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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진강 지나 장강(양자강)을 건너서며
2월17일 소주에 묵을 때 낮에는 손님들이 찾아왔었다. 그날 밤 3시에 한산사를 보러 갔으니 그 날 낮에 안찰어사 두 대인으로 성이 각각 왕(王)·송(宋)이라는 사람이 역으로 와 예빈관(禮賓館)에서 최부를 만난 것이다. 그들이 묻는 말에 최부는 일일이 답을 했다.
<“5품관입니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모두 경학을 궁리(窮理)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풍월을 조롱하는 것을 천시하기 때문에 나 역시 시사(詩詞)는 배우지 않았습니다.”>
<“기자의 후손인 기준은 위만에게 쫓겨나 마한으로 도망하여 도읍 했으나, 후에 백제에게 멸망당했으며, 지금은 후사가 없소. 기자묘(箕子廟)는 평양에 있는데 국가에서 해마다 봄·가을에 향을 내려 짐승과 예물로써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앞서 잠시 말했지만 최부는 동국통감에 참여한 당대의 지성인이다. 특히 고조선 쪽은 아주 능통했다. 그러니 질문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누구나 그렇지만 해외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 자신도 모르게 잠재한 관념의 자아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스멀스멀 일어나 육신의 자아로 변신하여 발 벗고 나서곤 한다. 피는 못 속인다고 스포츠 원정 경기를 보면 우리 동포들의 열렬한 동포애를 바로 느낀다.
하물며 자부심 강한 최부의 경우야 말할 필요가 없다. 최부는 중국 땅에서 중국인과 생활하는 과정에서 조선인의 자아로 변모하는 정신의 궤적을 태연하게 그리고 있다. 최부는 상대에게 지지 않기 위해 지난 번 자신은 두 번이나 급제했고, 매년 쌀 200석을 하사 받으며 정문은 3층이라고 허황된 말, 즉 일부러「부탄지언(浮誕之言:도리에 맞지 않는 말)」까지 하였었다. 그 뿐이 아니다. 최부는 당시 조선의 젊은 지성을 대표하는 이른바 신진사류이며 동국통감 등의 국사편찬 사업에서 중국문명에 경도하는 사론을 많이 썼다. 동국통감 첫머리「단군조선」대목의 사론에서 최부는 "단군의 즉위가 중국의 요 임금보다 25년 뒤진다. 옛 기록의 '요와 더불어 함께 즉위했다' 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했었다.
그런 그가 2월 4일 소흥에서 총독비왜서도지휘검사인 황종의 질문에 대하여서는,
<“연혁과 도읍에 대해 말하자면 곧 시작은 단군으로 당요(唐堯)의 시대와 같았고, 국호는 조선이며 도읍은 평양으로 대대로 천여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 후 주(周) 문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고 평양에 도읍하게 하니, 팔조(八條)로서 백성을 교화하였습니다.>라고 분명히 단군과 요와 같다고 동시성으로 답을 했다.
기년(紀年)의 동시성은 엄청난 무게가 있으며 가치의 동시성을 의미한다. 고난 중의 선지자처럼 최부는 지금 조선을 대표하고 있다고 인식을 하고 이에 대처한 것이다. 그러자 당신네 나라는 무슨 비결이 있어서 수·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느냐는 보다 진진한 질문이 이어진다. 이에 최부는 아마 힘주어 말을 하였을 것이다.
