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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앙일보 기사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신제국 미국은 어디로 . . . ********************************************************* 목차 1 고독한 거인의 마이웨이 2. 탈바꿈하는 제국군대 3. 다시 그리는 동맹지도 4. 왼쪽 날개 잃은 독수리 5. 외국인은 싫다 6. 이념의 생산공장 싱크탱크 7. 한손엔 IT, 한손엔 금융 8. '제국' 인력의 양성소 9. 빅 브라더의 눈 10. 21세기의 콜로세움 - 할리우드 11. 링구아 프랑카(세계어) - 영어 12. 오일 커넥션: 돈·인맥으로 얽힌 부시 정부와 석유사 13. 신보수주의 14. 기독교 원리주의자 15. '제국'의 반항아들 16. 에필로그(끝) **********************************************************
1 고독한 거인의 마이웨이: 9·11후 21만명 일터서 군대로
마이크 고어스키(33)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은행원인 그의 생활은 9·11 테러가 터지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고객들과 투자 상담을 하고 있어야 할 그는 벌써 16개월째 병영생활을 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소속 하사인 고어스키는 9·11이 나고 얼마 후 연방정부 소집령에 따라 키보드 대신 총을 잡았다.
워싱턴주 타코마에 있는 군 기지에서 본토 방위 임무를 맡다 지금은 이라크 남부 카르발라에서 힘겨운 군 생활을 하고 있다. 8개월 정도를 이라크에서 더 보내야 할 형편이다. 회사가 종전처럼 월급을 지급하고 있어 가족들 생계에는 문제가 없지만 직업군인도 아니면서 이 정도 장기복무는 본인과 가족 모두 견디기 힘들다. 그는 귀국하는 대로 주방위군을 탈퇴할 계획이다.
고어스키 하사의 부인이 최근 뉴욕 타임스(9월 15일자)에 전한 사연은 그만의 얘기가 아니다. 현재 이라크에 주둔해 있는 주방위군 8천명의 이야기다. 14만7천명의 이라크 주둔 미군 중 2만명이 민간인 신분인 주방위군이나 예비군이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21만2천명의 민간인에 대해 소집령을 내렸다. 1백55개 미군 전투대대 중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9·11 이전 17개에서 지금은 98개로 늘었다. 미국은 전세계 90여개국(10명 이상 파견 기준)에 36만9천명의 군인을 파견하고 있다. 순환과 교대에 필요한 가용 병력이 사실상 고갈된 상태다. 힘에 부친 부시 행정부는 한국 등 14개국에 이라크 추가 파병을 요청 중이다.
로마 제국은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던 기원후 1세기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 28개 군단, 16만명의 정규 병력과 22만명의 보조 병력을 제국 곳곳에 배치했다. '최상의 안보는 확장'이라는 제국 신화는 병력의 과잉 전개(overstretch)를 초래했고, 쌓인 부담은 결국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한해 4천억달러가 넘는 천문학적 재정 적자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는 내년도 테러와의 전쟁 비용으로 8백70억달러를 책정했다.
『강대국의 흥망』을 쓴 폴 케네디(예일대)교수는 "제국적 야망을 부인하는 부시 대통령의 주장이 진심이라고 믿지만 문제는 제국처럼 보이고, 제국처럼 행동하고, 제국처럼 소리 지르면 진짜 제국이 된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통치자가 국경의 과잉 확장을 경계할 때 제국은 존속할 수 있다."『로마제국 흥망사』를 남긴 18세기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의 경고는 지금도 유효한 것인가. ********************************************************** 2. 탈바꿈하는 제국군대
미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남쪽으로 56㎞ 떨어진 포트 루이스 미 육군 기지. 21세기형 전쟁에 대비한 미군의 핵심 전력을 양성하는 곳이다. '과거 전쟁에서 미래 전쟁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로 불리는 최신예 스트라이커 장갑차 2개 여단도 이곳에 위치해 있다.
취재팀이 찾아간 지난 17일 오전 기지 병기창에서는 50여대의 스트라이커 장갑차에 컴퓨터와 적외선 감지기 등 각종 첨단 전자장비를 장착하는 작업이 철저한 보안 속에 진행 중이었다. 취재진 옆으로 스트라이커 장갑차 한 대가 소리도 없이 번개 같은 속도로 지나갔다.
"스트라이커는 지구상 어떤 장갑차도 필적할 수 없는 시속 1백㎞로 달립니다. 소음도 거의 없어 1마일(1.6km) 안까지 접근해도 적들은 눈치채지 못합니다. 순식간에 다가가 치명적 타격을 입히고 적이 대응하려는 순간 사라집니다. 21세기 전투의 새로운 형태가 열리는 거지요." 취재팀과 동행한 팀 베니나토 대위의 설명이다.
▶ 스트라이커 1여단장 브라운 대령 인터뷰
장갑차 안은 정보통신 상황실을 보는 듯했다. 운전병 앞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밤에도 투시장비를 통해 주변 상황이 손바닥 보듯 나타난다. 모니터에 적군은 붉은색, 아군 차량과 병력은 푸른색으로 표시돼 있다. 차량 내부를 설명하던 부대 관계자는 "이 장갑차 자체가 움직이는 컴퓨터"라면서 "전투 시간과 장소를 골라서 하는 '선택적 교전'이 가능하다는 점이 큰 강점"이라고 귀띔했다.
뒷자리의 사격병 앞에도 모니터가 놓여 있다. 스틱을 움직이면 장갑차 위에 설치된 기관총은 자유자재로 3백60도 회전하고, 버튼을 누르는 순간 자동으로 총탄을 쏟아낸다. 컴퓨터 게임과 똑같이 전투가 치러지는 것이다.
포트 루이스 25사단 스트라이커 1여단장인 로버트 브라운 대령은 "인공위성.정찰기 등을 통해 취합된 모든 정보가 곧바로 화면으로 여단장에게 전달된다"면서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여단장과 일반 병사들이 똑같은 화면을 보면서 전투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스트라이커의 8개 바퀴는 늪지.산길.도로 등 지형 상황에 따라 차 안에서 자유자재로 공기압 조절이 가능하다. 차량도 전투용.정찰용 등 10종류나 된다. 대당 가격이 1백50만~2백50만달러인 이 장갑차를 미국은 2006년까지 2천1백12대를 생산해 6개 여단을 만들 계획이다.
세계 최강 미군이 대변혁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인력 구조에서부터 무기.전략.전술 등을 통째로 뜯어고치는 대대적인 군 변혁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미군 역사상 남북전쟁과 2차대전 직후에 이어 세번째 대변화다.
미 국방대학원 맥그리거 더글러스 대령은 "냉전 종식과 9.11 테러로 인해 미군의 전술과 전략은 근본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하게 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인공위성.인터넷 등 첨단과학 기술의 획기적 발전과 미군이 태평양.대서양.인도양 등 5대양을 모두 장악해 '바다로부터의 기동작전'이 가능해진 것이 군 전력의 전면적 개편을 가능케 했다"고 지적했다.
미군 변혁의 핵심은 첨단화.기동화.정보화다. 모든 군 작전은 첩보위성과 정찰기에서 제공되는 정보에 따라 이뤄지고, 어떤 적도 넘볼 수 없을 만큼 무기를 첨단화하며, 5대양 6대주 어디에도 순식간에 병력을 보낼 수 있는 기동력을 갖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군을 21세기의 '무적(無敵) 강군'으로 거듭 나게 한다는 것이다.
미군 병력은 7년 전인 1996년엔 1백58만명이었다. 하지만 2003년 현재 1백46만명으로 오히려 12만명 줄었다. 같은 기간 미 국방비는 3천45억달러에서 3천8백27억달러로 7백82억달러 늘었다. '인력이 아니라 기술'로 전쟁을 치른다는 미국의 새로운 전략을 보여주는 변화다.
군 개혁에 대한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의지는 강력하다.
이미 럼즈펠드 장관은 미군의 10개 현역 사단을 7~8개로 줄인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 중이다. 이를 반대하던 토머스 화이트 미 육군부 장관과 에릭 신세키 육군 참모총장은 모두 자의반 타의반 군을 떠났다. 지난 4월 10일 미 의회에 제출된 군개혁법안(The Defense Transformation for 21th Century Act of 2003)이 통과되면 미군의 변화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21세기의 전투는 네트워크 중심(Network Centric War)이다."
미 국방대학원의 존 프리스터프 선임연구원은 미군의 전투방식이 '주둔에서 네트워크로' 변했다고 말했다. 특정 지역에 미군이 장기 주둔하면서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과거의 주둔군 개념은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 많은 숫자의 주둔군이 없어도 전쟁이 발생하면 일본.괌.하와이 등 동아시아 지역 여러 곳에서 순식간에 병력과 장비를 조합해 즉각 투입이 가능하다는 개념이다.
부시 행정부는 이미 2001년 '국방전략 지침서(QDR)'를 통해 이런 목표를 분명히 했다. 미군은 현재 전 세계 어느 곳에서 분쟁이 발생해도 ▶1개 여단은 96시간(4일) 이내▶1개 사단은 1백20시간(5일) 안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다.
미 국방부는 또 12개의 항공모함 전투단을 포함한 19개의 기존 타격팀을 ▶12개의 항모 타격단▶12개 해병 원정 타격단▶9개 미사일 방어팀▶4개 특수부대 타격단 등 37개의 기동 타격단으로 개편했다. 보다 다양하고 많은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공군도 52억달러를 투입해 최신형 전투기인 F-22 랩터 생산과 무인 전투기 개발 등에 주력할 방침이다.
"파워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남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고 조셉 나이 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학장은 말한다. 2위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압도적 군사력으로 미국은 국제정치의 카드놀이에서 이미 으뜸패를 쥐고 있는 셈이다. ****************************************************************
9.11 테러에 대한 미국인의 분노와 애국주의 물결이 미 전역을 휩쓸던 2002년 6월 1일 뉴욕주 웨스트포인트 소재 미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장.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장차 미국 군대의 간성이 될 청년들에게 "미국은 제국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영토적 야심을 품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테러 집단이나 불량 국가들에 대한 입장은 단호했다. 이들이 대량살상무기로 미국과 동맹국을 위협할 경우 선제공격을 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이른바 '부시 독트린'의 탄생이다.
아울러 부시 대통령은 "미국은 21세기의 도전과 기회에 맞서기 위해 대대적인 군 개혁을 단행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냉전의 종식으로 이미 필적할 상대가 없어졌지만 9.11 테러를 계기로 다시금 군사력 강화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의지가 현실로 구체화하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01년 3천2백74억달러였던 미국의 국방비는 2003년 3천8백27억달러로 늘었다. 두 해 사이에 무려 5백53억달러(66조원)가 늘어난 것이다. 미국은 매년 당해 연도 재정적자와 맞먹는 천문학적 액수를 국방비에 쏟아부을 계획이다. 2008년 국방비는 4천8백7억달러로 늘어나게 된다.
단순히 금액만 늘어나는 게 아니다. 올해 미국이 첨단무기 개발에 투자하는 연구.개발비는 5백68억달러로 전체 국방비의 14%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연간 국방비보다 훨씬 많은 돈을 첨단무기 개발에 투입하는 셈이다.
미국의 군사력 증강에는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존 볼턴 국무부 차관 등 부시 행정부에 포진한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윌리엄 크리스톨 위클리 스탠더드지 편집인이 이끄는 네오콘의 모임인 '뉴아메리칸센추리프로젝트(PNAC)'는 지난 1월 백악관에 보낸 서한에서 "부시 독트린의 효과적 이행을 위해서는 국방비를 지금보다 더 늘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현재 국내총생산(GDP)의 3.4% 수준인 국방비 비중을 최소 4% 선까지 끌어올리라는 주문이었다.
미국의 가공할 군사력에 대한 두려움은 미국 내부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은 "미국의 힘은 너무나 막강하기 때문에 자체 검열이 필요하다"고 우려한다.
