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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산업혁명 초기에 농업혁명을 주도한 것은 젠트리 계층이다. 프랑스, 스페인, 독일, 러시아 등에서는 작위를 물려받지 못한후손들도 귀족 증서를 받아 법적으로 귀족 신분이 보장되었다. 가령 톨스토이의 경우 넷째 아들이었지만 백작으로 불렸다. 그러나영국에서는 작위를 받지 못한 차남 이하 자녀들은 비록 귀족으로예우는 받았지만 법적으로는 평민이었다. 심지어 장남이나 장손도정식으로 작위를 물려받기 전까지는 평민 신분이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현직 작위를 가진 귀족 숫자는 매우 적었다. 작위를 갖지 않은 귀족 출신 자녀들을 통칭해서 젠트리라고 부른다. 차남이하 자녀는 3대째가 되면 자연스럽게 젠트리가 되었다. 젠틀맨의어원이 바로 이 젠트리로 이들은 비록 작위는 없지만 평민들과 구분되는 신분이었다. 젠트리들은 영주에게 넓은 면적의 농토를 임대해서 농부를 고용해 대규모 농업을 영위했다. 젠트리는 소유한토지가 없었지만 재능을 발휘해서 영국 농업을 발전시켰고 영국산업혁명의 물적 토대를 구축했다. 상공업에도 종사해서 부를 일으킨 경우도 많았다. 일본에서도 장자상속제로 인해 차남 이하 출신들인 군인, 수공업자, 상인계층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3)근친혼
가문의 재산을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은 근친혼이다. 고대 로마나 고대 이집트도 지배계급에서는 근친혼이 일반적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동생과 결혼한 이집트 최후의 파라오다. 유럽의 합스부르크 왕가 등 대부분 왕가는 근친혼을 통해 가문의 재산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왕족과 귀족의 숫자를 줄여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무함마드 자손들은 사촌들과 결혼했고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는 부계 사촌과의 결혼을 법으로 권장했다. 골품제를 유지했던 통일신라시대에는 왕족의 근친혼이 많았으며 이 전통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왕족 사이에 근친혼이 성행했다. 이복누이와 결혼한 고려 4대 광종이 대표적이다.
유전학적으로 근친혼은 혈우병 등 유전병과 장애를 많이 일으킨다. 근친혼의 폐해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주걱턱이 유명하다.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제대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슈케나지유대인들도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이 많았는데 그로 인해유전병을 많이 않는다. 인류는 유전공학이 발전하기 이전에도 근친혼의 부작용은 알았던 모양이다. 구약성경에는 3촌 이내의 결혼을 금하고 있고 가톨릭에서도 6촌 이하의 결혼은 원칙적으로금지다. 중국에서도 이미 고대 주나라 때 종법이 확립되어 동일성씨 결혼이 금지되었다. 이후 한나라 시대에 유교국가가 되면서근친결혼 금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우리나라도 고려 중기부터 유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차츰 근친혼이 금지되어 14세기에는 근친혼 풍습이 왕실 내에서 현저히 줄었고 유교국가인 조선시대에 들어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렇게 근친혼의 부작용이 일찍부터 잘 알려져 있었음에도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지역에서 근친혼을 선택한이유는 권력과 부를 지속적, 영구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동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평민까지도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했는데, 로스차일드 가문이 대표적이다. 형사취수제도는 한편으로는 미망인에 대한 사회보장적 성격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구약성경의 신명기에도 형사취수제도를 율법으로 명하고 있다.
4) 가문 유지를 위한 인간 본능(P60)
가문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은 환관이나 승려 또는 유럽의 사제와 같이 결혼이 금지되어 있는 이들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가톨릭사제들의 상당수는 내연녀를 통해 자녀를 두었다. 초대 교황인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가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쳐준 기록이 나온다. 6세기 전승에는 베드로의 딸 이야기도 등장한다. 이렇게 초대교회에서는 대주교도 결혼에 대한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성직자의 결혼이 금지되기 전에는 교황 중에는 아내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펠릭스 3세, 하드리아노 2세, 요한 17세 등은 모두 결혼해서 자녀를두었다. 1139년 서방교회의 라테란 공의회에서 성직을 받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독신 서약이 결정된다. 그러나 제도는 제도고 본능은 본능이다. 독신 서약이 의무화된 이후에도 클레멘스 4세와 호노리오 4세는 결혼해서 자녀를 두었다. 정식 결혼을 하지않고 재위 이전에 사생아 자녀를 둔 교황으로는 비오 2세, 인노첸시오 8세, 클레멘스 7세가 있다.
자신의 가문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교황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르네상스 시기 교황 알렉산데르 6세다. 교황직을 주로 이탈리아 고위 성직자들이 차지했던 시대에 스페인 출신으로 교황에 올랐기 때문에 이탈리아 출신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한편으로 외교관, 정치가, 행정관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추었다는 평가가 교차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은 발렌티노 공작 체사레보르자다. 이 체사레 보르자가 속명이 로드리고 보르자인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이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을 교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알렉산데르 6세에게는 딸도 있었다. 그는 딸 루크레치아 보르자를 정략결혼에 동원했고 이을 통해 보르자 가문의 위엄을 높이려고 했다. 또한 교황직의 세습까지 추구했다. 인간이 가진 집요한 상속 본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