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는 외환위기 후 구조조정 자체에 반대해서 몰락했습니다. IMF(국제통화기금) 처방을 철저히 따른 경제관료와 철학적, 감정적으로 충돌하며 김우중의 몰락이 초래됐습니다. 대우는 부실기업이 아니라 희생양 입니다.”
15년전 대우그룹 해체 과정에 대한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증언이 담긴 대화록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저자인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사진)는 26일 “대우는 성장신화를 일궜지만 구조조정을 등한시해 망한 기업으로 돼 있으나 실상은 외환위기 후 구조조정 자체에 반대한 게 문제였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신 교수는 “김 전 회장은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한국경제가 오히려 나빠진다고 봤다”면서 “당시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국제금융기관이 한국경제를 관리 체제로 만들기 위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와중에 (김 전 회장은)IMF 처방을 철저히 따른 경제관료와 철학적, 감정적으로 충돌했다” 고 강조했다.
▲ 26일 '김우중과의 대화'의 저자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책을 소개하고 있는 모습이다./유호 기자
그는 당시 구조조정을 주도한 강봉균 전 경제수석,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을 지목하며 “IMF 당시 구조조정으로 인한 국부유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공개질의했다. 또 “당시 부채비율 200%라는 일관적 기준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이 규제가 국민경제에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궁금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이헌재 전 금감위원장을 향해서는 “GM과 대우간 협상이 조건을 바꿔가며 질질 끌더니 1998년 7월 깨졌다고 했는데 무슨 근거로 이야기하셨냐”고 따져 물었다. 이어 “또 대우자동차의 기술자립이 어렵다고 평가했는데, 이것이 공개 입찰 전 비밀 인수의향서가 전달된 정황과 상관이 있느냐”고 물으며 “사업 맞교환이 되더라도 워크아웃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굳이 사업 맞교환을 종용했는가”라고 질의했다.
신 교수는 이 전 위원장이 (김우중 회장에게) 13조원 사재 출연과 담보를 제공하면 대우그룹 8개 계열사 경영을 보장하겠다고 한 약속을 어긴 것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13조원 사재출연하고 담보를 제공하면 8개 계열사 경영권을 보장하고 10조원을 지원하겠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4조원만 지원하고 ‘김우중 회장이 경영권을 내놔야 한다’는 발언을 지속적으로 했다”고 주장했다.
▲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
당시 금융당국이 대우그룹의 자산가치를 30조원 이상 축소해서 발표한 것에 대해서는 “당시 금감위원장이던 이 전 부총리가 실사 발표 후에 ‘무척 공교로운 일이다. 발표가 경솔했다’고 발언했는데 어떻게 금융위원장 모르게 발표가 이뤄질 수 있었냐”고 주장했다.
그는 ‘대우가 시장에서 외면받았다’라는 이헌재 전 금감위원장의 주장에 대해서는 “당시 금융시장은 살얼음판 걷는듯 폭이 얇아져 있는 상태였다”면서 “금융위기를 거쳐 어느 기업이 언제 망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확산된 상황에서 금융정책 당국자가 이 회사 나쁘다고 하면 금융권에서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대우그룹 해체는)이런 자기예언적인 실현과 비슷한 일이 발생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당시)금융관료들이 볼 때 대우 부실 정도가 심하다고 생각하니 무역금융 허용해주면 부실 더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면서 “수출금융 풀어줄 수 있었는데 여러가지로 미운털이 박혀 있으니 안 해 준 것 같다”고 주장했다. 당시 은행들의 외화자금 사정이 안 좋아 지원이 불가능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1998년 상반기에는 은행들이 보유한 외화자금이 별로 없어 그럴 수도 있지만, 1998년 하반기부터 무역흑자 크게 나고 은행에 돈이 쌓였는데도 정부가 수출금융을 계속 차단하니 단기차입금이 늘었다”고 반박했다
▲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과 대우차 레간자
시장이 대우를 외면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1998년 7월 CP(기업어음) 등 단기자금 규제조치가 대우를 겨냥한 게 아닌가”라며 “이때 대우의 단기자금을 회수하라고 해 금융기관이 그렇게 조치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당시 관료들이 ‘(대우가)외상매출을 부풀리는 밀어내기식 수출을 한다’는 얘기를 자꾸 흘리니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면서 “대우의 단기차입금이 증가한 이유가 금융시스템이 막혔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판단했으면 다른 방식의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최근 정치권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김우중 추징법 논의에 대해 “김우중 전 회장을 세 번 죽이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1999년 대우그룹 해체 후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법원이 선고한 추징금 17조9253억원에 대해서는 “원천무효”라고 주장했다. 추징금은 대부분 미납 상황이며 연대 책임이 있는 대우그룹 관계자 7명에 대한 것까지 합치면 미납액은 23조원을 넘는다.
신 교수는 “‘김우중 법’을 만들며 한국이 낳은 세계적 기업가를 3번 죽였다고 생각한다”면서 “대우의 몰락이 첫 번째이고, 재판을 받으며 징역형과 23조원을 추징받은 게 두 번째다. 이는 희생자를 범죄자로 몰아가는 부관참시였다”고 주장했다. 또 “사실 책이 작년 8월에 나올 예정이었으나 일명 ‘김우중법’으로 불리는 추징법안 때문에 (출간이)1년 늦어졌다”며 “책에도 추징금이 ‘완전무효’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밝혔다.
▲ 외신에 보도된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
신 교수는 이어 “한국 사회에선 이상하게 IMF 금융위기 이후 외국기업에 대한 환상을 많이 갖고 있는데 스티브 잡스도 위대하지만 한국 젊은이에겐 김우중, 정주영처럼 한국에 뿌리를 두고 세계에 나가 성공한 기업인에게 배울 점이 더 많다”고 말했다. 이어 “잡스와 김우중 회장은 상상력이 뛰어나고, 완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함에도 국내에서는 잡스에겐 열광하고, 김우중에겐 부실기업인으로 낙인을 찍는 것은 유감스럽다”고 덧붙였다.
신 교수는 이어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의 요체는 작은 나라인 한국이 성장하려면 젊은이들이 적극적으로 해외에 진출해 돈을 벌어오자는 것이었다”며 “김 전 회장이 78세로 고령이지만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는 '대우인'을 만드는 선생으로서, 국가 원로로서 재기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