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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천도교 자료실 스크랩 천도교-역사와 인물
야무 추천 0 조회 116 15.04.10 04: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천도교 역사와 인물 

反봉건·항일운동의 민족지도자 배출


성주현 천도교 중앙총부 교무차장


천도교의 발전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근대 1백년사와 그 궤를 같이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조 말엽에 이르러 통치이념인 유교가 쇠퇴하고 사회가 극도로 부패해 민생이 도탄에 헤매일 때 서양의 물질문명과 함께 서학(천주교)이 들어와 백성들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저마다 각자위심(各自爲心)으로 혹은 정감록 등의 참위사상에 사로잡히고, 서학에 귀의하기도 했으며 직접 저항으로 반란을 일으키는 혼란한 사회모습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모든 기성종교는 사회를 건질 만할 힘을 잃었고 이미 그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있었으므로 새 시대 새 문화에 맞는 새 종교가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형성돼 있었다.


천도교 1백년, 근대사 1백년


동학 천도교는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아 새로운 종교 신앙으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세워졌다. 천도교는 교조를 대 신사(大神師)라고 존칭한다. 대 신사는 어려서부터 남녀 차별이나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반상의 차별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또한 적자만 우대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재가녀의 자식으로 서자였던 대 신사는 누적된 사회적 부조리를 비판적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대 신사는 어려서 배웠던 유교의 경서를 다시 한번 상고하고 불교를 탐구하기도 했으며 당시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서학에 관심을 가져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세상을 건질 수 없음을 통감했다.


새로운 문화와 참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전국을 주유한 대 신사는 사회가치관의 몰락으로 인한 방향감각의 상실, 왕조사회의 몰락, 외세에 의한 국가적 위기상황 등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참된 진리를 깨달을 수 없음을 체득한 대 신사는 1854년 울산에 정착, 사색을 통한 새로운 방법을 추구했다. 종교적 체험으로 천서(天書)를 받은 대 신사는 천성산 내원암과 적멸굴에서 더욱 수도고행을 쌓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 신사는 이렇다 할 소득이 없음을 한탄하고 1859년 10월 고향인 용담으로 돌아왔다. 대 신사는 용담에서 큰 도를 얻기까지 산 밖으로 나가지 않기로 맹세하고 제선(濟宣)이라는 이름을 제우(濟愚)라 고쳤다. 이는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건지겠다는 굳은 결심을 뜻한다.


그 후 수도에 정진하던 중 37세 때인 1860년 경신년 4월 초5일에 이르러 마침내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아 천도(天道)의 진리를 깨닫게 됐다. 이때를 천도교에서는 창도 원년(布德 元年)으로 하며 올해는 포덕 139년에 해당한다.


대신사는 신을 ‘먼 데서 구하지 아니하고 가까운 내 몸에 모신다’고 해 시천주(侍天主)의 새로운 신앙을 내세웠다. 이를 무극대도라 이르고 포덕을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동학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경기·강원·충청 일대까지 널리 퍼지게 됐다.


이처럼 날로 입도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그 소문이 널리 퍼지자 한편에서는 이를 시기해 서학이라고 무고하기도 하고 또한 관가에서는 대 신사를 지목하게 됐다. 대 신사는 일시적으로 피신, 남원 은적암에 머무르면서 교훈가· 도수사· 권학가 · 논학문 · 수덕문 · 몽중노소문답가 등 천도교의 핵심 경전을 저술했다.


20년 구도 끝에 득도한 大神師 최제우


그러나 당시 유교를 국시로 하던 조정은 동학을 이단으로 몰아 대 신사를 체포했고 결국 대 신사는 포덕5년 갑자(1864) 3월10일 대구 관덕정 장대에서 순도했다. 대 신사는 순도하기 전 후계자로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을 지명, 도통을 잇게 했다.

해월은 천도교에서 제2세 교조, 신사(神師)로 존칭된다. 신사는 대신사의 순도 후 관의 탄압을 피해 지하 포덕을 하며 30여 년 동안 산간벽지로 은신하며 다녔다. 그는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라도·충청도의 삼남과 강원도·경기도 그리고 멀리 황해도·평안도까지 교세를 계속 확장했으며 “동경대전” “용담유사”의 경전을 간행하는 등 천도교의 종교적 기틀을 다졌다.


동학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자 해월신사는 대신사의 억울한 참형에 대한 무죄와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는 근대적 시위운동으로 삼례·공주·광화문·보은 등에서 이른바 신원운동을 일으켰다.


