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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 觸은 ‘무엇이 있다는 느낌’입니다. 우리가 ‘있다’라고 하는 모든 것은 이 느낌에서 비롯됩니다.
091. 地・水・火・風・空・識을 外道들은 우리 밖에 存在한다고 생각했고 이들 6가지는 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들 여섯 가지를 六界라고 불렀습니다.
092. 부처님께서는 왜 地・水・火・風・空・識 여섯 가지를 界라고 불렀을까요?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界는 같은 종류끼리 界域을 이루고 모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存在를 構成하고 있는 要素를 種類別로 모아 놓으면 地・水・火・風・空・識 여섯 가지가 됩니다. 따라서 이들을 界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觸은 六界가 성립하는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觸을 ‘入處’라고 하신 것입니다.
093. 六界는 우리의 具體的인 認識 現象에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四大는 실제로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닙니다. ‘있는 것’은 모두 ‘있다는 느낌’인 觸을 因緣으로 나타난 것이지 要素가 모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外道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外部에 實在한다고 믿고, 그것을 構成하고 있는 것을 四大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四大도 ‘있다는 느낌’에 의해 ‘있는 것’으로 認識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四大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發生에 관한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空이나 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 外道의 모든 邪見이 觸因緣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하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모든 존재가 觸을 因緣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알지 못하는 無明에서 觸을 일으켜 갖가지 要素說을 主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觸은 이렇게 外道들이 主張하는 要素들의 界를 成立시키는 바탕이 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觸入處’라고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094. 十二入處를 因緣으로 六識이 發生하면, 우리 마음은 十八界의 狀態가 됩니다. 十二入處를 因緣으로 한다는 것은, 十二入處의 意識 狀態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因緣이란 行爲, 즉 業을 말합니다. 우리가 因緣을 짓는다는 것은, 業을 짓는 것을 말합니다. 보는 것도 業이고, 듣는 것도 業이고 생각하는 것도 業입니다. 그러니까, 眼과 色을 인연으로 眼識이 생긴다는 말은, 눈으로 色을 보면 본 걸 分別할 수 있는 意識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095. 十二入처를 因緣으로 六識이 생긴다는 것은 ‘主觀’과 ‘客觀’, 즉 ‘自我’와 ‘世界’를 分別하여 보게 되면, 보이는 것을 分別하는 意識이 생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이는 걸 分別하는 意識이 생기면, 이 分別心에 의해 보는 놈과 보이는 것과 그것을 分別할 수 있는 意識이 같은 種類끼리 區分되며, 이렇게 같은 種類끼리 區分된 意識 狀態가 十八界입니다.
096. 十二入處는 關心, 즉 欲貪이 있어야 나타납니다. 그리고 十二入處가 나타나면, 十二入處를 因緣으로 보이는 것을 分別하려는 意識이 일어납니다. ‘저것은 무엇이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十二入處를 因緣으로 發生한 識입니다. 만약 이 識이 이미 十八界 안에 있다면, 그 識이 나타나서 ‘이것은 무지개다’라고 분별할 것입니다. 그러나 없을 때는 그것을 分別하는 意識이 새롭게 생깁니다.
097. 十八界는 보고, 듣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 즉 業에 의해 形成되어 같은 종류끼리 界域을 形成하고 있는 意識입니다. 이 十八界는 구체적인 因緣이 주어지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씩은 나타나지 않고, 반드시 셋이 모여서 나타납니다.
098. 보이는 것이 없으면 보는 놈이 나타나지 않고, 보는 놈이 없으면 보이는 것이 나타나지 않고, 보는 놈과 보이는 게 없으면 보이는 것을 分別하는 意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들이 나타나는 契機는 行爲, 즉 業입니다.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보는 놈, 보이는 것, 이것을 分別하는 意識이 나타나 함께 和合합니다. 이것이 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觸을 因緣으로 해서, 즉 業에 의해 形成된 十八界가 和合한 것입니다.
