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국경선평화학교 피스메이커들이 철원 소이산 정상에서 평창동계올림픽이 평화올림픽으로 성공하길 소망하는 평화촛불기도운동을 벌이고 있다. 평화촛불기도는 지난해 10월 16일에 시작하여 올림픽 개막일까지 매일 이어질 예정이다. (사진: 국경선평화학교 제공) |
스포츠는 평화를 만드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정치적 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스포츠는 좋은 연결도구 역할을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중국 수교를 만들었던 핑퐁 외교(ping-pong diplomacy)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적대 상황에 있던 1971년 중국 정부는 미국 탁구 선수단을 중국으로 초청하여 경기를 가졌고, 이를 계기로 미-중 간의 냉전 대립관계가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쩌둥 주석과 만나 국교를 수립했습니다. 비정치적 스포츠가 가장 멋진 평화정치를 실현한 것입니다.
스포츠와 평화 지금 우리나라 한반도 상황에서 이 과정이 다시 재연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스포츠 축제인 평창동계올림픽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북한이 평창 올림픽에 참가한다고 메시지를 보내왔고, 이를 계기로 끊겨 있던 남북한 사이에 만남과 대화가 시작됐습니다. 올림픽 참가를 논의하는 첫 만남의 자리에는 남북한 정부의 통일 담당 책임자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동안 2년 가까이 단절되어 심각한 갈등을 이어오던 남북한 사이가 단숨에 이어졌습니다.
지난 70여 년 분단시대 동안 남북 관계는 단절과 연결의 반복을 겪었지만, 최근 2년의 단절은 전쟁 상황으로 치닫는 위험한 지경이었습니다. 도무지 해결점이 없어 보였는데 극적으로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만남과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극적인 전환을 만드는 데 평창올림픽이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스포츠가 정치군사적 평화채널 역할을 했습니다. 이념적으로, 정치체제적으로 갈등을 해 온 한반도 상황에서 비정치적이며 이념을 초월한 인간 행동으로서 스포츠는 갈등 해결의 좋은 도구로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모든 일들은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과 남한의 문재인 대통령이 평창올림픽을 남북한 평화적 관계 개선을 위한 기회로 적극 활용했기에 가능해졌습니다. 문 대통령은 평창올림픽 홍보대사가 되어 올림픽 기간 중에는 모든 전쟁 행위를 중단하자고 제안하여 국제연합(UN)의 지지를 받았고, 미국 대통령을 설득하여 한미연합 군사훈련도 중단하는 평화올림픽의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북한 최고지도자가 응답한 것입니다.
평화는 평화로 선순환하게 되어 있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스포츠맨이라 합니다. 특히 농구를 좋아해서 미국의 유명한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먼을 평양에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스포츠를 통해 그는 북한의 이미지를 열린 사회, 다른 보통 사회와 같이 스포츠를 즐기는 평화로운 사회임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특히 미국과 관계 개선을 원한다는 평화 메시지의 표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포츠는 종종 정치인들의 평화 외교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스포츠에 담긴 평화 코드를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입니다.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전환점으로 한반도를 뒤덮고 있던 전쟁의 망령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상황을 돌아보면 남북한은 정치적 군사적 단절과 대립을 하는 중에도 스포츠 경기를 통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남북 유소년 축구경기인데, 2014년 연천에서 첫 번째 경기를 가진 이래 이듬해에는 평양에서 두 번째 경기로 이어졌습니다. 그때 역시 정치적 대립과 갈등은 계속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7년 12월 중국에서 남북 유소년 축구팀이 다시 경기를 했고, 이때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를 위한 물밑 접촉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포츠가 남북한을 이어주는 평화채널 역할을 한 것입니다. 정치적 단절 상황에서도 연결점을 유지하는 것이 평화운동에서는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 사실은 동서독 평화통일의 역사에서 우리가 다시 배울 수 있는 점입니다. 동서독이 두 개의 국가로 정치적 군사적 분단 상황 중에도 교회는 하나의 독일 교회를 유지했습니다. 교회들은 매년 동독과 서독에서 총회를 번갈아 열면서 교류와 만남을 이어갔고, 그 결과 동서독 정치적 군사적 통일을 실현시키는 평화채널 역할을 했습니다.
남북한 교회 상황은 독일 사례를 적용하기에는 매우 다릅니다. 하지만, 교회로서는 남북한 정치적 군사적 단절과 갈등 상황에서 평화의 메신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늘 갖고, 실력을 키워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항구적 평화채널로서 스포츠의 역할 항구적인 평화채널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치적 군사적 상황은 쉽게 깨지고 변화무쌍합니다. 특히 미국과 중국 같은 외부 강대국의 영향권 안에서 정치군사적 대립과 갈등을 겪고 있는 남북한 상황에서 견고한 평화채널은 필요합니다.
