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1925년에 지어진 시로, 총 4연, 각 연 3행의 짧은 서정시로 나를 버리고 떠나가는 님의 가시는 길에 진달래꽃을 담뿍 뿌리겠다는 것이 그 간추린 내용이다. 그러나 지금 떠나가는 님은 다시 돌아올 기약조차 없다. 오직 자신의 마음속으로만 그런 기대감을 갖고 보내고 있을 뿐이다. 이 시는 님을 억지로 붙잡아 두지 못하고 보내는 한 여인의 심정을 이만큼 완벽하게 시적으로 형상화한 데 있다. 이런 이별의 보편적 정서는 <가시리>나 <서경별곡 西京別曲> 등과 같은 고시가나 민요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의 해석에서 ‘나보기가 역겨워/가실때에는’의 반복구에 나타난 역설적(逆說的) 의미의 추구에만 집중되어 왔을 뿐이며, ‘영변(寧邊)에 약산(藥山)/진달래꽃’에 대해서는 유념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작자가 굳이 ‘영변에 약산’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의 해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영변의 약산에 피어있는 진달래꽃에 초점이 맞춰져야만 한다. 이 시의 제작 과정에서 이런 시적 배경을 설정한데 작자의 의도가 없었다면, 굳이 그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영변의 약산동대에 핀 진달래꽃을 이끌어 왔을 까닭이 없다. 영변의 약산동대는 서관(西關)의 명승지로서, 그곳을 둘러싼 많은 전설과 민요가 전해지고 있다. 봄이 되면 온통 천자만홍(千紫萬紅)의 진달래가 꽃밭을 이루고 있는 약산, 그 서쪽으로 넓은 벌판이 펼쳐지고 구룡강(九龍江) 푸른 물이 산록(山麓)을 흐르고 있다. 옛날 어떤 수령(守領)의 외딸이 약산에 찾아왔다가 그 강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그 죽은 넋이 진달래가 되어 약산을 뒤덮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소월도 약산동대에 얽힌 이런 전설과 민요를 알고 있었고, 특히 수령의 죽은 외딸의 넋이 진달래꽃이 되었다는 전설을 의식하고 이 시를 썼을 것이라는 추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마디로 이 시에서 소월이 떠나는 님을 붙잡지 않고 꽃을 뿌리며 보내겠다고 함으로써 보내는 사람에게도 위로가 될 수도 있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는 결코 울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한 슬픔과 원망이 사무쳐 있다는 것으로, 꽃을 뿌리며 ‘님’을 보냈듯이, 곧바로 되돌아올 것을 바라는 작자의 간절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김소월은 사립인 남산학교(南山學校)를 거쳐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에 다니던 중 3·1운동 직후 한때 폐교되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하였다. 1923년일본 도쿄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9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 일을 도우며 고향에 있었으나 광산업의 실패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개설, 경영하였으나 실패한 뒤 심한 염세증에 빠졌다. 1930년대에 들어서 작품활동은 저조해졌고 그 위에 생활고가 겹쳐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에 고향 곽산에 돌아가 아편을 먹고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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