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나머지 프랑스 길
a, 여기도 천사는 있어...
그러다 보니 5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서둘러야만 했다. 조금 늦었다고 다시 스페인 쪽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니, 이제 거기서는 처음 가 보는 프랑스로 넘어가야 하니까.
그 상황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둘러 지난 10년 동안 세 번이나 그저 기웃거리기만 했던, 솜뽀르뜨(Somport) 국경 검문소를 지나게 되었는데... 인야는 나름 감격스러웠다. 10년 전에는 국경 경비원들이 무장한 상태로 있었는데, 이제는 빈 건물만 텅!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위압감만 주는 것이었다.
국경을 통과하자마자 까미노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하나는 아스팔트, 또 하나는 숲길.
'아이, 이제... 모험은 그만!'
인야는 낮에 질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까지 가로젓고 있었다.
그런데 아스팔트를 타고 20여 m나 걸어왔을까? 길의 각도가 바뀌면서, 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과히 장관이었다.
피레네 산맥의 또 다른 아름다운 산풍경이 좍 펼쳐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구나!'
그동안 호기심만 가졌을 뿐, 솜뽀르뜨에서 스페인 쪽으로만 걸어 내려갔던 기억이 새록새록했다.
그리 멀리 온 것도 아닌데, 풍경이 이렇게 다르다니......
아직은 햇살이 따갑도록 좋은 날이었는데, 여긴 아직도 하절기 시간이라... 6시로 접어들고 있는데도, 여전히 해가 밝았다.
아름다운 산풍경에 감탄을 하며 걷는데, 인야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부럽기도 했다.
차량 통행도 그리 많지 않아, 인야는 사진을 찍어가며... 여유있게 아스팔트 내리막을 걸어갔다.
우선 확 눈에 띄는 건, 길가의 제방이었다. 스페인 쪽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는데, 여기 프랑스는 조용하고 드러나지 않게 사람과 차량의 안전을 위해 촘촘한 곳까지 신경을 쓴 모양새라... 확실히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국경을 넘었다고, 풍경도 달라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피레네 남쪽은 아프리카라고 했던 건가?' 할 만큼, 산악지역의 식물도 달라 보였다. 물론 고산지대의 북쪽이라 그럴 수도 있을 것이었다. 나무들이 크고 활엽수 위주였고. 피레네의 덩치 큰 산맥이라 산세가 웅장할 뿐만 아니라 깊고 장대해 보였다.
그렇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눈이 많지 않았는데, 그것이 또 발단이었을까?
인야는 여기서도 또 만용을 부리는데, 아스팔트로만 걷다 보니... 사실 걷는 맛이 덜 났던 것이다.
호기심까지 작동했던 인야는, 다시 숲길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랬더니 시작부터, 최근 며칠 사이에 사람들이 지난 흔적이 없어... 또 그만큼 아름다운 풍경 변화에 감탄을 연발하게 되었고,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기우니 역광이라... 사진 찍기도 불편해지는 것이었다.
'아, 여기도 까미노로 들어오니... 모험이로구나!'
그렇다고 다시 아스팔트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비록 어떤 곳은 실같은 절벽도 있었지만, 길은 평온하게 다듬어진 건 물론 까미노 표시도 잘 돼 있어서...
'이 나라는 세심한 곳까지 꽤나 신경을 써놓았구나!' 하면서는, 스스로도...
'내가 프랑스 찬미자가 됐나?' 하고 머쓱하게 웃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도 점점 해는 기울어, 이제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바빠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러면서도,
'이제 아스팔트로 나가, 걷다가 힘들면... 차를 타지, 뭐. 만약 차가 안 서주면, 버스를 타고. 또, 버스가 없으면... 아무 데나(?) 숙박시설로 찾아가면 될 거야......' 하는, 인야 자신도 왜 그리 태평인지... 의아하기까지 했다.
그건 어쩌면, 아니... 분명히, 까미노를 마감한 것에 따른(대단한 일이긴 했어.) 여유일 것이었다.
그렇게 프랑스 쪽 피레네 산맥을 내려가는데, 스페인 쪽 보다 훨씬 산세가 깊고도 볼거리가 풍성했다.
그렇지만 날이 저물어 가니 이제 아스팔트로 나갈 생각을 하면서도 인야는,
'아, 오늘이 무슨 날인지... 나에겐 별의 별 일이 다 생기는구나. 그래, 오늘 10월 27일을 내 '축제의 날'로 정하자. 까미노 10년을 마감한 날. 피레네산맥에서 죽을 뻔한, 그렇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날. 뭔가 새롭게 태어난 것 같은 신선함으로 프랑스 국경을 넘어 까미노를 혼자 걸은 날......'
인야는 오늘 하루가, 다른 날의 며칠은 보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새벽부터 다양하면서도 중요한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신비한 날로도 여겨졌던 것이다.
'그래, 이런 날은... 평생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날이야. 그냥 넘기지 말고, 기념하기로 하자. 매년 10월 27일을. 그러니까 오늘부터 내 남은 생 내내, 내 또 하나의 축제 일인 '11월의 축제'와 함께, '이 인야의 축제의 날'로 삼고 기념하기로 하자.'
'그건 그렇고, 이제 남은 건... 오늘 밤은, 어디에 가서 자느냔데......'
사람들이 얘기하던 8km 피레네 숲길은 끝난 것 같았다.