"망치를 쥔 사람에게는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인다"는 케이건의 말대로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힘을 쓰고 싶은 유혹이 다가서게 마련이다. 견제 세력 없는 미국의 군사력이 과연 세계 평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할지, 아니면 그 반대가 될지 세계는 기대와 우려 섞인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 3. 다시 그리는 동맹지도
지난 3일 워싱턴을 방문한 윤영관 외교통상부장관은 예정에 없이 백악관으로 초대됐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내 친구는 잘 있느냐"며 尹장관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안부를 물었다. 동맹국 정상에 대한 이례적인 친근감의 표시였다. 미국이 한국에 이라크 추가 파병을 은밀히 요청해 놓고 있던 터였다.
지난 5월 미국을 방문한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은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백악관에서는 미국 언론도 '이례적'이라고 지적한 성대한 만찬행사가 열렸다.
부시 대통령은 "앞으로 필리핀을 최우방 국가로 대우하겠다"고 다짐했다. 9천5백만달러의 군사지원을 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동남아시아의 이슬람 반군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교두보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9월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가 재선됐을 때 축하 전화조차 걸지 않았다. 지난 23일 유엔총회에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연설 차례가 되자 부시 대통령은 수행원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의 전용기인 공군 1호기 메뉴에서는 여전히 프렌치 토스트를 찾을 수 없다. 미국의 동맹질서가 대변혁을 겪고 있다. 철석 같던 동맹관계가 하루 아침에 무시되기도 하고, 과거의 적이 새로운 파트너로 등장하기도 한다. 미국의 외교전선에 '불확실성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6월 부시 대통령은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미국은 더 이상 안보를 보장받기 위해 집단동맹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50여년간 유지해 온 동맹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미국과 영국.프랑스.독일이 주축이 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냉전시절 유럽에서 소련의 서진(西進)을 막는 최대 보루였다. 하지만 냉전 종식과 더불어 나토의 위상은 갈수록 추락하고 있다.
헤리티지 재단의 제임스 칼라파노 연구원은 "21세기에 집단동맹은 큰 의미가 없다"면서 "미국은 앞으로 일대일의 양자관계에 더욱 치중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올해 초 프랑스와 독일 등 서유럽국가들을 가리켜 '늙은 유럽'이라고 표현했다. 미국 내 신보수주의 강경파들 사이에선 "더 이상 미국과 유럽이 같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지 말자"(로버트 케이건 카네기재단 선임연구원)는 노골적 주장까지 나왔다.
대신 미국은 동유럽 및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열을 올리고 있다.
폴란드와의 접근이 특히 눈길을 끈다.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 폴란드 대통령은 국빈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부시 행정부의 고위 관리들로부터는 '새로운 유럽의 지도자'라는 칭송을 들었다. 크바시니에프스키 대통령도 "부시 대통령의 비전은 나의 비전"이라며 열심히 코드를 맞췄다.
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슬로바키아.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국가들은 이라크에 비록 소규모지만 병력을 보냈다. 하지만 전통적 동맹국이었던 서유럽에서는 영국.이탈리아.스페인.네덜란드 등 4개국이 파병했을 뿐이다.
미국은 또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과 9.11 테러 이후 군사기지 및 영공 사용 협정을 맺었다. 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그루지야 등에 대해서도 군사지원을 시작했다. 미국과의 파트너십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유럽은 이미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지 오래다.
미국이 원하는 21세기 동맹의 모습은 무엇일까.
2001년 11월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미국의 목표에 따라 동맹이 결정되지, 동맹에 따라 미국의 목표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고 밝혔다. 기존 동맹관계에 구속되지 않고, 상황과 필요에 따라 파트너를 바꿀 수 있다는 '순환동맹(rotating coalition)' 개념을 천명한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경제.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신 미국의 단기적 군사목표를 지지하는 나라들을 중심으로 그때 그때 동맹지도를 바꿔 그리겠다는 뜻이다.
순환동맹은 다양한 형태로 구체화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했고, 핵을 보유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미국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르면서 파키스탄은 '미국의 동반자'로 둔갑했다.
반면 오랜 우방 캐나다는 미국의 눈 밖에 났다. "테러리스트들의 입국을 막아야 하니 자유 이민정책을 재고해 달라"는 요청을 묵살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5월 예정됐던 캐나다 방문을 취소했다. 비센테 폭스 멕시코 대통령도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첫번째 국빈 초청을 받을 만큼 가까웠으나 이라크전에 반대한 뒤부터 양국 관계는 최악이다.
미국과 동북아국가들의 관계에도 변화가 오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출범 초기 중국을 최대의 가상적으로 설정했었다. 하지만 9.11 테러와 북핵 사태를 대처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미국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잡았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미.중관계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1972년 베이징(北京) 방문 이후 지금이 최고"라고 선언했다.
아시아.태평양 외교의 변방에 머물던 호주의 급부상도 관심거리다. 호주는 9.11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의 PSI(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구상)에 적극 협조하면서 북핵 사태 등에 대한 발언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달 초 호주 근해에서는 미국 주도로 테러선박 나포를 위한 국제 군사훈련이 실시되기도 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의 지휘 아래 일본은 미국과의 친밀도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반면 오랜 동맹인 한국과 미국의 거리는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입맛에 따라 음식을 고르는 '아 라 카르트'(? la carte)식 동맹관계에 대한 미국 내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미 국제외교센터의 톰 베리 공동대표는 "일방주의.전쟁우위.도덕적 절대주의는 부시 행정부 외교의 새로운 3대 원칙이 됐다"면서 "미국의 입장과 시각만을 앞세우는 '편의주의적 동맹관계'(coalitions of convenience)는 장기적으로 미국의 국익에 해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24일 "부시 대통령은 미국의 행동이 문명사회를 혼란에서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세계의 다른 지도자들은 부시 대통령 때문에 혼란이 오고 있다고 비판한다"고 꼬집었다. 거인 미국의 '신 외교'가 시험대에 올라 있다. *********************************************************************** 4. 왼쪽 날개 잃은 독수리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버클리대. 미국 주립대학 중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버클리는 집안은 어려워도 머리 좋은 미국 청년들이 선호한다는 대학이다. 1960년대와 70년대 버클리는 좌파.반전운동.히피 문화의 총본산이었다.
불온한 진보주의자를 뜻하는 '더 버클리스(The Berkeleys)'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로 버클리가 미국 사회에 던진 충격은 컸다. 새 학기를 맞은 버클리 교정에서 취재진은 여전히 살아 숨쉬는 진보주의의 전통을 느낄 수 있었다.
게시판마다 이라크전 반전 포스터가 붙어 있고,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사진에는 '스톱(STOP)'이라는 붉은색 스탬프가 찍혀 있다. 국제사회주의연맹(ISF).국제모택동주의자운동(MIM)등 좌파 이념 서클의 홍보.집회 안내문도 간간이 눈에 띈다.
하지만 속사정은 다르다는 게 학생들의 얘기였다.
제이슨 네더벨드(22.경제학)는 "그동안 학교 분위기 때문에 숨어지내다시피 했던 공화당 버클리대 지부가 이번 학기 들어 공개적으로 신입회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면서 "9.11 테러 이후 나타난 미국 사회의 전반적 보수화 경향에서 버클리라고 예외는 아니다"고 말했다.
이 대학 한국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강동현(23.철학)씨는 "분위기 자체는 여전히 리버럴하지만 다들 전공학점 이수와 취업에 관심이 쏠려 있어 이념 논쟁은 거의 실종됐다"고 전했다.
한때 차고 넘쳤다는 학교 앞 운동권 서점들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어물어 학교 근처 지하상가 귀퉁이에 있는 '혁명서점'을 찾았다. 주인 게리 밀러(50)는 "과거에는 트로츠키파.룩셈부르크파 등으로 서점들이 세분됐을 정도지만 이젠 우리만 남았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미국에서 보수주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9.11 테러가 몰고온 애국주의의 물결이 아메리카 대륙을 휩쓸면서 미국 사회를 떠받쳐온 보수와 진보의 균형이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계.학계.언론계.문화계 등 각 분야에 걸쳐 보수.우경화는 9.11 이후 뚜렷한 조류로 자리잡았다. 부시 대통령 집권 초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변화다.
텍사스 주립대(오스틴)의 로버트 젠센 교수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은 9.11 이후 불거진 국민의 애국심을 미국의 힘을 강화하는 데 최대한 이용했고, 이제는 '진보=비(非)애국'이라는 등식까지 생겨날 판"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래서는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기 어렵다"면서 왼쪽 날개를 다친 독수리의 앞날에 우려를 나타냈다.
미 진보세력의 또 다른 온상으로 여겨지던 할리우드. 여기서도 진보주의자들은 수난을 당하고 있다.
수전 서랜든.팀 로빈스 등 이라크전 반대에 앞장섰던 배우들에게는 지금도 변변한 배역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 전쟁 발발 직전 이라크를 방문했던 배우 숀 펜에게 폭스 뉴스 앵커인 빌 오라일리는 '반역자'란 낙인을 찍었다.
텍사스 출신 보컬그룹 딕시 칙스는 "부시 대통령과 같은 고향인 게 부끄럽다"고 말했다가 남부 보수단체들에 의해 음반이 불도저에 깔려 뭉개지는 수모를 겪었다.
할리우드 영화평론가인 데이비드 프리드먼은 "영화의 실험적 속성 때문에 할리우드가 진보 성향을 보인 측면이 있지만 지금은 전형적인 미국식 영웅들과 보수 메시지가 관객에게 먹히고 있다"면서 "브루스 윌리스와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다시 뜨고, 멜 깁슨이 복고풍의 예수 영화를 다시 만드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고 설명했다.
미국 사회의 보수.우경화 바람은 정치권 지형도 바꿔놓고 있다.
지난해 11월 5일 치러진 중간선거는 공화당의 축제가 됐다. 팽팽하리라던 당초 예상을 깨고 상.하원 모두 공화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현직 대통령 소속 정당이 상.하원을 다 장악한 것은 1953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이후 처음이다.
동성연애.정교분리.낙태허용.이민제한.총기규제 등 미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좌표들도 일제히 우향우다.
갤럽 조사 결과 "동성 간 결혼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지난해 4월 46%에서 지난 7월 57%로 높아졌다. 99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지난 3월 버클리대 조사에서는 성인남녀의 69%가 학교 내 주기도문 암송에 찬성했다.
올해 하버드대 신입생들의 부시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60%였다. 그동안 소속 정당에 관계없이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늘 절반 이하였던 하버드대의 전통이 깨진 것이다.
출판계도 마찬가지다.
지난해부터 진보주의자를 공격하거나 최소한 '패트리엇(애국자)'이란 단어가 들어가야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변호사 앤 콜터는 '반역'이라는 책에서 "매카시즘은 진실이며 오히려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이 좌파 언론인들의 먹이가 됐다"고 주장했다. 미국 사회를 마녀사냥으로 몰고 갔던 극우 정치인까지 재평가하고 나선 것이다.
이 같은 보수화 바람에 '사회의 거울'이라는 언론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다.
부시 대통령 집권 이후 보수적인 색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온 폭스 뉴스는 CNN의 시청률을 추월했다.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뉴욕 타임스.워싱턴 포스트.ABC방송은 최근 언론감시그룹인 페어(FAIR)에 의해 '보수 편향 언론'으로 분류됐다. 이런 상황을 빈정거리는 '뭐, 미국 언론이 진보적이라고'라는 제목의 책(에릭 올터먼)도 나왔다.
'테러리즘의 덫'의 저자 마이클 파렌티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은 영국의 식민지배를 회상하며 자유와 평등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날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다들 미국의 세계 지배는 말하지 않고, '위대한 미국'만을 외쳤다. 그러나 누구도 이에 토를 달지 못했다"고 개탄했다.