<“모신(謀臣:계략을 세우는 데 뛰어난 신하)과 맹장(猛將)이 병사를 지휘하는데 도리가 있었으며, 병졸 된 자들은 모두 다 윗사람과 친하게 섬기며 장수를 위해 죽기 때문에 고구려는 작은 나라였으나, 충분히 중국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으며 지금은 신라·백제·고구려가 한 나라로 통일되어, 인물은 많고 국토는 광대해져 부국강병 합니다. 충직하고 슬기로운 인재를 수레에 싣거나 말[斗]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2월18일 소주를 떠나는 날, 마침 성이 나(羅)인 절강에서 직염을 관장한다는 태감을 만나는데 조선을 다녀온 태감의 이름을 대보라고 한다. 몇 사람 이름을 대자 태감이 그 중 누구누구는 작고했다고 글을 써 보이는데 최부는 그 단어의 의미를 모른다. 아마도 그때까지는 작고(作故)라는 표현을 조선에서 쓰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자 태감이 그러면 죽었다는 뜻으로 쓰는 단어가 무엇인지 묻는다. 물고(物故). 아마 조선에서는 그때까지 물고란 단어가 통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소주가 얼마나 비단이 유명하면 직염을 관리하는 태감이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2월19일 무석현을 지나 상주부에 다다른다. 무석은 연암 박지원이 제일 싫어한 사람이 활동하던 곳이다. 나중 나올 것이지만 잠시 소개 하자면 동림당(강소성 무석의 동림서원을 중심으로 일군의 유학자들이 당시의 여론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의 수괴 전겸익을 그는 엄청 성토를 했다. 그의 말은 그렇게 시작한다.
<동림당(東林黨)의 무리들은 조선을 좋아하지 않았다. 전목재(전겸익)는 동림당의 괴수인즉 우리나라를 야비한 오랑캐라고 보는 것을 청론(淸論)으로 삼았으니 분하고 억울함을 이길 수 있으랴. 더구나 우리나라 시문(詩文)에 이르러서는 말살(抹殺)하기가 일쑤여서 그의 《황화집(皇華集)》발(跋)에 보면~>
최부는 상주부에 대해,
< 상주부는 곧 연릉군이므로 오나라 계자의 채읍(향대부가 받는 봉지)으로서 호수와 산의 아름다움과 정과 대의 설치는 명성이 자자하다.>고 했다.
최부가 말한 계자, 즉 계찰은 춘추시대 오나라 왕 수몽의 넷째 아들이다. 계찰은 그 형제들 가운데 가장 현명하고 재능이 있어서 수몽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고 백성들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계찰은 왕위는 장자가 이어야 한다며 가족을 떠나 산촌에 살면서 밭을 갈며 살아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다. 계찰의 형들 역시 계찰의 높은 인격과 굳은 절개를 칭찬하며 차례로 집권하여 왕위가 그에게까지 이르도록 하려고 하였다. 계찰은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순서가 되었지만, 이때도 받지 않아서 왕은 계찰을 연릉(延陵)으로 봉후(封侯)했다.
그 후로부터 계찰을 연릉의 계자(季子)라 불렸다. 계찰이 처음 사신으로 길을 떠났을 때, 오(吳)나라의 북쪽으로 가는 도중에 서(徐)나라에 들러 서왕(徐王)을 알현하게 되었다. 서왕은 평소 계찰의 보검을 갖고 싶었으나 감히 말하지 않았다. 계찰 역시 속으로는 서왕이 자신의 보검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사신으로 중원(中原) 각 나라를 돌아다녀야 하였기 때문에 바치지 않았다. 각 나라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徐)나라에 도착해 보니 서왕은 이미 죽고 없었다.
이에 계찰은 보검을 풀어 서왕 무덤의 나무에 걸어놓고 떠났다[於是乃解其寶劍 繫之徐君塚樹而去]. 그의 종자(從子)가 물었다. "서왕은 이미 죽었는데 또 누구에게 주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계찰이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처음에 마음속으로 그에게 주기로 결정하였는데, 그가 죽었다고 해서 내가 어찌 나의 뜻을 바꿀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계찰계검'은 이 글을 요약한 말이며, 중국의 유서(類書)인 《몽구(蒙求)》의 표제어에는 '계찰괘검(季札掛劍)'으로 적고 있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은 계찰의 인물됨을 평가하여, "연릉계자(延陵季子)의 어질고 덕성스런 마음과 도의(道義)의 끝없는 경치를 앙모한다. 조그마한 흔적을 보면 곧 사물의 깨끗함과 혼탁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찌 그를 견문이 넓고 학식이 풍부한 군자가 아니라고 하겠는가!"라고 했다. 우리도 언제나 저런 소신 있고 도의를 철석같이 지키는 정치인이 나오려나.
