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7.18.수. 정상진 선생. 기독교침례교회(구원파) 수요 성경공부. 비디오 강의. 인터뷰. 김 교수 이야기. 안예카치리나 할머니댁. 위장 아프고 눈 치료. 내년까지 죽지 않고 있으면 꼭 내 집에 오오. 상대적. 선범, 내 목 뒤 런닝셔츠 속에 몰래 물을 부어 넣는 장난. 차갑기는 했으나 반가웠다. 어릴 때 참으로 많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기억하냐니까 기억한다고 했다. 장남한테는 그렇게 못했는데,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이 둘째한테는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고 그런 편이다. 우리 아버지가 늦게 낳은 막내여동생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둘째한테 비슷하게 그런다. 자꾸만 스킨쉽을 하려고 하거나 장난을 치려고 한다. 내 막내동생은 그걸 싫어했다가 나중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많이 울었었다. 내가 그렇다. 둘째아들한테 핀잔을 들으면서도 스킨쉽을 못해 안달이다. 대부분 거부당하기 일쑤이지만, 그래도 함께 있기만 해도 이쁘고 좋은 아들. 부자간의 정, 짝사랑과도 같다. 그래서 내리사랑이란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놈이 알면 다 지우겠지만, 이놈의 모습을 몰래 다 찍었다. 잠자는 모습, 책상에 앉은 모습 등등. 이놈이 하는 말까지 몰래 녹음했다. 돌아가서 아내한테 보여주고 들려주어야지.
2007.7.19.목. 알마티감리교회 아침기도회에 참석. 6시30분부터 1시간. 찬송. 요한복음 한 장씩 나누어 읽어가며 약간의 해설 더하기. 각자기도하기. 아침 먹은 후 8시 40분쯤 목사님 형제분과 함께 드디어 알뜽오르다 도살장 구경 가다. 도살장에 들어서니 한참 양과 소들을 잡는 중. 양 두 마리가 날 잡아잡수 하는 자세로, 그야말로 꼼짝않은 채 누워 있다. 이윽고 도살꾼이 칼을 들어 그 목을 길고도 깊숙이 찌르는데도 가만히 있다. 목에서 붉은피가 흐른다. 그래도 여전하다. 피가 어지간히 흘러나온 후, 마침내 칼로 목을 잘래내기 시작한다. 목이 거의 다 잘라내질 무렵, 그때야 양의 뒷다리가 버둥댄다. 아마도 신경과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나 타나는 현상 같다. 소는 달랐다. 저쪽 대기실에 서 있다가 도살장 안으로 몰아넣으려는데 버티며 안 들어오려고 한다. 앞발에 힘을 주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자 앞에 있는 사람이 잡아끌고 뒤에 있는 사람이 힘껏 밀어부쳐 겨우 겨우 도살장 안으로 들어섰는데도 계속 버티며 그 자세로 후진하려 한다. 나는 사진 찍느라 못 봤는데, 목사님이 보니, 순간적으로, 도살꾼 하나가 줄을 소의 다리에 걸어 확 당기자 소가 힘없이 쓰러지더란다. 그 다음 장면부터는 나도 보았는데, 쓰러진 소의 목에 칼을 들이대어 일자로 길게 찌르니 빨간 피가 뿜어져 나왔다. 찌른 부분의 목이 가위 입 벌린 것처럼 벌어지면서 수도꼭지의 물같이 핏줄기가 솟구치기도 하면서 콸콸 흘러나온다. 그러면서 그 목 부분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크게 나기 시작한다. 반쯤 잘린 그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 한참이나 그 소리가 났다. 소가 몸부림치는 바람에 피가 내 바지와 잠바에 튀겨 왔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아주 진한 피는 아니다. 