이번 평창올림픽이 남북한 관계를 다시 연결시키는 것을 보면서 저는 평화채널로서 스포츠의 역할에 주목합니다. 평창올림픽의 경험을 좋은 기회로 삼아 남북한 사이에 정치적 군사적 상황과 관계없이 유지되는 스포츠 교류가 정착되기를 기대합니다. 전문 스포츠 경기뿐 아니라 일반 사회 스포츠 교류운동으로 넓혀지고, 남북한 군인들간의 스포츠 교류를 정기적으로 실시해도 좋을 것입니다. 정치와 이념, 인종과 문화의 차이와 관계없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스포츠는 우리나라 남북한 갈등과 분단을 해결하는 평화 운동으로 발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협의하기 위해 남북한 정부의 체육, 문화, 예술 담당 관리들이 만났습니다. 북한은 평창올림픽에 선수단과 응원단뿐 아니라 문화예술단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스포츠로 시작한 만남이 문화 예술로 확산된 셈입니다. 남북한이 공동 공연을 하면 예술인들이 만나고 같이 호흡을 맞추며 친구가 될 것입니다. 원수였던 사람이 친구가 되는 변화, 이것이 평화입니다. 평창올림픽은 남북한 평화의 길을 여는 평화올림픽이 되었습니다.
올림픽 정신은 평화입니다. 고대 올림픽 경기가 시작했을 때 올림픽 기간 동안에는 전쟁을 중지했다고 합니다. 평화 정신을 지킨 것입니다. 현대 올림픽 정신을 담은 올림픽 헌장(2017년 9월 15일)은 “인류의 조화로운 발전(the harmonious development of humankind)과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평화로운 사회를 증진한다”는 올림픽 정신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평창동계올림픽에서 꽃을 피우고 실현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의 평화 비전 미국은 1월 셋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데이’ 공휴일로 지냅니다. 흑인으로서 미국 전체가 공휴일로 정해 기릴 만큼 마틴 루터 킹은 미국인들의 가슴 속에 인간 평등과 평화의 가치를 드높인 인물입니다.
마틴 루터 킹(1929-1968)은 목사로서, 성서의 인간평등 정신을 굳게 믿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의 문화와 법과 제도 개혁에 나섰던 사회개혁가요 인권운동가입니다. 그에게서 가장 빛나는 면모는 불굴의 선한 믿음에 기반한 담대한 평화 실천입니다. 그는 미국의 백인 권력에 정치적 사회적 신체적 폭력을 당했지만 결코 폭력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비폭력 평화의 신념을 지켰으며, 실제 행동도 비폭력 저항으로 일관했습니다.
1964년 스웨덴의 노벨평화상 위원회는 35세의 젊은 킹 목사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했습니다. 1968년 세계교회협의회 제4차 웁살라 총회는 킹 목사를 주제 강연자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강연 초청은 실현되지 못한 채 그는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미국 연방의회는 킹 목사의 생일날(1월 15일)을 기려 1월 세 번째 월요일을 기념일로 정해 전체 미국인들이 세대를 거쳐가며 킹 목사의 삶과 정신을 배우도록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킹 목사는 어떤 의미일까요? 미국의 요즘 모습을 보면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 반이민정책 등 인종차별 행태가 기승을 부립니다. 미국에서 사회적 약자들, 특히 유색인종은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평화로운 삶이 깨진 것입니다. 이 가운데 한국 이민자들도 있습니다. 킹 목사가 생전에 외쳤던 인간평등은 여전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평화의 실현은 인간평등의 실현입니다. 평화는 인간평등과 같은 말입니다. 이 평화의 비전은 이미 실현되었고 앞으로 실현될 희망이요 믿음입니다. 이것을 킹 목사가 삶으로 실천했고, 그 완전한 실현을 비전으로 보고 후대에 남겨주었습니다.
킹 목사는 예언자적 평화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것을 실천하지만 불가능하다 판단하면 포기합니다. 평화의 비전은 처음 시작할 때는 대개 실현가능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킹 목사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가 행동했던 당시는 100여 년 이상 노예로 살아 온 흑인들이 백인들과 평등한 인간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실현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꿈을 품었고, 과감하게 행동했습니다. 그 바탕에는 절대적 긍정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에서 킹목사는 말합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이 나라 건국 신조의 참뜻을 되새기며 살아가리라는 꿈입니다.
킹 목사의 믿음대로 흑인들은 공민권을 얻었고, 그후 50년이 지났을 때 흑인 대통령이 나왔습니다.
평화운동은 믿음회복운동 오늘 우리가 킹 목사에게서 배울 점은 바로 절대적 긍정의 믿음으로 과감하게 행동하는 평화 비전입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실현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지금, 평화의 비전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절대적 긍정의 믿음과 희망의 회복, 믿음의 회복운동이 필요합니다. 평화운동은 믿음의 운동입니다. 이를 위해 믿음의 학교인 교회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국가권력의 눈치를 보고, 굴복하고 추종하는 태도를 갖고 있는 한 평화 비전을 실천하는 과감한 행동도 믿음도 나올 수 없습니다. 교회는 국가의 전쟁과 폭력에 맞서 진리를 말하는 예언자적 평화의 소명을 감당할 수 있는 내적 믿음의 개혁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사회에서 평화운동은 교회 개혁, 믿음의 개혁 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킹 목사는 이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고, 오늘 그의 평화 비전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의미입니다.
교회는 국가의 지배자가 되어서도 안 되지만 국가를 섬기는 종(servant)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국가의 양심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국가의 비판자와 안내자가 되어야지 결코 국가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교회가 예언자적 열정을 다시 회복하지 못한다면 부적합한 사회클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도덕적 영적 권위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 마틴 루터 킹 정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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