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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헬라) 제국
헬라족이라 칭함을 받은 인도 유럽족이 BC2000년경에 다뉴브강 하류를 거쳐 해안지대로 남하했는데 이들 중 첫번째로 남쪽 헬라에 자리잡은 무리들을 아케안(Achaeans)이라 하고 그 뒤를 따라서 BC1500년경에 도리안이라 불리는 또 다른 무리가 들어왔다. 이들은 BC1400년경 배를 타고 내려와 그레데와 다른 근방의 섬을 정복하였다.
그 뒤에 또 BC1300-1000년 사이에 헬라족은 남은 여러섬과 소아시아의 해안지대를 점령하고 BC12세기경에는 소아시아의 드로이섬을 파멸시켰다.
이리하여 BC1000년경에는 헬라 반도 뿐만 아니라 에게해안 전역을 소유하게 되었고 그중 바다사람의 한 무리는 팔레스타인의 블레셋을 멸망시키고 애굽 제20왕조를 괴롭게 하는 "바다사람"으로 중동일대를 크게 흔들었다.
BC1000년경에서 BC750년까지는 국민회의 형식의 왕정시대를 열었다.
이후 BC750-600년 사이에는 귀족 정치가 이루어졌으며 유명한 올림피아 제전이 열렸고 이때 비로서 자기들을 헬라 사람이라 부르며 헨렌 조상의 후손이라고 믿었다.
BC500년 이후 아덴과 스파르타 사이에 동족 상잔이 일어났으며 그런 와중아 헬라 북쪽의 필립(BC359-336년)은 스파르타를 제외한 헬라 전지역의 맹주가 되었다.
필립의 뒤를 이은 알렉산더는 20세에 왕위에 올라 테베스를 함락시키고 22세때 바사에 눌렸던 헬라의 도시들을 해방시켰다. BC333년에는 바사의 다리오 3세를 잇수스(잇소)에서 격파한 후 계속 지중해로 남하하여 수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애굽까저 진격하여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다시 북상하여 초생달 옥토를 따라 티그리스강을 건너 BC331년에는 바사왕 다리오의 대군을 알벨라에서 대파하고 바벨론에 입성한 후 다리오가 죽은후 바벨론을 수중에 넣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가 정복한 대제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40여년간의 세력다툼이 계속되는 가운데 BC275년경에는 유럽의 마케도냐와 그리스 일부는 안티코너스 왕조가, 이집트와 남부 시리아는 톨레미(프롤레마이오스) 왕조가, 에게해안에서 힌두쿠시에 이르는 아시아 지역은 셀루커스 왕조의 지배에 속하였다.
이들 세왕조는 로마에 의해 BC146년 고린도가 파멸되고, 이어BC64년에는 수리아가, BC30년에는 애굽이 멸망되어 희랍은 종말을 고했다. 이리하여 역사의 중심은 로마로 넘어가게 되었다
헬라 제국시대
1)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
메대와 바사를 통일하고 당시 근동에서 가장 부유했던 리디아를 삼킨 페르시아의 고레스(키루스) 왕은 이오니아 지방과 동쪽으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점령하였고, 바벨론까지 점령하여 대제국의 주인이 됩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시장도 없고 사치와 낭비를 찾아볼 수 없는 순진한 나라였지만 황금의 제국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부유한 나라가 됩니다. 이는 고레스가 바벨론처럼 중앙집중화를 채택하지 않고 지방화 정책을 펼쳐 바벨론이 끌고 왔던 포로들을 돌려보냈기 때문입니다. 이 정책은 각 지역의 경제를 활성화시켜 많은 세금을 거두는데 상당히 효율적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예루살렘으로도 귀환이 가능했습니다.
‘아버지’로 불리며 29년간 통치기간 중에 페르시아인들에게 존경을 한 몸에 받던 고레스가 죽자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두 번째 왕이 됩니다. 그는 이집트를 정복하는 대업을 이루지만 젊은 나이에 후사도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페르시아는 나라의 중진 7명 중에 새 왕을 선출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다리오 왕입니다. 다리오는 이미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지만, 페르시아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고레스의 딸 아토사를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이 둘 사이에 태어난 장남이 바로 에스더의 남편 아하수에로 왕입니다. 아하수에로의 페르시아식 이름은 크사야르사이며 이 시기에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거느리게 됩니다. 동쪽으로는 파키스탄, 서쪽으로는 중앙 아시아, 서아시아, 북으로는 마케도니아,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뻗어있었으며 현재 미국과 맞먹는 면적입니다.
