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공연차 에스토니아에 있을 때 게스트하우스에서 워멕스 초청 소식을 들었어요. 아침에 커피를 마시다가 소리 지르고 방방 뛰던 게 기억나요.”(김보미)
“저는 그렇게 대단한 곳인지 몰랐어요(웃음).”(심은용)
“박람회여서 심사 받는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반응이 열광적이어서 놀랐어요. 원래는 45분 내에 쇼케이스를 끝내야 하고 음악은 90데시벨을 넘기면 안 됐는데, 어겨도 뭐라 안 하더라고요. 오히려 공연이 끝났는데 시간이 남았으니까 앙코르하라고 그러고.”(이일우)
거문고의 둔탁한 가락이 공간을 채우고, 이내 전자기타의 거친 소리와 해금의 신경질적인 선율이 좌중을 휘어잡는다. 불안정한 긴장감 속에서 헤드뱅잉까지 서슴지 않는 격렬한 연주는 광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전에 들은 적 없는 소리의 예술로 잠비나이는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사실 ‘잠비나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뜻이 없다.
“공연하러 지방에 내려가 있는데 보미에게 문자가 왔어요. ‘잠비나이 어때?’ 저는 바로 ‘하자!’고 했죠. 상상마당 레이블 마켓에서 저희 밴드가 첫 공연을 앞두고 있던 터라 빨리 이름을 지어야 했거든요(웃음).”(심은용)
“그 단어를 듣고 노란색이 딱 떠올랐어요. 그리고 노란색이 퍼져서 알록달록 모자이크로 이루어진 방이 그려졌어요.”(이일우)
“누구는 아프리카 부족이 떠오른다고 하더라고요. 신기하게도 이미지가 다 달라요.”(김보미)
아무 의도 없이 만들었지만, 그 또한 하나의 의도다. 잠비나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도 정의할 수 없다. 무채색의 음악. 이는 1집 앨범명 <차연(Differance)>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차연’은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만든 용어로, 언어의 한계 속에서 완벽한 교감이란 불가능함을 말한다. 즉, 잠비나이의 음악은 재생 버튼을 누를 때까지 알 수 없고, 다 듣고나서도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알 수 없다.
잠비나이의 기본은 국악이다. 기타와 드럼의 밴드 사운드가 무대를 압도하는 가운데, 거문고와 해금이 오묘하게 어우러진다. 그들만의 뚜렷한 색깔을 가지고 음악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학교에 들어가면 선배들이 악기 선택에 참고하라고 간단하게 연주를 해줘요. 그때 생각지 못했던 소리가 나서 놀랐는데, 그게 해금이었죠. 소리가 앵기기도 하면서 여성스럽고, 모양새도 예쁘고. 악기 자체를 처음 봐서 호기심이 강했어요.(김보미)
“거문고는 저음이 참 매력적이에요. 흔히 가야금은 여자 악기, 거문고는 남자 악기라고 하잖아요. 제가 원래 산만한 편이었는데 거문고를 하면서 많이 차분해졌어요. 악기 자체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요.”(심은용)
“국악을 좋아해서 피리를 배웠지만,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음악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중학교 때 메탈리카, 엑스제펜의 공연을 보고 전자기타에 푹 빠졌죠. 그때부터 학교에서는 피리를 부르고 기숙사에선 기타를 쳤어요. 사감에게 걸려서 압수당하고 무릎 꿇고 벌을 선 적도 있고, 메탈을 듣는다고 시디플레이어를 압수당한 적도 있어요. 지금은 피리・기타 둘 다 좋아해요. 엄마 아빠처럼(웃음).”(이일우)
같은 학교를 나왔지만 셋이 뭉친 때는 졸업 후 수년이 흐른 2009년이다. 각자 활동을 하던 중 우연히 지인의 공연 뒤풀이에서 만났는데 서로 통하는 게 있었다.
