 뒤 이를 반영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한다. 이 과정을 몇 차례 되풀이하면 어느새 오늘날 우리가 보는 다산의 저술 한 권이 탄생되어 있었다. ‘목민심서’나 ‘마과회통’ 같은 책은 수정 첨삭 과정이 다섯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어떻게’ 보다 ‘왜’가 먼저였다. ‘왜’로 방향이 나오면 ‘어떻게’는 저절로 따라올 문제였다. 모든 작업에서 다산은 이 첫 질문을 잊지 않았다. 왜 이 일을 하는가? 이 일을 함으로써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런 다음에 다산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사람들은 보통 반대로 한다. 왜 하는 지도 모른 채 죽으라고 열심히 한다.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자신을 탓하지 않고 세상을 원망한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민의 다산독본] 다산의 제자라면 반드시 ‘이것’이 있었다
입력 2018.05.2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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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껴 쓴 책 묶은 총서의 유무로
다산 제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어
다산이 잃어버렸다고 애석해 한
‘거가사본’도 총서 더미서 발견
다산이 제시한 매뉴얼ㆍ목차대로
제자들이 챕터별 카드 작성 후
정리해서 엮으면 완벽한 책 둔갑
다산의 제자 황상, 황경 형제가 작업한 ‘치원총서’와 ‘양포총서’ 등 문헌. 최근 발굴된 이 자료에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다산의 책 '거가사본'을 찾아냈다. 황한석 소장, 정민 촬영.
‘거가사본’의 출현
다산의 강진 시절 제자 황상(黃裳)과 황경(黃褧) 형제가 평생을 베껴 쓴 ‘치원총서(巵園叢書)’와 ‘양포총서(蘘圃叢書)’ 및 ‘양포일록(蘘圃日錄)’ 수십 권이 몇 해 전 세상에 나왔다. 광주 황한석 선생이 소장한 책이다. 그 길로 광주로 달려가서 자료를 열람했다. 책상 위에 수십 책을 한꺼번에 펼쳐놓자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다산은 제자 학습법으로 초서(鈔書) 공부를 강조했다. 초서란 책을 베껴 쓰는 것을 말한다. 책이 귀하던 사정도 있지만, 가까이에 두고 읽어야 할 텍스트를 통째로 베끼면서 자기화의 과정을 경험케 하는 공부법이었다. 베껴 쓴 책은 각자 자신의 이름을 딴 총서(叢書)로 정리시켰다.
다산의 제자인지 아닌지는 베껴 쓴 책을 묶은 총서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하면 된다. 이강회의 ‘유암총서(柳菴叢書)’와 ‘운곡총서(雲谷叢書)’, 윤종진의 ‘순암총서(淳菴叢書)’와 ‘순암수초(淳菴手鈔)’, 윤종삼의 ‘춘각총서(春閣叢書)’와 ‘춘각수초(春閣手鈔)’가 각각 남아있고, 손병조의 ‘선암총서(船菴叢書)’와 초의의 ‘초의수초(艸衣手鈔)’, 아들 정학연의 ‘유산총서(酉山叢書)’도 따로 전한다. 여기에 다시 황상의 ‘치원총서’와 황경의 ‘양포총서’, ‘양포일록’ 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15세에 스승과 처음 만났던 황상은 60년이 지난 75세 때도 날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초서 작업을 계속해서, 베껴 쓴 책이 키를 훨씬 넘겼다. 이날 본 자료는 이 중 일부였다. 두근대며 한 권 한 권 펼쳐 살피는데, 그 중 한 책에 놀랍게도 ‘거가사본(居家四本)’이 들어 있었다. 이 책은 다산이 아들에게 부친 편지 ‘기양아(寄兩兒)’에 구체적인 작업 매뉴얼만 나와 있고 실물이 전하지 않던 책이다. 지시만 남고 미처 진행하지 못한 책으로 알았는데, ‘양포일록’ 속에서 ‘거가사본’의 원본이 불쑥 튀어 나온 것이다. 책을 보다 말고 나는 기함을 하고 놀랐다. 다산의 사라졌던 책 한 권이 이렇게 다시 세상에 나왔다.
‘거가사본’ 편집 매뉴얼
거가사본이란 주자(朱子)가 ‘화순(和順)은 제가(齊家)의 근본이요, 근검(勤儉)은 치가(治家)의 근본이며, 독서(讀書)는 기가(起家)의 근본이요, 순리(順理)는 보가(保家)의 근본이다’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집안 생활을 가족관계, 경제활동, 학문활동, 인격수양으로 갈래를 나눠 여러 책에서 발췌한 명언과 일화를 들어 예시한 책이었다. 가족 간에는 화목과 순종이 필요하고, 근면과 검소라야 가계를 꾸려갈 수 있다. 집안을 일으키려면 책을 읽어야만 하고, 매사에 순리를 따르는 것이 집안을 보전하는 바탕이 된다는 뜻이다.
거가사본 표지와 첫 장. 집안을 이끌어나가는 원리와 구체적 사례들을 적어둔 책이다. 황한석 소장, 정민 촬영
다산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기양아’에서 이렇게 썼다. “얼마 전 어떤 사람이 옛 사람의 격언을 청하더구나. 유배지에 서적이 없어 4,5종의 책에서 명언과 귀한 말씀을 옮겨 적어 목차를 정해 책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사람은 이를 고리타분하게 여겨 내던져 버렸다. 흐린 풍속을 웃을 만하다. 덕분에 이 책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가석하다. 너희가 이 목차에 따라 여러 서적에서 가려 뽑아 서너 권의 책으로 만든다면 또한 한 부의 훌륭한 저술이 될 것이다.” ‘거가사본’은 다산이 잃어버렸다고 애석해한 바로 그 책이었다.
다산은 같은 편지에서 사본(四本)의 차례에 따라 정자(程子)나 주자(朱子)의 책과 ‘성리대전(性理大全)’ㆍ’퇴계집(退溪集)’의 언행록(言行錄), ‘율곡집’ㆍ’송명신록(宋名臣錄)’ㆍ’설령(說鈴)’ㆍ’작비암일찬(昨非菴日纂)’ㆍ’완위여편(宛委餘篇)’ 등의 책에서 관련 내용을 초록해 3~4권 분량으로 엮을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는 네 가지 분류에 해당하는 항목 내용들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항목 카드 작업 과정
예를 들어 ‘제가지본(齊家之本)’에는 가족 구성원간의 효도와 공경, 부부 생활, 친척들과의 화목, 하인을 대하는 태도 등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시키고, ‘치가지본(治家之本)’에는 밭 갈고 길쌈하는 일, 의식(衣食)과 농사 및 가축 기르기 등 전원(田園) 생활에 관한 내용을 넣으라고 지시했다.
다산은 이에 앞서 ‘제경(弟經)’의 편집을 지시할 때는 8장으로 목차를 구성하고, 각 장마다 12항목으로 엮게 했다. 또 ‘주자전서(朱子全書)’ 중에서 늘 가까이에 두고 외울만한 내용을 간추린 ‘주서여패(朱書餘佩)’란 책도 12장의 목차를 제시한 뒤 매장마다 12항목씩만 소화하게 했다. 특별히 한 항목이 120자를 넘지 않게 하고, 긴 내용을 압축하는 시범까지 직접 보여주었다.
제자들은 작업의 핵심가치를 숙지한 바탕 위에 스승이 제시해준 매뉴얼에 따라 카드 작업을 진행했다. 카드마다 목차의 어느 항목에 속하는지를 표시한 숫자가 적혀 있고, 이어 120자에 맞춰 본문을 간추려 베낀 뒤 끝에 그 책의 출전을 밝혔다. 이 작업은 성격에 따라 때로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동시에 달려들어야 했다. ‘목민심서’처럼 방대한 작업일 경우, 카드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과 카드의 숫자도 딱 그만큼 늘어났다.
막상 검토해야 할 책이 많아도 책 한 권 중에서 꼭 필요한 카드는 몇 장 나오지 않았으므로, 여럿이 집중 작업을 진행하면 항목 카드 추출 작업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드의 일관성 확보를 위한 장치들
설정 항목에 따른 카드 작업이 끝나면 분류 작업으로 이어졌다. 번호 별로 카드를 분류하고, 카드의 순서를 조정해서 작은 묶음들이 하나 둘 완성된다. 하지만 분류를 마쳤을 때 어떤 항목은 카드가 너무 많고, 어떤 항목은 거의 없어 난감한 경우도 있었다. 특정 항목에 추출 카드가 부족할 경우 다산은 자신의 실제 경험을 적은 카드를 끼워 넣기도 했다. ‘목민심서’ 곳곳에 들어있는 자신의 체험을 적은 카드가 그래서 들어갔다.
치원총서 필사기. 제자 황상이 스승 다산의 지시에 따라 무엇을 어떻게 작업했는지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황한석 소장, 정민 촬영.
단 각 항목별로 들어가는 카드의 숫자는 챕터별로 균형을 맞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카드가 많다 해서 그 부분의 분량이 그에 비례하여 확대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때그때 책에서 꺼낸 카드들이 분류 작업을 거쳐 순서를 매겨 공책에 필사되고 나면, 카드 작업을 할 때는 미처 알 수 없었던 질서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나 작업자 스스로 놀랐다. 그제서야 그들은 카드 작업의 위력을 실감했다. 흩어져 있던 정보들이 하나의 벼리로 꿰어져 쑥 들어 올려져서 한 그물 속에 쏙 들어오는 신통한 경험이었다.
선순환 구조
나는 서울로 돌아와 자료를 검토한 뒤에 ‘거가사본’의 번역 작업을 서둘러 진행했다. 원 출전과 비교해보니, 다산의 지시대로 긴 내용은 간결하게 추려졌고, 원래 짧은 것은 그 상태 그대로였다. ‘제가지본’의 항목 세 개를 이 지면을 빌어 소개한다. 전체 완역을 마친 원고는 따로 갈무리해 출간할 예정이다.
“양성재(楊誠齋)의 처 나부인(羅夫人)은 나이가 70여세였다. 겨울철 동틀 무렵이면 일어나자마자 부엌으로 가서 죽을 쑤었다. 노비들에게 모두 이를 먹게 한 뒤에야 일을 시켰다. 그 아들이 말했다. ‘날씨도 추운데 어찌 몸소 이처럼 수고롭게 하십니까?’ 부인이 말했다. ‘노비 또한 사람의 자식이니라. 새벽이라 추우니 모름지기 배에 뜨듯한 기운이 있어야 일을 할 수가 있다.’”
다음 항목은 또 이렇다. “노비 또한 사람의 자식이다. 나보다 부족한 것은 돈일 뿐이다. 재물이 부족해서 부모를 떠나 주인에게 몸을 내맡겨 시켜 부리는 대로 일하며 명령을 따른다. 그런데 이들에게 가혹하게 하고 포학하게 굴어, 못 견딜 정도로 나무란다. 또 주리고 춥게 하면서 가둬놓고 나오지 못하게 하기까지 하니, 어쩌면 이다지도 생각이 없는가? 어찌 내가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지 않는가?” 노비의 자리에 아래 사람을 넣으면, 갑질하는 대기업 오너들이 바로 새겨들어야 할 얘기다.
