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A in 1970
HIS HOMETOWN DIDN’T FORGET HIM
By 지타 볼링거 플레처
로버트 필립스와 방과 후에 같이 놀았던 친구들은 필립스가 베트남에서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52년이 흘렀지만, 도시 공동체와 친구들은 여전히 필립스를 기념했다. 베트남 참전자 공원의 시계탑 이름을 필립스로 명명했고, 2022년 6월 28일, 더는 필립스의 귀향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마그나렐리.
“이 사진은 기념식을 위해 어렵게 구했습니다. 같은 반 친구였었고 기록 연구원인 자나 호엔이 기꺼이 제공한 사진입니다. 저도 베트남전에 참전했지만, 필립스의 군대 사진을 가진 사람이 없어요. 저도 옛날에 필립스와 같은 반이었습니다.”
이로써 친구들에 의해 퀸시 시 중간에 공공이 필립스의 이름을 명명하게 된다. 친구들은 실종 상태란 필립스를 포기하지 않고 오래도록 기다렸다.
로버트 필립스는 퀸시 시에서 1949년 태어나고 자랐으며, 밝고 명랑한 소년이어서 대부분하고 친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마그나렐리. “명랑했어요. 반에서 항상 말하고 있었죠. 실수도 많았고 문제도 생겼죠. 그러다 어머니와 다른 주로 이사 가면서 연락이 끊겼어요. 그러다 베트남에서 다시 만난 겁니다. 그때는 베트남에 정말 많이 갔고, 퀸시에서만 50여 명을 잃었어요. 다른 도시 지역에 비교하면 전사율이 두 배가 높았죠.”
“같은 육군으로, 난 1970년 4월 파병이 종료되었고, 비엔 호아 기지의 포장 활주로에서 주저앉아 귀국 비행기(Freedom Bird)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음이 급해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죠. 그때 내 인생으로 누가 다시 걸어 들어온 겁니다. 앉아 있는데, 한 병사가 나를 지나쳐 걸어가요. 즉시 필립스란 걸 알았습니다.”
퀸시의 친구들은 필립스를 잊지 않고 있었다. 둘은 서로를 알아보고 행복했다.
“그때 필립스가 그래요. 참전 끝나고 귀국하면 고향 퀸시로 다시 돌아갈 예정이라고요. 말할 시간은 짧았어요. 그래서 퀸시로 돌아오면 다시 만나자고 했죠.”
이것이 퀸시의 친구에 의해서 목격된 마지막 필립스 모습이 된다.
1970년 6월 23일, 필립스 일병은 트럭 운전병으로 다이안을 떠나 라이 케로 향한다. 일상적인 보급 운행이었다. 동승자는 보급부사관 조 페터센과 기갑병 제임스 로조.
그날 운행 명령.
[595통신중대 휘하 2개 제대의 피복 기록을 상세히 파악하고, 불필요한 추가 장비를 회수해 복귀하라.]
모두 M-16 소총으로 무장했고, 45구경 권총도 한 자루 있었으며, 라이 케로 향하는 2½톤 GMC 트럭에 올랐다.
그렇게 거의 운항이 끝나갈 때, 복귀 운행 전에 마지막으로 들를 곳이 남은 시점이었다.
마지막 보급을 전달하는 푸옥 빈 통신기지에서 도로에 위험 경보를 듣는다. 그렇게 도로 운항이 중단되는 일은 꽤 자주 있어 일상적이었다. 도로에서 지뢰들과 부비트랩이 발견되었으며, 매설 지역 부근에 적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정보가 전파되었다.
라이 케까지 도달한 페더센 중사는 별개의 두 군데 도로 위험을 통보받았고, 중사는 두 군데를 피해서 돌아서 가기로 결정한다. 다만, 페터센 중사의 결정에 의해서 구간의 일부분을 사용하지 않는 구-도로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트럭이 라이 케를 떠나고, 이후 세 명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필립스 일병이 운전하던 트럭이 미군에게 발견되었을 때, 트럭은 길가 도랑에 있었고, 트럭 안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엔진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운전석 앞유리는 총알에 의해 부서졌고, 트럭 전방 타이어 하나도 터져 있었다.
수색대는 베트콩 시신 한 구를 발견했는데, 페더센 중사의 권총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보였으며, 주변을 뒤져 M-16 소총 세 자루를 모두 찾았는데, 누구를 탓할 필요 없이, 모두 기능 고장 상태였다.
필립스 일병과 두 명의 운명은 추정밖에 할 수 없었다.
(잇빨 주 : 그 우회 구 도로에 우연히 베트콩이 있었거나, 우회를 예상하고 따로 매복한 듯하다.)
이후, 1970년 9월에 미국의 방첩요원을 매복했던 베트콩 트란 반 탄이 포로로 잡혔는데, 트란 탄은 필립스와 로조가 캄보디아 방향 어딘가로 끌려갔다고 증언한다. 페더슨 중사에 관해서는 따로 증언했다.
[그 사람은 먹기를 거부해서, 자의로 아사했다.]
트란 탄은 자의적으로 아사한 미군을 매장한 지점으로 미군을 데려갔는데, 자의로 아사했단 사실을 믿기 힘들어 지체되다 1973년, 다른 베트콩 포로의 똑같은 증언으로 신빙성이 인정되어, 포로 구금 중 사망 추정으로 기록된다.
필립스와 로조에 관한 증언은 1971년 새로운 베트콩 포로에 의해 다시 진술된다. 베트콩은 두 미군 포로의 모습을 상세하게 진술했고, 그 두 명이 로조와 필립스가 유력한 상황에서 캄보디아로 가는 길에서 봤다고 했다.
1985년 미국 정보부에서 보안 해제된 보고서를 로조의 가족에게 공개했는데, 필립스와 로조가 1972년 탈출을 한번 시도했고, 필립스는 단기간 탈출에 성공해 정글에서 생존했지만, 결국 다시 잡혔고, 복수심에 불탄 베트콩이 필립스를 살해했다는 내용이다.
마그나렐리.
“필립스가 얼마나 두려웠을지 상상이 안 됩니다. 계속 움직여야 했고, 먹을 건 수렵으로라도 구해야 했고, 그러면서 적 추적자들을 피해야 했겠죠. 걸친 옷 밖에 아무 것도 없는 몸으로.”
그러나 어떤 보고서에도 이 실종자 세 명의 상태를 정확히 규정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3명은 아직도 실종자 명단, 그중에서도 ‘정확히 알 수 없는(unaccounted for)’ 상태로 올라 있다.
“필립스의 유해는 발견된 적이 없으며, 필립스 가족과 우리 친구들은 죽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영원히 안 믿을 것입니다.”
필립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필립스가 살아 있다. 바로 퀸시 국립묘지 시계탑을 통해서.
마그나렐리 :
“Well, Bobby,
it’s been a long time.
Fifty-two years and
you’re 10,000 miles from Quincy.
But welcome home, my friend.”
[끝]
첫댓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초기 m-16 버전이 기능고장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초창기에 M-16은 총기수입을 안해도된다고 잘못 이야기가 돈것이 재밍이 많이 된 이유 일부라는 말도 있더군요
절대절명의 순간에
총기 고장이라니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