2월20일 여성역이란 곳을 지나 진강부에 이르렀다. 양자강에 거의 다 온 것이다. 항주에서 출발한 경항 대운하가 무석-소주를 거쳐서 진강에서 장강을 건너게 되므로, 이곳 진강은 역대로 무수한 여행객들이 왕래하던 나루터였다. 즉 진강은 장강 하류, 장강과 경항(京杭)대운하가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서쪽으로 남경(南京, Nanj. ing), 동쪽으로 상주(常州, Changzhou), 북쪽으로 양주(揚州, Yangzhou)와 이웃한다. 황석영의 소설 '심청'에 보면 심청이가 중국 상인에게 팔려온 곳이 이곳 전강으로 되어 있다. 옛날 삼국시대에 동오의 손권이 이곳을 수도로 정했던 적이 있을 정도로 오래된 도시인데 19세기 중반에 아편전쟁을 승리한 영국이 장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올 때도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해 때문 맥을 못 추는 것도 같다. 진강에는 3대 산이 있다. 금산, 북고산, 초산. 북고산은 유비가 백제성(白帝城)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부인이 멀리서 제를 올리고 강 아래로 투신했다는 전설이 있는 작은 정자 제강정(祭江亭)이 있다. 앞서 항주에서 말한 송성가무에 등장하는 절, 금산사. 금산에 금산사(金山寺)는 백사전(白蛇傳)이라는 전설에 의해 이름을 떨친 절이다. 금산사의 법해(法海)스님이 뱀과 인간의 사랑에 개입해 사랑을 지키려는 뱀의 요정과 싸우면서 뱀의 요정이 금산사에 홍수를 불러왔다는 스토리는 거의 모든 중국인들이 다 안다. 금산사는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인 동진(東晉)때에 신축되었다.
이곳은 송경설재(誦經設齋)와 예불배참(禮佛拜懺) 등 중국 불교의 다양한 법회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초산(焦山)은 한나라 말 유명한 학자였던 초광이 산에 은둔했다 해서 초산이란 이름으로 불려진다. 초산엔 정혜사(定慧寺)란 유서 깊은 절이 유명하다. 이 절에는 `강남 제일`이란 비림(碑林)과 건륭황제가 남순(南巡: 남쪽을 돌다) 할 때 묵었던 건륭행궁(乾隆行宮)이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대개 유서 깊은 곳은 끼고 있는 산도 다 뜻을 갖고 있으며 걸맞은 의미를 부여한다. 후세는 또 그 뜻을 기리고 의미를 새기고자 몰려들 온다. 바로 진강이 그러한 곳이다.
2월 21일 최부 일행은 남수관이라는 수문에서 진강부성을 끼고 남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가서 경구역에 이르러 머물렀다. 저녁에 걸어서 경구갑(장강에서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이란 곳을 지나 통진(通津)체운소에 다다르니 통진은 물이 얕아서 반드시 조수가 들어오는 것을 기다려야 비로소 大江(양자강)으로 통할 수 있어 배를 갈아타고 조수가 이르기를 기다려 강을 건널 준비를 하였다. 양자강 하류이니 퇴적층이 많고 바닷물의 영향을 받아 조수간만이 일어나는 통에 하구 쪽은 때로는 역류현상마저 생긴다. 최부가 다니러 갔을 때도 이 현상은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경항 대운하가 황하강 유역에서 발이 끊긴 주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퇴적층 때문이다. 최부는 진강의 역사 적 장소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진강부는 즉 윤주성(閏州城)이니 손권(孫權, 181~251)이 단도(丹徒)로 옮겨 철옹성을 쌓고 경성이라 불렀다. 부치와 단도현치(丹徒縣治)는 성안에 있다. 성의 동쪽에는 또 철옹지가 있었으나 그 성은 없어졌다. 향오정(向吳亭)은 성의 서남쪽에 있고, 북고산(北固山)은 서북쪽에 있으니 곧 양 무제(武帝, 502~549)가 명명한 곳이다. 초산(焦山)·은산(銀山)에는 모두 거찰을 세웠는데 성의 북쪽에 있다. 금산(金山)은 대강(양자강)의 가운데에 있어서 은산과 더불어 마주 보고 있다. 위쪽에는 용연사(龍延寺)가 있는데 곧 송의 진종(眞宗, 997~1022)이 꿈속에서 놀던 곳이다.>
단도란 말은 진나라 시황제 때 그 땅에 왕의 기운이 있다고 하자 죄인 3천명을 보내 경현산이란 곳에 터널을 뚫어 기운을 꺾어 이후 단도라고 했다고 한다. 손권은 조조의 백만 대군이 쳐들어오자 이곳 양자강 변에 철옹성을 쌓고 적벽대전을 진두지휘했었다. 그의 양자강에 대한 설명은 또한 이렇다.