자식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는 주자의 다음 말을 인용했다. “재물을 널리 쌓아둠은 자식을 가르침만 못하다. 부형이 자제를 독려하여 가르침은 다만 사귀는 벗을 삼가 선택하고, 단정하고 방정함을 널리 확장시키는데 달려있다.” 돈만 주고 바르게 안 가르치니 자식의 버릇만 나빠진다. 자식보다 한 수 더 뜨는 부모라면 답이 없다. 다산의 이 ‘거가사본’은 오늘날의 가정 교육서로도 효용이 살아있다.
카드 작업 진행을 위해 제자들은 스승이 제시한 책을 다 훑어보아야 했다. 먼저 독서의 이익이 적지 않다. 항목을 옮기면서 내용을 새기는 사이에 각인의 효과가 더해진다. 다시 이것을 정리해 엮는 과정에서 편집의 노하우를 익힐 수 있다. 이 방법을 확장해 향후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추출하여 재배열하는 응용이 쉬워진다. 다산의 이 같은 작업 방식은 선순환(善循環)으로 확장되는 지식 경영의 실례를 잘 보여준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민의 다산독본] 정조의 심술궂은 ‘숙제’ 벗들과 머리 맞대 풀다
입력 2018.05.3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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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의 남동생이던 이벽
정조의 ‘중용 70문제’ 같이 풀어
한밤에 낸 ‘장편시 1400자’ 숙제
이가환 도움으로 새벽까지 해결
정조도 완벽한 답안에 그저 감탄
천주학 빌미 이가환 성토 당하자
다산 ‘이렇게 반박을’ 훈수
상소 올린 정적이 되레 귀양
이벽(1754~1785) 초상화. 이벽은 초기 천주교 신자 공동체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다산 집안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제공
끊임없이 묻고 치열하게 답하다
이번에는 다산의 학습법 중 토론과 강학에 대해 살펴보겠다. 다산 생애의 여러 장면에서 집체 강학을 통한 토론의 모습이 지속적으로 목격된다. 한 가지 주제를 들고 여러 날 한 곳에 머물며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은 다산이 속해 있던 성호학파의 학적 전통에 뿌리를 둔다. 이들은 공부 도중에 문제에 막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면 모여서 상의하고 함께 토론했다.
이동 거리가 멀어 만날 형편이 못 되면 쟁점을 두고 편지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편지 토론일지라도 의례적 인사나 시늉이 아니라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살벌할 때가 많았다. 특히 강진 시절 문산 이재의와 주고받은 논쟁은 집요하고도 치열했다. 대충 합의해서 중간에 덮지 않았다. 양쪽 다 승복이 안 되면 깨끗하게 각자의 길을 갔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상대의 인격을 존중한 것이 경이롭다.
화순 동림사에서 한 겨울 형 정약전과 공부하며 토론한 일부터, 성균관 반촌(泮村)에서 천주학 서적을 함께 모여 공부하던 일, 온양 봉곡사에서 성호 학술대회를 열 때, 만덕사 승려 아암과의 열띤 토론, 멀리 흑산도를 두고 형 정약전과 오간 학술 문답, 해배 이후 신작, 홍석주, 김매순 등과 오간 논변 등은 모두 다산의 학적 생애에서 인상적인 장면들이다.
이벽과의 토론을 통한 답안 작성
1784년, 다산은 23세였다. 정조가 ‘중용’에 대한 70조목의 문제를 냈을 때, 다산은 이벽(李檗)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다산보다 여덟 살이 많았다. 맏형 정약현의 부인 경주 이씨가 이벽의 누님이었다. 당시 다산은 회현방의 재산루동(在山樓洞)에 살았고, 이벽의 집은 수표교에 있었다. 성균관을 오가는 길목이었으므로 다산은 오다가다 그에게 자주 들렀다.
당시 이벽은 그 해 초 이승훈이 자신의 부탁으로 북경에서 가져온 천주교 교리서를 전해 받고 서학(西學)에 깊이 빠져든 상태였다. 다산은 임금이 내린 질문을 들고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 뒤 이벽의 의견을 청취했다. 두 사람은 진지하게 토론하며 함께 답안을 작성해 나갔다. 매끄럽지 못한 표현과 논의는 다산이 다시 깎아내거나 보태서 정리했다. 제출된 답안은 그 사유의 방식이 워낙 독특해 정조가 보고 깜짝 놀랐다.
다산의 ‘중용’ 문답의 바탕에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천(天)과 상제(上帝) 개념 및 천도(天道)와 천명(天命)에 관한 서학적(西學的) 이해가 깊이 깔려있었다. 다산은 훗날 강진 유배지에서 정리한 ‘중용자잠(中庸自箴)’과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여러 곳에서 이벽의 주장을 그대로 따왔음을 숨기지 않고 밝혔다. 당시 토론의 흔적과 생각의 주인을 분명히 하려 한 것이다.
1814년 ‘중용강의보’를 마무리 짓고 나서 서문 끝에 다산은 이렇게 썼다. “위로 광암 이벽과 토론하던 해를 헤아려보니 또한 이미 30년이 흘렀다. 광암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더라면, 덕에 나아가고 박학한 것을 어찌 나와 견주겠는가.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
중용강의보 첫 면. 다산은 자신의 중용 해석이 이벽에게 빚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김영호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중용자잠 첫면. 다산이 자신의 중용 해석이 이벽에게 영향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김영호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786년 가을 이벽이 갑작스레 병으로 세상을 뜨자, 다산은 ‘벗 이덕조 만사(友人李德操輓詞)’에서 그를 이렇게 애도했다.
선학(仙鶴)이 인간 세상 내려왔던가
훤출한 풍모가 드러났었네.
깃촉은 눈처럼 깨끗하여서
닭과 오리 시기해 성을 냈었지.
울음소리 하늘 높이 울려 퍼지면
소리 맑아 풍진 위로 넘놀았다네.
갈바람에 홀연 문득 날아가 버려
구슬피 사람 마음 애닯게 하네.
仙鶴下人間 軒然見風神(선학하인간 헌연견풍신)
羽翮皎如雪 鷄鶩生嫌嗔(우핵교여설 계목생혐진)
鳴聲動九霄 嘹亮出風塵(명성동구소 료량출풍진)
乘秋忽飛去 怊悵空勞人(승추홀비거 초창공로인)
하루 밤 만에 지어 올린 100운의 시
1795년 2월에 다산은 마침 병조에서 숙직 중이었다. 다산은 그날 군중에서 쓸 암호를 ‘선화(扇和)’로 적어 올렸다. 마침 봄바람이 부채질하듯 따뜻하게 불어왔기 때문이다. 군기가 빠졌다고 여긴 정조가 암호를 고쳐 새로 올리라는 엄한 교지를 내렸다. 다산 말대로라면 아흔 아홉 번이나 퇴짜를 맞은 끝에 ‘만세(萬歲)’로 올리자 겨우 재가가 떨어졌다.
곧바로 견책의 뜻을 담은 숙제가 내려왔다. “폐하는 만세를 누리옵소서. 신은 2,000석이 되었습니다(陛下壽萬歲, 臣爲二千石)”를 제목으로 새벽 문이 열릴 때까지 7언 배율 100운(韻) 200구의 시를 지어 올리라는 엄명이었다. 숙제를 받았을 때의 시각이 이미 밤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출제 의도조차 모호한 제목이었다. 제목을 던져주고 가는 승지의 말이 이랬다. “전한(前漢) 시절 인물의 활쏘기와 관계된 이야길세.” 이게 힌트의 전부였다.
자료를 찾아 뒤질 시간 여유조차 없었다. 다산은 당시 조선 최고의 천재로 불리던 이가환의 집으로 문지기를 급히 보내 다급하게 도움을 청했다. 자다가 일어난 이가환이 즉석에서 붓을 달려 관련 고사를 일러주었다. 1시간 만에 답장이 돌아왔다. 11시를 막 넘긴 시간부터 다산은 붓을 달렸다. 7언 200구이니 무려 1,400자에 달하는 장편시를 운자의 규칙까지 맞춰 써야 했다. 내용은 전한 시절 왕길(王吉)이 창읍왕(昌邑王) 밑에서 중위(中尉) 벼슬을 할 때, 왕이 사냥을 과도하게 즐기므로 사냥을 그만 두고 학문에 힘쓰라고 간했던 일을 가지고 쓰되, 임금의 축수와 자신의 다짐을 담은 제목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다산은 숨도 쉬지 않고 붓을 내달려, 마침내 장강대하의 7언 200구를 마치고 나서 붓을 던졌다. 새벽 4시 반이 막 지나고 있었다. 불과 5시간 반 만에 그 엄청난 장시를 지은 것이다. 문집에 실린 ‘병조에서 분부에 따라 왕길의 석오사 100 운을 짓다(騎省應敎 賦得王吉射烏詞一百韻)’가 바로 그 작품이다.
정조는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다가 동트기가 무섭게 올라온 답안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정조는 시 끝에 전후 사정을 자세히 적고, “전개가 원만하고 구절이 야무지다. 중간중간 훌륭한 말도 많다. 오늘 이 사람의 작품은 신속하기는 시부(詩賦)보다 낫고, 내용은 표책(表策)에 밑돌지 않는다. 이처럼 실다운 인재는 드물다고 할만하다”는 비평을 내렸다. 대신들도 작품을 보고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초계문신 시절 정조가 다산에게 내린 상을 담았던 포장지. 포장지 겉면에는 상으로 내린 약재의 내용물을 써뒀다. 만보장춘원(萬寶長春元) 1환(丸), 천금광제환(千金廣濟丸) 3환, 입효제중단(立效濟衆丹) 3정이다. 강진 윤관석 소장, 정민 촬영
이렇게 반박하시지요
1795년 7월 7일에는 박장설이 천주학을 믿는 남인을 겨냥하여 이가환과 정약전을 주적으로 삼아 상소문을 올렸다. 박장설은 상소문에서 이가환이 조카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 요사스런 천주학 책을 사오게 해 스스로 교주가 되어 남의 자식을 해치고, 남의 제사를 끊어버렸다고 격렬하게 성토했다. 연전 임금이 책문(策問)에서 역상(曆象)에 대해 묻자 ‘청몽기(淸濛氣)’란 불경스런 주장을 신법(新法)이라 하며 방자하게 떠벌렸다고 공격하기까지 했다. 아울러 정약전이 오행(五行)을 주제로 쓴 책문에서 금목수화토의 전통적 오행(五行)을 서양 사람의 수화토기(水火土氣)의 사행(四行)으로 대체해 답안을 올렸는데도 이가환이 이를 합격시켰다고 고발하였다.
청몽기는 ‘청몽기차(淸濛氣差)’로 지구의 대기에 의해 태양빛 또는 별빛이 굴절되는 각도 차이를 가리키는 천문학 용어다. ‘역상고성(曆象考成)’에 처음 소개된 덴마크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학설이었다. 답안 가운데 서양 천문학에서 나온 용어 하나를 꼬투리 잡아 그가 천주학을 한다는 증거로 삼은 모략이었다.
이 터무니없는 상소에 다산은 자기 일처럼 격분했다. 그는 이때 이가환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이 계속 이 말로 꼬투리를 잡거든, 진(晉)나라 속석(束晳)의 글이나 ‘한서(漢書)’의 ‘경방전(京房傳)’에 나오는 몽기(濛氣)의 용례를 들어 반박하라고 훈수했다. 자신이 중국 고전을 뒤져서 찾아낸 청몽기의 여러 용례를 알려준 것이다. 앞서는 도움을 받았고, 이번엔 갚았다.