하지만 한쪽으로 쏠린 시계추가 다시 반대 편을 향해 움직이듯 미국 사회의 지나친 우편향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의 이라크 전후처리가 수렁에 빠지고, 미국이 유엔에서 다른 나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움츠렸던 진보 진영이 다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메릴랜드 주립대의 애리 크루글랜스키(심리학)교수는 "9.11의 충격이 워낙 컸던 탓에 정권의 움직임에 관계없이 보수화 경향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면서도 "장기적으로는 좌우의 균형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5. 외국인은 싫다
지난달 7일 밤 미국 애리조나주의 툼스톤에서 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멕시코 국경. 사막 구릉지의 가시덤불 뒤쪽에서 대여섯개의 시커먼 그림자들이 세 시간째 꼼짝하지 않고 어둠 속의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군화에 위장복을 입고, 허리춤에는 권총을 찼지만 이들은 군인이 아니다. 인근 마을인 툼스톤.비스비.더글러스에 사는 백인 주민들로 이뤄진 '조국민간수호대'(Homeland Civil Defense) 대원들이다. 야음을 틈타 국경을 넘어오는 멕시코 밀입국자들을 잡아 국경수비대에 넘기는 일을 하고 있다. 무보수 자원봉사다.
매복작전에 동행한 취재진이 저려 오는 무릎을 펴면서 잠시 바스락댔다. 바로 옆 언덕 위에 엎드려 있던 한 대원이 살그머니 기어와 핀잔을 준다. "저들도 '척후병'을 보내 동정을 살핀 뒤에야 넘어온다. 사막에서는 사람 목소리가 1마일(1.6km)도 더 가고, 그믐달 밤에도 사람 윤곽선이 보인다. 제발 좀 조심해 달라."
매복은 자정을 넘겨 한시간 가량 더 지속되다 대장인 크리스 심콕스(42)의 철수명령에 따라 중단됐다.
현재 멕시코 국경에서 이들처럼 자발적 국경감시활동을 벌이는 민간 조직은 목장구조대.미국국경감시단 등 10여개. 모두 9.11 테러 이후 결성됐다. 지난 5월부터는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미주리주 주민들까지 단체를 조직해 야간투시경.서치라이트.망원렌즈.라이플까지 갖추고 애리조나로 '원정'을 오고 있다.
보수성향의 지역신문인 툼스톤 데일리 발행인인 심콕스 대장에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많은 미국인이 멕시코 불법이민자들에게 밀려 일자리를 잃고 있다. 이들은 세금 한푼 안 내면서 아이들을 공짜로 학교에 보낸다. 이대로 두면 미국은 이민자 때문에 망한다 …." 차가운 국경의 밤, 그의 열변은 그칠 줄 몰랐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이 달라지고 있다. 9.11 테러 이후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과 반(反)이민 정서가 확산하면서 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 들어와 살고 있는 이민자에 대한 각종 차별과 규제가 대폭 강화되고 있다.
출신과 국적에 관계없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다인종 국가 미국의 경쟁력으로 승화시켜온 미국의 '멜팅 폿(melting pot.용광로)'이 식어가고 있는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한국인 최모(46.직장인)씨는 9.11 이전 이민국에 영주권을 신청했다. 전 같으면 진작 영주권이 나왔어야 하지만 2년6개월이 지난 지금도 이민국은 "기다려라"는 대답뿐이다. 올해 말로 취업비자 기한이 만료되면 그는 꼼짝없이 귀국하거나 불법체류자 신세로 전락할 판이다.
'테러와의 전쟁'이후 이민수속과 비자발급이 한층 까다로워진 것은 물론이고 운전면허증 발급과 학교 등록, 은행계좌 개설 등도 외국인에게는 장벽이 높아졌다. 경찰.세관.이민국의 전산망이 통합되고, 신설된 국토안보부 산하로 이민국이 넘어가면서 이민정책의 우선 순위가 지원에서 단속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미 인권변호사위원회(LCHR)의 레베카 손턴 자문변호사는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비자 및 이민 심사에는 '무관용(zero tolerance)'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예외나 정상참작 등이 용인됐지만 지금은 서류상의 사소한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살 때 한국에서 입양된 애런 빌림스(27)는 지난 6월 대마초 판매 혐의로 추방명령을 받았다. 양부모의 착오로 영주권만 가졌던 그는 한국에 연고도 없고 한국말도 못해 막막한 처지다. 비시민권자들의 형사범죄는 곧바로 추방을 의미한다.
이민국은 2000년 3천1백만명이었던 미국 내 이민자(출생지가 외국인 사람)수가 지난해 3천3백만명으로 2백만명 늘었지만 추방자수는 오히려 줄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매년 추방자의 70% 이상을 차지해온 멕시코 밀입국자들이 국경단속 강화조치로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제외한 중동계와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추방은 계속 늘고 있다.
이민자에 대한 증오범죄.인권침해도 심각하다. 지난 6월 후세인이라는 명찰을 승객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트랜스 스테이츠 에어라인은 중동계 승무원을 해고했다. 지난해 11월 웨스트버지니아 노스알링턴에서는 인도 시크교도의 두건을 벗겨 가위로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일도 있다.
아메리칸이슬람위원회(CAIR)에 따르면 중동계에 대한 증오범죄는 2001년 5백12건에서 지난해 6백2건으로 늘어났다. 자난 하샴 CAIR 이사는 "더 큰 문제는 소수인종에 대한 범죄를 막아야 할 경찰 등 사법당국이 소극적이라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는 점"이라고 말한다.
인종갈등은 미국의 영원한 숙제다. 따라서 '멜팅 폿'보다는 '샐러드 보울(salad bowl)'이 현실에 가깝다는 주장도 있다. 그릇 속의 샐러드처럼 혼합은 돼도 융합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자는 미국의 경제적 활력과 문화적 다양성을 상징해 왔다. 미 스티븐스 기술연구소의 제리 헐틴 소장에 따르면 미국 의사의 20%, 전체 박사의 23%, 특허출원자의 26%가 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이민자들이다.
미 21세기 농업연구소의 데이브 주다이 연구원은 "중남미계 히스패닉을 중심으로 이민자들이 미 농업인력의 80%, 축산업 인력의 15%를 담당하고 있다"면서 "이들을 불법이민이라고 몰아낸다면 당장 생필품 가격이 뛰어오르고, 농토는 황폐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난해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총재는 "불법이민자도 미국 경제에는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이민자들의 경제적 기여 효과보다는 '이민자들 때문에 미국 사회가 지출하는 추가비용이 매년 2백20억달러'(국립연구위원회), '불법이민자 자녀들로 인한 공립학교 교육비가 74억달러'(이민제도개혁연맹) 등의 부정적 수치들이 더 부각되고 있다.
노스이스턴대의 앤드루 섬(노동경제학)교수는 "최근 80년 동안 미국 경제가 지금처럼 이민자들에게 의존한 적이 없었다"면서 "이민자들이 없다면 당장 집값 폭락과 임금 폭등으로 미국의 대외경쟁력이 추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6. 이념의 생산공장 싱크탱크: "워싱턴에만 100여곳 다양한 아이디어 장점"
조지 타운대의 켄트 위버(공공정책)교수는 "싱크탱크는 미 정치 현장에 신선한 아이디어와 다른 목소리를 제공한다는 개방성이 큰 장점"이라면서 "그러나 싱크탱크 스스로가 너무 정치적인 성향을 띨 경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는 싱크탱크가 얼마나 되나.
"아무도 정확한 숫자를 모른다. 신고만 하면 설립이 가능하기 때문에 심지어 2~3명이 모여 컴퓨터 한 대 놓고 '세계 평화'같은 거창한 제목의 싱크탱크를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1천2백여개 정도로 추산되며 이 중 대학에 있는 기관을 빼면 약 6백개다. 공공정책에 영향을 미친다는, 좀 더 엄밀한 기준을 적용하면 3백개로 축소되고, 이 중 1백여개가 워싱턴에 있다."
-싱크탱크들이 워싱턴에 몰리는 이유는 뭔가.
"국가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면 워싱턴에 있는 게 유리하다. 주요 언론들이 워싱턴 주변에 포진해 있고, 의회 증언 등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펼 수도 있다."
-싱크탱크의 기원은.
"자유로운 사고방식과 토론이 정부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판단에 근거해 20세기 초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랜드(RAND)연구소처럼 정부의 용역을 받아 연구하는 기관들이 생겨났다. 1970년대 이후에는 보수주의를 표방한 헤리티지 재단의 성공에 자극받아 환경·노동 등 각종 분야에서 싱크탱크들이 양산됐다."
-싱크탱크는 '회전문'의 기능을 통해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가.
"그렇다. 싱크탱크에는 다양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완전히 통일된 목소리를 내는 건 쉽지 않다. 따라서 싱크탱크의 영향력은 얼마나 많은 인력을 행정부에 포진시켰는지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싱크탱크를 '아이디어 브로커'로 보는 부정적 시각도 있는데.
"목소리가 너무 다양해 누가 무슨 주장을 했는지조차 파악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또 자칫하면 싱크탱크라기보다 이익단체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 **************************************************************** 7. 한손엔 IT, 한손엔 금융
세계 정보기술(IT) 산업의 메카 실리콘 밸리. 취재진이 이곳을 찾은 지난달 16일 새너제이 컨벤션센터에서는 때마침 '인텔 디벨로퍼 포럼(IDF)'이 열리고 있었다.
세계 1위의 반도체 회사인 인텔이 매년 봄과 가을 전 세계 IT 전문가들을 초청해 개최하는 행사다. 1인당 2백만원 가까이 하는 참가비에도 불구하고 사흘간의 포럼 기간 3천여명이 몰려들었다. IT 산업의 장기 불황에도 불구하고 '인텔이 부르면 온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인텔의 신제품 전략과 구상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IT 분야에서 생존이 어렵다." 포럼에 참가한 프랑스인 필립 다몽(35)은 의료분야에 집적회로 기술을 접목한 인텔의 헬스 사이언스 기술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전문가들을 이렇게 불러모을 수 있는 힘의 원천에 대해 인텔 기술마케팅부 수석 엔지니어인 게리 웨일은 한마디로 '기술 지배력'이라고 말한다. 인텔의 칩이 내장돼 있다는 뜻의 광고 문구인 '인텔 인사이드'는 지구촌 개인용 컴퓨터(PC)의 82%에 적용되고 있다.
선도적 독점 기술과 고부가가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퍼시픽 크레스트 증권의 애널리스트 마이클 매코넬은 인텔의 마진율은 올 2분기 50.9%에서 3분기엔 56%로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1백달러짜리 물건 하나를 팔면 56달러가 고스란히 순수익으로 떨어진다는 얘기다.
인텔과 마이크로 소프트(MS)의 기술 독점력은 '윈텔(Wintel)'이란 합성어를 탄생시켰다. 미국의 IT 분야 칼럼니스트인 조지 길더는 "우리는 오늘날 '윈텔 제국'아래 살고 있다"고 말한다. 컴퓨터를 구성하는 두 부문, 즉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핵심을 장악한 것이 바로 윈텔 제국이라는 것이다. 전 세계 PC 10대 중 9대가 MS가 만든 윈도를 운영체계로 해 돌아가고 있다.
뉴저지주 머리힐에 있는 루슨트테크놀로지의 벨연구소. 연구소 로비에 설치된 전광판에 '30,383'이란 숫자가 반짝이고 있다. 1925년 설립된 이후 현재(지난달 15일)까지 벨연구소가 획득한 특허 숫자다. 벨연구소는 트랜지스터부터 ADSL 모뎀까지 인류의 생활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핵심 기술들을 숱하게 쏟아냈다.
대부분 원천 기술들이다. 이런 기술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임은 퀄컴사의 경우를 보면 분명해진다. 부호분할다중접속(CDMA)방식의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퀄컴이 95~2002년 삼성전자.LG전자 등 한국 휴대전화 제조사들로부터 챙겨간 로열티만 1조5천억원이 넘는다.
첨단기술력과 함께 미국 경제를 굴러가게 하는 또 하나의 바퀴는 금융 지배력이다. 뉴욕 맨해튼 남단의 월가(街). 매일 오후 4시가 지나면 어김없이 일군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하루의 긴장과 피로를 담배연기에 날려보낸다. 세계의 '금융 심장' 월가의 핵심을 이루는 뉴욕증권거래소(NYSE)의 주식 중개인들이다.
