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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시, 위대한 인류의 어머니
1974년 11월 24일 에티오피아의 <하다르>에서 미국의 고 인류학자 도널스 조핸슨, 루시 발견.
지금으로부터 약 320만년전으로 추정
문명-일반적으로 ‘인간의 지혜로 인하여 사회가 정신적, 물질적으로 진보된 상태’를 말함.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인류의 역사의 기간은 7000년 정도
그 이전 14만년의 역사가 아프리카에서 진행되었음.
2. 잊혀졌지만 잊혀질 수 없는 아프리카
아프리카의 역사가 제대로 전해지지않은 건 아프리카 대륙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통용된 문자가 없었기때문.
문자가 없다는 건 그들의 문명을 후대에 남기는데 불리하게 작용하지만 그렇다고 문명 자체가 보잘것 없었던 건 아님
-잉카문명, 마야문명
아프리카역사의 시대별 구분
● 기원전 1만년 무렵-농업 시작, 기원전 4000년경 금속제조 이루어짐 |초기 문명은 이집트에서 일어남
그후 마그렙(서쪽), 아프리카의 뿔 지역으로 퍼져나감
~ BC8000년 경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밀과 보리 재배, 양과 같은 가축 사육,
사하라 사바나 지역과 사헬지역에서 수수와 기장 기름
~ BC5000년경
서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야자나무 기르기 시작
BC4000년경- 에티오피아 고원 지대에서 당나귀 키우기 시작
납, 구리, 청동 등이 만들어짐,
BC1000년경- 철의 주조기술이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이집트와 수단지역에 도입
이와 별도로 BC1500년경차드호수 부근에서 철의 주조기술이 사용된 흔적 발견
●중세시대 - 이슬람이 사하라 이남의 사헬지역 대부분까지 전파
(아랍 어로 ‘변두리’란 뜻을 지닌, 사하라 남부의 사막과 초원의 경계가 되는 지역)
※사헬(Sahel)지대- 세네갈 북부 ·모리타니 남부에서 말리 중부 ·니제르 남부 ·차드 중남부까지, 서쪽에서 동쪽으로 띠 모양으로 이어진 곳, 건조한 사하라 사막에서 열대아프리카로 넘어가는 점이지대로서, 식생(植生)은 스텝 또는 사바나가 나타난다. 1년의 대부분은 건계이고, 6∼8월의 짧은 우계에 200mm 안팎의 비가 내린다. 사헬지대의 유목민들은 일정지역에 장기간 머무르지 않고 이동을 하였으므로 스텝초원이 자연적으로 복구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인구증가와 이에 따른 가축의 과다한 방목으로 초원이 황폐화 되어 사막화가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자연적인 가뭄이 겹쳐 사헬지방은 생물이 살 수 없는 불모의 지대로 변하게 되었다.
●15세기 - 유럽과 아랍에 의해 탐험과 노예거래가 본격적으로 시작
● 19세기 말~20세기 초
아프리카 쟁탈전 시작
세계 제 1, 2차 대전 기간에는 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노예가 아니라 군인으로 전장에 끌려가 목숨을 잃음
1960년 전후로 대부분 독립- 오늘날까지 독재와 내전으로 점철된 고달픈 역사를 이어오고 있음
사하라 지역은 BC5000년경부터 사막화시작
나일강 지역에 사람들이 정착하게 되는 유인, 수많은 부족들이 나일강 유역에서 명멸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 강력한 세력 등장-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
BC3100년경 상이집트의 나메르가 이집트 통일- 이집트 제 1왕조의 파라오
흥망성쇠를 거듭하다가 BC332년 알렉산더에게 패망,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305~BC30년)
튀니지의 카르타쥐지역-
BC814년 티레의 공주 디도가 식민지 건설. BC600년경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한 강력한 해상세력으로 떠오름
' shining city'라는 별칭이 붙었으며 산하 약 300개의 도시를 거느림-아프리카의 어원이 됨
떠오르는 강자 로마와의 한판 전쟁 불가피- 포에니 전쟁
354년 북아프리카 타카스테(현 알제리의 수크아라스크, 당시 로마의 속지)- 성 아우그스 티누스 탄생
,<신국론><고백록><삼위일체론>
악숨제국
기원전 550년경에 셈족계열의 민족이 서아시아의 농법과 철의 기술을 가지고 홍해를 건너, 오늘날 에티오피아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기원전 120년경에 악숨을 도읍으로 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 기원후 1세기경에는 에티오피아 고원 이외에 북동부의 다나키리 사막에서 동부의 소말리아, 홍해넘어 아라비아 반도에까지 그 세력을 확대하였다.