정조는 크게 노하여, 도리어 상소를 올린 박장설을 두만강으로 먼저 귀양 보냈다가 다시 동래로 옮긴 뒤, 제주를 거쳐 압록강으로 귀양지를 옮기는 최악의 유배형에 처해 버렸다. 이렇게 동서남북으로 떠돌게 한 것은 상소문의 서두에서 박장설이 자신을 기려지신(羈旅之臣), 즉 ‘떠돌이 신하’라고 자칭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제가 생기면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가면서 이들은 동지적 결속과 학문적 유대를 강화시켜나갔다. 온양 봉곡사에서 열흘 간 열린 성호 학술 세미나와 강진 시절 제자들과 함께 한 각종 토론, 그밖에 여러 벗들과 진행한 열띤 토론의 장면에 대해서는 차례로 좀더 깊이 들여다보겠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다산, 정조와 함께 ‘노아의 방주’를 읽었다
입력 2018.06.0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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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촌 이내 성인ㆍ성녀ㆍ복자가 6명
평생 천주교와 얽힌 다산
정조가 홍수로 시 짓게 하자
다산 ‘나아방주의 일’ 인용
왕이 “어느 책에 나오느냐” 묻자
“전하와 읽은 책서 보았나이다”
서양 과학기술서 전파 붐 타고
사대부 의식 저층으로 스며들어
초기 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 명례방 공동체. 현재 명동성당 자리에 있던 명례동(현재의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열린 교인들의 모임을 말한다. 이 공동체엔 다산을 비롯해 정약종 정약현 이벽 등이 드나들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무후무한 순교자 성인 집안
다산에게 서학(西學), 즉 천주교는 평생 헤어날 수 없었던 굴레였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천주교 신앙 문제가 다산의 발목을 낚아챘다. 정조의 눈 먼 사랑과 두둔이 없었다면 다산은 진작에 죽었을 목숨이었다.
조선 천주교회의 창립과 확산, 그리고 그 참혹한 박해의 과정에서 다산은 늘 한복판에 있었다. 조선 천주교회 창립 주역인 이벽(李檗)은 큰 형수의 동생이었고, 최초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창설의 리더 역할을 맡았던 이승훈은 누나의 남편이었다. 형님인 정약전, 정약전의 스승 권철신 권일신 형제도 초기 교회 창립의 핵심 주역이었다.
형 정약종은 평신도 대표로 있으면서 ‘주교요지(主敎要旨)’란 천주교 교리서까지 썼다. 그의 아내 유조이 체칠리아와 딸 정정혜, 아들 정하상은 모두 순교하여 가톨릭교회의 성인품에 올랐다. 먼저 세상을 뜬 큰 아들 정철상은 복자(福者)가 되었다. 큰 형 정약현의 딸 정난주는, 무력으로 쳐들어와서라도 종교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탄원으로 온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은 황사영의 아내였다. 조상의 신주를 태우고 제사를 거부해 천주교 탄압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게 한 윤지충은 다산과 이종사촌 간이었다. 윤지충을 천주교로 끌어들인 것도 바로 다산 형제였다. 정약종과 윤지충 또한 2014년 복자품에 올랐다.
다산과 친가나 외가로 4촌 이내의 범위 안에서 가톨릭 교회의 성인과 성녀가 셋, 복자가 셋씩이나 배출되었다. 순교자 수는 훨씬 더 많다. 사우(師友)를 포함해 다산과 관련된 순교자의 명단은 초기 조선 가톨릭교회의 핵심그룹 그 자체였고 또 전체였다. 그의 집안은 세계 가톨릭 역사에서 앞에도 없었고 뒤로도 나올 수 없는 성인과 순교자의 가문이었다.
천진암 성지의 천주교 창립주역 5인의 묘소 사진. 정약종 이승훈 이벽 권철신 권일신이 차례로 묻혀있다. 이 다섯 사람은 모두 다산과 인척 또는 사우(師友)로 긴밀한 관계였다. 정민 제공
다산이 썼다는 ‘조선복음전래사’
다산은 천주교에 관한 한 어떻게 하더라도 헤어날 수 없게 깊이 얽혀 있었다. 그는 이승훈에게 자청하여 영세를 받아 ‘약망(若望)’, 즉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한때 과거시험 공부도 팽개친 채 여럿이 모여 천주교 교리서를 공부하다가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명례방의 종교 집회에 참석해 적발된 일도 있었다. 자식들이 천주학에 깊이 빠진 것을 뒤늦게 안 아버지 정재원이 곁에 두고 철통 감시까지 했어도 다산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정조의 기대를 차마 저버릴 수 없어 배교(背敎)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 마음속에서 신앙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이 천주교 신자였던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다만 배교한 뒤 만년에 다시 참회해 신자의 본분으로 돌아왔는지 여부는 의견이 엇갈린다. 천주교 쪽의 가장 신뢰할만한 문서인 다블뤼(Antoine Daveluyㆍ1818-1866) 주교의 비망기에는, 다산이 만년에 참회의 생활을 계속하면서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했고, 세상을 뜨기 직전 종부성사까지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조선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그가 남긴 비망기엔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참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충남 당진 신리성지에 조성된 다블뤼주교 기념관. 한국일보 자료사진
다블뤼 주교는 그의 비망기에서 초기 가톨릭의 조선 전래에 관한 기술은 너무 간략하나 매우 정확하고 잘 된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에 대부분 힘입었다고 분명히 썼다. 다블뤼는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이래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할 때까지 21년간 조선에 머물렀던 조선통이었다. 그는 조선 사람보다 더 조선말을 잘 한다는 평을 들었다. 그의 비망기는 때로 전문(傳聞) 과정에서 다소의 과장이나 부정확한 내용이 일부 포함되었을망정 거짓으로 꾸며서 쓴 기록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정작 다산 자신의 글 속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안 나타난다. 다산은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이나 내용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거나 외면하는 자기 검열을 거쳤다. 그간 이 문제에 관한 한 국학연구자와 천주교계의 논의는 얼음과 숯처럼 갈라져서 중간 지대가 전혀 없다. 자기 쪽에 유리한 내용만 보려는 통에 감정의 골만 깊어졌다. 다산의 신앙과 배교도 사실이고, 만년의 참회도 거짓이 아니다. 그렇다면 다산의 경학 연구는 이로 인해 허물어지고 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이것은 결코 도 아니면 모, 전부냐 전무냐로 갈라 말해서는 안 될 문제다. 천주학과 유학의 공존, 이 가운데 다산을 배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 다산이 만년에 천주교인으로 다시 돌아온 것과 그의 경학 연구 사이에 특별한 모순 관계가 없다는 가설이 대전제다. 이렇게 보면 다산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율배반의 인간이 아니라 그 시대를 전신으로 받아들여 치열하게 진실을 살다간 영혼이 된다. 실상은 뭔가? 다산은 어떻게 천주교에 발을 들여 놓았고, 중간의 과정은 어떠했나? 아니 그보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천주학이란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이제부터 여러 회에 걸쳐 이 문제를 찬찬히 살펴보겠다.
의식의 기층으로 스며든 천주학
해마다 두 차례 이상 중국으로 떠난 조선의 사신들은 북경을 갈 때마다 천주당에 들러 선교사와 필담을 나누고, 그들이 주는 각종 선물을 받아왔다. 1764년 홍대용은 북경 성당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처음 보고, 음악에 대한 자신의 깊은 조예로 직접 건반을 눌러 보았다. 천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토론을 기대하고 신부와 면담을 요청했지만, 언어의 장벽 말고도 두 사람 사이에는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수준 차가 너무도 현격해서 심도 있는 대화는 애초에 진행될 수가 없었다. 관상감 옥상에 각종 천문관측 기구가 놓인 관상대는 조선 사신 일행이 꼭 가고 싶어 하는 장소의 하나였다.
북경의 천주당. 조선 유학자들은 이곳을 통해 서양 과학과 역법을 접했다. 이런 방식으로 서학은 조선 지식인들의 의식을 파고들었다. 정민 제공
과학기술과 역법에 대한 호기심이 강렬해지면서 관심은 점차 그 배경 사유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나 빤토하의 ‘칠극(七克)’ 같은 책은 진작부터 조선에 들어와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었다.
기중가(起重架)를 제작할 때 정조는 서양인이 쓴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다산에게 내주어 참고하게 했다. ‘직방외기(職方外紀)’ 같은 지리서와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같은 세계 지도는 세상이 얼마나 넓고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깨우쳐 주었다. 한문 서양서를 통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식견을 공유하는 것은 탐구욕에 불타던 조선의 지식 청년들에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중국이 진작에 공인한 천주교를 조선이 굳이 배격할 이유가 있는가? 게다가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들은 ‘보유론(補儒論)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유학과 천주교는 상호 보완의 관계이지 대립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실제 조선 지식인들이 구해 읽어 본 ‘천주실의’나 ‘칠극’, 그리고 스콜라 철학의 사유를 담은 ‘영언여작(靈言蠡勺)’ 같은 책에는 이제껏 보지 못한 놀라운 통찰과 깊은 사유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로 갈리고,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으냐 다르냐로 나뉘어 100년 넘게 사생결단하고 싸우던 지식계의 풍경 안에 속해 있다가, 이들 글을 읽자 그들은 홀연 답답함이 뻥 뚫리고, 새로운 세상의 한 축이 열리는 느낌을 가졌다. 이렇듯 천주학은 서양 과학기술서의 전파 붐을 타고 조금씩 알게 모르게 사대부의 의식 저층으로 스며들었다.
답안에 쓴 노아의 방주 이야기
이능화가 1925년에 펴낸 ‘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의 제 18장은 제목이 ‘정씨형제삼인(丁氏兄弟三人)’이다. 그 중 다산이 탄핵 받은 일을 다룬 ‘정약용피핵(丁若鏞被劾)’조에 묘한 기사가 있다.
정조가 다산과 이학규에게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켰다. 책이 완성되어 올라갔다. 임금이 보니 ‘부(父)’자의 풀이에 ‘시생기(始生己)’란 말이 나왔다. 시생기란 처음 나를 낳아준 분이란 뜻이다. 정조가 불쑥 물었다. “이 뜻풀이는 어느 책에 나오는 것이냐?” 천주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처음 나를 낳아주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교리서의 설명 중에 나오는 대목이었다. 이 문제로 신하들 사이에 ‘규장전운’을 훼판(毁板)해야 한다는 비난이 비등했지만 정조는 애써 무시했다.