반봉건 반침략의 기치로 포덕 35년(1894) 기포한 동학혁명은 전라도의 접주 전봉준·손화중·김개남·김덕명 등에 의해 대규모로 진행된 근대적 민주화의 민중혁명이다. 이 혁명에서 동학군은 반봉건, 반침략의 기치를 올리고 12가지의 폐정개혁안인 근대화 요구조항을 내걸었다. 그 주요내용은 ▷평화적 해결 ▷탐관오리 척결 ▷횡포한 부호 처단 ▷불량한 유림 응징 ▷노비문서 소각 ▷천민에 대한 대우 개선 ▷과부의 개가 허용 ▷무명잡세 폐지 ▷지벌 타파 ▷외세 구축 ▷공사채 일소 ▷토지 평균분배 등이다. 동학혁명에 참여한 주요인물로는 총기포령을 내린 해월신사를 비롯해 전봉준 · 손화중· 손병희· 김개남· 손천민· 김덕명 · 최경선 · 김봉득 · 오하영 · 손여옥 ·김도삼 ·이종훈 · 홍병기 ·이방언 · 오권선· 신재련· 서우순· 이용구· 김연국 · 김복용 · 박인호· 박희인· 오창섭· 김구 등을 들 수 있다.


동학혁명은 근대적 민주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나 일본의 개입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동학혁명 이후 신사는 또 한번의 관의 탄압으로 도피생활을 해야 했으며 포덕39년(1898) 6월2일 교조에 이어 경성감옥에서 순도하였다. 신사는 천도교의 도통을 받고 순도할 때까지 대신사의 기본사상을 더욱 확대 발전시켜 평등사상(平等思想), 양천주(養天主), 대인접물(待人接物), 용시용활(用時用活), 이천식천(以天食天), 천어(天語), 이심치심(以心治心), 삼경(三敬, 敬天· 敬人· 敬物), 내수도문(內修道文), 내칙(內則), 천주직포(天主織布), 만유시천주(萬有侍天主), 물물천사사천(物物天事事天) 등의 사상을 전개하여 어린이나 부녀를 막론하고 일체 평등하게 대하도록 강조했다. 또한 ‘만사지(萬事知)는 식일완(食一碗)’이라 하여 모든 것이 밥 한그릇에 달려있음을 말씀했으며 ‘땅 아끼기를 어머니 살같이 하라’고 늘 강조했다.


천도교 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존칭은 성사(聖師)이다. 성사는 동학혁명으로 와해된 교단의 조직을 재수습하는 한편 일본에 망명하여 여러 지사와 국사를 의논하고 박종경· 장경낙· 최창조· 서윤경· 백종흡· 황석교· 정광조· 이인숙· 이관영· 김승운· 이광수· 홍성운 등 64명의 인재를 뽑아 유학시키는 등 꾸준히 재기 준비를 했다.


그리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서북 지역에 교세가 확장되어 나용환 ·나인협 ·이두연· 김유영· 오영창· 홍기억· 홍기조· 임예환· 노석기· 문학수· 김학수· 이겸수· 한용구· 김낙겸· 한태훈· 정운봉· 정계완· 박영구 등 수백여 포(包)가 조직되었다.


성사는 동학의 조직이 새롭게 정비되자 포덕45(1904)년에 이르러 갑진개화혁신운동을 일으켰다. 전국 3백60여 지역에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20여만명의 교인이 일제히 흑의단발(黑衣斷髮)로 혁신시위를 일으켰다.


혁신의 대원칙으로 ▷독립의 기초 ▷정부개혁 ▷군정·재정 정비 ▷국민의 생명 재산보호 등 네가지의 강령을 세웠다. 이러한 강령 아래 부패한 정부 탄핵, 민회운동 전개, 생활개선, 탐관오리 축출, 잡세혁파, 교육제도 개선과 산업부흥 등을 도모하는 연설과 집회를 전개해 민권의 신장과 문화혁명의 개혁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이용구 등 일파의 배신으로 실패한다.


이에 따라 성사는 포덕46년(1905) 12월1일을 기해 그동안 불려오던 ‘동학’을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공포하는 동시에 천도교중앙총부를 서울에 설치해 근대적 종교체제를 확립하는 한편 이용구 등 친일적 일진회원 60여명을 출교 처분했다. 성사의 활동은 단순히 종교적 활동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사회현상의 모순과 정치비리를 타파하고 신앙의 자유를 추구해 자주 자강을 이룩하려는 민족주의적 시국관에서 비롯됐다.


항일운동의 거대 인맥 형성


그 후 성사는 춘암(春菴, 朴寅浩. 존칭은 上師)에게 대도주의 직을 승계하고 소위 한일합방 이후 10여 년 동안 교세확장과 교육사업을 통해 구국에 심혈을 기울였다. 성사는 망명지 일본에서 개화된 모습을 직접 보고 망국의 원인이 낙후된 민도에 있다고 하여, 범국민적 민중교육을 통한 민도의 계도와 고양만이 자주독립의 첩경이라고 판단했다.