그런데 다리오왕에 이어 아하수에로 왕까지 연거푸 그리스를 점령하려다가 지는 바람에 힘을 잃어 결국 다리오 3세 때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제국의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다리오 왕은 B.C.492년 첫 번째 그리스 침공을 하게 되는데 심한 폭풍우를 만나 공격 한번 하지 못하고 함대 300여 척이 침몰당해 버립니다. B.C.490년에 두 번째 그리스 침공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유명한 마라톤 전투이며, 그리스 병사가 42.195km를 달려 승보를 전한 일화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아하수에로왕이 치룬 전쟁으로 세계 4대 해전 가운데 하나인 살라미스 해전입니다. 아하수에로는 영화 300에서 절대무력의 왕의 역할로 나오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책을 쓴 레온우드는 그 책에서 아하수에로 왕이 4년간의 그리스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후 재위 7년째에 에스더를 왕비로 맞이했다고 기록합니다. 아하수에로는 즉위 20년 해에 자신의 친위대장 아르타바누스에게 암살당하고 맙니다.
2)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전쟁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엄청난 침공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뭉친 연합으로 인해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결국 이 전쟁에서 패한 페르시아는 그리스에게 지배권을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리스 연합군은 언제든지 페르시아나 그와 비슷한 국가에서 침략해올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각 도시국가들이 전쟁기금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아테네가 그 기금을 사적으로 사용하여 아테네에 파르테논 신전을 건립하는데 쓰기도 하여 동맹국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습니다. 아테네가 기금을 사적으로 유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페르시아를 무찌르는데 아테네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 가운데 아테네는 해군이 강하고, 스파르타는 육군이 강했습니다.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는 해군력이 강했던 아테네의 공이 큰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아테네가 기금을 유용한 것과 더불어 그리스 도시 국가 중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인 고린도까지 지배하려하자 스파르타를 비롯한 다른 도시국가들이 마침내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전쟁의 이름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 합니다. B.C.431년에서 B.C.404년까지 27년에 걸쳐 진행된 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3단계로 진행됩니다.
1차 단계는 ‘스파르타의 아테네 침공’입니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지휘 아래 아테네 시를 수비하면서 스파르타에 대해 굳게 방어했습니다. 그런데 아테네 시내에 전염병이 돌고 맙니다. 페리클레스와 수많은 아테네 시민들이 죽게 되자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리는 스파르타가 차지하게 됩니다.
2차 단계는 양측이 휴전 협정을 맺고 전쟁 이전의 상태로 회복하기로 결의합니다. 그러나 아테네가 시칠리아 내전에 개입하고 원정군을 보냄으로 다시 큰 전쟁으로 확대되는데 이것이 3단계로 발전합니다. 3단계에서는 스파르타가 아테네와 싸우느라 과거의 적이었던 페르시아를 끌어들여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지상전과 해전을 치르고 이긴 전쟁이었습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 성을 파괴했으며, 아테네의 모든 함대를 빼앗았습니다. 비록 스파르타가 그리스 도시국가간의 전쟁에서 이겼지만 그리스 문명의 종말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리스 도시국가는 스파르타에서 테베로 권력이 이동해가다가 마케도니야의 필립포스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더에게 무너지게 됩니다. 그리고 세계 역사는 헬라 제국이라는 새로운 강자가 탄생하게 됩니다.
3) 그리스의 반란과 마케도니아의 응징
그리스 도시 국가의 권력이 스파르타에서 테베로 이동할 당시 마케도니아의 왕자 필립포스 2세는 당시 15세의 어린 나이에 테베에 볼모로 잡혀있었습니다. 필립포스 2세는 테베에서 에파미논다스가 발전시킨 밀집 보병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테베의 에파미논다스가 부상을 당해 죽자 그리스에서는 더 이상 강력한 지도자가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B.C.359년에 필립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의 왕이 됩니다. 많은 전쟁전문가들은 필립포스 2세는 군사방면의 천재였다고 평가합니다. 필립포스 2세는 왕이 되자 현재의 유고슬라비아인 일루리아와 트라키아, 그리고 테살리아를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를 포위 공격하며 무자비하게 성을 파괴했습니다. 이어서 필립포스 2세는 자신을 볼모로 끌고 갔던 테베를 점령하고 아테네 연합군까지 격파시켰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 전체를 그의 발 아래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도시 국가의 정치인들을 고린도에 소집해 자신의 지도 아래에 그리스와 마케도니아가 통합되어야 함을 역설하면서, 다시는 내전을 일으켜서는 안 되고,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략했던 것에 대한 복수를 하자고 말했습니다. 늘 그리스인들에게 야만인 취급을 받던 마케도니아가 오히려 그리스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정치인들의 의견을 모은 필립포스 2세는 유럽의 보병과 동방의 기병을 혼합한 통합군을 창설하였으며, 그 이후로도 많은 군사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의 딸 결혼식에서 마케도니아의 젊은 귀족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파우사니아스가 필립포스 2세를 죽인 이유는 자신의 진가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20살의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 3세)가 아버지의 뒤를 잇게 됩니다.