나중에 목사님 말씀으로는, 물이 섞인 피란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물과 피를 쏟았다더니 짐승이 죽을 때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모양이다. 신기한 일이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려고 나오니, 우리에서 도살장으로 가는 그 죽음의 100여 미터 길에 며칠 전 늦게 왔을 때와는 달리 소와 양이 들어가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문지기가 있어서 몇 마리씩 집어넣고는 입구를 막곤 하였다. 이미 대기하고 있는 소들을 제끼며, 두 청년이 서너 마리의 양을 몰고 도살장 입구 문에 도달하였다. 양의 뒷다리를 들어 질질 끌며 도달하였다. 아마도 소들이 있어서 그냥은 전진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질질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문 앞에서 한 마리씩 문을 열고 집어넣는데, 나머지 양들은 눕힌 대로, 눈을 뜬 채 꼼짝 않고 누워있었다. 그러자 안아 세워서 그 도살장 안으로 넣자 반항 한 번 안고 순순히 들어간다. 그리곤 아까 내부에서 내가 본 것처럼 도살꾼의 칼에 찔려 피흘리고 죽어가겠지. 소를 들여보내는 것은 미처 보지 못했다. 아마도 이미 들여보낸 소와 양 도살해 고기 다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런 듯했다. 우측 우리마다 양떼와 염소떼가 가득 차 있었다. 1년된 양이 작은 줄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제법 컸다. 어쩌다 작은 양이 있어 물으니 6개월 되었다 한다. 그렇게 어린 양도 도살장에 끌려오다니 불쌍했다. 우리는 사진 찍으러 간 건데, 거기 지키는 사람들은 우리가 양 사러 온 사람으로 알아, 자꾸만 다가와 사가라고 한다. 양 우리에서 들려오는 양떼들의 울음소리, 초원에서 들었다면 참 평화로웠을 테지만, 그렇게 구슬플 수가 없었다. 소와는 달리 양떼들은 자기네가 곧 죽을 거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겠지? 아니지. 알면서도 그냥 순종 순응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대단한 구경을 했다. 교회 왔더니 그 소문이 퍼져서, 요진, 요인, 요엘의 차례로 사진 좀 보자고 한다. 보여주며 설명해 주었더니 신기해 한다. 주일날 어린이예배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란 제목으로 설교해야지. 엄청난 더위다. 선범이가 오전에 학교 가서 재학증명서 떼오고, 다시 교회 가서 영어교실 수업 듣고 오자마자 러시아어 과외를 받더니, 더위를 먹어 침대에 쓰러진다. 한잠을 자고 나더니 기운이 나는지 밥도 먹고 한다. 요 며칠 기록적인 더위라고 한다. 더 이상의 더위는 없을 거라 하니 다행이다. 재학증명서 영어로 번역하고 공증받기 위해 잔돈(2천텡게)이 필요해 알마굴시장에 과일 사러 갔다 오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나무가 우거졌는데도 이러니 나무가 없다면 어찌 견딜까 싶다. 그래도 이곳 알마티는 천산 덕분에 강우량도 많은 편이라 나무가 잘 자란다고 한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식당 테이블에 자리잡고, 금요 속회 설교준비도 하고 구운몽 개작작업도 하다.
