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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5-10).
본문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5)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6)가 대조(對照)되어 있습니다.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행함으로냐?, 믿음으로냐?”를 대조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으려는 유대인들의 열심(熱心)이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님”(2)을, 신명기 30장을 들어서 해설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2:28-29절에서,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모세 5경을 표면(表面)만을 보면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는” 것으로 여길 수가 있으나, 의문(儀文)이라는 수건을 벗기고 보면 이면(裏面)은 복음이라는 것이 사도의 논증입니다.
①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5)합니다.
㉠ 이는 레위기 18:5절의 인용인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는 말을 문자(文字)만을 본다면, 율법에도 사는 길이 있구나 하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점에서 해석의 원리가 등장하는데,
㉮ 구약으로 구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의문(儀文)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 밝히 드러난 신약으로 구약을 해석하는 관점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일군”(고후 3:6)인 사도가 하고 있는 해석의 원리입니다.
㉡ 야고보서에서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을 과거에 행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요, 지금도 계속적으로 행해야만 하고, 앞으로도 일평생동안 완전무결하게 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9999가지를 행하다가도 1가지를 범하게 되면 그는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의롭다함”만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정죄를 당하게 되고 저주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의를 행함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 그러므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한 5절은 앞에 있는,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한 4절과 첨예하게 대조(對照)되는 말씀입니다. 실체인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약시대에 “언약, 예표, 그림자” 등으로 계시하셨던 것들을 성취하심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셨는데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그 길로 달려가면서,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배척했던 것입니다.
②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6상)합니다. 이는 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다름 아닌 사도가 그토록 역설한 이신칭의(以信稱義)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이렇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6하)합니다. 율법을 행하므로 의를 얻으려는 사람은 마치 자기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과 같고,
㉯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7), 즉 음부에 내려가서 “그리스도를 모셔 올리려는” 것과 같은 열심과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6-7절을 통해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열심(熱心)이 얼마나 무모한가를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 “복음”이 어찌하여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다 이루어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이 땅에 내려 보내 주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주신, 전적인 하나님의 행사(行事)를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거부하면서 자신들이 “하늘에 올라가서, 또는 음부에 내려가서” 얻어가지고 오려는 불가능한 열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③ 사도는 신명기 30:11-14절을 염두에 두고 논증하고 있는데 신명기에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어떻게 신명기 30장에서, “그리스도와, 복음”을 볼 수가 있었을까요?
㉠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신 30:14)한, “그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 말씀”에는 교훈적인 면과 신학적(神學的)인 면이 있는 것입니다.
㉮ 교훈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할 “윤리와 법도”가 “그 말씀”인 것입니다.
㉯ 그런데 “그 말씀”을 신학적으로 보면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어려운 것도 아니요” 했는데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기는 커녕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일꾼인 바울, 마음에서 수건이 벗어진 바울은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한 “말씀”이 의문에 쌓여있는 복음(福音)이라는 점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④ 그래서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8)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 “믿음의 말씀”이라 합니다. 이 말은 “하늘에 올라가서” 의를 얻어 가지고 내려오려 한다거나, “음부에 내려가서” 얻어 가지고 올라오려는,
㉮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니요,
㉯ 또한 그토록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
㉰ “믿음의 말씀”은 바로 네 가까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⑤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고 말씀합니다.
㉠ 어떻게 해서 그토록 가까이 있게 된 것입니까?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8하)을 통해서 가까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세 당시도 모세를 통해서 “그 말씀”을 들은 자들에게 만이 가까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아무에게나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전파자를 통해서 들은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그 사람의 “입과, 마음” 가까이까지 와 있다는 것입니다.
⑥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인가? 사도는 구원에 이르는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 첫째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한 “시인”(是認)입니다. 이는 공중(公衆) 앞에서 시인해야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시인 한다”는 말을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으로 보면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엄숙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는 구원에 이르는 방법(方法)이요,
㉡ 둘째로 믿어야 하는 내용(內容)은,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9) 합니다. 이는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4:25)는 점을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⑦ 그리고 10절은 요약인데,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義)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 합니다.
㉠ 마음으로 믿어 의롭다함을 얻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하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지금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의를 얻었고,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한”(9: 30-31) 원인을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9:30), 유대인들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9:32), 즉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다가”(3) 멸망을 자초하였다는 것입니다.
⑧ 이 말씀을 듣는 형제는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구원은 참으로 쉬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 그렇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다는 자체는 쉬운 일 같이 여겨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주목해야할 점은 세 절(8-10) 안에는 “마음”이라는 말이 3번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히브리서 10:22절에서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합니다. “참 마음”으로 믿는 것을, 목숨과 바꿔야하는 경우에서도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쉬인 일이 아닌 것입니다.
⑨ 또 주목해야할 점은 “예수를 주(主)로 시인”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 “주”(主)라는 말은 노예가 사용할 때는 상전을 가리키고, 신하가 말할 때는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예수를 “주”라 고백할 때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예수는 나의 주인(主人)이 되시고, 나는 그 분의 노예”라는 뜻입니다. 즉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는 의미입니다.
㉡ 이런 신앙을 고백(告白)한 자란 필연적으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14:7-8) 하고, 인생의 목적(目的)이 바뀐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9상)의 의미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주재(主宰)권을 주님에게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가르침은,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하)는 뜻을 곡해하여, “믿는다고 말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구원을 얻습니다. 고개만 끄덕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천당이요” 하는 것입니다.
⑩ 또 주목해야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인칭(人稱)입니다. 사도는 “너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라고 말씀합니다.
㉠ 8-9절 두절 안에 “네가” 라는 말이 6번이나 등장합니다. 구원은 “너희들” 하고, 도매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요, “너와, 주님”과의 단독적인 만남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는 8:2절에서도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고, “너”라고 지목하듯 말씀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主)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하자는 뜻에서입니다.
㉠ 당신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시인합니까? 마음 중심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삶의 목적과 당신 자신까지도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도록 그 분께 맡겨드렸습니까? 앞으로 어떤 극한 상황이 닥친다 해도 그 이름을 부끄러워 아니하겠습니까? 혹시라도 당신이 예수 믿는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행복이나 위해 주는 종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나를 주관하여 주십사 하고 나의 운전대를 그 분께 맡겨드린다면, 혹시나 나에게 손해나 불이익이라도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그렇다면 형제는 1-8장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형제를 위하여 무슨 일을 어떻게 행해주셨는가를 상고해야할 것입니다.
㉢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8:32) 하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십시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또한 전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믿고 시인”한 대로 고백적인 삶을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