"자본의 힘이 엄청나게 비대해진 반면 국가 권력은 상대적으로 왜소해진 지금 월가를 '수퍼 파워'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월가 역사 연구가인 존 스틸 고든은 말한다. 월가는 90년대 IT 혁명으로 대변되는 신경제의 호황을 누리면서 세계 증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초강자로 발돋움했다.
뉴욕증시(나스닥 포함)가 정점에 달했던 2000년 3월 시가 총액은 18조2천억달러로 세계 증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 60%에 달했다. 2000년 초 IT 거품이 빠지면서 지금까지 약 6조달러가 날아가 버렸지만 다른 나라 증시도 비슷한 침체를 겪었기 때문에 여전히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어디나 그렇지만 월가의 강점 역시 앞선 기술과 치열한 경쟁"이라고 모건스탠리 애널리스트인 다이애나 퀸테로는 말한다. 정확한 기업 분석과 주가 예측 능력, 다양한 상품 개발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경쟁은 언제나 불꽃을 튀긴다. 지난해 나스닥시장에서 퇴출된 상장사는 5백35개사에 달했다. NYSE에서도 1백45개 기업이 쫓겨났다.
월가의 힘은 세계 신용평가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스탠더드&푸어스(S&P)와 무디스에서도 생산된다. 무디스가 신용등급을 평가하고 분석 자료를 제공하는 채권금액은 총 30조달러, 기업수로는 8천5백개에 달한다. 1백개 이상의 국가 신용등급도 매긴다. 이들이 한 나라의 명운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은 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통해 입증됐다.
월가의 손은 월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올 들어 9월까지 아시아.태평양지역(일본 제외)에서 일어난 기업 인수.합병(M&A)은 6백억달러를 넘었다. 그 대부분을 JP모건.시티그룹.모건스탠리.골드먼삭스 등이 중개하면서 거액의 수수료를 챙겨갔다. 미군이 점령한 이라크의 낙후된 금융시스템을 재건하는 작업도 월가가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라크전을 치르면서 국제사회에서 드러난 '팍스 아메리카나'의 균열 조짐은 경제 부문에서도 뚜렷해지고 있다.
쌍둥이 적자로 불리는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일국(一國) 단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으로 부풀어오르고 있다. 미국이 쌍둥이 적자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기가 죽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하나,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달러의 발권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정적자는 후손에게, 무역적자는 타국에 돈을 빌리는 것이기에 무한정 늘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늘어나는 무역적자는 국제무역을 이끌던 미국의 리더십까지 흔들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칸쿤 회의가 끝내 좌초할 수밖에 없던 이유 중 하나로 미국의 주도력 부재가 꼽히고 있다. 농산물 분야의 수를 보조금 인하 문제에 미국이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개도국들은 이 같은 미국의 태도를 '경제 발전의 사다리(development's ladder)'를 걷어차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개도국들이 자국 경제를 키울 수 있는 자그마한 가능성마저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앞세워 봉쇄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90년대 후반 아시아 경제위기 과정에서 미국식의 투명한 기업 지배구조를 나타내는 말로 인기를 모았던 '글로벌 스탠더드'도 이제는 다소 빛이 바랬다.
미국에서도 엔론 등 기업들의 회계부정 사건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최근 거액 연봉 문제로 여론에 떠밀려 물러난 리처드 그라소 뉴욕 증권거래소 이사장 스캔들도 미국식 자본주의가 완성품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경제적으로 팍스 아메리카나를 유지하는 수단인 국제통화기금(IMF) 등 주요 국제기구들은 가난한 나라의 이익보다 월가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 그 결과 지구촌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조셉 스티글리츠 전 세계은행 부총재의 쓴소리다. ***************************************************************** 8. '제국' 인력의 양성소 : 세계 20개國 통치자는 美유학파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있는 하버드 행정대학원(케네디스쿨) 내 '포럼'. 학생들의 휴식과 토론 공간이다. 취재진이 학교를 찾은 지난달 중순, 신학기를 맞은 학생들이 이곳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책을 읽거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루지야의 국방차관 젤라 베주아시빌리, 오만의 공군사령관 모하메드 알라디, 나이지리아의 가톨릭주교회 사무총장 매튜 쿠카, 싱가포르 사회개발·체육부 정책연구국장을 지낸 로렌스 리엔, 중국의학협회 국제담당부국장 쑤동…. 인종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약 9백명의 대학원생 중 3분의 1 이상이 외국인이다.
"왜 여기에 왔냐고요? 명성이 대단하잖아요. 여기서 공부한 건 내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로렌스 리엔)
"여기엔 세계의 인재들이 많아요. 그들과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어 좋지요. "(매튜 쿠카)
미래를 꿈꾸는 세계의 인재와 엘리트들이 미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2001~2002학년 미 대학과 대학원에 등록한 외국인은 한국인 4만9천46명을 포함해 모두 58만2천9백96명이나 됐다. MIT(26%)·컬럼비아(23%)·스탠퍼드(21%)·하버드(19%) 등 일류 대학의외국인 학생 비율이 특히 높다. 재료공학·원자력공학과 등 미국인이 덜 선호하는 일부 이공계 학과는 외국인이 오히려 더 많다.
대학뿐이 아니다. 명문 고등학교에도 외국인이 몰린다. 하버드대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앤도버에 있는 필립스 아카데미. 조지 부시 전 대통령, 조지 W 부시 대통령, 젭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 등 부시 3부자가 다닌 학교다. 2003~2004학년도 학생은 모두 1천87명. 한국인 11명을 포함해 30개국 82명이 외국 학생이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군사력과 경제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육에서도 미국은 '제국'의 중심에 있다. 세계의 수많은 엘리트가 미 대학을 거쳐갔다.
중앙일보 정보검색실이 1백96개국의 왕·대통령·총리를 조사한 결과, 주요국을 포함해 20개국 21명이 미 대학에서 공부하거나 학위를 땄다. 이라크전에 반대한 프랑스와 멕시코, 반미 노선의 선봉에 있는 말레이시아, 친미 국가인 바레인·필리핀·태국·싱가포르·콜롬비아의 국가원수가 모두 미국의 인재 양성소를 거쳤다. 왕족·각료·정치인과 학계·법조계·문화예술계·언론계까지 따지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현직 엘리트들만이 아니다. 차세대 리더들도 미국 교육을 받았거나 받고 있다. 마잉줘 타이베이 시장은 하버드 법학박사고,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아들이자 차기 총리로 거론되는 리센룽 부총리는 케네디스쿨을 졸업했다. 미 명문 고등학교에는 각국 상류층 자녀들이 많다.
미 대학에 인재가 몰리는 것은 무엇보다 교육경쟁력 때문이다. 역대 의학·물리·화학분야 노벨상 수상자 4백93명 중 약 40%인 2백18명이 미 대학 출신이다. 지난 7월 상하이(上海)교통대학이 발표한 세계 5백대 명문대학 중 1위 하버드, 2위 스탠퍼드 등 상위 10위권 대학 중 8개를 미 대학이 휩쓸었다.
세계의 문제를 직접 다뤄본 당사자들로부터 경험을 직접 전수받을 수 있다는 점은 미 대학만이 제공하는 특장이다. 케네디스쿨의 조셉 나이 대학원장, 그레이엄 앨리슨 전 대학원장, 애시턴 카터 교수는 모두 국방차관보를 지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존 수누누 교수는 미 중앙정보국(CIA)이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에게 새로운 국가(러시아) 창설을 위한 참고자료를 건네준 비화를 학생들에게 들려준다.
"국방차관을 지낸 존 화이트 교수의 강의를 처음 듣는데 전율을 느꼈어요. 미국의 국방예산과 무기조달에 관한 강의를 듣고 싶었는데 바로 그걸 담당했던 당사자가 교수였거든요."
프랑스 최신예 전투기 라팔 시험 탑승 기록을 갖고 있는 한국 청년 이원익(李元翼·27)씨의 케네디스쿨 첫 수업 소감이다.
국제사회의 뉴스 메이커들로부터 직접 얘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도 미 대학이 내세우는 이점이다. 하버드대에서 지난달 16일 하루에만 티베트의 종교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강연을 가졌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담당장관 나탄 샤렌스키가 토론회에 참석했다. 지난달 하순엔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과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장관이 연단에 섰다.
당장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살아있는 지식을 전수하는 것도 미 대학 교육의 매력으로 꼽힌다. 케네디스쿨의 거시경제학 교수인 수전 쿠퍼는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부시 행정부의 감세정책을 비판한 월스트리트저널 칼럼을 슬라이드로 보여주며 학생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이 배운 정부지출-국민소득 그래프로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선진교육이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미국물을 마신 인재들은 다시 세계로 흩어져 미국의 가치, 미국식 기준과 코드를 전파한다.
미국은 각종 혜택을 부여하면서 과학과 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진 브레인들을 끌어모은다. 특별비자가 이들에게 발급되고, 미국에서 태어난 이들의 2세는 자동으로 미국 시민이 된다. 미국의 지적 토양이 그만큼 넓어지는 셈이다.
'미국 유학'이란 브랜드는 각 나라에서 유용한 경력이 된다. 각 나라의 미 대학 동창회는 자연스레 미국과 말이 통하는 지미(知美)그룹을 형성하면서 나름의 세력을 이룬다.
세계의 엘리트를 양성하는 미 고등교육에 대해 『제3세계 교육론』을 쓴 브라질의 교육가 파울로 프레리와 '문화적 식민주의론'을 설파한 마틴 케노이(스탠퍼드대)교수는 종속이론적 관점에서 문제점을 제기해 왔다.
그러나 비판론은 힘을 잃고 있다. 연세대 한준상(교육학)교수는 "1960~80년대 초반 일부 미 대학이 신식민주의적 의도와 상업적 목적에서 후진국 학생들을 상대로 학위를 남발한 적이 있다"며 "그러나 이런 현상이 많이 사라진 데다 교육에 관한 한 미국의 선진 시스템을 인정하는 시각이 압도적이어서 비판론을 찾기 어렵다"고 인정했다. ************************************************************* 9. 빅 브라더의 눈: 9·11 예보 실패 … 정보 예산 대폭 늘려
2001년 9월 10일. 아프가니스탄 서부 칸다하르의 동굴에 숨어 있던 오사마 빈 라덴의 측근은 위성전화 스위치를 켰다. 그의 위성전화가 인도양 상공에 떠 있는 통신위성 인마샛(Inmarsat)을 통해 알카에다 동료와 연결이 되는 순간 아프가니스탄에서 1만1천km 떨어진 미국 메릴랜드주 포트 미드에 있는 국가안보국(NSA) 컴퓨터에도 번쩍 불이 켜졌다. NSA의 도·감청용 컴퓨터는 흥분된 어조로 "엄청난 사건이 곧 일어날 것"이라는 테러리스트들의 통화 내용을 고스란히 테이프에 녹음했다. 그러나 9·11의 대참변을 예고한 문제의 통화는 그로부터 48시간이 지나도록 중앙정보국(CIA)의 조지 테닛 국장에게 보고조차 되지 않았다.
CIA 국장을 역임한 제임스 울시 등 미 정보 전문가들은 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그 이유가 외국어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2천7백92명의 인명을 앗아간 9·11 테러 직전에 이뤄진 문제의 통화는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사용하는 파슈툰어로 돼 있었는데 당시 NSA에는 파슈툰어를 구사하는 요원이 단 한명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초대형 '정보 실패'를 계기로 자신의 진로를 바꿔온 나라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미국은 거대한 잠재력을 지녔지만 유럽에 비하면 국제감각과 세련도가 떨어지는 '촌뜨기'국가에 불과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라는 치명적 정보 분석 실패를 계기로 미국은 태평양 전쟁과 나아가 2차 대전에 뛰어들었고, 초강대국으로 탈바꿈했다. 그 뒤에는 항상 정보기관이라는 '그림자 제국'이 있었다.
정보기관 하면 바로 CIA가 연상되지만 CIA는 미 연방정부 산하 13개 정보기관의 하나일 뿐이다. 지난해 경우 CIA는 미국의 전체 정보예산 3백억달러(36조원)의 10% 정도만을 사용했다. 정보예산의 대부분은 최첨단 첩보위성을 운용하는 국방부 소속 국가정찰국(NRO)과 국가영상·지도제작국(NIMA), 그리고 NSA 등이 사용한다.