그리스의 많은 도시 국가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20세인 알렉산더는 즉시 출병하여 테베, 아테네, 스파르타를 차례로 진압하고 이어 그리스 전역을 순식간에 완벽하게 장악해버립니다. 그러면서 다른 도시 국가들도 스스로 굴복하게 됩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게 충성서약을 받고 원정길에 오릅니다. 멀리 도나우 강까지 가서 연이어 대승을 거두고 있는데, 그리스에서는 알렉산더가 죽었다는 괴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러자 테베가 아테네와 손을 잡고 B.C.335년에 마케도니아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알렉산더는 반란 후 2주 만에 도착하여 매우 잔인하게 테베를 응징했습니다. 테베 시민 6천 명을 살육했으며, 어린아이를 포함해 3만 명을 모두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알렉산더를 어린 애송이로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그리스를 장악한 알렉산더는 4만 명의 군사로 페르시아를 응징하고 다시 세계 정복을 위한 출정을 나서게 됩니다.
4) 알렉산더의 헬라제국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왕 다리오 3세와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래도 다리오 3세는 구사일생으로 도망에 성공합니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다리오 3세를 추격하기보다는 이집트로 향합니다. 이 소식이 시돈, 비블로스, 아라두스에 퍼지자 알렉산더에게 항복하면서 황금 왕관을 바치게 됩니다. 그런데 두로는 항복을 요구하는 알렉산더의 사절단을 모두 바다에 던져 죽입니다. 두로는 과거 앗수르의 산헤립의 공격을 5년 간 견딘 전력도 있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포위 공격에도 13년을 버틴 경험도 있었고, 또한 카르타고가 원정군을 보내주리라 믿었기에 이런 일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알렉산더는 6개월 만에 두로를 점령하였고, 테베에 행했던 대로 잔인한 복수를 가했습니다. 결국 아모스, 이사야, 에스겔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두로 왕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을 살펴봅시다. 겔28:2~8절 입니다. 강하게 저항하던 블레셋도 2개월 만에, 가사도 2개월 만에 점령한 알렉산더는 이후 시리아와 유대, 이집트를 점령하고 페르시아까지 단숨에 점령합니다.
전쟁하면서 거두어들인 수많은 노획물과 금은보화로 70개 이상의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고, 평소에 존중하던 그리스의 사상과 문화를 페르시아의 문화와 융합하여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 퍼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으로 그 자신부터 헬레니즘 사상을 전파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른 그는 직접 페르시아의 공주와 결혼하며 문화 결합과 그리스 문명의 전파의 선구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로마 제국 초기까지 그리스 학문은 지식인들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익혀야 하는 요소가 될 정도였습니다. 알렉산더의 통치 방식은 앗수르의 혼혈정책과는 다르게 알렉산더가 앞장서서 동방의 여인들을 맞이하여 서로를 융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자신의 부하들에게도 동일하게 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 이후로 헬라어는 국제 공용어로 사용되었고, 세계동포주의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5) 알렉산더와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더의 전쟁 이야기를 들으면 잔인한 장수처럼 느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의 사상과 문화를 진심으로 존중하던 철학자의 모습도 가지고 있습니다. 알렉산더가 애굽을 점령했을 때,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만들고,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을 만든 것은 큰 의미를 지닌 일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일방적인 정복자와는 분명 다른 면입니다. 알렉산더는 밤마다 독서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의 베게 밑에는 매일 밤 자기 전에 읽던 ‘일리아드’와 그의 칼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입니다. 나폴레옹도 알렉산더를 따라 전쟁 중에도 독서를 자주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 독서의 원조는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 1:6~8을 읽겠습니다.