한 번은 홍수를 제목으로 문신들에게 시를 짓게 한 일이 있었다. 다산이 올린 응제시(應製詩) 중에 놀랍게도 ‘나아방주(挪亞方舟)’의 일, 즉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인용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왕이 다시 물었다. “방주의 일은 어느 책에 나오느냐?” 다산이 대답했다. “신이 전하를 모시고 그 책을 읽을 적에 이 뜻을 보았나이다.(臣於侍讀之其書, 得見此義.)” ‘시생기’와 노아의 방주 일은 모두 천주교 책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정조 또한 그 책을 다산과 함께 보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월북한 최익한이 1955년에 펴낸 ‘실학파와 정다산’에서도 소개 되었다. 여기서는 노아의 방주를 ‘나닉(那搦)의 상주(箱舟)’로 적었다. 이능화와 최익한 두 사람 모두 인용의 명확한 근거를 밝히지는 않았다. 당시 천주교 서적에서 노아는 ‘낙액(諾厄)’ 즉 ‘노에’로 표기하였으니, 근거가 된 원전 자료의 확인 문제가 남는다. 혹 당시까지 다산 집안에 분명히 있었던 ‘균암만필’ 속의 내용이 아니었을까 싶지만 단정키 어렵다.
최익한은 이 일화를 소개한 뒤 한 발짝 더 나아가 “당시 반대당의 공세가 없었다면 서서(西書) 연구와 서교 신앙은 큰 문제로 되지 않고 오히려 자유 상태에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유당전서를 독함’에서는 “가령 당시에 벽파 서인이 영구히 집권하고 또 왕위 계승자가 정조의 혈통이 아니었다면 정조 자신도 사학(邪學)을 비호한 연좌율을 죽은 뒤에 어떤 형식으로도 받지 않았을까?”라고 했다. 그 혜안이 자못 놀랍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천주교리 처음 듣고는 “놀랍기가 끝없는 은하수 같아”
입력 2018.06.1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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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형수 제사 지내고 오는 길에 형수 동생 이벽이 천주학 강의 “대체 무슨 말?” 처음엔 황당 반응 호기심에 책 빌려 읽다 푹 빠져 아버지 따라 북경가던 이승훈에 이벽이 천주당 들러 책 구입 부탁 수학 공부위해 교회 찾은 이승훈 천주학에 훈도 조선 첫 영세 받아
중국에 남아있는 작자 미상의 마테오 리치(왼쪽)와 아담 샬 인물화. 조선 지식인들은 청나라에 들러 이들 서양인이 전해준 문물에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접했다.배 안에서 처음 들은 천주학 강의
다산은 22세 나던 1783년 성균관에 처음 입학했고, 큰아들이 태어났다. 그해 회현방으로 이사해 누산정사(樓山精舍)에서 살았다. 한 해 동안 여러 가지로 좋은 일이 많았다. 이듬해인 1784년 여름, 큰형수의 동생인 이벽의 도움으로 ‘중용강의’ 70조목을 지어 올려 임금의 극찬을 받았다.
이벽은 ‘중용강의’만 도와준 것이 아니라, 다산 형제들에게 서학(西學)을 심었던 사람이었다. 이에 앞서 큰형수가 어른들 병구완을 하다가 병이 옮아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1784년 4월 15일, 누이의 기제사에 참석했던 이벽은 다산 형제와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배 위에서 이벽은 정씨 형제들에게 천주학에 대해 강의했다. 팔당에서 미사리까지는 여울이 져서 쏟아져 내리는 물길이었다. 이벽의 강의는 그 물길처럼 도도해 거침이 없었다.
다산은 훗날 중형 정약전을 위해 쓴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에서 이때 일을 이렇게 적었다. “우리 형제는 이벽과 함께 한배를 타고 내려오다가 배 안에서 천지 조화의 시작과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의 이치에 대해 들었다. 멍하니 놀라고 의심스럽기가 마치 은하수가 끝없는 것만 같았다.” 세상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이벽은 들뜬 상태로 신이 나서 천주교의 가르침을 펼쳤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다산의 첫 반응은 어땠을까? 다산의 표현대로라면 ‘멍하니 놀라고 의심스러웠다(惝怳驚疑)’였다. ‘창황(惝怳)’은 너무 놀란 나머지 정신이 멍해진 상태를 말한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어쩌자는 거야? 이것이 천주학에 대해 들은 다산의 첫 반응이었다.
끝도 없는 은하수
그러고 나서 다시 ‘마치 은하수가 끝없는 것만 같았다(若河漢之無極)’고 당시의 심리 상태를 설명했다. 이 대목을 ‘조선천주교회사’를 쓴 달레를 비롯해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천주교의 교리를 듣고 나서 은하수를 보는 것처럼 황홀한 상태에 빠져들었다고 해석했다. 그렇지 않다. 이 표현은 ‘장자(莊子)’의 ‘소요유’ 편에서 따온 것이다.
‘장자’의 해당 대목은 이렇다. “내가 초나라 미치광이 접여(接輿)의 말을 들었는데, 거창하기만 하고 합당한 구석이 없었다. 한없이 펼치기만 했지 돌아올 줄 몰랐다. 나는 그의 말이 놀랍고 두려워서 은하수가 끝이 없는 것만 같았다(吾聞言於接輿, 大而無當, 往而不返. 吾驚怖其言, 猶河漢而無極也.)”
하한무극(河漢無極)은 중국어 사전에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고 불경스러워 도저히 믿기 어려운 것을 비유하는 표현(比喻言論荒誕不經, 難以置信)’으로 나와 있다. 그러니까 이벽에게서 처음 천주교 교리를 들은 다산의 첫 반응은 ‘황홀’이 아닌 ‘황당’이었다. 저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할까?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 거지?
이때 다산의 당황스러운 반응은 같은 날 쓴 시 ‘벗 이덕조와 함께 배를 타고 서울로 오면서(同友人李德操檗乘舟入京)’의 7,8구에서 “졸렬하여 맥락에 못 기댐을 깊이 알아, 남은 경전 붙들고서 옛 성현에 보답하리(深知拙劣絡無賴, 欲把殘經報昔賢)”라 한데서도 엿보인다. 놀라운 말을 들었지만 그냥 유가 성현의 글 공부나 계속 하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갑작스레 확 달라진 이벽의 확신에 찬 말과 행동에 호기심이 생긴 다산 형제는 상경 직후 이벽을 찾아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판토하(Pan-toja)의 ‘칠극(七克)’ 외에 샤바냑(Emericus de Chavagnac)이 쓴 천주교 교리서 ‘진도자증(眞道自證)’과 마이야(De Mailla)가 정리한 가톨릭 성인전 ‘성년광익(聖年廣益)’ 등을 빌려 읽었던 듯하다.
판토하가 쓴 '칠극'. 정민 교수 제공
형제는 그제서야 앞서 느낀 황당함을 지우고 “비로소 기쁘게 마음이 기울어 그리로 향하였다.(始欣然傾嚮.)” 황당함은 어느새 다시 황홀함으로 바뀌었다. 멍하니 몽롱하던 정신이 돌아오면서, 이후 형제는 강력한 은하계의 블랙홀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갔다.
“북경에 가거든 천주당을 찾아가게.”
이벽은 전부터 혼자 남몰래 천주학 관련 책을 찾아 읽고 있었다. 이벽은 서학이 더없이 궁금했지만 혼자 하는 공부로는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책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벽은 성호 이익의 조카였던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의 문인이었다. 이벽이 1776년 10월 15일에 스승 이병휴의 영전에 올린 친필 제문이 남아 있다. 이병휴는 양명학에 기운 성호 좌파에 속한 학자였다. 권철신 권일신 형제가 그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벽이 쓴 스승 이병휴를 위한 제문.
1783년 겨울, 가깝게 지내던 벗 이승훈은 아버지 이동욱을 수행하는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을 향해 출발했다. 부친은 서장관의 직분을 맡고 있었다. 이벽은 다산의 자형이기도 한 이승훈을 찾아갔다.
“내 긴히 이를 말이 있네. 북경에 가거든 천주당을 꼭 들러 주게. 거기에 서양에서 온 선교사가 있을 걸세. 가서 그를 만나 신경(信經) 한 부를 달라고 청하고, 영세도 달라고 하게. 그러면 신부가 틀림없이 자네를 아껴 기이한 물건을 듬뿍 줄 걸세. 그저 돌아오면 절대로 안 되네.”
황사영의 백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시까지 이승훈은 천주학을 잘 몰랐다. 그는 서양의 기이한 물건을 많이 받아 올 수 있다는 이벽의 말에 홀연 호기심이 동했다.
“조선 사신의 아들이 수학을 배우려고 찾아왔었습니다”
한편 당시 북경 교구장으로 있던 포르투갈 출신의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주교가 1790년 10월 6일에 바티칸의 안토넬리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여기에 당시 이승훈의 행적이 보인다.
“1784년에 조선 왕국에서 온 사신 가운데 한 사람의 아들이 수학을 너무도 배우고 싶은 마음에서 북경 교회를 찾아왔었습니다. 그리고는 수학을 가르치는 유럽인 선교사에게 수학의 원리에 대해서도 듣고 수학 책들도 얻어 갔습니다. 그런데 유럽인 선교사들은 이 조선 사람에게 수학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기회를 봐서 가끔씩 그리스도교의 원리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도 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들을 건네주기도 하는 등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그 결과 그 사람은 천주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으며, 마침내 세례를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는 사신으로 온 아버지의 승낙과 동의를 받은 다음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윤민구 역주ㆍ’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ㆍ가톨릭출판사ㆍ2000년ㆍ44쪽)
이승훈 초상. 원래 그는 수학을 배워 볼 생각으로 중국의 천주당을 찾았다가 천주교에 입교한다. 절두산순교성지 소장
이 편지에 따르면 당시 이승훈은 수학 공부를 위해 천주당을 찾았고, 그 과정에서 천주학에 훈도되어 마침내 자청해서 세례를 받기까지 했다. 애초에 그는 서양서를 구해 와서, 당시로서는 첨단의 학문인 서학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볼 생각이 컸다.
어쨌거나 이승훈은 서학보다는 수학에 더 관심이 있었고, 이후 신부와의 대화 과정에서 천주교에 깊이 이끌려 조선인 최초로 영세를 받았다. 그가 받은 본명은 베드로였다. 조선 교회가 그의 반석 아래 서리라는 바람을 담은 이름이었다. 당시 신부들과의 대화는 필담으로 진행되었다. 그의 영세는 대부분의 신부들이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반대하는 중에, 유일하게 그라몽(De Grammont) 신부의 지지를 받아 성사되었다. 이승훈은 그라몽 신부가 주는 교리책과 상본(像本) 등 각종 성물을 듬뿍 받아 조선으로 돌아왔다.
제 죄를 고백합니다
1996년 윤민구 신부는 로마 바티칸 교황청 포교성 고문서고에서 이승훈이 1789년 말, 1790년 7월 11일에 북경 성당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 두 통을 찾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한문 원본은 사라지고, 라틴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불어로 번역되어 공증을 거친 것이었다.
이승훈이 1784년 영세를 받고 귀국한 이후, 조선 천주교회 창립을 위한 노력의 경과를 보고하고, 그간 자신의 무지로 인해 교회법을 어긴 사실들을 적시한 후, 죄의 용서를 청한 내용이었다. 첫 번째는 영세 받을 당시 교리 지식이 부족했는데, 그래도 영세가 유효한가, 아니면 다시 받아야 하는가. 두 번째는 자신이 수학을 공부하려는 욕망 때문에 성교회에 입교했는데 이것이 문제 되지는 않는가. 세 번째는 북경에서 받은 천주상과 성물들을 국경 검색을 피하기 위해 외교인(外敎人)에게 맡겼다가 돌려받았으니, 이것이 혹 신성 모독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가.