특히 NSA는 '그런 기관은 없다(No Such Agency)'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베일에 싸인 기관이다. 3만여명의 요원이 CIA 예산의 두배가 넘는 70억달러를 매년 사용하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수학자를 고용하고 있는 NSA는 전 세계적인 도·감청 네트워크인 '에셜론 (Echelon)'과 1초에 1천의 6승(乘)까지 계산이 가능한 엑사플롭(Exaflop)급 수퍼 컴퓨터로 외교기밀은 물론 수백만통의 전화·팩스·e-메일 등을 매일 도청, 해독한다. 한국에도 8개 감청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NRO가 운용하는 첩보위성은 지상 수백km 높이에서 축구공 크기 물체의 움직임까지도 정확하게 포착해 낸다. 최근 개발된 무인정찰기 프레더터의 위력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이미 입증됐다.
최근 워싱턴 서점가의 베스트셀러로 등장한 『메인 에니미(The Main Enemy)』에서 CIA 중동 지부장 출신인 밀턴 비어든은 "우리는 지난 50년간 아시아·중동·중남미에서 끊임없이 소련의 KGB와 쟁패를 벌였다"고 증언한다. 지구상의 유일 초강대국 미국이 이룩한 '팍스 아메리카나'는 '그림자 제국'에서 벌인 사투에서 승리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91년 냉전이 막을 내리면서 잠시 힘을 잃었던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9·11을 계기로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9·11이라는 엄청난 정보 분석 실패에도 불구하고 테닛 CIA 국장은 물론 단 한명의 정보 간부나 요원도 경질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시 대통령은 2003년도 CIA 예산으로 50억달러를 배정했다. 전년도에 비해 50% 이상 증액한 것이다.
또 9·11이 외국어 요원 등 '인적 정보(Humint)'부족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에 따라 부시 행정부는 외국어에 능통한 소수인종 출신 요원을 대거 증강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9월 CIA에 전 세계 80여개국에서 비밀활동을 허가하는 극비지령을 내렸다. 워싱턴의 정보 전문가 존 파이크는 "CIA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빅 브라더'가 다시 눈을 부릅뜨고 세계 구석구석을 감시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적극적인 옹호에도 불구하고 9·11은 CIA에 씻기 어려운 이중 부담을 안겼다. 정보 분석 실패도 실패지만 정보조작 의혹 때문이다. CIA 요원들은 자신들이 가장 금기시하는 행위를 "쿡 더 북(Cook the Book)"이라고 말한다. 정보조작 유혹에 대한 경고다. 정보의 최종 소비자인 대통령 등 정책결정자의 입맛에 맞추려고 정보를 부풀리거나 윤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지난 1월 28일 국정연설에서 대(對)이라크 공격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인용한 정보는 "영국 정부는 최근 사담 후세인이 상당량의 우라늄을 아프리카로부터 사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딱 13단어(영어 기준)로 된 한 문장에 불과했다. 부시 대통령이 슬쩍 비틀어 개전의 명분으로 활용한 이 CIA 정보는 후세인 정권의 붕괴와 이라크인 수천명의 살상, 수백억달러의 전비(戰費), 그리고 국제질서의 일대 지각변동을 몰고 왔다.
46년 9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진주만 기습 같은 정보 분석 실패를 막고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받기 위해 CIA를 창설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7년이 지난 오늘 CIA는 대통령의 정치적 목적을 합리화하기 위한 정보조작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국제판 편집장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이라크인 망명자의 정보 조작에 말려들어 이라크 전쟁을 감행했다"며 "북한의 핵 정보가 부풀려졌다면 그 진원지는 CIA가 아니라 백악관일 것"이라고 말했다. 취재팀과 만난 케네스 퀴노네스 전 국무부 북한 데스크는 "미 정부가 북한의 핵 능력을 실제 이상으로 부풀리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 10. 21세기의 콜로세움 - 할리우드: 전 세계 극장 정복 … 美정신 절로 전파
미국 서부의 최대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북서쪽으로 뻗은 101번 고속도로(일명 '할리우드 하이웨이'). 이 길을 따라 약 20분을 달리면 '웰컴 투 유니버설 스튜디오'라는 표지판을 만나게 된다.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인 유니버설이 직영하는 테마 파크다. 영화 촬영장을 겸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볼거리와 놀거리가 가득한 놀이공원일 뿐이다.
이곳에서 요즘 가장 인기있는 코너는 '슈렉 4-D'극장이다. 취재팀이 찾아간 지난 8월 말 극장 앞에는 1천여명의 관람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양한 옷차림과 피부색 사이로 각종 언어가 춤추는 현장은 그 자체로 '리틀 지구촌'이고, '21세기의 바벨탑'이었다.
피오나 공주를 납치한 파콰드 영주가 전속력으로 모는 마차는 화면에서 튀어나와 그대로 관객을 덮친다.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하는 순간 마차에서 튀긴 물방울이 사람들 얼굴로 떨어지고, 객석은 마차와 함께 요동을 친다. 거대한 용이 불덩이를 쏟아내자 뜨거운 바람이 확 밀려온다.
"3차원 디지털 입체영상에 촉각을 가미해 보고 듣고 몸으로 느끼면서 관객이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만든 세계 최초의 4차원 영화"라는 것이 홍보담당자의 설명이다.
'슈렉 4-D'코너는 지난 5월 개관 이래 전회 만석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한번 더 보겠다"며 보채는 아이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리는 부모들의 모습은 이곳에서 흔한 풍경이다.
'꿈의 공장' 할리우드가 어린이에서 어른까지 지구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때로는 감동, 때로는 재미, 때로는 꿈의 옷을 입고 할리우드는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유발한 공포와 경계심도 '팍스 할리우디아나'의 미소 앞에서는 눈 녹듯 사라지고 만다.
할리우드의 영화사 드림웍스가 5천만달러를 들여 제작해 2001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슈렉'은 전 세계에서 7억6천만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렸다.
평균 입장료를 5달러로 따져 1억5천만명 이상이 못생긴 괴물 슈렉과 피오나 공주의 이색 러브 스토리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는 얘기다. 여세를 몰아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슈렉 4-D'로 또 한번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
세계 영화시장에서 할리우드의 위세는 거인의 독주나 다름없다. 2002년 한 해 동안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 영화시장에서 2억5천만달러 이상의 흥행수입을 기록한 영화는 모두 여섯 편이었다. 1위 '스파이더맨'에서 6위 '맨 인 블랙'까지 할리우드 영화가 모조리 휩쓸었다. 지난해 미 영화업계는 4백49편의 영화를 개봉해 미국을 포함, 전 세계에서 1백91억달러의 입장료 수입을 올렸다.
할리우드가 배급한 볼거리에 정신이 팔려 지구촌 남녀노소 전원이 한 해 3달러 이상을 '팍스 할리우디아나' 입장료로 지불한 셈이다. '21세기의 콜로세움'이 할리우드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미국영화협회(MPAA)에 따르면 지난해 할리우드 영화 편당 평균 제작비는 5천8백80만달러였다. 게다가 개봉작 판촉비로 편당 3천62만달러를 썼다. 영화 한편을 만들어 출시할 때마다 평균 8천9백42만달러(약 1천억원)라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자금력에 바탕을 둔 물량공세만으로 할리우드의 독주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미 영화관계자들은 말한다.
로마제국의 검투사를 소재로 한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년)의 제작과 각본을 맡았던 데이비드 프랜조니는 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주인공 막시무스는 1백% 허구의 산물"이라면서 "금기(禁忌)가 용납되지 않는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력이야말로 할리우드의 최고 경쟁력"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할리우드는 시대사조와 대중심리를 재빨리 파악해 영화화하는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다.
상업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최고권력자에서 극악무도한 범죄자까지, 반체제에서 포르노까지 영화의 소재가 되지 않는 것이 없다. 할리우드의 상상력은 때때로 미국의 국익과 충돌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상업주의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절묘한 결탁을 이뤄내고 있다. 특히 전쟁영화가 그렇다.
9·11 테러를 전후해 할리우드에서는 전쟁과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 개봉이 줄을 이었다. 9·11 석달 전 진주만 피습의 충격을 다룬 '진주만'이 개봉됐고, 미군의 소말리아 참사를 그린 '블랙호크 다운'이 2001년 말에 나왔다. 이듬해 '컬래터럴 대미지' '위 워 솔저스' '섬 오브 올 피어스'등이 잇따라 개봉됐다.
대부분 미 국방부의 지원을 받아 제작됐다. 미 국방부에는 할리우드 담당관이 따로 있고, 육·해·공군과 해병대는 로스앤젤레스에 각각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이 시나리오를 꼼꼼히 검토해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관행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알게 모르게 미국적 가치와 이데올로기가 영화에 스며들 수밖에 없다.
"미군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모병과 병력 유지에 도움을 받는 기회로 영화를 활용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미 국방부의 할리우드 담당관인 필립 스트럽은 말한다.
할리우드의 상상력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은 다시 꿈이 된다. 영화적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은 9·11 테러 직후 백악관은 할리우드 영화 관계자들을 불러모아 후속 테러 가능성을 논의했다.
꿈은 숱한 영웅들을 만들어낸다. 영화 속의 영웅 터미네이터는 주지사가 됐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할리우드가 창조한 '탑건'신화에 의지해 조종사 복장으로 항공모함 위에서 이라크전 종전을 선언했다. 이라크전의 부상병 제시카 린치 일병은 조만간 할리우드 영화의 영웅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문화제국주의의 신화』를 쓴 미국의 문화산업 컨설턴트인 로버트 라우트는 "지구상에서 가장 개방된 사회가 가장 매력적인 대중문화를 갖고 있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고 말한다.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 대중문화의 경쟁력은 이민국가 미국의 문화적 다양성과 제약없는 개방성의 당연한 결과라는 주장이다. 더구나 유럽과 일본 자본이 깊숙이 들어와 있는 지금의 할리우드를 더 이상 미국 문화의 터전으로만 보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다고 말한다.
지배당하는 자가 지배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효과적인 지배는 없다. 할리우드라는 '트로이의 목마'를 타고 '신제국' 미국은 이미 우리의 정신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 11. 링구아 프랑카(세계어) - 영어
지난달 23일 대만의 타이베이시 중심가에 있는 제일여자고중(한국의 고교) 2학년 영어수업반. 마이크를 쥔 교사가 영어책을 읽자 학생들이 합창하듯 열심히 따라 하고 있다. 교재는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가 펴낸 '아메리칸 헤드웨이(American Headway)'.
영어는 이 학교의 전략과목이다. 학생 1백명당 영어교사는 0.9명꼴로 한국의 경기여고(0.8명)보다 조금 많다. 반마다 학생 2~4명이 번갈아가며 학교 웹사이트에 영어로 학급소식을 써넣는다. 웹사이트에는 '해리포터''반지의 제왕'같은 영어소설을 읽고 나서 올린 영어 독후감이 가득하다.
취재팀이 "왜 영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2학년 장천안양은 유창한 영어로 "영어는 세계공통어다. 영어를 알아야 세계를 알 수 있다"고 대답한다. 옆에 앉은 첸페웨이양은 "인터넷 시대엔 더욱 그렇다"고 거든다.
대만은 영어 열풍에 휩싸인 대표적인 나라다. 대만은 영어를 외국어로 쓰는 나라 중 처음으로 영어 공용화 정책을 채택했다. 대만세계박람회가 열리는 2008년까지 영어를 제2공용어로 만들 방침이다. 행정원은 올해말까지 외국과 관련된 모든 정부문서를 영어로 번역하도록 지시했다. 내년 봄학기부터는 미국.영국.호주.캐나다 등에서 '수입'된 영어교사 4백여명이 시골학교부터 투입된다. 대만의 3개 민영 TV는 오전 11시~낮 12시 사이 30분간 영어로만 뉴스를 방영한다.