099. 觸은 모든 存在가 成立하는 根據가 되는 意識 狀態입니다. 十八界라는 意識 世界 속에 있는 意識 內容을 存在 現象, 즉 ‘있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이 觸입니다. 그렇다면 觸을 통해서 어떤 存在들이 나타나게 될까요? 그것은 이 世上의 모든 存在입니다. 이 世上에는 수많은 存在가 있습니다. 佛敎에서는 이 모든 存在를 五蘊이라고 합니다.
100. 부처님께서는 唯物論이건, 唯心論이건, 一元論이건, 多元論이건 모두가 옳지 않단 견해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들 모든 理論이 옳지 않다고 하시는 理由는 觸에 있습니다. 우리가 ‘있다’라고 하는 모든 것은 實際로 있는 것이 아니라, 十八界를 因緣으로 해서 생긴 觸에서 발생한 意識을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物質이건 精神이건, 그것은 모두 觸에서 생긴 것입니다.
101. 우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物質, 憾情, 理性, 意志, 意識 등 다섯 가지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存在에 대하여, 우리는 物質은 物質을 構成하고 있는 物質的 要素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憾情, 理性, 意志, 意識은 우리 精神이 가지고 있는 精神 作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世上에는 物質的 存在와 精神的 存在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2. 부처님께서는 五蘊이 우리의 外部에 實在하는 다섯 가지 要素가 아니라, 十八界에서 緣起한 觸을 통해 ‘存在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五蘊은 우리 마음에서 緣起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五蘊이 緣起하는 데 바탕이 되는 것을 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五蘊은 觸入處에서 緣起한 것입니다.
103. 觸入處에서 五蘊이 곧바로 緣起하는 건 아닙니다. 觸入處에서는 五蘊의 質料가 되는 것들이 생깁니다. 五蘊은 觸入處에서 생긴 質料로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104. 우리가 있다고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의 實體에서 派生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 十二入處라고 하는 우리의 虛妄한 마음에서 緣起한 것입니다.
105. 觸은 ‘무엇인가가 있다’라는 느낌입니다. 촉을 통해서 있다고 느끼는 것은 十八界 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十八界 속에는 十二入處와 六識이 있습니다. 十八界라는 界域 속에 있는 이들, 十二入處와 六識은 우리의 認識 行爲를 통해 和合하게 됩니다. 이것을 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觸을 통해 비로소 우리 마음속에 있는 十二入處와 六識이 우리 밖에 存在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106.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아서 있다고 느껴지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色이라고 부릅니다. 色은 이렇게 우리에게 보이고, 들리고, 냄새나고, 맛이 나고, 만져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色은 觸을 통해서 있다고 느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7. 부처님의 緣起說에 의하면 모든 存在는 마음에서 緣起한 것이지 外部의 空間에 實在하는 事物이 아닙니다. 따라서 ‘色’을 ‘物質’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108. 우리는 色이 認識되면, 色을 認識하는 존재도 있다고 느낍니다. 보고 만지는 놈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는 놈은 눈이고, 듣는 놈은 귀이고, 만지는 놈은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고, 듣고, 만지는 놈도 色입니다. 우리는 눈, 귀, 혀, 몸을 우리 肉體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色은 이러한 우리 肉體를 뜻합니다. 따라서 色은 十二入處 가운데 意와 法을 제외한 眼・耳・鼻・舌・身과 色・聲・香・味・觸 열 가지가 觸을 통해서 ‘존재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9. 十二入處의 意와 法은 色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意는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感覺的으로 認識한 內容을 綜合하여 事物을 認識할 수 있는 軌範, 즉 法을 만드는 우리 마음이고, 法은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軌範이기 때문입니다.