2007.7.20.금. 살인적인 더위다. 교회 현관 온도계가 45도를 가리켰다 한다. 앞으로 50도까지 올라간다는 소식이다. 과거와는 달리 겨울에 눈이 적어지고, 여름에 이렇게 고온 현상에 습도도 높아져 견디기 어려운 날이 늘어난다고 한다. 선범이와 진짜루에서 점심을 먹고 알파라비길에서 63번 버스를 타고 중앙박물관 다녀오는데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버스 안의 모든 손잡이가 열기에 달아올라 뜨끈했다. 숨이 턱턱 막혔다. 길을 걸을 때 그늘이 아니면 견디기 어려웠다. 오후에 야외속회가 있어, 시간이 촉박해, 중앙박물관 구경은 자세히 할 수 없었다.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설명을 들으면서 봐야 할 일이다. 대충 보았으나 우리 나라 중앙박물관에 비하면 정말 빈약했다. 동식물 박제해 놓은 것도 전시해 놓고 있었으며, 화석 자료들을 그냥 노출상태로 두기도 하여 걱정스러웠다. 왜 이렇게 빈약할까? 이 나라와 민족의 독립적인 역사는 12세기부터인가라고 하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의 역사나 문화는 대단한 것이다. 2층에 올라가니 각 나라의 문화를 보여주는 코너들이 있었고 한켠에 우리나라코너도 있다. 장승, 사물놀이악기, 밥상, 전통촌락 등등을 그림이나 미니어처, 사진 등 여러 형태로 보여주고 있었다. 러시아코너가 역시 가장 풍성하였다. 전쟁 관련 사진과 물건들이 아주 강조되어 있는 인상이었다. 집에 들어와 샤워한 후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기운 차린 후, 목사님 차 타고 알마라싼 계곡으로 야외속회(사랑방모임)로 떠나다. 한참을 올라가니 우편에 카작 전통 가옥인 유르타들이 즐비하다. 물어보니 우리 식당이나 카페 같은 곳이라 한다. 여름에 피서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집이란다. 우리가 자리잡은 곳은 맑고도 차가운 얼음물이 흐르고 욜까라는 독일가문비나무가 울창한 바로 옆의 공터였는데, 전혀 덥지 않다. 산 아래와 산 위, 산 속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떠날 때 사모님이 전화하기를 “긴팔 준비해 오세요” 하여 무슨 말씀인가 했더니, 저녁이 되어 으슬으슬해질 때 알았다. 초가을 날씨였다. 모기도 없었다. 그 맑은 곳에서 싹싸울 나무 뿌리를 태워 그 숯불로 삼겹살을 구워 먹는 맛은 기막혔다. 싹싸울나무 뿌리는 워낙 단단해, 가로로 놓고 도끼질하면 도끼가 튀어오른다고 한다. 세로로 놓고 찍어야만 한단다. 한번 불 붙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불이 붙으면 연기도 거의 나지 않을 만큼 완전연소하는데, 우리 장작불과는 달리 새벽까지 그 옆에서 정담을 나눌 정도로 오래 간다고 한다. 고난을 당하거나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그렇게 단단해질까? 그 인격의 영향력이 진하고 오래가는 걸까? 싹싸울나무뿌리, 매번 나를 생각하게 한다. 말씀 전하라는 목사님의 요청에 순종하여, 우즈벡 고려인의 구전설화 <화재 : 벙어리 며느리>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거기 담긴 복음적, 신앙적, 성경적 메시지 두 가지에 대해 말씀 나누었다. 첫째, 공평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벙어리요 귀머거리이지만 시력좋은 눈을 주고 놀라운 관찰력과 호기심 주어 온 동네 사람들의 소식을 가장 먼저 보고 아는 은사를 주셔 그 재미로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 어찌 그게 며느리만의 감사조건일까,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함부로 남 무시하지도 말고 못났다고 스스로 열등감 갖지도 말자. 둘째, 며느리처럼 우리도 복음을, 내가 들은 소식을, 남들에게 유익한 소식을, 남들 살리는 소식을, 온몸으로, 며느리처럼 바디 랭귀지로, 삶 전체로 전해야 한다. 밤에 송라브렌티 씨와 통화되었다. 고려인 작가. 강제이주를 소재로 한 희곡 <기억(추억)>으로 유명한 분이다. 우리말이 서툴러 의사소통이 어려웠는데, 정상진 선생님께서 중간에서 전화해 주셔서 해결되었다. 나 귀국한 후 안창현 선생에게 작품들을 제공해 주기로 했다. 정상진 선생님 정말 고마운 분이다. 식사 대접이라도 하려고 했으나 바쁘다며 사양하신다. 나중에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이 한국에 몇 달간 초빙할 수도 있다니 그때 꼭 모셔야겠다. 안 선생 말을 들으니 작고한 박일 교수(까즈구대 철학과)와 정상진 선생 두 분은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인 지주라고 한다. 모두가 존경하는 분들이란다. 그분들하고 함께 걸어가면, 그분들 옆에만 있으면 고려인 분들의 도움을 모두 다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단언한다. 부러운 일이다. 그런 인격과 덕망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 일만 해도 그렇다. 90 고령으로 보나 과거 경력으로 보나 문단의 위상으로 보나, 60대 송 씨에게 내 일로 일부러 전화해서 부탁을 한다는 것 아무나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무 이득도 없는 그 일을 해주셨으니 대단한 분이시다. 인터뷰할 때인가, 내게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난 늘 강조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카작 나라와 카작 민족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 <감사>, <감사>뿐이라고.”