<부성의 동북쪽의 모퉁이는 강의 언덕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강은 곧 양자강이다. 시속(時俗)에는 양자강(洋子江)이라고도 한다. 강의 넓이는 20여 리이고 강의 수원은 민산(岷山)이다. 한수와 만나고 남경을 지나서 이 부(진강부)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 들어가니 곧 우공에 ‘민산에서 강을 인도한다(岷山導江)’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동쪽은 오군(吳郡)과 회계군(會稽郡)으로 통하고, 서쪽은 한수와 면수(沔水)에 접하고, 북쪽은 회수(淮水)와 사수(泗水)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민과 절강과 닿으니 진실로 사방에서 몰려드는 곳이었다.>
옛 요순시절부터 중국에는 치수(治水)가 군왕의 책임이자 의무였던 만큼 양자강의 홍수해결은 어쩌면 영원한 중국의 숙원사업이었다. 만리장성을 만든 중국인다운 ‘싼쌰 댐’ 공사를 양자강에서 대대적으로 펼쳐 2009년 완성을 했다. 삼협 관광이 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이 댐 공사도 역시 관심을 끌기 시작했는데 이 댐이 완공되면 삼협의 유명한 관광지는 상당부분이 모두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리기 되어 댐 공사가 완공되기 전에 구경을 가야한다는 말이 있었다. 강의 높이를 175m 높여 지금은 상류에 중경까지 600 km의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지금은 크루즈 관광유람선이 장강을 오간다. 중국 대륙 중앙부를 횡단하는 강, 창장(長江)! 장강은 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이자,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강이다. 6,300km에 이르는 이 드넓은 강을 따라 수많은 이야기와 영웅호걸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져 있는데 그렇기에 창장은 중국 문학에서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내로라하는 시인들이 창장을 따라 풍류를 즐겼기 때문이다.
싼샤(삼협, 三峽)는 충칭(중경, 重慶)에서 이창(의창, 宜昌)에 이르는 3개의 협곡, 즉 취탕샤(구당협, 瞿塘峡), 우샤(무협, 巫峡), 시링샤(서릉협, 西陵峡)을 말한다. 양자강 크루즈 여행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언뜻 떠오르는 백제성, 장강을 따라 거슬러 오르면 삼국지의 유비가 손권에게 패해 도망쳤다가 죽음을 맞이한 백제성이 나온다. 이백(이태백)이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을 쓴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조발백제성은 이태백이 귀양길에 올랐다가 이곳 백제성에서 사면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에 아침 일찍 백제성을 떠나 강릉으로 돌아가면서 남긴 시다. 강택민 중국 주석이 쿠바의 카스트로를 만났을 때 이 시를 언급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는데 중국 사람들이 가장 애송하는 한시이기도 하다.
朝辭白帝彩雲間(조사백제채운간)
千里江陵一日還(천리강릉일일환)
兩岸猿聲啼不住(양안원성제부주)
輕舟已過萬重山(경주이과만중산)
아침 일찍 오색 구름 감도는 백제성에 이별하고
천리길 강릉을 하루 만에 돌아 왔네
강기슭 원숭이들 울음소리 그치질 않는데
가벼운 배는 만겹의 산을 지나왔다네
이백은 701년에 서역의 쇄엽(碎葉)에서 태어났다. 그가 페르시아 인이라는 설도 있는데, 아버지가 서역과의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이어서 서역과 중국 본토를 오갔다고 하니 사실일지도 모른다. 742년, 곧 이백의 나이 42세에 비로소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처자가 있었지만 아무런 미련 없이 이별을 고하고 수도로 향했다. 이백은 한림공봉(翰林供奉, 문서의 초안을 잡는 관리)이라는 직위에 올라 현종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이백은 당연히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직위가 주어지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기대는 허망하게 꺾이고 말았다. 만년에 접어든 현종이 정치에 대한 열정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현종은 도교에 심취해 불로장생을 염원하면서 양귀비를 탐애했다.