대만 교육부 국제문화교육사업처의 로렌스 황 위원은 "해외의존도가 높은 대만에서 영어는 생존의 필수조건"이라며 "한국.일본도 사정은 같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만처럼 정책으로 채택하진 않았지만 일본에서도 일찍이 영어공용화론이 제기됐다. 고(故)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전 총리의 자문기관인 '21세기 일본의 구상'은 1999년 "일본어를 공용어, 영어를 제2공용어로 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한국의 영어 열풍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소설가 복거일씨는 98년 영어 공용어론의 깃발을 들었다.
'신제국' 미국의 언어 영어가 세계 언어를 지배하고 있다. 군사력.달러.하이테크.대중문화와 더불어 영어는 오늘날 미국이 행사하는 막강한 파워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현실론 앞에서는 이념도, 과거의 갈등도 다 묻혀버린다. 미국의 잠재적 경쟁 상대로 꼽히는 중국도 지금 영어 태풍권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중국 대학생들은 학사학위를 받으려면 '밴드(Band) 4'라는 영어능력 인증 국가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국가가 영어교육을 직접 관장하고 있는 것이다.
냉전시대 미국의 라이벌이었던 소련이 해체된 후 92년 러시아에는 영자신문 '모스크바 타임스(The Moscow Times)'가 등장했다. 모스크바에는 영어로만 강의를 하는 러시아 학교가 생겼다. 젊은 사업가들은 시간당 50달러를 주고 영어를 배우고 있다.
베트남은 약 1백년간 프랑스 식민지였다. 그러나 프랑스어는 흘러간 노래고 히트곡은 영어다. 호치민시에만 사설 영어학원이 2백개가 넘고 공산주의 월맹의 수도였던 하노이에도 40여개가 있다. 영어는 베트남인 수십만명을 죽인 '적성국' 미국의 언어다.
범용성에서 영어는 이미 확고한 '링구아 프랑카(세계어)'의 반열에 올랐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은 5억1천여만명, 공용어로 쓰는 사람이 3억5천명, 그리고 주요 외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이 1억명이다. 55개국에서 영어는 모국어 또는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
프랑스어 27개국, 스페인어 20개국, 아랍어 17개국과 비교하면 압도적이다. 규모만이 아니라 질에서도 영어는 이미 세계어가 됐다. 과학.항공.컴퓨터.외교.관광 등에서 영어는 공식언어로 사용된다. 브리태니카.아마존과 연결된 '크리스털 정보사이트'는 "모든 비즈니스 계약의 절반이 영어로 체결되고, 과학논문의 3분의 2가 영어로 집필된다"고 지적한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영어의 세계 지배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영국 언어학자 데이비드 크리스털에 따르면 인터넷 시대 초기에 영어 사이트는 전체의 80%를 차지할 정도였다. 최근 그 비율이 50% 이하로 떨어지긴 했지만 양질의 사이트는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어 인터넷의 영어 파워는 여전히 막강하다는 것이다.
검색엔진 구글에서 '컴퓨터'를 영어로 치면 1억3천7백만건의 정보가 나온다. 한글로 치면 겨우 99만건이다. 약 1백43배의 정보 격차가 나는 셈이다. 케네스 케니스턴 미 MIT 교수는 "영어를 할 줄 모르는 국민은 정보화 시대에서 낙오될 위험이 높다"고 경고한다. '정보화의 격차(디지털 디바이드)'에 이어 '영어 능력의 격차(잉글리시 디바이드)'가 정보화 시대의 성패를 가르는 새로운 변수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2천년 전 알렉산더 대왕의 말발굽을 따라 그리스어는 중동의 공용어가 됐다. 8세기 무어족의 발흥과 함께 이슬람교가 전파되면서 아랍어는 북아프리카와 유럽 일부에까지 널리 퍼졌다.
로마제국이 융성했을 때 로마의 언어 라틴어도 흥했다. 인구로 보면 로마인은 그들이 정복한 사람들보다 적었다. 그러나 로마의 힘 때문에 이민족들은 라틴어를 배워야 했다. 로마가 쇠퇴한 후에도 라틴어는 1천여년 간 '교육의 언어'로 군림했다. 로마제국은 사라졌지만 라틴어의 족적은 종교와 학술.외교 각 분야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미국이 세계사의 전면에 부상하기 전인 19세기 후반, 세계어를 실현하려는 다른 시도가 있었지만 힘이 받쳐주지 못해 실패했다. 유대계 폴란드인 안과의사였던 자멘호프는 1887년 여러 언어의 요소를 결합해 에스페란토를 창안했다. 에스페란토는 영어.독어.프랑스어.러시아어 등 대언어권에 대한 반란이었다. 배우기 쉽고 쓰기 쉬워 효용성이 있었지만 인공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영어의 확장에 가장 적극적으로 맞서고 있는 나라는 프랑스다. 영어의 침투가 거세지자 프랑스는 94년 '프랑스어 사용 관련법'을 만들어 프랑스어를 보호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모든 상품의 이름과 사용 설명을 프랑스어로 써야 한다. 라디오 방송물의 최소한 40%는 프랑스어로 된 자국 프로그램으로 편성해야 한다.
그러나 영어의 힘은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냄새처럼 프랑스에도 번지고 있다. 지하철 광고판 다섯개 중 하나는 영어로 돼 있다. 파리 근교에 있는 아메리칸 스쿨과 브리티시 스쿨에 들어가려는 조기영어 교육파들은 1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
인류 역사를 풍미했던 다른 언어와 마찬가지로 영어는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라는 두 바퀴에 실려 세계의 언어 위에 군림하고 있다. *********************************************************** 12. 오일 커넥션: 돈·인맥으로 얽힌 부시 정부와 석유사
미국 중남부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45번 고속도로를 타고 동남쪽으로 약 1시간 동안 달리면 멕시코만에 다다른다. 멕시코만의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갤브스톤이란 긴 섬이 보이고, 그 안쪽에 자리잡은 갤브스톤만 주변으로 세계를 호령하는 미국 석유 메이저들의 공장이 진을 치고 있다.
핼리버튼 갤브스톤 서비스센터도 그 공장들 중 하나다. 쇳물이 흘러내린 높다란 굴뚝들이 이 회사의 84년 역사를 말해준다. 세계 어느 곳이든 석유 냄새가 나는 곳에는 핼리버튼이 있다. 텍사스주에만 영업소가 1백곳이 넘는다. 핼리버튼은 굴착기술과 시추장비 등 유전개발 관련 종합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달 초 미 육군 공병단은 이라크전이 끝난 지난 5월 이후 핼리버튼이 이라크에서 따낸 수주 규모는 13억9천만달러라고 발표했다. 대부분 손상된 유전을 복구하는 공사다. 지난 8월 초 타미르 가드반 이라크 석유장관 직무대행은 이라크 석유산업을 재건하는 데 16억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다. 핼리버튼이 이라크 유전 복구사업을 사실상 '독식'하고 있는 것이다.
핼리버튼과 백악관의 유착관계는 이미 뉴스가 아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짝을 이뤄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까지 딕 체니 부통령은 핼리버튼의 최고경영자(CEO)였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 동안 그가 받은 보수는 총 4천5백만달러(약 5백20억원)에 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5월 초 헨리 왁스먼(민주당) 미 하원의원은 "핼리버튼이 미 정부의 금수(禁輸)조치에도 불구하고 80년대부터 이란·이라크·리비아 등과 거래해왔다"며 자료를 공개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대로 부시 대통령 자신이 석유업계 출신이다. 미 석유산업의 메카인 텍사스주 주지사가 되기 전인 80년대 중반 부시는 '스펙트럼 7'이라는 작은 석유회사를 직접 경영했다. "석유 비즈니스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그는 자서전에서 회고했다. 부시는 나중에 이 회사를 2백만달러에 하켄에너지에 넘겼고, 자신은 하켄의 이사로 근무했다. 89년 하켄의 주가가 마구 뛰어오르자 부시는 그 해 6월 보유주식의 3분의 2를 처분해 85만달러를 챙겼다. 얼마 후 회계부정과 함께 대규모 적자가 공개되면서 하켄의 주가는 폭락했다.
부시 행정부와 석유업계의 긴밀한 커넥션을 보여주는 사례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라크전쟁 당시 미군은 임시기지를 이라크에 건설하면서 엑손모빌 등 특정 석유회사 이름을 붙였다. 카자흐스탄 유전 개발권을 따내는 과정에서 뇌물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는 셰브론텍사코는 이 회사 고문으로 일해온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이름을 유조선에 붙여주기도 했다.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자 미국에서는 "'오일 커넥션'의 집권"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2000년 대선 당시 미 석유회사들은 부시·체니 진영에 2천6백70만달러의 후원금을 기부했다. 지난해 중간선거 때도 1천8백만달러를 제공했다. 초대형 회계부정 스캔들로 2000년 말 도산한 엔론사도 고액 기부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미 최대의 에너지 유통회사였던 엔론의 케네스 레이 전 회장은 부시가 주지사였을 때부터 서로 친한 사이였다. 부시는 2000년에만 그를 두 번 만난 적이 있다고 시인했다. 엔론은 3백50억달러의 빚을 지고 도산했다.
엔론의 국제사업부장을 지낸 아툴 다브다는 지난해 3월 '내셔널 인콰이어러'와의 인터뷰에서 "엔론은 90년대 중반 아프가니스탄에서 송유관 공사를 하기 위해 탈레반 정권과 은밀한 커넥션을 구축했다"고 털어놨다. 로비자금으로 탈레반 측에 수백만달러가 건네졌다는 것이다. 탈레반이 오사마 빈 라덴 일당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 정보당국이 이미 파악하고 있을 때였다. 아프가니스탄에 탈레반 정권이 들어선 이듬해인 97년 아프간의 고위 관리들이 엔론사 초청으로 나흘간 텍사스주 슈가랜드를 방문한 사실이 미 국무부에 의해 확인되기도 했다.
미 의회는 특정 기업의 이해가 정책에 반영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2월 미 의회 회계감사국은 백악관을 상대로 에너지정책 입안 과정에 엔론 등 석유기업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유례없는 소송을 제기했다. '2001년 국가에너지 전략보고서' 작성팀이 어느 석유회사의 누구를 만났는지를 회계감사국이 조사하려 했으나 거부당하자 소송을 낸 것이다. 이 소송은 결국 법원이 권력분립을 해칠 수 있다며 기각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보고서 작성을 주도했던 체니 부통령이 엑손모빌 등 석유회사 경영진을 여러 차례 만난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이 보고서는 "에너지 안보를 미 외교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둬야 한다"면서 "걸프지역에서 미국의 석유 접근권을 확대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반전론자들은 이를 근거로 이라크전은 석유를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대규모 자본과 기술이 동원되는 유전개발 및 정유사업을 위해 미국 회사들은 최근 몇년간 거대합병을 통해 덩치를 키웠다. 98년 12월 미국 1, 2위인 엑손과 모빌이 합병해 유럽의 브리티시석유(BP)와 로열더치셸을 제치고 세계 정상으로 올라섰다. 2년 뒤엔 2, 3위의 셰브론과 텍사코가 합병대열에 동참했고, 지난해엔 코노코와 필립스가 손을 잡았다. 모두 '석유왕'존 록펠러가 세운 스탠더드오일에서 갈라져 나온 회사들이다.
1911년 독점법(셔먼법) 위반으로 30여개로 쪼개졌던 스탠더드오일의 후예들이 21세기의 '신제국' 미국을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으로 다시 뭉치고 있는 셈이다. *********************************************************** 13. 신보수주의
포토맥강을 사이에 두고 백악관에서 멀지 않은 워싱턴 17가 1150번지의 오피스 빌딩 3개 층을 차지하고 있는 미국기업연구소(AEI)라는 싱크 탱크와 버지니아 쪽의 국방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벨트로 연결돼 있다. 이 네오콘 벨트를 모르고는 부시 정부의 세계전략을 이해할 수 없다. 국방부 중추와 AEI는 부시 정부의 안보전략을 독점한 네오콘(neoconservatives·신보수파)의 아성이다.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하고 천문학적인 예산이 드는 군비경쟁을 도발해 소련을 붕괴로 이끈 정책도 그때 국무부 정책수립 스태프로 있던 폴 울포위츠와 루이스 리비 같은 네오콘들의 머리에서 나왔다. 두 사람은 지금 부시 정부의 국방부 부장관과 부통령 딕 체니의 수석 보좌관이다.