2007.7.21.토. 밤새 비가 내리고 구름이 끼어 한결 견딜 만했다. 월요일 새벽 6시 10분 비행기니 3시 30분에는 집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목사님께서 공항 나오시는 것 아무래도 부담일 것 같아 걱정이었는데, 진짜루에서 소개해 줘 3000텡게로 콜택시 예약했다. 가능하면 남에게 신세지지 않아야 한다. 불가피하다면 신세 지되 반드시 갚아야 한다. 한국 갔다 오신 김 장로님이 점심 같이 먹자고 해서, 한우리에서 한참 이야기하다 안 선생, 선범이도 불러서 진짜루에서 점심 먹다. 아주 귀국할 생각도 했었으나 40여일 금식기도하는 중, 뿌린 복음의 씨앗을 거두기까지 하라는 응답을 받고, 다시 들어왔다고 하셨다. 내년 8월에 박넬리 학과장과 함께 12명의 외대 한국어과 학생들을 데리고 한 달간 한국에서 체류하며 서울과 지방 나들이, 기업체 견학, 교회 방문 등을 시킬 계획이라 한다. 왕복 비행기 티켓값만 부담하면 나머지 숙식이며 모든 경비는 교회, 기업체 등의 후원을 받아 진행한다고 한다. 이번 한국행에서도 가족 일도 가족 일이지만 이 일을 위해 거의 모든 시간을 쓰신 듯하다. 내 이익을 위해서는 최소한도로, 남의 유익을 위해서는 발벗고 나서기, 이것이 기독인의 삶임을 몸소 보여주시는 분이다. 인천공항에서 짐 무게가 초과되어 고민인 상황에서, 아는 분의 부탁을 뿌리칠 수 없어 들어주다가, 정작 당신의 짐은 초과 비용 물어 우진트랜스로 보내고 남의 서류짐을 가지고 들어왔다니 알 만하다. 원래는 점심식사비를 김 장로님이 내려고 했던 건데, 우리가 들어설 때 먼저 와서 식사하다가 인사를 건넨 한국교육원 지 부원장이 이미 지불하고 나갔단다. 언젠가 지 부원장의 시부모가 이곳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김 장로님 댁에서 대접한 일이 있어서 그런 모양이라 한다. 그렇게 세상은 주고받으며 사는 곳이다. 남부터 배려하며 사는 것이 화평한 세상을 만드는 가장 현명한 길인지도 모른다. 우선은 상대방이 좋아하고 나도 즐거운 일이다. 조금만 손해를 보면 되는 일이다. 욕심만 줄이면 되는 일이다. 내일은 주일. 아침 10시부터 11시까지 신뾰뜨르 할아버지 살아오신 이야기 녹음, 11시부터 어린이예배 <어린 양 예수> 설교, 오전예배 드리기, 점심후 김마리아 할머니 댁 찾아가 살아오신 이야기 녹음하기, 7시 청기와에서 요진이 키멥 합격 축하 식사. 집에 와서 짐꾸리기(선물용 꿀 포함). 그러고 나면 내일은 글을 작성할 시간이 없을 듯하다.
첫댓글 휴.... 이교수님 글을 모두 읽었네요....이곳 까페 다른 방대한 자료보다 이글이 저에게는 현실적으로 와 닿는듯 하네요 ...알마티 가게되면 도움주실? 분들 상세히 소개해 놓은것 같아 감사 하구요.....까페 운영자님께 감사...(꾸벅) 이어지는 속편은 없나요?
이교수님 역시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