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중동 이야기] 고대 오리엔트 국가의 흥망 - 바빌론 유수와 유대교 성립
유다 왕국은 아시리아의 사르곤 왕조 시대 때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 가까스로 명맥만 유지했다. 이는 당시 유다 왕국의 왕들이 아시리아와, 이에 대항하는 남쪽 이집트 두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 쪽도 가담하지 않고 약소국의 명운을 지키려 애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침략했을 때 유다 왕국의 요아킴 왕은 일단 신바빌로니아에 복종했지만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이집트 침입에 실패하자 신바빌로니아에 반기를 들었다(기원전 601년). 네부카드네자르는 곧바로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유아킴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 요아킨이 즉위한 지 석 달 만에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요아킨 왕을 비롯한 유다 왕국의 지배계층은 모두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것이 ‘제1차 바빌론의 유수’다. 요아킨 왕을 비롯해 3023명(예례미아 52:28)이었다는 주장과 함께 ‘모든 고관과 병사 1만 명’(열왕기하 24:14)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마도 이는 장정만 거론한 수로, 실제 규모는 몇 배에 달했을 것이다.
신바빌로니아의 속국으로 전락한 뒤 유다 왕국의 왕위에 오른 시드키야(재위 기원전 597-587)는 또다시 신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유다 왕국의 시드키야 왕이 결국 이집트 편에 서자 네부카드네자르는 대군을 몰고 예루살렘을 포위, 1년 반의 전투 끝에 또다시 예루살렘을 함락했다. 시드키야는 오르단 동쪽으로 도망쳤으나 예리코에서 붙잡혀 네부카드네자르가 있는 시리아의 리블라(지금의 홈스에서 남서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호송됐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시드키야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키야의 두 눈을 뽑은 뒤 사슬로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지배계층도 함께 바빌론으로 연행됐다. <구약성서> ‘예레미야’에는 바빌론에 끌려간 사람이 모두 832명이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 이것이 ‘제2차 바빌론 유수’다.
이어 기원전 582년에는 제3차 바빌론 포로 745명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신바빌로니아는 유다 왕국을 정복하고서 신전을 불태우며 예루살렘 전체를 파괴했다. ‘계약의 성궤’도 이때 불타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후 성서에 ‘계약의 성궤’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영화가 빛났던 예루살렘의 신전들은 재로 변했고, 모세 때부터 전해 내려온 신과의 약속을 기록한 석판은 흔적도 없이 부서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포로’로 전락한 사람은 유다 왕국 주민만이 아니었다. 이미 그전에 북이사르엘 오아국의 주민들이 아시리아에 포로로 끌려갔었다. 아시리아의 포로도 바빌론의 포로 못지않게 가혹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시리아 식민정책의 특징은 정복한 나라의 주민 대부분을 강제로 또 다른 정복지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신바빌로니아도 마찬가지로 유다 왕국을 점령한 후 이곳 주민들을 바빌론으로 강제이주시켰고, 이 사실이 ‘바빌론 유수’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아시리아의 강제이주에 비하면 매우 온건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바빌론 유수는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한 매우 제한적인 조치였고, 정복 후에는 유다 왕국에 외국인도 유입되지 않았다. 포로들도 바빌론에서 가까운 지역에 함께 모여 살았다. 포로가 된 뒤에도 이들의 정체성을 말살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종교활동도 허용했다.
이에 비해 아시리아의 강제이주는 민족성을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한 정책이었으며, 이주자들을 다양한 정복 지역으로 분산하는 등 매우 철저했다. 정복한 영토 내에 살던 원주민들을 모두 다른 지역으로 분산 이주시키고, 이 지역에는 다른 민족을 정착시키는 방식이었다.
북이스라엘 10개 부족의 명맥은 이렇게 끊어졌다. 왕국이 멸망한 뒤에도 남쪽의 유다 부족만이 살아남았으며 이후 유대인과 유대교라는 개념이 명확해졌다. 하지만 포로 신분이 된 유대인들의 생활은 고난 그 자체였다. 그들은 오로지 예루살렘을 그리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견뎠다. 이런 유대인들의 생활을 ‘시편’ 137장 1-6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놓고서,
우리를 잡아온 그 사람들이 그곳에서 노래하라 청하였지만,
우리를 끌어온 그 사람들이 기뻐하라고 졸라대면서
‘한 가락 시온 노래를 불러라’하였지만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버릴 것이다.
네 생각, 내 기억에서 잊혀진다면
내 만일 너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