성사는 1905년 일본에서 귀국해 먼저 출판사업과 교육사업에 투자했다. 1906년 3월부터 사립보성학교를 비롯해 흥화학교, 광명학교, 석촌동 소학교 등에 20원부터 80원까지 보조했다.


그리고 1910년 현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학원을, 1914년에는 동덕여학교(현 동덕여대)를 인수해 경영했다. 그 외에도 1910년대 천도교에서 직·간접으로 관여한 교육기관으로는 양영학교 · 양덕여학교 · 보창학교 · 삼호보성소학교· 문창보통학교 ·창동학교· 교남학교 · 명신여학교 · 종학학교· 봉양의숙· 보명학교 등이 있다. 또 전국 시 ·군에 8백여개의 교리강습소를, 서울에 사범강습소를 설치하는 등 민족교육 차원에서 교육사업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다.


한편 언론활동으로는 1906년 6월17일 ‘만세보’(萬歲報)를 창간했다. 만세보는 국한문을 혼용하면서 서민 대중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한자 옆에 국문으로 토를 달아 대중교육의 실천의 장으로 역할을 다했다. 이외에도 신소설 ‘혈의 누’ ‘귀의 성’ 등을 연재해 신문소설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1910년 소위 한일합방 후 일제의 폭압적 식민정치와 무단정치에 항거하던 천도교는 1919년 3월1일 기독교·불교 등 종교계 대표들을 규합, 거족적인 3·1운동으로 구국독립운동을 일으켰다. 3·1운동을 준비하면서 기독교에 5천원을 제공하고 독립선언서를 보성사에서 인쇄하는 등 모든 경비는 천도교에서 전적으로 부담했으며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의 세 가지 원칙 아래 민족대표 손병희 등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선포했다.


천도교에서는 손병희를 비롯해 김완규·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한묵·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오세창· 최린· 홍병기· 홍기조 등 15명이 서명했다. 이외에도 48인으로 박인호· 노헌용· 인종익· 안상덕 등이 참여했다.


전국으로 확산된 3·1운동에는 각 지방 교구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1919년 말 총 수감자 1만9천50명 중 천도교인이 1천3백64명이나 됐다.


성사는 인내천의 천도교 종지를 밝히고 무체법경·각세진경·수수명실록·명리전·삼전론·천도태원경·이신환성·인여물개벽설 등을 비롯한 수많은 법설을 남겼다. 특히 삼전론에서는 언전(言戰)·재전(財戰)·도전(道戰)에 대하여 말하고 ‘천년에 한번 크게 변하고(大一變) 백년에 중일변(中一變)하고 십년에 소일변(小一變)한다’는 삼변설을 설파하기도 했다.


3·1운동의 주도세력으로 참여


3·1운동 이후에도 천도교는 일제에 끊임없이 항거했다. 1922년 이종일과 천도구국단을 중심으로 전개한 제2의 3·1운동, 1926년 4월 만주에서 고려혁명당 조직, 1930년대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무장 항일운동을 전개한 조국광복회 운동, 1936년 8월 일제의 멸망을 촉구하는 무인멸왜기도운동 등이 대표적 예다.


고려혁명당은 천도교 정의부 형평사가 중심이 돼 1926년 4월 만주에서 결성된 대일 무장 항쟁 조직으로 이종훈· 홍병기· 최동희 · 이동락 · 이동구 · 김광희 · 김봉국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1927년 일경에 체포돼 2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3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조선을 병참기지화하자 천도교는 1936년 8월14일 지일기념일을 계기로 전교인에게 식고(食告) 때마다 일본의 멸망을 기원하는 무인멸왜기도를 전개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38년 2월 일경에 발각되어 중앙간부를 비롯한 수백 명의 교인이 황해도 사리원경찰서로 압송됐다. 이 사건으로 최준모 ·김재계· 한순회 · 김경함 ·홍순의 등이 치안유지법으로 구속되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대일 무장 항쟁이 만주와 압록강·두만강 등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결합을 이루면서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만주지역의 장백현, 함남의 갑산군, 풍산군, 삼수군의 천도교인들은 조국광복회와 연계해 대일 무장 항쟁에 적극 가담했다. 당시 주요한 인물로는 박인진을 비롯해 이전화 장백현 종리원장, 이경운 풍산군종리원청년당대표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박인진 등 함경도 일대에서 대일 무장 항쟁운동에 적극 참여한 천도교인들은 일제 말기의 가혹한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민족적 양심을 버리지 않고 항일운동을 전개한 대표적 사례를 남겼다. 천도교는 한때 사회주의자들과 연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6·10 만세운동과 신간회 창립이다. 1926년 6월10일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3·1운동과 같은 전 민족적 독립운동을 일으키려던 사회주의자들은 단독으로는 어렵다고 보고 천도교와 연계해 추진하려 했다. 이리하여 사회주의자들은 박래홍·박래원·손재기 등과 접촉,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으로 박래홍·양재식·민창식·백명천 등이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렀다.