알렉산더가 다른 정복자와는 다르게 독서를 중요하게 생각한 배경에는 그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매우 큽니다.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필립포스 2세에게는 7명의 아내가 있었지만, 딸이 많던 중 태어난 아들 알렉산더는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필립포스 2세는 아들을 위한 가정교사를 초빙했는데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필립포스 2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모시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인 스타기라 시를 모두 복원해주기도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에게 도덕과 교리뿐 아니라 일반인에게 알리지 않던 심오한 가르침도 모두 전수해주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알렉산더는 높은 지식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둘 사이의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알렉산더가 수많은 나라들을 정복해가고 있던 날 스승 아리스토텔레스가 책을 만들어 출판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즉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항의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답장을 했는데 그 내용이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기록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선생님께, 건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친히 구전으로 가르치셔야 할 이론들을 책으로 발표한 것은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배운 지식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해버린다면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그들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권력이나 영토로써가 아니라 지식으로 뛰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 편지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그 지식들은 발표되었다고 말할 수 없소. 왜냐하면 형이상학에 대한 이 책은 내게서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아무리 읽어보아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오.”
6) 알렉산더와 예루살렘
알렉산더가 예루살렘을 침공한 것은 다른 지역을 침공한 것과 많이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원정을 시작하자 대부분의 나라들은 저항하거나 항복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저항하지도 항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어떤 군사적 피해도 입지 않았고,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세금 혜택까지 받았습니다. 그 이유를 요세푸스가 기록합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더가 원정을 떠날 때 마케도니아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에서 알렉산더가 아시아를 제패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던 중, 자주색과 주홍색의 옷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금패가 달린 모자를 쓴 한 사람이 나타나 자기가 군대를 인도해 페르시아를 점령하게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알렉산더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꿈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 알렉산더를 맞이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유대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유대를 공격하지 않고 대제사장의 조언대로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께 제사까지 드렸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매 7년마다 지키는 안식년에는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수많은 지역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는데, 유대인들로 하여금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하여 살게 했습니다. 이주한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장사에 종사하는데, 이후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은 헬라와 로마 제국시대까지 상권을 차지하고자 대립하게 됩니다. 로마시대에는 상권을 두고 싸우다가 폭동으로까지 번지기도 합니다. 알렉산더는 정복한 나라의 내정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았으나 세금에 있어서는 매우 철저하게 수거했습니다. 많은 정복전쟁을 유지하기 위한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7) 프톨레미 왕조와 유대
이집트와 페르시아를 손에 넣은 알렉산더는 헬리니즘을 확산시키며 인도의 갠지스 강까지 원정을 떠납니다. 인도까지 도착해서 일어난 사건은 알렉산더의 부하들이 더 이상의 종군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원정을 중단하고 돌아오던 중 알렉산더는 32세의 젊은 나이에 원인 모를 병으로 죽습니다. 사인이 말라리아라고도 하고 열병에 의한 죽음이라고 하지만 명확한 원인은 알 수 없었습니다. 알렉산더의 죽음은 헬라 제국의 큰 변동을 초래했습니다. 알렉산더의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어린 아들이 있었지만 성장하기도 전에 알렉산더의 부하 장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부하 장수들은 각축을 벌이다가 결국 헬라제국을 나누어 통치하게 됩니다.
먼저 마케도니아의 장군 라고스의 아들 프톨레미가 애굽을 차지했습니다. 프톨레미는 44세의 나이에 애굽에 도착해서 능숙한 솜시로 애굽을 손에 넣고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정하여 알렉산더의 시신을 애굽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프톨레미 소테르라 칭했습니다. 소테르란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프톨레미 왕조는 이후로 300년간 애굽을 통치하다가 시리아와 동방을 차지한 셀루커스 왕조와 유대를 두고 경쟁하다가 결국 유대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는 프톨레미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그의 호운과 용맹을 사용하여 코엘레 수리아와 페니키아 전역을 장악하였고, 모든 신민들을 무력으로 굴복케 하여 어떤 이들은 그곳으로 이주시켰고 또 어떤 이들은 포로로 잡아갔다. 바로 이때 그는 십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유대인의 지경에서 애굽으로 데려갔다. 그는 이들 가운데서 선발된 3,000명의 남자들을 무장시켜 그 나라에 파견한 주둔군에 배속시켰다.”