그들 말고도 부시 정부에는 국방정책위원 리처드 펄, 정책담당 국방차관 더글러스 파이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중동팀장 엘리엇 에이브럼스, 국가안보 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의 보좌관 스티븐 해들리 등이 막강한 네오콘 그룹이다. 그들은 9·11 사태를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이라크 침공의 오랜 숙원을 성취했다.
정부 밖에서 정책을 개발해 권력 중추에 제공하는 것은 어빙 크리스톨과 빌 크리스톨 부자, 로버트 케이건, 데이비드 프럼들이다. 어빙 크리스톨은 네오콘의 대부로 AEI 고문이고, 빌 크리스톨은 AEI가 들어 있는 빌딩 5층에서 주간지 위클리 스탠더드를 발행하면서 '미국의 신세기 프로젝트(PNAC)'라는 공화당의 정책개발팀을 이끌고 있다. 아들 크리스톨은 도산하기 전의 거대 에너지 기업 엔론으로부터 고문료를 받았고 그의 잡지는 놀랍게도 호주 출신 미디어 황제 루퍼트 머독 소유인 폭스방송의 재정 지원을 받는다. 그의 외삼촌 밀튼 히멜파브는 세계의 금융을 쥐락펴락하는 로스차일드 계열의 지원으로 미국 유대인위원회를 창설해 이스라엘 로비를 주도하고 있다.
네오콘들은 국가안보문제유대인연구소(JINSA)와 안보정책센터(CSP)에도 이중 삼중으로 참여하고 있다. 부시 정부가 발족하기 전 체니와 파이스가 이스라엘의 이해를 대변하는 JINSA에 참여했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멤버 중 22명이 부시 정부에 들어간 CSP는 강경파와 네오콘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체니 부통령의 부인 린 체니가 AEI 연구원인 것도 부시 정부에 대한 네오콘의 영향력과 관련해 의미심장하다. AEI 연구원 데이비드 프럼은 부시의 스피치 라이터이던 2002년 대통령 연두교서에 '악의 축'이라는 용어를 집어넣은 사람이다. 그는 짐 정리가 덜 되어 어수선한 사무실에서 취재팀을 맞아 유대계 네오콘 특유의 자신감과 확신에 찬 어조로 질문에 열정적으로, 때로는 도전적으로 응수했다.
부시 정부의 오만한 일방주의, 모험적인 선제공격 전략, 대북 강경노선은 네오콘들이 사활을 걸고 계획하고 전파한 논리의 귀결이다. 명분은 '스트롱 아메리카'의 부활이고, 수단은 미국의 절대적인 파워다. 부시 독트린의 바탕에는 네오콘의 3대 보고서가 있다.
#보고서1. 아버지 부시 정부의 1992년 울포위츠와 리비가 중심이 되어 만든 '방위계획지침'이다. 보고서는 미국에 대한 위협을 용납하지 않고, 미국은 다른 나라들과 제휴하되 집단행동이 안 되면 국제법과 국제조약에 구애받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보고서2. 1998년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서한이다. 리처드 펄이 대표집필한 이 서한에 서명한 18명의 인사들 중 10명이 부시 정부에 참여하고 있다. PNAC 멤버의 대부분이 서명했다. 이라크 침공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클린턴이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그들은 르윈스키 스캔들을 가지고 클린턴을 궁지로 몰았다. 결국 클린턴은 그해 12월 '사막의 여우'작전으로 70일간 이라크를 공습했다.
#보고서3. 빌 크리스톨의 PNAC가 2000년 9월에 낸 '미국의 국방재건-신세기의 전략, 무력, 자원'이다. 체니·럼즈펠드·울포위츠·에이브럼스가 참여했다. 미국에 대한 도전세력 등장 불허, 동맹은 위기가 끝나면 해소되는 일시적인 집단, 미사일방어(MD) 추진, 소형 핵무기 개발이 핵심이었다.
3개 보고서의 종합이 부시 독트린이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2월 육사 연설에서 위협이 눈앞에 닥칠 때를 기다리면 늦다, 적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먼저 공격해야 된다는 선제공격론을 폈다. 그리고 사흘 뒤 부시 독트린이 공식 발표됐다. 오시라크가 그 모델이다. 1981년 이스라엘 공군기들이 이라크 오시라크의 핵시설을 완전히 파괴한 것을 말한다.
네오콘의 사상적 교조(敎祖)는 시카고대학의 유대계 정치사상가였던 레오 슈트라우스다. 슈트라우스와 울포위츠/크리스톨의 관계는 마르크스와 레닌/스탈린의 관계와 같다. 울포위츠는 슈트라우스와 이념을 같이하고 유명한 '아메리칸 마인드의 종언'의 저자인 앨런 블룸 교수의 수제자다. 정치체제가 국민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블룸의 이론에 공감한 울포위츠는 후세인 제거가 급하다고 판단했다. 슈트라우스의 사상적 후계자들은 미국과 서양문명을 구제하려는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서는 힘의 사용이 정당화된다고 믿는다.
네오콘의 절대 다수가 유대계다. 이스라엘의 적은 그들의 적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안전을 중동정책의 중심에 둔다. 그들의 입장은 거대 에너지 자본의 이해와도 일치한다. 첨단무기 개발의 수주(受注)를 받은 거대 군수기업 간부들은 소형 핵무기 분야에서는 국가공공정책연구소(NIPP), 미사일 방어망에서는 안보정책센터(CSP), 전체적으로는 PNAC에 이사나 자문위원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다.
지적(知的) 오만이 네오콘의 상표다. PNAC 공동설립자인 로버트 케이건이 2002년 발표한 논문은 네오콘적 오만의 백미(白眉)다. "약한 유럽은 국제기구에 의한 평화를 제창한 칸트의 공상적 세계에 안주하고, 미국은 토머스 홉스의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현실세계에서 평화와 문명을 위해서 싸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네오콘 천하가 오래가지 않는다고 위로했다. 그러나 그들의 두뇌는 아주 짧은 기간에도 많은 사람에게 큰 재앙을 초래할 만큼 탁월하다. 그리고 그들은 강한 인내심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집념을 가진 집단인 것이 불안하다. **************************************************************** 14. 기독교 원리주의자
텍사스주 웨이코는 인구 12만명의 아름다운 전원도시다. 야구팀 텍사스 레인저스의 '명사의 홀'도 웨이코에 있다. 거기서 28km 거리에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크로퍼드 목장이 있다. 미국이 1900년까지 세계 최대의 목화 생산국일 때 그 중심지가 웨이코였다. 19세기 웨이코-크로퍼드는 흑인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농업 사회로 성장했다. 그래서 미국의 어느 고장보다 인종차별이 심하고, 반동적이고, 반(反)지성적이다.
워싱턴에 있는 뉴 아메리카 재단 연구원인 마이클 린드는 '메이드 인 텍사스'라는 책에서 웨이코-크로퍼드의 부시랜드와 거기서 남쪽으로 수백마일 떨어진 오스틴을 중심으로 한 린든 존슨 전 대통령의 존슨랜드를 비교했다. 같은 텍사스지만 이념적.문화적.종교적 성향은 별천지 같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부시랜드는 인종적.종교적으로 동질적이다. 종교는 앵글로-켈트족을 중심으로 한 남부 개신교 계열의 침례교와 감리교 및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류를 이룬다. 반면에 독일 이민들이 개척한 존슨랜드는 종교적으로는 독일계 루터파와 가톨릭, 남부 복음파 개신교의 세력이 강하고 인종적으로는 멕시코계와 흑인이 많은 다원적인 사회다.
부시랜드는 남북전쟁 때는 남부연방을, 그 후에는 자주 극우단체 KKK까지 지지한 사람들의 후손들이 사는 고장이다. 존슨랜드의 주민들은 남북전쟁 중에도 북부연방을 지지했고, '링컨의 당'이라는 이유로 공화당을 계속 지지했다.
웨이코의 베일러대는 침례교회가 세운 대학으로는 세계 최대다. 린드는 1886년 웨이코대로 출발한 베일러대가 일찍이 프로테스탄트 원리주의의 본산으로 자리를 굳혔다고 말한다. 린드에 따르면 복음파 개신교도들은 그리스 철학을 의심하면서도 웨이코를 '텍사스의 아테네'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존슨랜드 사람들은 "천만의 말씀"이라며 "웨이코는 '브레이저스 강변의 예루살렘'"이라고 말한다. 브레이저스는 웨이코의 한 귀퉁이를 흐르는 아름다운 강이다.
종교학부장 랜들 오브라이언 박사와 웨이코 침례교회협의회장을 지낸 폴 스트리플링 교수, 그리고 신학부의 레비 프라이스 교수를 만나러 베일러대에 갔다. 참나무와 호두나무, 짙은 핑크빛 꽃을 피운 크레이프 머틀이 우거진 넓고 아름다운 캠퍼스가 인상적이었다.
린드가 '메이드 인 텍사스'에 쓴 것과는 달리 이 대학 신학부와 종교학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극단적인 원리주의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세 교수 모두 원리주의에 비판적이었다. 오브라이언 교수는 "이런 말하면 잘릴텐데"라는 농담까지 하면서 부시의 이라크 침공과 남부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의 교조주의적 성경 해석을 강력하게 공격했다. 그는 베일러대에 있으면서도 그가 졸업한 예일대 신학부의 '티'를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구내 서점에서는 베일러가 역시 웨이코-크로퍼드의 대학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유명한 기독교 원리주의 목사.전도사.저술가인 팀 래해이와 제리 젠킨스가 공동으로 쓴 원리주의 종교소설 '낙오자' 시리즈가 많이 꽂혀 있었다. '낙오자' 시리즈 다섯권은 1천5백만부나 팔렸다.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에 7년의 대환란이 있고, 그 기간에 적(敵)그리스도가 뉴 바빌론에서 세계를 지배하고 러시아를 비롯한 북방과 주변 세력의 이스라엘 침공을 하느님의 신군(神軍)이 격퇴한다는 줄거리다.
어느날 순식간에 그리스도가 신앙심 두터운 수백만명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휴거(Rapture)'가 일어나 지구상 곳곳이 큰 혼란에 빠진다. 영화배우 로버트 레드퍼드를 닮은 30대의 루마니아 대통령 니콜라에 카파시아가 유엔 사무총장이 돼 유엔본부를 이라크의 바빌론으로 옮기는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요한 계시록과 구약의 예언들을 믿는 사람만이 쓸 수 있고 반계몽적.반지성적인 원리주의자들을 열광시킬 만한 스토리다. 타임과 CNN 공동조사에 따르면 9.11 이후 미국인의 35%가 종말론에 관심을 갖고 있고, 17%가 세계의 종말이 자신들의 생전에 온다고 믿고 있으며, 59%가 묵시록의 예언이 실현될 것으로 믿는다.
원리주의자들의 비율이 이 정도면 미국 정치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94년 텍사스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당을 장악하고 부시의 주지사 후보 선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그들이다. 투표율이 낮은 대통령 선거 예선에서 투표장에 갈 동기가 강한 그들의 지지는 절대적이다.
부시가 예선의 첫 연설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 있는 밥존스대에서 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다른 인종과의 데이트를 금지했던 이 대학은 가톨릭에 적대적인 기독교 원리주의의 종가(宗家)다. 98년 지사에 재선되고 2000년 대선에서 대법원 판결로 대통령이 된 부시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지지에 힘입은 바 큰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부시는 나이 마흔 직전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를 듣고 그때까지의 방종한 생활을 청산하고 기독교도로 거듭났다.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은 부시 취임식 예배뿐 아니라 9.11 1주년을 기념하는 국방부 행사의 예배까지 맡았다. 프랭클린 그레이엄은 이슬람을 '악의 종교'로 비판한 것으로 악명 높다. 부자 모두 원리주의자들인 것은 물론이다.