해방 직후 남북분열 저지운동도


6·10 만세운동으로 사회주의와 연계를 가진 천도교는 민족협동전선으로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신간회(新幹會)에도 적극 참여했다. 신간회 창립에는 권동진 · 오세창 · 이종린· 박래홍 · 최준모· 이병헌· 이기정· 오일철· 이황· 황생주· 마기상· 정환석· 한순회· 이세헌· 최병현 · 박양신 · 황업주· 박완· 강세희· 유인목· 홍종각· 김세환· 나천강· 유태홍· 유종석· 강인택· 오상준· 백명천 등 서울과 지방에서 수백명이 가담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확고한 식민정책을 위해 황국화(皇國化)정책을 추구했다. 이와 같은 식민정책은 천도교에도 강요했다. 이때 교단의 지도자 일부가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고 일제의 정책에 협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지도자와 교인들은 일제에 항거해 끝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해방 후 천도교는 임시전국대회를 개최하고 백세명 · 이단· 홍순의· 안상덕· 김병제· 이군오· 오상준· 김광호· 신용구· 한순회 등으로 구성, 일제의 암울했던 역사를 뒤안길로 하고 새로운 출발을 했다. 그러나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됨에 따라 북쪽에서도 나름대로의 교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근섭 ·조기주 ·한충혁 ·김명희 ·문재경 ·나인협 · 이돈화· 김기전· 임예환 등으로 북조선종무원을 설립했다.


그 외 일제 말기에 강제해산을 당한 청우당을 재건하는 한편 부인회·청년회·학생회 등 각종 단체를 부활했다. 그리고 개벽사 역시 부활, “개벽” “어린이” 등의 잡지를 복간, 문화사업에도 적극 활동했다. 그러나 남북분단이 고착화에 이르자 천도교는 ‘남북분열’을 저지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제3차 유엔 총회에서 남북 총선거 결의가 있었으나 남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세우려 하자 천도교는 1948년 3월1일을 기해 북한 전역에서 통일 총선거를 크게 외치고 남북 분열을 저지하기 위한 일대 시위를 전개했다.


이를 3·1재현운동 또는 남북분열저지운동이라 하는데 평북 영변 희천 개천 등 일부에서만 성공하고 거사 직전 북한 당국에 탄로되어 각 지역에서 2만여 명의 천도교인이 검거 투옥 당 했으며, 김명희 박용완 주명득 배의찬 지성률 김일대 등 87명은 평양감옥으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사형에서 4년형의 중형을 받았다.


그 후로도 천도교는 영우회라는 비밀결사를 북한 전역에 조직하여 민족통일을 추진하였는데 1950년 4월에 또다시 발각되어 평양감옥에 1백65인과 해주감옥에 47인을 비롯하여 각 지역에서 5백15명이 처형당했다.


6·25 전쟁으로 한때 부산으로 피난했던 천도교는 9·18 수복으로 다시 서울로 복귀하였다. 이 전쟁기간에 황해도 지역 교인들은 구월산 유격대에 참가하여 후방교란 작전을 펴기도 했다. 또 유엔군의 북진 후에는 북한 각지에서 교인과 청우당원이 향토수복과 치안담당에 앞장섰다. 특히 1954년 1월, 정전으로 판문점에서 전쟁포로를 교환할 때 천도교인은 대형 태극기와 궁을기(교기)를 앞세우고 자유의 다리를 넘어왔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수십만의 천도교인이 월남, 아직도 망향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1948년 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4백80만 명의 교세를 자랑하던 천도교는 현재 교세가 현저히 위축되었다. 이는 남북 분단으로 인한 외적요인(북한의 천도교인이 전체의 3분의2 이상을 차지했음)과 지도자 양성 부재의 내적요인에 기인하고 있다. 민족통일연구회, 남북교류추진위원회 발족 등 통일운동을 꾸준히 전개해온 천도교는 60년대 들어 여타 종교와 교류하면서 그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으며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정보화 사회에 부응해 각종 자료와 소식을 인터넷에 소개하고 있다. 해방 이후 천도교를 이끌어온 지도자는 백세명 ·정석환 · 한순회 ·이동락 · 신용구 · 공진항· 김경태 · 최덕신 ·이우영 ·김명진 · 이영복 · 고정훈· 정운채· 오익제· 김재중 등이며, 현재 지난 4월 취임한 김광욱 교령이 교단을 이끌고 있다. 김광욱 교령은 재임동안 교회중흥의 기초가 되는 교구육성과 교구 중심제 운영, 남북통일과 학교설립을 위한 건실한 재단운영,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 종교의 사회화의 지표인 사회복지사업 전개, 남북통일 추진과 중원포덕 등을 추진, 교단의 중흥을 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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