프톨레미 왕조 시대에 많은 유대인들은 애굽에 거주하였으며 이 때 유대인들은 그리스어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프톨레미 왕조는 122년간 유대를 지배하였으며 이 시기에 유대는 평화와 안정을 누렸습니다. 또한 유대의 제사장들은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로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의 입장에서는 지배하는 나라가 페르시아에서 헬라로 바뀌었을 뿐 자신들의 종교와 문화는 계속 지킬 수 있었습니다. 단지 페르시아 시대에서는 배우지 않아도 되었을 헬라어를 헬라 제국에서는 강제로 배워야만 했습니다.
8) 헬라어 성경 70인역
프톨레미 소테르는 자신의 왕조를 40년간 통치한 뒤 그 뒤를 이어 프톨레미 필라델포스가 또한 40년을 통치합니다. 프톨레미 필라델포스의 큰 업적 중에 하나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애굽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인구와 맞먹는 100만 명의 인구가 사는 세계적인 도시였고 문화와 패션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대인들은 이상 생활에서 히브리어를 읽거나 쓸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헬라어로 모든 상거래가 이루어졌고, 법이 공포되고 모든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헬라 제국에서 존경받고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헬라어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자 유대인 후손들이 히브리어를 알아듣지 못하여 그들만의 회당에서 히브리어를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어 성경인 70인역이 준비되기 시작했습니다.
알렉산더가 세운 도서관은 당시 20만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이어받아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더욱 더 많은 책을 소장하고 싶어했지요. 그는 율법에도 관심이 많아 율법서가 헬라어로 번역되는데 힘을 실어주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자 헬라 제국을 통해 성경의 세계화가 이루어집니다. 당시 프톨레미 필라델포스가 도서관장에게 남긴 어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내 도서관에 꼭 있어야 할 책들 가운데 탐구해볼 만한 유대인의 율법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 책들은 유대인의 방언과 문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헬라어로 번역하기에 매우 힘이 든다고 했소. 그 문자는 수리아의 고유 문자와 비슷하며 발음도 비슷한 것처럼 보이나 나름 독특한 면이 있다고들 하오. 그러나 우리가 그 책들을 번역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 책들이 우리 도서관에도 있으니 번역하는 데 필요한 것은 다 갖추지 않았소?”
마침 프톨레미 필라델포스의 가까운 친구인 아리스테우스가 율법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중이니 애굽에서 노예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해방시켜주자는 제의를 하게 됩니다. 이를 받아들인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국고에서 속전 460달란트 이상을 내어주어 12만 명의 애굽 포로들을 풀어줍니다. 해방을 선언하고 조서를 공포한지 7일 만에 속전속결로 이루어졌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애굽으로 내려간 유대인들이 약 300년 만에 귀환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율법은 주로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정확한 사본도 없었으며,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할 헬라어에 능통한 율법학자가 없었습니다. 결국 유대의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애굽의 노예들을 해방한 일과 선물과 금 50달란트, 많은 보석들을 보내어 성경 번역과정에 동참해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12지파에서 각 6명씩 72명을 선발해 알렉산드리아로 보내 모세오경부터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성경을 후대 사람들은 ‘셉투아진트’라는 라틴어로 불렀으며 70인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70인역이라는 이름은 70인의 장로가 같이 번역했다는 설에서 나왔습니다. 초기에는 모세오경만 번역되었고, 그 이후 계속해서 구약의 다른 번역도 실행되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70인역이 완성되자 프톨레미 필라델포스는 크게 기뻐하였으며, 도서관장에게 70인역의 사본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하고 손상이 가지 않도록 잘 보관하는데 만전을 기울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또한 유대로 귀국하는 율법학자들에게 최고급 옷 3벌과 금 2달란트, 금잔, 가구들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유대의 제사장 엘르아살에게는 은으로 만든 침상 10개와 가구 잔, 자주색 옷 10벌, 왕관, 세마포 100필을 주었습니다.
9) 셀류커스 왕조와 유대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 아래 122년을 보낸 유대는 주전 2세기 프톨레미 왕조와 셀루커스 왕조 사이의 갈등이 다시 재기되면서 혼란을 경험합니다. 주전 223년 셀루커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가 20세에 왕이 되면서 스스로 알렉산더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세계정복 계획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안티오쿠스 3세는 셀루커스 왕조가 시작된 이래로 가장 넓은 영토와 부를 가지게 되었고, 프톨레미 왕조와 싸워 이겨 유대를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유대는 재빨리 셀루커스 쪽으로 지지를 보내며 안티오쿠스 3세를 도와 유대에서 프톨레미 군대를 몰아냅니다. 이에 감동한 안티오쿠스 3세는 유대인들의 신앙과 율법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고 3년간 세금 감면의 혜택을 베풉니다. 그리고 도시와 성전재건을 지원하기로 약속하고 유대인 포로들을 모두 석방해주기로 약속합니다. 또한 유대인 공동체 내부의 자치까지 허락합니다.