그 무렵 봄의 연회석에서 남긴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해 현종은 명가수 이구년을 불러 노래를 들으면서 모란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려 했는데, 노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것도 오래된 노래가 아니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새로운 노래를 원했다. 그때 거리에서 술에 취해 노닐고 있는 이백이 불려왔다. 이백은 그 자리에서 단숨에 시를 써 내려갔다. 그 시가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이다. 술에 취해 방금 불리어 온 이백이 일필휘지로 작성한 시 한 수가 이 정도였으니 갈채를 받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백은 술에 취해 현종의 총신이었던 고력사(高力士)에게 신발을 벗기게 했는데, 그의 시 앞에선 그런 무례함도 관대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시가 나중에는 화근이 된다. 이백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고력사는 그 시에서 양귀비를 한(漢)나라의 음란하다고 알려진 조비연(趙飛燕)에 비유했다고 중상을 했다. 결국 744년, 44세가 되던 그해 봄에 이백은 장안을 떠났다. 1년 반의 궁중 생활이었다. 755년에는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 이후 9년에 걸친 전란으로 양귀비는 죽고 현종은 퇴위했다. 이백은 전란을 피해 여산(廬山)으로 갔다가 현종의 아들인 영왕[永王, 이름은 린(璘)]의 군대에 합류했다. 이백은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종군 시인으로 그 명성을 이용당했을 뿐이다.
게다가 현종이 퇴위한 뒤, 셋째 왕자가 숙종(肅宗)으로 즉위하자 영왕은 반란자로 몰려 토벌당하고 만다. 이백도 사로잡혀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친구들의 노력으로 감형되어 야랑(夜郞)으로 유배되었다. 바로 그 귀양지로 향하던 중 백제성에 이르러 사면 소식을 듣고 일정을 바꾸어 장안으로 곧장 되돌아 온 것이다. 이 시는 그 당시 이백의 기쁜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서둘러 길을 떠나고 천리 길을 하루에 내달으며 원숭이 울음소리도 슬프게 들리지 않고, 가벼운 배로 만 겹이나 되는 산을 스쳐지나간다는 표현은 바로 작가의 유쾌한 심경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백은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병사했다고 하나 다음과 같은 설이 전해진다. 어느 날 이백은 양자강 채석기(采石磯)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늘 그랬듯이 술에 취해 있다가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물속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백 자신이 만들어 낸 술과 노래와 달의 이미지가 전해지고 중복되면서 늘 새로운 이백의 모습을 만들어 내어 다른 생명으로 숨 쉬며 오늘날도 늘 애창하며 살아서는 별 볼일 없는 관리에 천재 술꾼, 죽어서는 전설이 된 시선, 그를 우리는 영원토록 만난다. 글을 잘 쓰는 것과 출세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나는 번번이 느낀다. 오히려 귀양을 간 처지에서 간절하고 애달픈 글이 쏟아져 나온다. 솔직히 이백은 시는 잘 지었지만 삶은 가볍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드디어 장강을 건너는 최부 일행이다. "귤이 강남의 양자강을 건너면 탱자가 된다." 아직은 강남, 이곳 강을 건너면 탱자가 되는 노릇이다.
*현재 장강삼각주는 상해를 비롯한 강소성과 절강성의 16 개 도시를 포함한 지역이며 장강이남 산업벨트 [ 상해- 소주- 무석- 상주-진강(구용)-남경] 는 가장 역동적인 경제 지역이다.
고속철 건설로 형성되는 장강삼각주 주요 도시의 한시간대 생활권
자료원 : 상하시 인민정부 합작교류판공실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