“각자 창작의 욕구가 있었어요. 기존의 음악을 답습하는 학습과정을 겪어오다보니 현실과 괴리가 있잖아요. 지금 통하는 음악을 하고 싶은데, 대안으로 나온 퓨전음악은 연주자도 재미없고 듣는 사람도 지겨워해요. 그래서 ‘한번 만들어보자’고 했죠.”(김보미)
“같이하기로 약속하고 처음 만난 자리가 있었어요. 어색한 분위기에서 서로의 음악 취향을 공유해봤는데, 셋 다 우울하고 차분한 음악을 좋아하더라고요. 강렬하지만 그 안에 마이너 감성이 있는.”(심은용)
잠비나이는 실험적이다. <차연>이 EP <잠비나이>에 비해 대중적인 측면을 강화했다지만, 여전히 쉽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은 아니다. 음악적 설득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생소한 소리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저희 안에서 계속 고민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죠. ‘우리가 대중으로서 이 음악을 즐길 수 있나?’ 그래서 EP 발매 후 곡의 길이도 줄이고 리듬 파트도 집어넣고, 여러 변화를 시도했어요.”(이일우)
“저희 음악이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음악은 아니에요. 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절망적인 상황이 닥치면 자기고뇌에 빠지잖아요.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 저희 음악이 그런 순간을 잘 표현한다고 말씀해주세요.”(김보미)
멤버 수보다도 적은 두 명 앞에서 공연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세계가 그들의 무대다. 워멕스를 비롯한 세계 유수 음악축제에서 공연을 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한국음악을 대표하게 됐다. “일말의 사명감”이 생긴다.
“종종 공연 동영상에 ‘잠비나이는 우리나라 음악의 미래다’ 같은 댓글이 달릴 때가 있어요. 그걸 보면 정신을 차리게 돼요.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 싶고.”(김보미)
“요즘에는 이 악기들을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연이 끝나면 저희 악기를 보고 중국 악기냐, 일본 악기냐 물어봐요. 왜 한국 악기는 모를까? 그리고 모르면 차라리 악기 이름을 물어보면 될 텐데, 왜 ‘고또 같다’ ’쟁 같다’고 말할까? 기분이 좀 나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이렇게 답해요. ‘This is Geomungo!’”(이일우)
EBS <스페이스 공감>은 잠비나이를 두고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음악. 잠비나이의 음악은 존재하지 않음으로 존재한다”고 평했다. 그렇다면 방향은 어디일까?
“아직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특별한 지향점을 가지고 저희가 모인 게 아니라서요.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나갈지는 고민 중이에요. 일단은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음악을 해야겠죠.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가능한 한 오래 하고 싶어요.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고 오랫동안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요.(김보미)
“저도 보미랑 같은 생각이에요. 얼마 전에 메탈리카 내한 공연이 있었는데 무대를 보고 정말 뭉클했어요. 인생을 함께한 사람들이 할아버지가 된 지금도 무대에서 저렇게 숨을 쉬고 음악을 하는구나. 잠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잠비나이를 그려보기도 했고(웃음). 아무튼 오래 하고 싶어요. 기왕이면 저희도 잠실종합운동장처럼 큰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으면 좋겠죠?”(심은용)
숨[su ːm]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음악을 들려드립니다 박지하_피리・생황, 서정민_가야금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숨을 쉰다. 음악에서, 특히 한국음악에서 호흡은 매우 중요하다. 때로는 평온한 숨, 때로는 거친 숨, 때로는 숨이 멎을 듯 참는 숨….” _ 1집 <공간에서 숨 쉬다> 소개글 |
“워멕스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잖아요. 이제 시작이죠. 세계 음악시장에 이제 겨우 이름을 알렸으니 더 노력하고 고생해야죠.”
숨[su ːm]은 그 이름부터 눈길을 끈다. 자연스럽게 숨을 쉬듯 우리는 자연스럽게 음악을 듣는다. 이어폰을 꽂고 어떤 음악을 들을지 선택할 수도 있지만, 길을 걷다보면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오기도 한다. 우리 삶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음악. 숨과 음악은 닮아 있다.
“‘숨’은 정말 숨을 쉬는 느낌이에요. 호흡을 조절하면서 차분해지고. 외국인을 위해 발음기호를 붙인 건 아니에요. 있으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잖아요. 어감을 살리고 싶었어요. 장음 표시가 있어서 쉬어가는 의미도 더 살고.”(박지하)
“하나의 고유명사죠. 워멕스 책자와 앨범에도 유일하게 한글이 쓰였는데, 그게 ‘숨’이에요. 근데 동명의 화장품 브랜드가 생겨서 좀 속상했어요(웃음).”(서정민)
피리와 생황, 그리고 가야금. 악기 구성은 단출하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여백의 미를 돋보이게 한다. 공간을 가득 채우지 않는 소리. 그 여백을 청자의 감성이 채운다.
가야금의 부드러운 선율 위에 때로는 생황이 여린 소리를, 때로는 피리가 곧은 소리를 낸다. 그 소리를 듣다보면 산이 생각나고, 그 속에 서 있는 한 소녀가 떠오른다. 소녀는 사라지는 것들을 향해 외친다. 여리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바람에 이는 수풀과 나뭇잎. 구슬픈 소리에 한 폭의 수채화가 그려진다. 때때로 들리는 가야금 변주는 저 멀리 다가오는 먹구름을 연상시킨다. 음과 음, 그 미묘한 끌림이 무대를 다른 공간으로 만들어놓는다.