악숨왕국은 상아,노예,흑요석등을 수출하고, 이집트로부터 의복, 유리 제품등을, 인도에서는 철과 면포를 수입하면서 교류와 무역이 왕성했다. 기원후 3세기경에는 화폐를 만들었는데, 이 화폐에는 왕의 초상과 그리스 어가 조각되어 있다. 이즈음 독자적인 문자도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4세기경에는 크리스트교가 전해져 악숨 왕국의 국교가 되었다.
악숨왕국은 기원후 6세기경에 쇠퇴하여 멸망하였다
BC2000년경부터 서아프리카에도 인구집중시작
티치트, 왈라카등의 도시국가들이 지금의 모리타니아 지역에서 번성 - 사하라 사막을 통한 교역을 주로 담당
젠느(지금의 말리)지역에서는 기원전 3세기경 상업마을 번창
BC2000년경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큰 부족군으로 자리잡은 반투족의 이동 시작
카메룬에서 빅토리아 호수 방향으로 자리를 옮겼고 BC1000년경부터 빅토리아 호수 남동쪽 방향으로 이동
그리고 남아공까지 진출- 반투족의 자취가 전 아프리카로 퍼져나감
오늘날 반투족은 그 안에서도 300~600개의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다.
대표적인 반투족 남아공의 줄루족, 탄자니아의 스와힐리족, 케냐의 키쿠유족
4세기경 지금의 말리지역에 가나제국 성립
상업국가로 발전, 사하라 사막 너머 북아프리카와 교역하면서 성장
주요수출품- 세네갈 강 주변의 금과 차드 호수 주변의 노예, 상아, 타조 털, 콜라 넛
주요 수입품- 소금, 금속제 무기류, 대추야자
금무역의 중심지가 니제르 강 동쪽으로 바뀌면서 급격히 쇠약, 말리에 의해 13세기 멸망
3. 아프리카은 신대륙이 아니었다
15C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진출- 유럽인의 아프리카 진출 시작
엔히크 왕자-전략적 요충지인 세우타를 점령한뒤 본격적으로 아프리카에서 식민지확보에 열을 올림
공포의 바다 보쟈도르 곶의 돌파에 성공한 후
카보베르데, 기니, 시에라리온 해안까지 접근하는데 성공
프레스터 존, 혹은 사제왕 요한이라는 전설을 믿고 사제왕 요한과 연대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낼 계획을 세움,
결국 아프리카 진출을 서둘렀고, 아프리카 대륙을 식민화하기 시작
포르투갈에 이어 15C후반 스페인,네델란드, 영국, 프랑스가 서부 아프리카로 진출
15,16세기는 교역이 가장 큰 이유, 노예, 설탕, 후추, 상아, 황금
가나의 경우 16세기 황금 생산량의 1/10을 차지. 황금해안
711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무어인이 이베리아 반도 침입- 스페인과 포르투갈지역 거의 800년간 지배
1250년 포르쿠갈 독립-수도 리스본으로 옮김
스페인 1492년 독립
포르투갈은 군사력 강화, 농업, 상업, 조선업의 발전추구, 1386년 영국과 윈저 저약 체결. 1793년 나폴레옹침입때 영국이 도와줌
유럽의 서쪽 끝에 있는 포르투갈은 당시의 지중해무역에 소외되어 있어서 인도로가기위한 해로개척이 절실
스페인은 미독립,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중, 후추에 집중할만한 여력이 없었슴.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 진출하기 좋은 입지적인 조건
1415년 세우타 점령-대서양의 무인도와 아프리카 연안 식민지화하기 시작
1487년 바르톨로뮤디아스의 희방봉 발견-해상장악력 키움-1492년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해상 장악력에 도전
교황 알렉산더 6세 중재- 인터 캐테라 칙령-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토분쟁지속 포르쿠갈- 우루과이, 파라과이 지역에 진출
18세기 후반 스, 포 전쟁 포르투갈 남미대륙 진출 허용받고 스페인에게 적도 기니 양보
포르투갈은 1500년에 브라질 발견, 1510년에 인도 남서쪽 고아 합병. 그러나 대륙발견을 위한 재정지출 압박으로 쇠퇴기를 맞이하다가 1580년~1640년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됨. 이기간동안 포르투갈은 기니, 앙골라, 모잠비크등에 정착
