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유럽의 와인산업을 꽃피게 한 일등공신이 결국 로마 정복군이라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본에서 북쪽 디종을 향해 N74번 국도와 D122 지방도로를 따라 달리면 왼편으로 나지막한 산중턱에 발달한 그림 같은 포도원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이 길이 유명한 부르고뉴의 레드와인가도다. 와인 애호가는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 두근거리는 뉘-생-조르주, 본-로마네, 클로 드 부조, 샹볼-뮈지니, 모레-생-드니, 주브레-샹베르탱 마을이 모두 22km의 이 황금 언덕에 있다.그러나 이 지역도 기원전에는 한낱 야만인(골족)이 거주하는 황량한 자갈밭이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시저)의 <갈리아 전기>에 의하면 이곳 와인의 역사는 전적으로 로마군에 의해 시작됐다. 기원전 59년부터 9년 동안 갈리아(현재의 프랑스)를 통치했던 카이사르는 지금의 이 황금 와인가도를 따라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지역을 정복했고, 알자스 지방의 와인가도를 따라 게르만족을 라인강 북안으로 격퇴하였다.
한때 시토회 수도원 소유였던 클로드부조 포도원과 순전히 양조시설을 위해 16세기에 세워진 웅장한 클로드부조 성의 장관.
카이사르는 정복지에 와이너리를 조성하여 주둔군에게 와인을 공급했고, 일부 양질의 와인은 본국으로 보냈다. 지금도 대부분의 유럽 와인산지는 그 당시의 로마군에 의해 조성된 것이고, 그때의 로마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오늘날 유럽의 와인산업을 꽃피게 한 일등공신이 결국 로마 정복군이라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필자는 아침 일찍 본을 출발하여 기원전 카이사르의 군단이 행진했던 옛 로만가도(Roman Roadways)인 황금의 계곡을 달렸다. 아침안개 자욱한 알록스 코르통을 지나 약속시간에 맞춰 뉘-생-조르주에 있는 페블레 와이너리(Domaine Faiveley)의 본사에 도착하였다. 1825년에 설립되어 근 2세기 동안 7대에 걸쳐 세계적인 와인메이커로 발전해온 페블레는 총 13개 종류의 그랑크뤼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저온 장기발효와 숙성방법을 통해 부르고뉴 와인의 개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마침 수확하는 날이어서 자세하게 그랑크뤼 와인의 발효과정을 볼 수 있었다. 우선 손으로 일일이 수확한 포도는 무게로 인해 으깨지지 않도록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아 운반하며, 와이너리에 도착한 후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선별작업을 한다. 선별된 포도송이는 다시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파쇄기로 옮겨지며, 이곳에서 포도알은 부드럽게 으깨지고 줄기가 제거되어 발효통에 옮겨진다.
황금의 마을 본-로마네 모습. 이 골목을 나서면 오른쪽에 유명한 로마네콩티를 포함하여 부르고뉴 최고급 포도원이 모여 있다.
옮기기 전 특이한 점은 저온 발효를 위해 드라이아이스로 포도즙의 온도를 낮추는 것이었다. 저온 발효나 숙성은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피노누아가 가지고 있는 섬세하고도 복합적인 아로마를 충분히 발현시킬 수 있는 양조방법이다.
섬세하고 복합적인 저온 장기발효
발효란 당분에 효모(이스트)가 작용하여 알코올과 탄산가스를 분해시키는 화학적 메커니즘인데, 알코올 1%를 만드는 데 당분 약 17.5g/ℓ가 필요하다. 알코올 함유량 14%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도 25% 이상의 잘 익은 포도가 필요하다. 한 알의 포도에 당분과 수분을 제외하면 약 0.5%의 유기산, 타닌, 질소화합물과 무기질이 있다. 이런 물질에 의해 와인의 특성과 품질이 결정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페블레의 마케팅 담당 안 세실 여사의 안내로 테이스팅 룸에서 12개 종류의 와인을 시음했다. 그랑크뤼 레드인 마지(Mazis) 샹베르탱(2011)은 아직 젊지만 입에 꽉 차는 듯한 강건한 개성을 뿜어내고, 마시기 쉬웠다. 향후 5년 이상 숙성이 가능한 타닌의 수렴성을 느낄 수 있었다. 부르고뉴 와인을 발전시키는 데는 12세기부터 시토회 수도원의 공이 컸다.