어찌 보면 꽤 유치한 수준의 대죄(待罪)였는데, 이제 막 열성적으로 신앙에 불타오르던 그로서는 어쩌면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교리서를 전해 받은 이벽은 그 길로 외딴집을 구해 그곳에 처박혀서 골똘히 교리 학습에 돌입했고, 1784년 4월부터는 앞서 다산 형제들에게 배 위에서 그랬던 것처럼 광적인 열정에 휩싸여 포교 행동에 돌입하였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민의 다산독본] 정조가 극찬한 ‘중용’ 답변, 실은 ‘천주실의’ 내용서 차용했다
입력 2018.06.2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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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과 함께 답안을 연구 마테오 리치의 개념을 끌어와 주리와 주기의 논쟁에 대입 다산은 이후 이벽을 더 신뢰 천주학에 급격히 빨려들어가 이벽은 유명학자들과 논쟁서 차례차례 ‘도장 깨기’에 성공 천주교가 요원 불길처럼 번져
서학과 유학, 양 진영에서 벌인 사흘간의 대토론회 장면. 이 토론회에서 이벽은 천주교리를 바탕으로 당대의 천재라 꼽히던 이가환을 격파했다. 탁희성 그림, 김옥희 수녀 제공외딴 방
1784년은 한국 천주교회의 원년이었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동지사 일행을 수행해 서울에 도착한 것은 3월 24일. 목을 빼고 기다리던 이벽은 그 길로 이승훈을 찾아가 천주교 교리서를 전해 받고 북경에서 영세 받던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이벽은 아예 외진 곳에 방을 구해 틀어박혀 본격적으로 교리 연구에 돌입하였다.
누이의 제사에 참석하고 오는 길에 다산 형제에게 선상(船上) 강의를 한 것이 4월 15일이었으니, 그는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다산의 자형인 이승훈이 가져온 천주교 교리서를 집중 탐구했다. 다산 형제가 그의 첫 포교 대상이 되었다.
선상 강의 11일 뒤인 4월 26일 정조는 성균관의 제생들에게 ‘중용’에 대한 70가지 질문을 내려 여기에 답할 것을 명했다. 다산의 본격적인 ‘중용’ 학습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벽은 기꺼이 안내자 역할을 맡았다. 임금의 질문은 묵직했고, 대답은 대략 난감했다. 두 사람은 문제를 하나하나 토론하며 답안의 방향을 잡아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이벽의 높은 식견은 다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 다산의 학문 세계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기(理氣)를 묻노라
정조가 ‘중용’에 대해 내린 70가지 질문 중 두 번째는 이(理)와 기(氣)의 선후에 대한 율곡과 퇴계의 주장을 짧게 인용한 뒤, 어느 것이 맞는지 적확(的確)한 의논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산의 대답은 이랬다. 조금 풀어서 옮긴다.
“신은 사단(四端)을 이(理)에 넣고, 칠정(七情)을 기(氣)에 두는 이분법적 사고에 오래 의문을 품어왔습니다. 만약 이런저런 주장에 얽매지 않고 선입견 없이 본다면 쉽게 따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기란 자유지물(自有之物), 즉 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理)는 의부지품(依附之品), 곧 실재에 기대어서만 드러나는 개념적인 것입니다. 의부지품은 반드시 자유지물에 기대야만 합니다. 실재가 있은 뒤에 개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를 펴서 이가 여기에 올라탄다(氣發理乘)고는 할 수 있어도 이를 펴서 기가 따라온다(理發氣隨)고는 말할 수 없겠습니다.”
퇴계의 주리설을 부정하고 율곡의 주기설에 손을 들어준 모양새가 되었다. 다산의 이 견해를 두고 제출 후 비난이 비등했지만 정조는 이를 칭찬했다. 일반론을 추종하지 않고 자기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다산의 이 생각은 바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천주실의’는 중국 선비와 서양 선비가 천주교의 주요 교리에 대해 토론하는 방식으로 기술한 책이다. 태극에 대해 논의하다가 질문이 이(理)의 문제로 옮겨갔을 때, 마테오 리치가 대답했다.
“대저 사물의 종류에는 두 가지가 있지요. 자립하는 것(自立者)과 기대는 것(依賴者)이 그것입니다. 천지와 사람, 조수 초목 등 다른 것에 힘입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자립지품(自立之品)이고, 다른 물건에 의탁하여 개념을 이루는 오상(五常)이나 칠정(七情) 같은 것은 의뢰지품(依賴之品)이 됩니다.”
마테오 리치가 자립지품이라고 한 것을 다산은 자유지물(自有之物)로 살짝 바꿨고, 의뢰지품은 의부지품이라 하여 한 글자만 교체했다. 배경에 깔린 개념 사유는 똑 같다. 마테오 리치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존재론에서 실체(substance)와 속성(attribute)으로 설명한 개념, 즉 구체적 개별자로서의 현상적 실체와 추상적 보편자로서의 초월적 이데아로 구분한 내용을 성리학의 이기 개념에 대입했다. 다산은 바로 그의 이 용어를 끌어와 조선 성리학 핵심 논쟁의 진앙지인 주기와 주리의 주장에 대입했던 셈이다. 그 뒤에 이벽이 서 있었다.
답안에서 다산은 이 밖에도 인격신으로서의 상제(上帝) 개념과 귀신의 문제 등에 대해 천주교의 관점을 반영한 과감한 주장을 펼쳐, 국왕 정조에게 심각한 인상을 남겼다. 생각의 틀을 바꾸자 안 보이던 지점이 보였다. 서학의 관점으로 경학을 보니 새로운 차원이 열렸다. 천주학은 유학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보유(補儒)’의 종자가 분명했다. 이벽의 느닷없는 선상 강의에 이어, 그의 조력을 받아 작성한 ‘중용강의’ 답안이 뜻밖의 성공을 거두자, 다산은 이벽에 대한 신뢰를 업고 천주학에 한층 더 급격히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순식간에 1,000명으로 불어난 신앙 조직
북경에서 서양 신부에게 직접 영세를 받아온 이승훈은 그때까지 정작 천주교 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이승훈은 1789년 북경 천주당의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어떤 학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예전에 우리 종교에 관한 책을 한 권 발견하고는 그 책을 여러 해 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으니, 그는 천주교에 관한 문제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까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과 열정은 그가 알고 있는 지식보다도 더욱 대단하였습니다.” 이승훈이 만났다는 어떤 학자는 말할 것도 없이 이벽이다.
이승훈은 같은 편지에서 “그들이 어찌나 열렬하게 영세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던지, 저는 모든 사람들의 요청대로 제가 북경에서 영세를 받을 때 행해졌던 예절에 따라 많은 사람들에게 영세를 베풀어 주었습니다”라고 했고, 또 “1784년 이후부터 저희들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하느님을 흠숭하는 사람들이 사방 천 리에서 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라고 썼다. 바싹 마른 들판에 불이 번지듯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신앙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산도 1784년 9월경에 자청해서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았다. 그의 영세명은 ‘약망(若望)’, 즉 사도 요한이었다.
이벽과 이가환의 사흘 논쟁
이가환은 자신의 생질인 이승훈과, 이벽과 다산 형제가 주축이 되어 천주교 신앙이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가환은 이를 제지하기 위해 이벽을 찾아갔다. 그 또한 서학에 미쳤던 사람이었다. 이가환은 남인계에서는 서학의 일인자였다. 하지만 철학과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었지 신앙 차원은 아니었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이벽과 이가환의 격정적인 토론은 여러 명의 입회 아래 무려 사흘간이나 계속 되었다. 황사영의 백서에도 이 토론회의 장면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다산도 ‘정헌묘지명’에서 이가환이 그에게 가서 힐난했지만, 이벽이 장강대하 같은 웅변으로 철벽처럼 고수하므로 말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고 적었다. 세 사람의 기록이 같다.
전투에 가까운 사흘간의 논쟁은 이벽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천하의 천재 이가환도 이벽의 논리를 당해낼 수 없었다. 달레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가환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하나하나 그 논적에게 지적되고 조목조목 반박되었다. 이벽은 세밀한 점에까지 추궁하여 이가환의 논리의 건축을 모두 파괴하고 먼지로 만들어 버렸다.” 더 나아가 “그것은 마음이 순진하고 정직한 사람들을 많이 사로잡았으며, 새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 지배력을 강화하였다”고 썼다. 다산도 분명 이 자리에 입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토론에서 패한 뒤 이가환이 남겼다는 다음 한 마디가 인상적이다.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 그러나 이를 따르는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달레는 이후 이가환이 천주교에 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썼고, 황사영의 백서에서는 이와는 달리, 이후 이가환이 제자들을 권유하여 교리를 가르치고, 이벽 등과 아침저녁으로 비밀리에 왕래하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적었다.
이가환을 무너뜨린 뒤 권철신을 찾아간 이벽. 학식과 인품이 뛰어나 영향력이 컸던 권철신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면 파급력이 엄청날 것이라 생각했다. 탁희성 그림, 김옥희 수녀 제공도장 깨기
이가환과의 논쟁에서 승리한 이벽은 한층 자신감을 얻었다. 다음 번 논전은 이기양(李基讓)과의 사이에서 벌어졌다. 그는 천하의 이가환이 이벽에게 투항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벽에게 달려갔다. 다시 긴 토론이 벌어졌다.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이렇게 썼다. “이기양은 토론을 견뎌낼 수 없어 침묵을 지켰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믿는 듯하였으나, 솔직하게 그렇다고 시인할 결심은 하지 못했다.” 2차전 또한 이벽의 완벽한 승리였다.
두 차례의 논전에서 승리한 일로 한껏 고무된 이벽은 본격적인 도장 깨기에 나섰다. 그의 다음 타깃은 권철신이었다. 권철신은 성호학파의 한 흐름을 장악한 이른바 녹암계(鹿菴系)의 수장이었다. 그는 당대에 손꼽는 학자로 명망이 높았다. 고매한 인격까지 갖춰 모든 이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벽은 권철신이 천주교로 넘어 오면 그 파급력이 실로 엄청날 것이라 생각했다.
이벽은 다짜고짜 권철신의 집이 있는 양근의 감호(鑑湖)로 찾아갔다. 이벽은 10여일간 감호에 머물며 권철신과 그의 아우 권일신을 천주교의 진리로 이끌기 위해 설득을 거듭했다. 권철신이 망설이는 사이에 그의 아우 권일신은 곧바로 천주교 입교를 결심하고 행동에 옮겼다. 얼마 못 가 권일신은 그의 모든 가족과 친구, 그리고 중인들에게까지 천주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다. 이후 양근 지역은 신앙촌이 형성되어, 1800년 5월에 지평(持平) 신귀조(申龜朝)가 임금께 올린 글에는 “양근 한 고을은 서학이 대단히 성행해서 안 배우는 사람이 없고, 행하지 않는 마을이 없다”고 썼을 정도였다. 천주교는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고, 초기 천주교회의 중심부에 다산이 있었다.