그런데 안티오쿠스 3세가 로마와의 전쟁에서 연거푸 2번 패하면서 변동이 시작됩니다. 주전 190년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한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에게 많은 땅을 빼앗겼고, 해군이 강제 해체되었으며, 전쟁에 대한 책임으로 배상금 15,000달란트를 물어내야 했습니다. 이 액수는 고대 징수된 배상금 가운데 손에 꼽힐 정도의 거액이었습니다. 전쟁에서도 패하고 전쟁 배상금도 마련해야 하는 안티오쿠스 3세는 자기 나라 모든 신전들의 재산을 압류했습니다. 그리고 속국인 예루살렘 성전까지 압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만큼 셀류커스 왕조의 재정상태는 바닥이었습니다. 그러자 나라 곳곳에서 백성들의 반기가 일어났고, 안티오쿠스 3세는 주전 187년 수사에서 신전을 약탈하는 과정에서 암살당하고 맙니다. 그 뒤를 이은 셀루커스 4세도 로마에 바쳐야 하는 배상금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을 강탈하고자 했고, 역시 유대에서 강한 반대에 부딪쳤고, 셀루커스 4세도 암살당하고 맙니다.
셀루커스 4세의 동생 안티오쿠스 4세가 왕이 되어 스스로 칭하기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즉 ‘신의 현현’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과 나라의 기움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를 안티오쿠스 에피마네스, ‘미친 놈 안티오쿠스’라고 불렀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지금부터 중간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먼저 그는 돈을 받고 자기 마음대로 ‘야손’이라는 사람을 유대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합니다. 지금까지 유대는 아론의 후손들이 맡아왔었고, 다윗과 솔로몬 이후 사독계열의 사람만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인들, 특히 제사장은 혈통이 중요함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주 중요했던 전통이 사라지고 그 이후로 성전의 매매가 시작됩니다. 야손이 대제사장으로 임명될 때, 어떤 과정으로 올랐을까요? 안티오쿠스 4세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대제사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토비아드 가문의 ‘메넬라우스’라는 사람이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하자 안티오쿠스 4세는 야손을 내쫓고 메넬라우스를 대제사장으로 앉히게 됩니다. 이러한 성직의 매매는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집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프톨레미 왕조가 다스리는 애굽을 빼앗고 싶었습니다. 대군을 거느리고 진격하여 애굽을 장악하기 시작하자, 프톨레미 왕조는 로마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로마는 밀사를 보내 안티오쿠스 4세에게 철수를 명합니다. 아쉽지만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 로마에 대항할 힘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유대에게는 안티오쿠스 4세가 전쟁에 패하였고, 죽었다고 들렸습니다. 이에 억울하게 대제사장을 빼앗긴 야손은 군사를 일으켜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였고, 자신이 다시 대제사장이라고 선포합니다. 소문이란 참 무섭습니다. 이 소문은 다시 안티오쿠스 4세에게 들려지기를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들렸습니다. 화가 난 안티오쿠스 4세는 로마에 대한 굴욕과 잘못된 소문으로 인해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아크라’라는 요새를 세워두고 유대인들을 박해합니다. 성전을 늑탈하고, 율법서를 찢고, 신상에 절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학살했습니다. 각 개개인의 머릿수에 따라 다양한 세금을 매겨 거두었고, 율법대로 살지 못하게 될 법령을 선포하였습니다. 안식일은 지키지 못하게 하고 할례를 하지 못하게 했으며, 율법서를 소유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행위는 모두 셀루커스 왕조에 대한 불충으로 규정했습니다. 심지어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부부를 처형할 때 부부의 목에 죽인 아기를 두른 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도 했습니다. 박해는 더욱 심해져서 성전 안에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세워 돼지고기를 희생제물로 바쳤습니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교 경건주의자들인 ‘하시딤’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다시 연구하고 탐구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자들로 후대에 ‘서기관’들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안티오쿠스 4세의 강한 핍박을 하나님에 대한 심판으로 믿고, 진노를 멈추고 구원을 허락하시도록 더욱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는 움직임이 많아지게 됩니다. 이 때 한 원로 제사장이 세상을 바꿀 혁명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의 마카비 혁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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