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절)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고전1:2) 고린도교회를 향해 불쌍해지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들에게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나긴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시는 믿음이 결여되므로(고후13:5) 불쌍한 교회가 된 상태이긴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니 천국에 갈 준비나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하는 겁니다(고전15:2)
지금 이 세상은 무섭습니다. 종말의 현상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납니다.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기독교가 근본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과학과 문명의
발전으로 세상이 부요해지므로 교회도 따라서 그 가치관을 지향해 왔습니다.
뭐라고 해도 마지막 때의 교회의 모습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형편이 됩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이 같이 가련한 교회, 가난한 교회, 눈먼 교회, 벌거벗은 교회가 널려 있습니다.
세속의 가치관으로 현대교회를 보면 집도 크고 사람도 많고 시설도 화려하고
없는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역사가
없어 그를 옷 입고 그를 먹고 그와 더불어 보좌에 앉은 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겨우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비록 밑지고 살지만 장차 천국에 갈 것이므로
참고 인내하여 그 날에 이르자는 독려를 할 뿐입니다. 그리고는 정작 그들은
좋은 자동차에 입맛을 다시고 고급 시계를 탐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이 죽은 다음일까 내세의 영광을 보려면
과연 육체 밖에 나가야만 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설교자들에게 던집니다.
지금 내노라 하고 기독교를 대표하는 설교를 듣다보면 가련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그만 꺼버리고 맙니다. 그 앞에서 찬송의 가락에 맞춰 흔들어대는
무리들의 눈멀고 벌거벗은 모습을 보노라면 속이 상해 시선을 돌리고 맙니다.
외화내빈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한 표현입니다. 겉은 화려하나 속은 가난합니다.
바울이 던진 교회의 문제는 복음이었습니다. 지금의 교회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 두 영역뿐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 안에
붙잡혀 온 다음 복음을 듣고 보니 몸은 죄로 인해 죽었지만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어(롬8:10)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 양쪽에 걸쳐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영을 좇아 살면 하나님의 나라이고 육신을 좇아 살면 음부이며 사망입니다.
이 둘을 지겹도록 경험하고 난 다음에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성경의 모든 믿음의 인물들의 신앙의 역정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된 모습을 보이신
것은 육체 밖에 나가서 그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육체 안에 있을 때에
이 세상 삶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의와 거룩과 영광의 삶이 겹쳐
있음을 알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두 세계를 입증하셨습니다.
왜 그리스도인에게 영이 담긴 마음의 변화로 인해 마음이 담긴 육신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걸까요? 그야말로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해지는 복이 없는 이유가 뭘까요?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의 역사가
우리의 심령과 심신의 지각변동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활과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밖에 계시는 라오디게아교회 같은 불상사 때문입니다.
어떤 교수가 거듭남만 강조하는 어떤 단체를 비방하는 한국기독교가 그 거듭남을
해결하기 위해 주야장창 매달리고 있노라 말을 했다고 합니다. 복음이 문젭니다.
예수만 알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눈먼 자들의 신학과 설교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으로 그의 죽으심과 연합이 되고 그의 살으심에 연합이
되는 구원이 그 속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육체와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겁니다.
마음이야 하늘을 향하지만 그만 육신의 소욕에 슬그머니 기울어지고 맙니다.
아무리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복은 신령한 것이라고 외쳐도 성향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그래서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가 세상에
대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골3:1-3) 이건 강요할 일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듣고 계시의 영을 가진 자들 곧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바라심과 성도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과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자들은 땅에서 난 자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넘기므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난 자로 주의 형상으로
주의 영광을 보므로 땅의 것을 바라던 겉사람은 점점 낡아지고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 갑니다. 자신도 모르게 점점 커가는 자신의 존재감에 놀라게 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