정민 한양대 교수
[정민의 다산독본] “천주학 유행, 좌시할 수 없다”… 원로 학자들로 번진 논쟁 대결
입력 2018.06.2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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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벽, 당대 논객ㆍ원로 설득 풍문에
성균관 유생 등 적극 추종 나서
젊은층서 서학 공부 급속 유행
남인서도 천주교 파급력 경계령
성호학파 좌장 안정복이 첫 포문
“둘을 꺾어야 이벽 광풍 사라져”
배후지목 원로 이기양ㆍ권철신에
수차례 장문 편지로 천주학 공방
2012년 치러진 탄생 300주년 추모제에 모셔진 순암 안정복 선생 초상. 성호 이익의 제자였던 순암은 역사책 '동사강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변 남인 성리학자들이 겉잡을 수 없이 천주학에 빠져들자 이를 강하게 비판한 인물이기도 했다. 광주시청 제공
“천주학은 유문(儒門)의 별파”
1784년 여름 이래 이벽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최고의 논객 이가환이 그의 논리에 무릎을 꿇었고, 그해 9월에는 원로급의 이기양과 권철신 형제마저 이벽에게 설득 당했다는 풍문이 파다했다. 성균관 유생 중에서도 재기명민한 젊은 그룹이 그를 적극 추종하고 있었다. 다산은 그들 중의 선두주자였다.
이는 1776년 정조 즉위 이래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면서, 젊은 그룹 사이에서 서학 공부가 유행처럼 번져갔던 사정과도 무관치 않다. 36세 때인 1797년에 작성해 올린 ‘동부승지를 사직하며 비방에 대해 변백한 상소(辨謗辭同副承旨疏)’에서 다산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신이 서학 책을 얻어 본 것은 대개 20대 초반입니다. 이때 원래 일종의 풍기가 있어, 능히 천문역상(天文曆象)의 주장과 농정수리(農政水利)의 기계, 측량추험(測量推驗)하는 기술에 대해 잘 말하는 자가 있으면 세속에서 서로 전해 해박하다고 지목하곤 하였습니다. 신은 그때 나이가 어렸으므로 가만히 홀로 이것을 사모하였습니다. 하지만 성품이 조급하고 경솔해서 몹시 어렵고 교묘하고 세밀한 내용은 애초에 세세히 탐구할 수가 없어 그 찌꺼기나 그림자도 얻은 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리어 사생(死生)의 주장에 얽매이고, 쳐서 이기는 훈계에 귀를 기울이며, 삐딱하고 기이하게 변론을 펼친 글에 현혹되어 유문(儒門)의 별파로만 알았습니다.”
똑똑한 젊은이라면 서양학에 대해 관심을 쏟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 추세였다. 임금도 적극 장려하던 일이었다. 그러다 점차 영혼에 대한 주장, 천당과 지옥에 대한 학설, 그리고 ‘칠극’에서 일곱 가지 죄악을 이겨내는 가르침 등을 읽으면서 유학의 별파로 알고 이 공부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변명한 것이다.
“침묵으로 죄악을 면하겠다”
기호 남인 집단 안에서 천주교가 무서운 파급력을 보이자, 남인 내부에서도 이 같은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는 경계경보가 발령되었다. 성호학파의 좌장 격인 안정복(1712-1791)이 처음 포문을 열었다. 당시 73세의 안정복은 양근의 권철신(1736-1801)과는 나이 차이가 24살이나 났다. 둘은 애초에 사제간이었다. 안정복은 아우 권일신(1742-1791)의 장인이기도 했다.
안정복의 문집 '순암집' 가운데 천주교 비판 논문인 '천학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서학이 광풍처럼 번져나가는 것에 대한 우려의 뜻에서부터 글을 시작한다. 실학박물관 소장
안정복과 권철신은 전부터 공부에 대한 견해 차이로 소모적인 논쟁을 계속해왔다. 한계를 느낀 권철신은 1772년 안정복에게 편지를 보내 더 이상 학문적 토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그랬던 권철신이 1784년 11월에 안정복에게 문득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가운데 이상한 내용이 있었다.
“지난 날에는 글의 의미에만 얽매이는 바람에 실제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이 큰 죄만 입었습니다. 혼자 생각해보니 아침 저녁으로 제 허물을 구할 겨를조차 없는데 어찌 감히 다시 글에 대해 논하겠습니까? 이제껏 어리석은 견해로 메모하여 기록한 것들을 한꺼번에 모두 없애버리고, 아직 살아있을 때 오직 침묵으로 스스로를 닦아 큰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이 구경(究竟)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유학을 버리고 천주학으로 전향하겠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가?”
안정복은 권철신의 느닷없는 편지가 몹시 낯설었다. 편지 속의 그는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닌 듯 했다. 1784년 11월 22일에 다급하게 발송한 안정복의 답장은 이랬다.
“공의 편지를 받았소. 전날의 규모와 크게 다른 데다, 자못 이포새(伊蒲塞)의 기미를 띠고 있었소. 공은 어찌하여 이 같은 말을 하는 게요? 편지에 또 ‘죽기 전에 침묵으로 스스로를 닦아 큰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이 궁극의 방법일 것’이라고 했더군. 이 어찌 달마가 소림사에서 면벽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아미타불만을 외워 전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부처님 전에 간절히 빌기를, 천당에서 태어나고 지옥에 떨어짐을 면하고자 하는 뜻과 다르겠는가? 나는 그대가 이 같은 말을 하는 까닭을 참으로 알 수가 없소.”
이포새는 우파새(優婆塞)와 같은 뜻으로 집에서 계율을 수행하는 재가 불자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권철신의 편지는 속세를 초월한 고승의 말투에 가까웠다. 더 이상 유학의 논설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단지 침묵하며 그간의 내 잘못을 속죄하겠다. 말끝에 단호한 결심이 묻어났다.
“이벽을 그다지도 아꼈건만”
며칠 뒤 마지못해 쓴 권철신의 답장이 돌아왔다. 상관 말라는 투였다. 안정복은 편지를 받자마자 12월 3일에 권철신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이기양이 찾아와 천주교 수양서인 ‘칠극’을 빌려가더라는 영남 선비의 전언을 거론하는 사이에, 안정복의 감정은 차츰 거칠어졌다. 그의 편지를 듬성듬성 건너뛰며 읽는다.
“그 뒤로 여기저기서 양학(洋學)이 크게 일어났는데, 아무개와 아무개가 우두머리이고, 아무개 아무개는 그 다음이며, 그 나머지 좇아서 감화된 자는 몇이나 되는 지도 모른다고 합디다. 이벽이 여러 권의 책을 안고 그대를 찾아갔다고 들었소. 이벽은 내가 평소에 아끼고 중히 여겼는데, 이제 이곳을 지나면서 들르지도 않으니 그 연유를 모르겠구려. 가는 길이 달라 이제 서로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겠소.”
앞 편지까지만 해도 돌려 얘기하던 것을 이제는 내놓고 말했다. 안정복은 이재남(李載南)과 이재적(李載績)에게 ‘칠극’을 빌리고, 유옥경(柳玉卿)에게도 편지를 보내 ‘기인십편(畸人十篇)’과 ‘영언여작(靈言蠡勺)’을 더 빌렸다. 그들과 본격적인 일전을 치르자면 이편에서도 상대의 공부 내용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이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요즘 듣자니 우리 무리 중에 연소하고 재기가 있는 자들이 모두 양학을 한다는 말이 낭자하여 덮어 가릴 수가 없구려. 그대도 틀림없이 들었을 것이오”라는 내용이 보인다.
“천주가 능히 구해줄 수 있겠는가?”
1784년 12월 14일에 안정복은 다시 권철신에게 세 번째 편지를 썼다. 더 이상은 좌시할 수 없다는 결기를 담은 장문의 편지였다.
“지금 듣자니 아무 아무개의 무리가 서로 약속을 맺어 신학(新學)의 주장을 힘써 익힌다는 말이 낭자하게 오가고 있소. 또 접때 들으니 이기양이 문의(文義)에서 보낸 한글 편지 중에 자기 집안의 두 젊은이가 모두 천주학 공부를 한다고 칭찬해마지 않았다더군. 이 어찌 크게 놀랄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 책을 대략 살펴보니 문제가 너무 많고, 책 속의 이야기는 허탄하여 성현을 비방하는 뜻이 한 둘이 아니었네. 일전에 권우사(權于四)가 와서 자다가 서학에 말이 미쳤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 ‘중국에서도 일찍이 서학을 금하여 천 사람 만 사람을 넘게 죽였어도 끝내 금할 수가 없었고, 일본 또한 서학을 금하여 수만 명을 죽였답니다.’ 어찌 우리나라에도 이 같은 일이 없을 줄 알겠소? 설령 일망타진의 계책을 세운다 해도 몸을 망치고 이름을 더럽힌 욕스러움을 받게 되면, 이때 천주가 능히 구해줄 수 있겠소?”
오가는 말이 점차 가팔라지고 있었다. 안정복은 그 사이에 자신이 천주학에 대해 공부해 정리한 ‘천학설문(天學設問)’이 있는데 다음에 보내주겠다며 확전(擴戰)을 예고했다.
반격
이왕에 뽑은 칼이었다. 안정복은 이기양에게도 편지를 썼다. 안정복이 보기에 천주학의 가장 배후에는 권철신과 이기양이 버티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둘의 뒷배 없이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둘을 꺾어야 이벽의 광풍은 비로소 사그라질 것이었다.
“지난번 권일신이 와서 힘써 천주학을 내게 권하더군. 나는 그저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려니 했었소. 그 뒤 또 편지를 보내 내게 이를 권하면서, 천주학이 참되고 실다워(眞眞實實) 천하의 큰 근본이요 통달한 도리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소.”
경기 광주 이택재 전경. 안정복이 공부하며 제자를 키운 곳이다. 안정복은 우리 역사서 '동사강목'의 저자로 유명하지만, 천주교에 빠진 남인들과 거센 논쟁을 볼인 인물이기도 하다.
사위 권일신이 장인을 찾아가 천주학을 함께 믿어보자고 적극 권유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때를 고비로 권철신 형제와 이기양 측의 반격도 조금씩 수위가 높아졌다.
다시 해가 바뀌었다. 1785년 2월, 안정복은 이기양에게 한번 더 붓을 들었다.
“지난번 종현(鍾峴)에서 보낸 답장을 보니 앙칼진 말이 많았소. 내 생각에 그대가 내 말을 늙은이의 잠꼬대 같은 소리로 보는 것이 분명하구려. 어이 깊이 허물하겠는가? 다만 지난번 권일신이 들렀다가, 내가 어리석은 견해를 지녀 깨닫기 어려움을 걱정한다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갔다네. 이제껏 어둡고 앞뒤 막힌 생각을 종내 깨치지 못하니, 이야 말로 앞서 말한 지옥의 고통을 받는 것에 불과할 것일세 그려.”
