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당의 성격 牧溪 부락에는 富興堂이라는 神堂 하나가 있어서 지금도 매년 음력 1월 9일이 되면 洞祭를 올린다. 이 마을에서 서울 방면으로 200m쯤 되는 도로에서 산록으로 100m 정도 올라가면 木造瓦家 1동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부흥당이다.
堂內의 중앙 정면에는 서낭각시圖를 봉안하고, 우측에 山神圖, 좌측에 虎神圖를 배치하였으며 당 밖의 좌측과 우측의 작은 암벽에 조그만 제단을 만들어 치성을 드릴 수 있게 해 놓았다. 부흥당에는 서낭각시와 산신 그리고 호신을 같이 모시고 있지만 이 堂은 城隍堂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祝文의 내용에 "伏以城隍之神"이란 구절이 있고, 서낭각시의 탱화를 정면 중앙에 봉안한 것도 부흥당의 主神이 성황신임을 확실히 해주고 있다.
둘째는 신당이 동리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점이 성황신임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 그 전에는 바로 길에서 보이는 데 있었지만(박수대, 남, 80세) - 옛날에는 길이 서낭 밑에 있어 가지구(김현해, 남, 37세) 중원지방에서의 산제당은 대개가 山上이나 높은 산의 중턱에 設壇하는 데 비해 서낭당은 동리의 입구나 고개마루에 만들어 놓는다. 부흥당의 원래 위치도 마을 초입의 도로 옆이었는데 도로 확포장 공사를 하면서 100여 미터 정도 되는 산 위로 이전한 것으로 보아도 성황당이 확실한 것 같다.
셋째는 致祭 시각이 저녁 해가 지면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 시간은 인저 7시 반이나 8시 되면 시작해서 11시나 11시 반이나 돼야 끝나죠(변근수, 남, 80세) - 해가 지고 나서 7시경 어둑어둑 할 때 올라가지요(김현해, 남, 37세) 중원지방에서는 서낭제는 초저녁에 지내는데 비해 산신제는 자시인 밤 12시나 되어서 올리는 것이 통례다. 그런데 부흥당 당고사는 초저녁에 봉행되므로 역시 성황당의 성격을 띤 것이라 하겠다.
넷째는 무당이 부정풀이를 하고, 농악대 반주를 동반하여 주민 전체가 참여하고 治祭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부흥당 당고사는 성황제가 분명한 것 같다. - 무당 부르구 말구 정월 초하루날부터 아흐렛날까지 기도를 드리우. 무당이 사방으루 광대 불러 遊家를 돈다니까유. 삼현육각잡히구(박수대) - 예전에 우리 어른들이 할 적에는 참 굉장했어요. 삼현육각 잡히구 소머리잡아다 놓구 내일이 당고사면 오늘부터 부정 풀어내구. 참 무당들이 춤추고(변근수) - 애들이 전부 나와유 쪼그만 애들이 전부 기다리구 있어유(김현정 남77세) 중원지방의 성황제는 동민 대부분이 참석하는 가운데 농악을 곁들여 마을의 축제와 같이 집단적으로 고사를 드리는 데 비하여 산신제는 제관 이하 2,3명이 높은 산에 가설한 神堂에 가서 잡인의 출입을 금하고 엄숙하게 치룬다.
그런데 부흥당 당고사는 무당과 광대를 불러 부정풀이를 하고 춤도 추면서 오락성이 짙게 진행하는 것으로 보아 서낭제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는 제관을 특별히 선정하지 않고 매년 구장이 洞祭를 주관하는 점이다. - 예전에 구장이 전수 했어요(변근수) - 떡은 떡방앗간에서 다 하는 편이지유(김현해) 산신제의 경우 생기복덕을 가려 不淨이 없는 사람을 엄격히 가려 제관을 선정하고 떡도 都家에서 정성껏 만드는 데 비해 부흥당 당고사는 구장네 집에서 모든 음식을 조리한다는 점이 성황제의 성격을 가진 洞告祀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또한 산신제는 생기복덕에 의해 엄선한 사람이 제관이 되는 데 비해 목계 부흥당의 당고사는 구장이 초헌관이 되는게 관습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부흥당 당고사는 성황제가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부녀자들이 개별적으로 지내는 개인제는 산신이 主神으로 신앙되고 있는 듯 하다. - 떡은 당 안에는 신령님 앞에, 서낭각시, 이쪽에 호신 앞에 하나 놓지. 밖에는 국사당(國師堂?) 앞에 하나 놓구 마부(馬夫?) 앞에 하나 놓구, 원 떡시루 제일 큰 시루는 국사당 앞에 놓지(신복순, 여, 69세) 부흥당은 원래 마을 공동제를 지내는 곳이지만 옛날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와서 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과거 목계에 津이 설치되어 이곳의 상경기가 활발할 때에는 船主나 이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서울 단양 등지로 화물을 배에 싣고 떠나기 전에 안전운행을 위하여 부흥당에 와서 수시로 치성을 드렸다. 개인이 어떤 소원성취를 위해 치성을 드리는 경우는 서낭각시의 우측에 모신 山神을 國師로 명칭을 바꾸고 서낭각시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서낭각시는 산신(국사)의 부인 정도로 인식하고 왼편에 게시된 虎神은 마부로 격하시켜 國師를 받들어 모시는 하위신으로 여긴 듯 하다.
첫댓글 길옆에 조금 높더군요.,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