“가야금으로 제가 밑바탕을 그리면, 그 위에 지하가 색을 입혀요. 남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 가야금 줄을 뜯을 때 그 울림이 바닥에서 제 몸으로 전해져요. 특히 베이스 부분은 더. 그 울림이 참 좋아요.”(서정민)
“아버지가 ‘남자들이 연주하는 악기를 여자가 잘 하면 멋있을 것 같다’고 하셔서 시작한 게 피리예요. 피리는 예민하고 까다로워요. 리드도 자기 입에 맞게 깎고 다듬어야 하고. 그만큼 피곤하게 만드는 악기인데, 함께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매력을 느껴요. 개량하지 않은 악기라서 거칠고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거든요. 생황은 무척 화려해요. 피리와는 달리 여성적인 매력을 표현해주는 악기랄까? 신기하게 생기기도 했고, 소리가 좋아서인지 관객들이 좋아해요.”(박지하)
숨[suːm]의 음악에는 한국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정서가 배어 있다. 흔들리는 농음과 농현, 그리고 꺾고 흘리는 성음. 그 안에서 오만 감정이 스친다. 생각하게 하고 느끼게 한다. 그 위에 현대 클래식의 감성이 덧입혀져 새로운 소리가 만들어진다. 적절한 국악과 양악의 조화 속에 숨[suːm]은 숨[suːm]의 음악을 만들어낸다.
“국악은 보통 극단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잖아요. 흥(興) 아니면 한(恨). 저희 음악은 둘 다 아니에요. 저희는 한국 악기로 낼 수 있는 순수한 소리를 찾으려고 해요.”(박지하)
“연주를 하면 ‘국악기로 이런 걸 해?’ ‘이건 무슨 악기야?’ 하는 시선이 있어요. 양악이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 텐데 국악이기 때문에 생기는 시선들이죠. ‘좀 신나는 거 없어요?’라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고. ‘퓨전국악이에요?’ 하면 음악적 대화를 이어가기가 어렵죠. 저희도 국악을 배운 것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그걸 넘어선 하나의 ‘음악’으로 다가가고 싶어요.”(서정민)
이들은 정형화된 틀을 거부한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것을 찾는다. 가야금을 타악기처럼 쓰고 독특한 주법을 선보이지만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관습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의 가능성을 좇을 뿐이다.
“아르메니아에 피리와 비슷한 ‘두둑’이란 악기가 있어요. 피리는 10년 넘게 항상 크고 꿋꿋하게 불어야 한다고 배웠는데, 어느 연주자가 두둑을 힘을 쫙 빼고 섬세하게 부르더라고요. ‘나도 이렇게 불 수 있을 텐데 왜 그동안 피리 소리를 크게 내는 데만 집착했지?’ 하고 반성했어요. 점점 악기를 연주할 때 자유로워지고 본래의 제 소리를 찾게 돼요.”(박지하)
함께한 지 6년이 흘렀다.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싸우고 연습했다. 매년 바리바리 악기를 싸들고 산으로 합숙을 갔고, 타지에서 서로를 믿고 무대에 올랐다. 가족보다 가까운 사이가 된 지금 둘은 서로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정민이와 같이하면서 조금씩 적극성을 찾고 있어요. 중고등학교 때 잘하는 애들 사이에서 연습만 하다보니 성격이 소극적으로 변했거든요. 완성된 게 아니면 보여주는 것도 싫어하고. 그래서 연습하는 모습도 남한테 잘 안 보여줘요. 완벽주의자랄까? 정민이는 그런 부분에 두려움이 없어요. 좀 틀려도 괜찮다고. 그러니까 저도 좀 더 편하게 연습하고, 좋은 음악을 많이 만들게 돼요.”(박지하)
“저는 지하랑 반대예요. 옛날에는 일과 노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왈가닥이었는데, 지하랑 함께하면서 많이 차분해졌어요. 좀 더 정리되고, 안정되고. 서로에게 영향을 많이 끼쳤네요(웃음).”(서정민)
1집 <공간에서 숨 쉬다>를 발매한 지 2년이 흘렀다. 수많은 무대에 서며 보고 생각하고 느꼈다. 충분히 숨을 골랐다. 이젠 다시 숨을 내뱉을 차례다.
“2집을 낼 생각인데,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요. 숨[suːm]은 개인적인 음악이에요.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했고,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그때그때 오는 기회들을 놓치지 않아서 지금까지 왔는데… 앞으로도 잘 해나가고 싶어요. 시간이 흐르고 저희가 공부를 더하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넘어선 다른 의미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박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