110. 六識은 觸을 통해 ‘認識하는 存在’로 느껴집니다. 우리는 認識하는 存在가 있으므로 色을 認識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눈을 통해서 色을 認識하고 있는 건 眼識이고, 마음을 통해서 法을 認識하고 있는 것은 意識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意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十八界 속의 六識입니다.
111. 觸을 통해서 존재로 느껴지고 있는 것은 色과 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存在로 생각하는 건 十八界 속에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존재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色과 識 이외에도 憾情, 理性, 意志가 있습니다.
112. 十八界 속에 없는 憾情, 理性, 意志 같은 걸 存在한다고 느끼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觸을 통해서 새로운 意識이 發生하기 때문입니다. 色과 識은 觸을 통해서 十八界라고 하는 意識 內部에 있는 것들이 밖에 存在하는 것처럼 느껴진 것들인데, 이렇게 色과 識이 存在하는 것으로 느껴지면, 이 느낌을 통해서, 즉 觸을 因緣으로 해서 새로운 意識들이 나타납니다.
113. 우리의 憾情, 理性, 意志를 불교에선 受・想・思라 합니다. 『雜阿含經 306』에선 觸에서 受・想・思가 생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受・想・思는 五蘊의 受・想・行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觸을 통해서 十八界 속의 十二入處와 六識은 五蘊의 色과 識이 되고, 觸을 통해서 새롭게 생긴 受・想・思는 五蘊의 受・想・行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觸을 통해서 五蘊이 發生합니다. 그러나 觸을 통해서 發生한 ‘있다는 느낌들’이 곧 五蘊은 아닙니다. 觸을 통해 發生한 것은 五蘊의 質料가 되는 것들입니다.
114. 受・想・思 즉 우리의 感情, 理性, 意志는 觸에서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受)・이성(想)・의지(思)가 생기면, 이것들이 우리 몸속에 本來부터 存在한다고 생각합니다.
115. 憾情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憾情은 觸에서 생긴 것이지 본래부터 우리 몸속에 存在하는 實體가 아닙니다. 理性, 意志(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16. 우리가 자신의 存在라고 主張하는 것들은 觸에서 생긴 五蘊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五蘊은 觸에 따라서 無常하게 變化하는 虛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五蘊이 存在한다고 믿기 때문에, 그 五蘊을 ‘나’라 하면서, ‘내가 世上에 태어나서 죽는다’라는 虛妄한 생각에 빠져있습니다.
117. 우리가 ‘나와 世界’를 構成한다고 생각하는 五蘊은 觸에서 생긴 無常한 것입니다. 따라서 觸을 없애야만 해탈이 있고, 열반의 성취가 있습니다.
118. 觸을 因緣으로 緣起한 虛妄한 생각들이 모여서 五蘊을 이룬다. 우리가 ‘나와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五蘊은 觸에서 발생한 意識들이 모인 것입니다. 十八界 속에 있는 우리의 意識들은 觸이 發生함으로써 存在로 느껴집니다. 다시 말하면 十八界가 觸을 통해서 色과 識으로 느껴지는데, 六界는 이러한 色과 識이 같은 종류끼리 모여서 界域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119. 六界는 부처님 당시의 인도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존재의 종류들입니다. 六界는 十八界에서 觸이 發生하여 十八界를 存在로 느낌으로써 우리가 갖게 된 存在의 世界입니다. 十八界가 意識의 世界라면, 六界는 存在의 世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觸은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十八界라는 의식의 세계를 六界라는 存在의 世界로 드러내는 우리의 마음 狀態라고 할 수 있습니다. 觸을 통해 意識의 世界가 存在의 世界로 느껴지는데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觸을 緣하여 受・想・思가 함께 생긴다고 하신 것입니다.
120. 五蘊은 觸을 통해 存在로 느껴진 六界와 觸에서 새롭게 發生한 受・想・思를 質料로 하여 具體的인 存在로 構成된 것입니다. 따라서 六界와 觸에서 생긴 受・想・思는 五蘊의 質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이중표 교수 지음.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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