그랑크뤼 와인 생산지 클로 드 부조(Clos de Vougeot)는 원래 이 수도원의 소유였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때 나폴레옹이 수도원이 소유하고 있던 이곳 50ha의 포도원을 몰수하여 일반인에게 나눠주었고, 현재는 소유주가 90명에 이른다. 그 결과 같은 클로 드 부조 와인이라도 와인메이커에 따라 품질이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한 병에 2만 유로가 넘는 로마네 콩티
광활한 포도원 가운데 와인 양조시설로 16세기에 건설되었던 웅장한 ‘클로 드 부조 성’이 있다. 당시 수도원의 세속적인 권력과 부를 새삼 절감할 수 있었다.
페블레 와이너리에서 시음한 12종류의 와인들. 용량이 375ml로 별도로 생산한 시음용이다.
클로 드 부조와 남쪽으로 인접해 있는 지역에는 작은 와인 마을이 있다. 와인애호가가 아니라도 세계인이 열광하는 황금의 와인, 로마네 콩티(Romanee Conti)가 있는 본 로마네(Vosne Romanee)라는 마을이다.마을 뒤편 골목을 지나면 서쪽 언덕배기에 이름만 들어도 황홀한 로마네-생-비방, 리쉬부르, 그랑드 뤼, 라타슈, 라 로마네의 포도밭이 로마네 콩티 포도밭을 여왕 모시듯 둘러싸고 있다. 로마네 콩티 포도밭은 유기농법으로 인해 잡초가 무성하였고, 마치 숯덩이처럼 검게 익은 포도송이가 늙은 포도나무 가지에 달려 있는 것이 특이하였다.그러나 포도알 하나하나가 유리구슬처럼 탱글탱글하게 뭔가 꽉차 있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비싼 땅과 포도라고 생각하니 묘한 감동이 일었다. 몇 년 전 파리의 유명한 백화점 와인숍에 들렀을 때 로마네 콩티 2005년산 한 병의 소매가가 무려 2만5000 유로였고, 이번 여행에서 확인한 2007년산 역시 2만 유로를 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예술품을 넘어 황금보다 더 비싼 액체가 아닐까?인간에게는 황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지만, 로마네 콩티 같은 와인은 어쩌면 처음부터 황후장상의 씨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땅이 단단해지는 것을 우려해 트랙터 대신 아직도 말이 끄는 쟁기로 밭을 갈고 있다. 1.8ha(약 5000평)에 불과한 포도밭에서 평균 50년생의 포도나무 3그루가 겨우 한 병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이렇게 탄생된 황금의 와인을 평가한다는 것은 난센스일지도 모른다.
페블레 와이너리에서 파쇄기에서 발효통에 옮기기 전 저온 발효를 위해 드라이아이스를 이용하여 포도즙의 온도를 낮추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필자는 몇 년 전 Wine MBA 동료들과 함께 시음했던 로마네 콩티를 회상하면서 이 와인을 영국 출신의 부르고뉴 와인전문가인 클라이브 코테스의 설명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비싸며, 항상 최고 품질의 와인, 가장 순수하고 귀족적이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피노누아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본보기다. 그것은 단순한 넥타가 아닌 모든 부르고뉴 와인을 평가하는 척도다.”코트 드 뉘 지역에서 샹볼-뮈지니는 벨벳처럼 우아하고 부드러우나 오랜 기간 그 향미를 뽐내는 그랑크뤼 와인을 생산한 지역이다. 황혼녘 이곳의 고즈넉한 시골마을의 풍경에 매료되어 미슐랭 가이드가 추천한 ‘르 밀레짐’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우리와 달리 유럽 여행을 할 때 대도시보다는 작은 시골 마을에 유명한 맛집이 산재해 있다는 것이 항상 부러웠다.필자는 다시 한 번 부르고뉴 와인의 진수를 맛보고 싶어서 본 로마네 그랑크뤼 에세조(Echezeaux) 2008년산을 주문하였다. 아직 젊어서 디켄팅(찌꺼기 제거)을 한 후 마셨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남성적인 강렬함과 여성적인 부드러움을 어우르는 균형의 풍미가 매혹적인 걸작이었다. 좋은 와인은 우리에게 단순히 감각적인 향기뿐만 아니라 때로 이성적인 삶의 철학을 선물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