대외 정책에 대한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의 영향력은 그들과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연대'로 한층 강화됐다. 일부 네오콘은 9.11 직후 프랑스의 르몽드가 "이제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라는 사설을 쓴 것을 흉내내 "이제 우리는 모두 이스라엘인"이라고 선언했다. 이스라엘을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의 희생자로 묘사한 놀라운 순발력이다.
'힘에 의한 정의'에서도 네오콘과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은 서로 코드가 맞고 남부에 강한 군사문화와 가깝다. 기독교는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에 적대적이다. 팻 로벗슨 같은 사람은 반유대적인 발언을 자주 했다. 그러나 네오콘의 대부 어빙 크리스톨은 기독교 원리주의 목사들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한 어느 정도의 반 유대적인 발언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코멘터리'에서 밝혀 유대계 네오콘의 기회주의적인 유연성을 과시했다.
베일러대의 프라이스 교수는 신약에서 말하는 뉴 이스라엘은 상징적으로 오늘날의 기독교도 전부를 의미하는 것이지 고대고 현재고 미래고 간에 이스라엘을 문자 그대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원리주의자들은 구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로 돌아가려고 해요. 원리주의자들이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보는 것도 묵시록에 일곱개 언덕 위의 도시라고 나오는 말을 광신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죠."
요한 계시록 14장에서 천사가 요한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도시 바빌론이 무너졌다." 미국의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은 바그다드 함락과 후세인의 몰락을 묵시록의 요한과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한 사탄의 도시 바빌론의 최후로 보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기대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그런 해석이 거듭난 크리스천 부시 대통령의 네오콘 정부를 통해 미국의 세계 경영에 반영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 15. '제국'의 반항아들
"쾅 쾅 쾅…."
지난 26일 오전 6시10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중심가에 있는 라시드 호텔에 투숙 중이던 폴 울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은 연속적인 로켓 포격음에 잠을 깼다. 이라크전 기획자로 알려진 울포위츠는 3박4일 일정으로 이라크를 둘러보던 중이었다.
로켓은 호텔 3층과 8층, 11층에 명중했다. 12층에 투숙하고 있던 울포위츠는 경호원과 함께 황급히 복도로 나갔다. 그는 매캐한 연기를 뚫고 비상계단을 통해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군정청 요원과 미 군속이 숙소로 쓰고 있는 이 호텔 로비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로켓포 공격에 놀란 투숙객들이 잠옷 바람으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화를 면한 울포위츠는 사건 직후 CNN에 출연해 "이런 테러 행위가 바로 우리가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같은 시간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NBC방송에서 "공격이 이토록 장기간 지속될 줄은 몰랐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테러리스트가 로켓포 공격을 통해 워싱턴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미국은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2천2백년 전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끈질긴 도전으로 로마제국을 괴롭혔다. '팍스 로마나'는 변방의 끊임 없는 저항에 대한 응전과 제압 위에 구축된 불안한 평화였다. 패권에는 저항이 따르게 마련이다. 21세기의 유일 초강대국 미국이 이룩한 '팍스 아메리카나'역시 반미주의를 앞세운 지구촌 반항아들의 갖가지 도전에 직면해 있다.
반미주의는 국제정치적 측면에 경제적.문화적.심리적 요인이 뒤섞인 혼합물이다. 또 지역별로 맥락이 다르다. 석유정책과 친(親)이스라엘 정책 때문에 미국은 20여개 중동국가에서 반발을 사고 있다. 국제정치 무대에서 프랑스.독일 등 유럽국가들은 미국의 일방주의적 행태에 싸늘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미국은 반(反)세계화주의자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반미감정을 뒤집어 보면 그 밑바닥에는 미국의 파워와 문화에 대한 열등감과 시기심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반미주의자들은 흔히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으면서 반미구호를 외친다"고 꼬집었다.
미국의 경제적 헤게모니에 저항하는 가장 큰 세력은 반세계화 운동이다. 이들은 미국이 국제통화기금(IMF).세계무역기구(WTO) 같은 국제기구들을 내세워 지구촌의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는 코카콜라.맥도널드.카길 같은 미국 기업들의 배만 불릴 뿐이라고 맞서고 있다.
이들은 미국이 참가하는 국제행사마다 쑥대밭을 만들고 있다. 1999년 11월 미 시애틀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킨 이래 반세계화주의자들은 IMF 워싱턴 총회(2000.4), 이탈리아 제노바 선진 8개국(G8) 정상회담(2001.7), 멕시코 칸쿤의 WTO 각료회의(2003.9) 등을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극렬시위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뉴욕 타임스는 반세계주의자들을 일컬어 "현재 지구상에는 미국과 '새로운 길거리 권력(A New Power in the Streets )'이라는 두 개의 수퍼파워가 있다"고 보도했다.
알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테러 조직은 미국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는 반미세력이다. 이슬람 테러 전문가인 요제프 보단스키에 따르면 빈 라덴을 비롯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미국을 이슬람 세계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정면공격은 불가능하므로 테러 공격을 통해 미국을 이슬람권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이 같은 신념은 2001년 9월 11일 미 경제력의 상징인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군사력의 상징인 워싱턴 펜타곤에 대한 항공기 자폭 공격으로 한 획을 그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 이틀 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빈 라덴의 테러는 반세기에 걸친 미 중동정책의 난맥상에다 근대화에 실패한 이슬람 내부의 좌절감이 결합돼 분출된 결과였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이를 간과한 채 군사력이라는 하드파워를 앞세워 지나치게 단순하게 접근했다.
하드파워적 측면만 놓고 보면 부시는 지난 2년 간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이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제거했다. 비록 빈 라덴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알카에다 조직은 사실상 와해됐다. 부시는 지난 9월 "알카에다 지도자 중 70%가 체포되거나 죽었다"고 말했다.
리비아.시리아.이란 등 중동의 전통적인 반미국가들도 '자세 낮추기'에 여념이 없다. 80년대 미국의 공습을 두차례나 겪으면서도 반미를 외쳤던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는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부시가 손에 쥔 것은 반쪽의 승리다. 미 여론조사기관인 퓨 리서치 센터의 여론조사 결과는 그가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평화에는 패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라크 전쟁 이후 각국 국민의 미국에 대한 호감도는 일제히 하향 곡선을 그렸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지난해 61%에서 올해는 15%로 급락했다.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 관계도 흔들리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동안 지속돼 온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연합'은 파산 일보 직전이다. 또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60년 동맹 관계도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쿠바는 버티기로 맞서고 있다. 특히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핵 카드를 뽑아 들고 벼랑끝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워싱턴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최근 유출된 메모에서 "우리가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가, 패배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했다. 조셉 나이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 학장은 "세계화의 결과로 군사력 즉 하드파워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는 추세"라면서 "21세기에도 미국이 세계 제1의 국가로 남아 있으려면 다자주의를 통해 소프트파워를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힘에 의한 로마의 평화는 군사력의 과잉전개(overstretch)를 초래했고, 이로 인한 힘의 공백을 변방의 반항세력이 파고들면서 로마제국은 결국 붕괴했다. 미국이 로마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 16. 에필로그(끝)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유일한 수퍼 파워 미국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미국은 고대 로마 같은 제국(Empire)인가. 여덟 명의 취재진이 각 분야 많은 전문가를 만난 결과를 갖고 15회에 걸쳐 미국을 여러 측면에서 뜯어봤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듯이 미국이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해 유일한 수퍼 파워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은 군사.경제.교육.문화.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 경쟁력의 집합체다.
최첨단 무기를 갖춘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미국의 대학에는 60만명의 외국 학생이 유학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물'이 들어 귀국한다.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10조4천4백56억달러는 세계 총생산 32조1천4백억달러의 32.5%를 차지한다. 영어는 반미 구호를 외치는 젊은이들도 필사적으로 배우는 세계어가 됐다. 할리우드 영화와 음반은 세계인들을 미국 문화에 중독되게 하고 있다.
이런 미국을 제국으로 부르면 논리의 비약일까. 부드럽게 팍스 아메리카나라고 부를까, 패권국가라고 부를까.
미국 역사학자 찰스 비어드는 1939년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미국은 로마나 영국 같이 돼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보스턴대 앤드루 베세비치 교수에 따르면 비어드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전승국이 되면 제국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위대한 공화국의 천명(天命)을 버리게 될 것을 걱정했다.
미국이 유일한 수퍼 파워가 되기까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반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소련의 붕괴를 가져 온 것은 소련이 로널드 레이건 정부가 도발한 군비 경쟁에 휘말려 국력을 탕진한 결과다. 소련 제국은 15개의 공화국으로 분해되고, 러시아는 소련 영토의 76%, 인구의 절반, 경제의 45%, 군사력의 33%를 계승해 2류 국가로 전락했다.
미국은 국력의 세 기둥인 군사력과 경제력과 소프트 파워에서 내다볼 수 있는 장래에는 어느 나라의 도전도 허용하지 않을 리바이어선(Leviathan.괴수)이 됐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금은 미국과 유럽의 경제 규모가 거의 비슷하지만 2050년이 되면 미국 경제가 유럽 경제의 두 배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때가 되면 미국과 유럽의 중간(Median) 연령도 지금의 35.5세와 37.7세에서 36.2세와 52.7세로 벌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미국의 잠재적인 도전 세력으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중국은 어떤가.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의 조셉 나이 원장은 중국의 개인소득이 미국에 접근하는 것은 일러야 2056년, 늦으면 2095년이 될 것이라는 통계를 소개했다.
그래도 미국은 중국 대책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벌써 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 군사적인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곳은 중국의 뒷마당인 전략적인 요충지다. 중앙아시아와 카스피아 연안의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는 데도 필수적인 지역이다. 키르기스스탄의 미군기지는 중국과의 국경에서 32㎞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에 군사적으로 진출한 미국이 이라크까지 장악하면 중앙아시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이라크-발칸반도를 잇는 방대한 안보 벨트가 구축된다. 미국은 유라시아 대륙 쪽에서는 중국을 초생달 모양으로 포위하고 태평양 쪽에서는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이 건재하는 한 중국 해군의 해양 전개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다.
1992년의 방위정책지침(DPG)은 이미 유라시아 대륙에서 미국이 군사적으로 도전 세력의 등장을 차단할 것을 건의했다. 올해 미국의 첨단무기 연구.개발비(5백68억달러)가 중국의 연간 국방비보다 많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소프트 파워에서도 미국은 부동의 우위를 누린다. 우선 영어의 힘이다. 영국 웨일스대의 데이비드 크리스털 명예교수에 따르면 전 세계의 15억명이 많고 적고 간에 영어를 사용한다. 조셉 나이는 웹사이트 내용의 80%가 영어라고 말한다. 정보통신 기술에서는 전 세계 PC의 82%가 인텔사의 칩을 사용하고, PC 10대 중 9대가 마이크로 소프트(MS)의 윈도를 쓴다.
바세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들을 장악하고… 자위가 아니라 다른 나라들을 압박하기 위해 세계 도처에서 절대적인 군사적 우위를 지키는 것은 제국의 경영이다… 미국은 이제 로마다." 미국의 신학자이자 사상가인 라인홀드 니버는 냉전의 전성기였던 1960년에 미국이 제국을 경영하면서도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미국이 풀어야 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영토에 대한 야심이 없는 것이 미국은 로마가 아닌 근거로 지적된다. 그러나 미국은 하드 파워의 뒷받침을 받는 막강한 소프트 파워로 세계를 지배한다. 영어와 할리우드 영화, 코카콜라와 맥도널드 치즈버거로 미국의 가치관을 세계 구석구석에 전파한다. 개방과 세계화가 '미국적인 것'에 문호를 활짝 열어준다. 그 과정에서 빚는 충돌이 테러요 반미다.
로마의 정치가.철학자인 루시우스 세네카의 경구(警句)를 미국에 상기시키면서 시리즈를 끝낸다. "생사를 좌우하는 힘이여, 뽐내지 말라. 그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그 공포로 그대를 위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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