권일신은 연거푸 장인을 찾아가 천주교의 논리를 설득하기 위한 적극적 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이번 글에 실린 안정복의 편지들은 문집에는 빠진 것이 더러 있고, 친필 초고인 ‘순암부부고(順菴覆瓿稿)’ 제 10책에 날짜순으로 실려 있다. 권철신과 권일신, 이기양의 당시 편지는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민의 다산독본] “가문의 희망이 천주교에…” 충격받은 아버지 ‘밀착 감시’
입력 2018.07.0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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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판으로 알고 현장 덮친 포교
푸른 두건 등 낯선 풍경에 당황
명동 김범우 집서 함께 미사보던
이벽ㆍ이승훈ㆍ정약용 형제 등 체포
명문가 자제 많아 곳곳서 아우성
서학책 불태우고 반성 시 쓰고…
“천주교 포기를” 가족들 압박 거세
남인 명문가 자제들 사이에서 천주교는 급히 세를 불려나갔다. 교인들은 중인 김범우의 명례방 집에 모여 미사를 거행했다.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에 1898년 지어진 것이 지금의 명동성당이다. 천주교서울대교구 제공
검거된 종교 집회
1785년 3월, 의금부에 속한 기찰포교들이 명례방(지금의 명동)의 장례원(掌禮院)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 중 한 집 앞에 유독 신발이 많아 분위기가 수상쩍었다. 포교들은 노름판이 벌어진 것으로 여겼다. 가만히 염탐해 보니 방안의 광경이 사뭇 기괴했다. 수십 명의 사내들이 ‘분면청건(粉面靑巾)’, 즉 모두 얼굴에 분을 바른 채 푸른 두건을 쓰고 있었다. 손을 움직이는 동작이 해괴했다. ‘벽위편(闢衛編)’에 나온다.
얼굴에 분은 왜 발랐고, 푸른 두건은 왜 썼을까? 특별히 아랫목 중심에 사려 앉은 사내는 푸른 두건으로 이마를 가리고 어깨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그 둘레에 선비 복색의 수십 명이 둘러 앉아 그가 하는 말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저마다 책을 들었고, 행하는 예법과 태도는 유가의 사제 간보다 한층 엄격하였다.
투전 판으로 알고 현장을 덮쳤던 기찰포교들이 예상 밖의 낯선 광경에 오히려 당황했다. 현장을 수색하면서 그들은 더 놀랐다. 듣도 보도 못한 서양인의 화상이며 십자가, 수상쩍어 보이는 책자 및 물품들이 압수되었다.
천주를 믿는 것이 왜 잘못입니까?
그 곳은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의 집이었다. 가운데 앉았던 사내는 이벽이었다. 자리에 함께 있던 인물들은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용 형제 및 권일신과 그의 둘째 아들 권상문이었다. 권일신의 매부인 이윤하(李潤夏)와 이기양의 아들 이총억(李寵億), 이기양의 외종인 정섭(鄭涉)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들 권철신 형제와 이기양을 정점으로 하는 남인 명문가의 쟁쟁한 집안 자제들이었다. 중인층도 여럿이 있었다.
이들은 나이를 떠나 이벽에게 깍듯한 스승의 예를 표했다. 조사 결과 이들은 벌써 여러 달째 날짜를 정해 모이고 있었다. 날짜를 정해 모였다는 말은 주일을 지켜 미사의 의식을 행했다는 의미다. 이벽이 썼던 푸른 두건은 북경 천주당의 사제들이 미사 때 쓰던 제건(祭巾)을 본떠 만든 것이었다.
급작스런 보고를 들은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더 놀랐다. 압수해온 물품은 한 눈에도 천주교의 교리 책과 예수의 화상, 그리고 집회 의식에 필요한 물품들이었다. 자칫 불똥이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었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을 우려한 김화진은 장소를 제공한 중인 김범우만 옥에 가두고, 나머지는 방면하는 것으로 이 일을 덮으려 했다. 이것이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 조직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을사년 추조적발 사건’의 시작이었다.
쉬 가라앉을 것 같던 상황은 예측을 빗겨나 이상하게 돌아갔다. 김화진이 김범우에게 서학을 어째서 믿느냐고 추궁하자, 그는 “서학은 좋은 점이 너무 많은데, 이를 믿는 것이 왜 잘못입니까?”하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사학징의(邪學懲義)’에 나온다. 그 대답으로 인해 그는 매서운 형벌을 받았다. 아무리 심한 고문을 하면서 배교를 재촉해도 김범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확신범이었다. 하지만 형벌은 그에게만 국한되었다.
물건을 돌려주시오
해괴하고 맹랑한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날 방면한 자들이 이튿날 형조로 찾아와 앞서 압수해간 성상(聖像), 즉 예수의 화상을 돌려달라고 당당히 요구했던 것이다. 권일신이 앞장을 서고, 이윤하와 이총억, 정섭 등 다섯 사람이 함께 왔다. 이윤하는 성호 이익의 외손자였다. 이때 다산은 동행하지 않았다. 형조판서 김화진이 화를 벌컥 내며 이들의 무모한 행동을 꾸짖었다. 하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눈에 뭔가 씐듯했다.
사건 직후 성균관 유생 이용서(李龍舒)와 정서(鄭漵) 등 여러 사람이 연명으로 올린 통문(通文)에 당시 이들이 했다는 말이 나온다. 이들은 형조판서에게 자신들도 김범우와 똑같이 처벌해 달라면서, “다만 원하기는 육신을 속히 버리고 영원히 천당에 오르고 싶을 뿐(惟願速棄形骸, 永上天堂)”이라고 했다. 그들은 다음날도 오고 그 다음날도 또 왔다. 돌려줄 때까지 그만두지 않을 기세였다. 부형이 금해도 듣지 않았고, 벗들이 말려도 소용없었다. 그들에게 예수의 화상은 단지 소중한 물건 이상의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통문에는 그들뿐 아니라 성균관 유생 중 공부깨나 한다 하는 명성이 있는 자들마저 그들과 동학이라 말하면서 여러 번 글을 올렸다고 적혀있다. 다산을 지칭한 말일 터였다. 다산은 당시 성균관에서 임금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기대주였다.
1784년 4월 15일, 이벽이 다산 형제들을 대상으로 편 첫 선상 포교 이후 이가환, 이익운, 권철신 등 쟁쟁한 남인계 학자들과의 연쇄 토론과 포교 과정을 거치면서, 1784년 말에 천주교는 파죽지세로 신앙 집단을 형성했다. 이들은 연말 언저리부터 모임을 가지기 시작해, 1785년 3월에는 이들은 푸른 두건과 서책 등 집례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여 얼굴에 분까지 바른 채 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다.
얼굴에 분은 왜 발랐을까? 거룩한 의식에 앞서 몸과 마음을 정결히 갖기 위한 정결례(淨潔禮)의 절차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검거 당시 포교들이 목격한 해괴한 손놀림은 성호를 긋는 행동, 사람마다 손에 들었던 책은 미사의 기도문과 순서를 적은 경본이거나 교리서였을 터였다.
발칵 뒤집힌 세 집안
집단으로 모여 집회를 갖다가 의금부에 적발된 일이 알려지자, 이벽과 이승훈, 정약용의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들의 부친은 저마다 즉각 강력한 제지 행동에 돌입했다.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과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은 자식이 사학에 깊이 빠진 것을 모르고 있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자식들에게 친지의 집을 돌며 제 입으로 사학을 끊겠다는 다짐을 공표하게 했다.
북경으로 가는 이승훈. 그는 천주교를 들여왔으나 명례방 집회가 탄로난 뒤 '벽이단'이란 글을 지어야 했다. 탁희성 그림, 김옥희 수녀 제공
나아가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은 가족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뜰에서 서학 관련 서적을 불 질렀다. 그것들은 1년 전 자신이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을 때 구해온 것들이었다. 이때 이동욱은 분서(焚書)의 심경을 담은 7언 율시 두 수를 지었다. 그 시는 남아있지 않다. 아들 이승훈에게도 앞으로 천주교와 결별하겠다는 각오를 담은 벽이단(闢異端)의 시문을 각각 짓게 했다.
당시 이승훈이 썼다는 ‘이단을 물리치다(闢異)’란 시는 이랬다.
하늘과 땅의 윤리, 동과 서로 나눠지니
저문 골짝 무지개다리 구름 속에 가렸구나.
한 심지 심향 피워 책을 함께 불태우고
저 멀리 조묘(潮廟) 보며 문공(文公)께 제 올리리.
天彛地紀限西東(천이지기한서동)
暮壑虹橋晻靄中(모학홍교엄애중)
一炷心香書共火(일주심향서공화)
遙瞻潮廟祭文公(요첨조묘제문공)
시에 담긴 뜻은 이렇다. 한때 무지개다리로 알았던 꿈은 저녁 무렵 구름 노을 속에 잠겨 사라졌다. 애초에 동양과 서양의 윤기(倫紀)란 같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무지개다리만 건너면 피안으로 건너갈 수 있으려니 나는 믿었다. 이제 미망에서 깨어나 한 심지의 향을 태우며, 나를 미혹케 했던 천주교 관련 책자를 다 불에 사른다. 그런 뒤에 조주(潮州)에 있는 당나라 한유(韓愈)의 사당을 향해 우러러 큰 절을 올리면서 사죄하겠다고 적었다.
한유는 ‘불골표(佛骨表)’를 지어 당나라 때 세력을 떨치던 불교를 이단으로 강력하게 배격하였던 인물이다. 그러니까 한유가 정학(正學)인 유학으로 이단인 불교를 배척하였듯, 자신도 천주교를 버리고 유학으로 돌아오겠다고 다짐한 시다. 그는 정말로 배교할 마음이 있었던 걸까? 그렇지 않다.
밀착 감시
다산의 부친 정재원은 즉각 상경하여 아들의 거처부터 옮기게 했다. 다산은 1783년 봄 이후 회현방의 누산정사에서 살았다. 이곳이 천주학의 한 온상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적발 사건 직후 다산은 아버지 정재원의 종용으로 처가인 회현방의 담재(澹齋)로 이사했다. 장인 홍화보가 1784년 겨울 강계도호부사로 부임해 본가를 비운 터였다.
사건 직후인 1785년 4월에 다산이 지은 시에 ‘담재에서 아버님을 모시고 주역을 공부하다(陪家君於澹齋講周易)’란 시가 있다. 정재원은 다산을 붙들고 앉아 ‘주역’을 직접 가르쳤다. 일종의 밀착 감시가 시작되었다. 다산이 지은 시 가운데, “성인도 때로는 잘못 있나니, 회린(悔吝)은 밝고 어두움에 말미암는다(聖人時有過, 悔吝由明昏)”고 한 구절이 있다. 회린은 뉘우침과 인색함이다. 잘못을 해도 뉘우치면 흉함이 변해 길함으로 바뀌고, 자만하여 뻗대면 길함은 다시 흉함으로 변한다. 그러니까 회와 린 두 태도는 마음의 밝음과 어두움의 차이를 반영한다.
명례방 집회가 들킨 뒤 다산 또한 종교를 포기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아버지 정재원은 아들을 이사시킨 뒤 함께 주역을 읽어나갔다. 공부보다는 감시가 목적이었다. 당시 다산 또한 천주교를 배격한다는 시를 지었는데, 그 시가 ‘어유당전서’에 실려 전한다.