물론 그것도 만만치는 않은 길이었는데, 슬슬 저녁 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아스팔트길을 따라 인야는 터벅터벅 걸어내려갔다.
'아, 오늘만 해도... 하까(Jaca)에서 솜뽀르뜨(Somport)까지 31km. 산을 오르다 길을 잃은 것까지 포함하면, 최소한 몇 Km는 늘어날 거고... 프랑스 숲길 8km, 여기서 '보흐세(Borce)'까지 또 얼마나 걸어야 한다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우스웠다. 다리도 아프고 한심해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걸어가는 나. 아, 나는 어느새 걷는 기계가 돼버린 것일까?'
'이제, 어딘지는 몰라도 그 마을까지 간 다음... 버스가 있는지를 물어(하기야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 아까 프랑스 여자가 알려준 보흐세(Borce) 까진 버스를 타고 가서 자야겠지?'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그런데도 발걸음은 점점 무게가 더해지고 있었고... 도로를 달리는 차량들엔 이미 라이트가 켜진 상태였다.
이제 인야는 지팡이마저 아스팔트 바닥에 질질 끌고 있었는데, 저 아래에... 조금 큰 마을이 하나 보였다.
'저기에 가면, 최소한 뭔가가 있겠지......' 하고 나지막히 한숨을 쉬고 있는데, 웬 차 한 대가... 도로 건너편에 멈칫거리는가 싶더니, 섰다.
그런데 창이 열리면서, 웃는 얼굴로 인야에게 뭐라고 하는 것이었다.
'왜 그러지?' 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데,
그가 손으로 인야를 향해, 건너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
고개를 갸웃하면서, 인야는 아스팔트를 건넜다.
"어디로 가세요? 태워다 드릴까요?" 운전자가 영어로 물었다.
갑자기 영어로 대답하려니, 말이 안 나왔던 인야는...
"알베르게(Albergue)!" 하고 말았다. 유럽인들은 다 알아듣는 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망설임도 없이 바로 차에서 내리더니,
"내가 태워다 줄 게요. 당신 배낭 이리 주세요..." 하면서,
축 쳐져있던 인야의 배낭을 자신이 벗겨내는 것이었다.
사실, 인야는 말할 힘도 별로 없었다.
황송한 표정으로, 우선 고맙다는(Thank you!) 말을 두어 차례 반복하게 되었고,
그가 미니 트럭 뒷문을 여는데 보니, 꽃이 가득 실려 있었다.
어딘가 꽃을 배달(납품)하러 가는 중인가 보았다.
그렇게 인야는 한 천사를 만났다.
그는 프랑스인치고는 영어를 곧잘 했다.
자신은 거기서 가까운 산촌에 사는데, 이 길에는 이따금 인야 같은 국경을 넘어오는 뻬레그리노(순례자)가 있어서... 특히 그날처럼 어두워지는데, 지금의 인야처럼 지쳐서 걷는 순례자를 보면... 이따금, 뭔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는 것이었고(인야가 운이 좋았던 것이다.),
차 안에서 애기를 나누다 보니, 인야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아, 그래요?" 하고 반갑게 웃으며, "사실 나는 '외인부대'였거든요? 거기에 한국인 친구가 하나(Kim) 있었는데, 나하고도 아주 친하게 지냈답니다......" 하면서 친근미를 드러내는데,
인야는 속으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외인부대'라 함은 남성성의 대표적인 거친 대상이 분명한데, 꽃을 실은 트럭도 그렇고... 그의 부드러운 어투와 표정 등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서도.... 뭔가 묘한 매력을 풍기는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인야가 점심 무렵에 만났던 프랑스 여자가 준 쪽지를 보여주자,
"내가 가는 곳은 아니지만, 당신을 보흐세까지 데려다 드릴 테니... 이제부터는, 마음 다 놓고... 가기만 하면 됩니다." 하니,
인야는 정말, 천사를 만난 기분이었다. 천사도 이런 천사가 없을 것 같았다.
'아, 오늘은 무슨 날인지... 도대체 오늘은, 왜 이러는지......'
인야에게는 실로 엄청난 날(하루)로 이어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심신까지 다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아예 그에게 자신의 운명까지를 맡긴 사람처럼, 늘어져서... 그의 자잘하고도 연속된 질문에도, 몽롱한 상태로 답을 해주긴 했는데...
어둠을 뚫고, 마침내 보흐세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도 인야 대신 자신이 알아서(언어 소통에 문제가 있을 걸 알아채고는) 거기 절차까지를 다 해주었고, 인야의 배낭을 침실까지 옮겨주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 알베르게엔 인야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축 늘어진 상태로 그런 모습을 지켜보았던 인야는, 그가 너무 고마워...
"딱 한 가지만 부탁합시다." 하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고마워서 그러니, 우리, 헤어지기 전에... 사진이나 한 방 같이 찍자구요." 하자(뭔가, 증거를 남겨두고 싶었다. 평생 간직할......),
그도 환한 얼굴로 응해줬다.
그 상태에서 인야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게 미안하고 아쉽긴 했지만, 굳은 악수로만 그를 보내면서도... 인야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지워지질 않았다.
(인야는 그에게도 자신의 그림 엽서 하나를 주면서 이메일 주소도 교환했으며, 그 뒤로도 몇 년간을(특히 크리스마스 등)... 엽서와 카드를 주고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