노예무역의 원조는 1444년 포르투갈 항해사들이 까보베르데에 도착하면서 시작. 흑인 노예를 잡아서 이베리아반도에 데려가면서 시작
4. 후추에 감춰진 슬픈 진실
후추 인도에서 유래, 6세기경 로마로 전파
사라졌다가 십자군 전쟁을 전후해 (1096~1270) 유럽에 다시 도입
15,16세기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진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유럽으로 복귀,
영,프의 좋은 먹이감. 해적질로 양이 차지않아, 영.프는 직접 금, 상아, 노예등을 찾아 아프리카로 떠남
영국의 해적 프렌시스 드레이크. 엘리자베스의 비호를 받음
자국 상선의 보호와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의 물품 입수를 위해 항구및 성채가 필요
프랑스 1659년 생루이(세네갈)에 무역항을 건설하여 아프리카 진출의 거점으로 삼음
영국 1795년 네델란드로부터 케이프타운을 빼앗아 겨점으로 삼음
16,7세기 신대륙에 진출한 유럽각국들은 광대하고 비옥한 토지에 노동집약적인 플랜테이션 확장. 설탕, 담배, 면화등을 생산하기 시작, 수많은 노동력 필요- 노예거래 본격화
5 선교사와 탐험가, 아프리카 쟁탈전의 길을 열다
리빙스턴 (영국)
선교 목적으로 남아공에 보내졌다가 내륙에서 아프리카인에 의한 노예사냥 목격
- 노예무역은 내륙으로 유통되는 길이 만들어질 때라야 비로소 철폐된다고 믿음
기독교와 유럽상품이 내륙으로 난 길을 통해 전파됨으로써 아프리카인의 물질적 필요와 영혼이 혜택받을 수 있다고 봄
잠베지에서 출발~6개월 후 루안다에 도착
다시 길을 돌려 다른 길로 잠베지를 향함. 루안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장에 의해 리빙스턴의 탐험이 본국에 알려지고 유명인사가 됨. 가는 길에 폭포 발견 빅토리아 폭포로 명명
그리고 당초 출발지가 아닌 모잠비크에 도착하게됨
1856년 영국으로 돌아감.<선교여행>출간
1858년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와 나일강 원류찾기등 15년간 탐험
나일강 원류찾기
청나일의 원류-18세기 영국의 참험가 제임스 브루스에 의해 발견. 에티오피아에 있는 타나호수에서 기원
백나일??
1856년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지원을 받은 리차드 버튼, 존 스피크에 맡겨짐 -
원 목적-내해지역의 종족 연구와 그 지역에 수풀할 품목을 알아내는 것.
잔지바르에서 1857년 동부해안을 거쳐 내륙으로 들어감. 1858년 탕가니카 호수 도착- 빅토리아 호수 발견, 원류라고 믿음
영국으로 돌아옴. 이들의 탐험기가 후의 탐험가들에게 도움
1860년 영국 왕립지리학회- 백나일의 원류에 대한 논쟁을 벌이다가 스피크를 다시 아프리카로 보냄
1872년 스탠리와 리빙스톤이 탐험하면서 빅토리아호수가 원류임을 알게됨
스탠리- 뉴욕헤럴드의 기자 . 4년째 행불인 리빙스턴을 찾아 아프리카로 들어옴.
1871년 탕가니카 호수 끝에 있는 마을에서 콩고강 유역에서 나일강의 원류를 찾아 헤메다 병에 걸린 리빙스턴을 만나게됨 .
1873년 리빙스턴 탐험도중 사망
스탠리의 2차 아프리카 탐험
잔지바르→중앙아프리카→ 콩고강→콩고의 보마
3220킬로미터의 탐험으로 식민지화를 위한 지도 완성 .
스탠리는 영국에 자신의 탐험결과물을 팔려고 했으나 관심을 기울이지않아 브뤼셀의 레오폴드 2세와 손을 잡게됨
- 보마와 스탠리 풀을 연결하는 길을 개척함. 콩고강의 빠른 물살과 폭포등의 방해로 기대만큼 속도를 내지못함
프랑스의 피에르 브라자가 스탠리가 발견한 길을 가로챔
브라자 1875년~1876 콩고 북쪽 가봉에 있는 오궤에 강 탐사
스탠리보다 더 빨리 콩고에 갈 수 있는 길을 개척했기에 콩고가 프랑스의 소유가 되어야한다고 주장
브라자가 차지한 ㅋ콩고강 북쪽은 프랑스콩고가 되고
스탠리가 차지한 콩고강 남쪽은 벨기에 콩고
스탠리 레오폴드 2세의 명에 따라콩고강을 따라 교역소만듬
- 유럽국가가 건설한 최초의 아프리카 내륙 교역거점. 유럽의 다른 나라들 자극. 결국 아프리카 쟁탈전으로 발전
첫댓글 완전 폴리님 전공인데
이걸 못들었다니~~
정말 잼있을텐데!!
아프리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좋은 기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