다산의 이 구절은 한 때 자신이 잘못된 길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그 잘못을 깊이 뉘우쳐서 바른 길로 돌아오겠노라고 말한 것이다. 이 또한 이단 배격을 선언한 시였다. 정재원에게 다산은 집안을 일으킬 희망이었다. 그런 그가 삐뚠 길로 가는 것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이때 다산은 정말 천주학을 버렸을까? 그럴 리 없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정민의 다산독본] 이벽의 죽음 뒤 정약용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앉았다
입력 2018.07.1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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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집회 적발 사건 후
집안 감금당한 이벽 역병 걸리자
가족들이 땀 내야 한다며
이불 뒤집어 씌었는데 질식
수험생 모드로 돌아온 다산
천주학 세상 열어 준 스승의
허망한 죽음에 큰 충격
이 일 이후 전혀 다르게 변했다
1979년 이벽 유해 발굴 작업 당시 현장. 초기 천주교 최초이자 최고 이론가였던 이벽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다산에게 큰 충격이었다. 천주교천진암성지홈페이지
다시 조신한 모범생으로
다산은 아버지 정재원의 감시 아래 다시 수험생 모드로 돌아섰다. 다산은 상황 판단이 늘 빨랐다. 고집을 부려 경거망동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벽과 이승훈 등 두 주축의 발이 꽁꽁 묶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이 시기 다산은 부친과 함께 ‘주역’을 읽었다. 훗날 천주교 신앙 문제로 평생의 원수가 된 이기경(李基慶)과도 가깝게 지냈다. 용산에 있던 그의 정자로 가서 과거 준비를 위한 변려문 공부에 몰두했다. 이후 다산이 다시 성균관의 각종 시험에서 연거푸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 아버지 정재원의 감시도 조금 느슨해졌다.
중심부가 와해된 천주교 집회는 중단되었다. 스스로 이단 선언을 한 이승훈은 운신이 어려웠다. 이벽은 당시 온 집안이 동원된 강력한 감금 상태에 놓여 있었다. 다산 형제에게도 부친의 보이지 않는 감시가 따라 다녔다. 모든 것이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열병보다 강렬했던 신앙의 열정이 하루아침에 없던 일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평온한 나날이 흘러갔다. 하지만 자형 이승훈의 이단 선언과, 큰형의 처남 이벽의 강제 연금으로 공백 상태에 빠진 지도부의 상황을 지켜보던 다산의 심경은 말할 수 없이 참담했을 것이다.
미사 집회 장소를 제공했던 김범우는 참혹한 형벌 끝에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귀양을 떠나 뒤에 그곳에서 죽었다. 막 꽃봉오리가 맺히던 조선의 천주교회는 다시 눈 속에 파묻혔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므로 다산은 냉각기를 갖고 교회 재건의 기회를 살펴야 했다.
이벽 부친의 자살 소동과 정신 착란
사돈 간이기도 한 양가 부친의 적극적 노력으로 이승훈과 다산 형제 쪽은 외견상 진정이 되었다. 성정이 과격했던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李溥萬)은 ‘추조 적발’ 이후 아들이 그 수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그야말로 펄펄 뛰었다. 그는 아들에게서 천주교를 떼어내려고 갖은 설득과 위협을 거듭했다. 이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부만은 천주교로 인해 집안이 문 닫는 꼴을 볼 수 없으니, 당장 배교하지 않으면 자신이 먼저 죽겠노라며 자식 앞에서 목을 매는 소동까지 벌였다. 그 서슬에 이벽은 그만 주춤했다.
이벽은 키가 180㎝가 넘는 거구로 한 손으로 100근의 무게를 너끈히 들어 올리는 장사였다. 외모로 풍기는 위엄이 있어 모든 이의 시선을 끌었던 미남자였다. 어려서부터 고집이 워낙 세서 누구도 그를 꺾지 못했다.
다블뤼의 비망기에는 연금 당시 이벽을 배교하게 만들려고 갖은 책략을 썼다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천주교도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가 이벽에게 부렸다는 재간과 책략은 구체적 설명 없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계략과 거짓말을 죄다 동원했다고만 적었다. 바깥소식이 차단된 이벽에게 함께 했던 동료들의 잇단 이탈과 배교 행동을 부풀려 말한 것일 터였다. 다블뤼의 비망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러한 끊임없는 공격에 이벽은 글로는 묘사할 수 없는 상태 속으로 던져졌다. 그는 기운이 없고, 말이 없고, 침울한 사람이 되었다. 낮이고 밤이고 눈물이 그칠 줄 몰랐고 시시각각으로 그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더 이상 옷을 벗지 않았으며 잠은 멀리 달아났다. 여전히 가끔 먹기는 하였지만 모든 식욕을 잃은 지라 아무 맛도 없었고 몸에 도움도 안 되었다. 이 심한 상태는 지속될 수가 없었고, 불행하게도 본능이 이겼다는 조짐이 드러났다.”
달레는 또 “이벽은 마침내 시달림에 지치고 배교자에게 속고, 실망에 빠진 아버지를 보고서 정신이 착란되어, 그 사람의 말에 넘어가게 되었다. 명백하게 배교하는 것은 주저하여, 두 가지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자신의 신앙을 감추었다”고 당시 이벽이 처한 정황을 부연했다.
초기에 이벽의 영혼은 불안과 우울에 침식당했고, 극도의 불면증에 시달리며 식음을 전폐해 착란의 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후 그는 차차 평온을 되찾아 건강을 회복했다. 신앙의 열병은 겉보기에 없었던 일처럼 되었고, 심지어 그는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기까지 해서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이때 이벽이 실제로 배교의 상태로 빠져든 것인지, 탈출을 위해 가족들을 방심케 하려는 의도된 행동이었는지는 이제 와서 가늠할 길이 없다.
이벽의 돌연한 죽음
이 와중에 1785년 7월초 이벽의 갑작스럽고도 비극적인 죽음이 다산에게 전해졌다. 이 소식을 접하고 다산이 받았을 엄청난 충격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6월말 역병이 돌았던 듯하다. 다블뤼와 달레는 페스트로 표현했지만 역사 기록에는 관련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장티푸스나 콜레라 같은 질병이었을 것이다. 쇠진한 육신에 역질이 스며들자, 가족들은 이벽에게 땀을 내게 하려고 이불을 뒤집어 씌웠다. 이불 속에서 이벽은 땀구멍이 열리지 않은 채 질식하여 그만 삶의 맥을 놓았다. 병을 앓은 지 8일만의 일이었다. 참으로 허망한 결말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천주교 신앙 집단은 최고이자 거의 유일한 이론가를 잃었다.
다블뤼 주교의 비망록 표지와 내용. 그는 초기 천주교회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면서 다산의 서술을 참고로 했다고 밝혔다. 다산은 초기 천주교에 대해 자신이 증언해둘 필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천주교천진암성지홈페이지.
다블뤼와 달레는 ‘조선순교자비망록’과 ‘조선천주교회사’에 당시 이벽의 상황과 심리 상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를 마치 곁에서 지켜 본 것처럼 세세하게 묘사했다. 특히 이벽에 대한 다블뤼의 너무나도 상세한 묘사는 다산이 만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조선복음전래사’란 책에 수록된 내용임에 틀림없다. 다산이 아니고는 이벽의 마지막을 이렇듯 핍진하게 묘사할 수 없다. 다블뤼도 직접 자신의 비망기 내용 중 천주교회사의 초기 부분은 정약용이 수집해 기록한 것에 전적으로 의지했다고 밝히고 있다. 다블뤼의 비망기 중에서도 이벽 관련 내용의 소개는 다른 대목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길고도 상세하다.
이벽의 사망 시기는 기록에 따라 얼마간의 혼선이 있다. 다블뤼와 달레는 이벽의 사망이 1786년 봄이라고 썼다. 하지만, 다산이 쓴 ‘우인 이덕조 만사(友人李德操挽詞)’가 편년 순인 다산 시집에 1785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실렸고, 제 7구에 “가을 타고 홀연히 날아 떠나니(乘秋忽飛去)”라 했으니, 1785년 7월의 일이 분명하다. 족보에도 그렇게 나온다.
신서파(信西派)를 대변한 ‘조선복음전래사’
다산이 썼다는 ‘조선복음전래사’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자세히 논할 기회를 갖겠다. ‘조선복음전래사’란 책 제목은 다산이 지은 원래 명칭이 아니라, 다블뤼가 자신의 ‘조선순교자 비망기’에서 ‘Les notes manuscrites sur Ľétablissement de la Religion Chretinne en Corée’로 번역한 것을 우리말로 다시 옮길 때 번역자가 임의로 붙인 제목이다. 다블뤼의 명칭을 직역하면 다산이 지었다는 책의 제목은 ‘조선천주교 설립에 관한 비망기’다. 나는 ‘조선복음전래사’의 원래 제목이 ‘대동서학고(大東西學攷)’거나 ‘서학동전고(西學東傳攷)’쯤이었을 것으로 본다.
다산은 강진 유배시절 해남 대둔사의 역사를 정리한 ‘대둔사지’를 엮을 때, 뒤편에 부록으로 ‘대동선교고(大東禪敎攷)’를 포함한 바 있다. 말 그대로 조선불교전래사에 해당하는 저술이다. 다산은 불교 신자로서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필요에 의해 역대 문헌에서 불교 전래와 신앙에 관한 내용을 편년체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을 뿐이다.
만년의 다산은 공서파(攻西派)인 이기경이 엮은 ‘벽위편(闢衛編)’과 이재기(李在璣)의 ‘눌암기략(訥菴記略)’ 등 척사의 시각에서 기술된 책자의 논리에 맞서 천주학이 전래 도입되던 초기의 상황과 중심인물들의 행적에 대해 객관적으로 기록해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신서파(信西派)를 대변해 이른바 ‘조선복음전래사’를 집필하고, 주변의 일화들은 ‘균암만필’ 등의 기록으로 남겨, 저들의 공세에 대응코자 했던 것으로 판단한다.
1785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이벽의 죽음으로 초기 천주교 신앙집단은 배를 이끌 선장을 잃었다. 다산은 이벽에 대해 말할 때면 늘 우인(友人) 즉 벗이라고 했지만, 다산에게 이벽은 벗보다는 스승에 더 가까웠다. 그에게 이벽은 학문적 사유의 힘을 보여주었고, 무엇보다 천주학의 황홀한 은하계를 활짝 열어 보여주었던 스승이었다.
유해발굴 작업 뒤 천진암으로 옮겨진 이벽의 묘소. 천주교천진암성지홈페이지
그랬던 그를 적발 사건 이후 얼굴 한 번 못 본 채 지내다가 석 달 만에 참혹한 부고를 들었다. 이벽의 죽음은 다산의 젊은 시절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다산의 청년시절은 한 매듭이 지어졌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강진 시절에, 다산은 이벽과 젊은 시절 함께 작성했던 ‘중용강의’를 새로 정리해 ‘중용강의보’로 마무리 한 뒤, 서문에 이렇게 썼다. “위로 이벽과 토론하던 해를 헤아려보니 어느새 30년이 되었다. 그가 여태 살아 있었다면 덕에 나아가고 학문에 해박함을 어찌 나와 견주겠는가? 옛 글과 지금 글을 합쳐서 본다면 틀림없이 놀랄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은 살아남았고 한 사람은 죽었으니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랴.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한다.” 1814년 7월 말에 썼다. 그 행간에 고인 회한이 맥맥하게 느껴진다.
1785년의 잔인한 여름은 이렇게 지나갔다. 다산의 연보나 시문집만 봐서는 정말이지 아무 일도 없었던 아주 평온한 여름이었다. 연보 속의 그는 임금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성균관의 주목 받는 수험생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일이 있고 나서 다산은 전혀 다르게 변했다. 속 깊은 곳에 다른 사람이 들어 앉아 있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