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다모를 제목으로 쌩뚱맞게 어만 노래를 했습니다.
처음엔 아다모의 인샬라를 자동으로 했습니다. 근데 지금 흐르고 있는 곡이 수동을 했더니
다음 곡으로 들을때마다 너무 번거러운겁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곡들은 재생하면 무한 반복으로 해놨습니다.
그의 기타 실력은 조부에게 배웠다고 합니다.
Salvatore Adamo
1943년 11월 1일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 코미소에서 태어났다.
1947년 광부로 일하던 아버지를 따라서 벨기에로 이주하였으며,광부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의 절대적인 희생으로 좋은 교육기관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던중에 12세 무렵은 교회의 성가대에서 노래 부르고 15세 때부터는 노래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조부한테 받은 기타를 치면서 그것에 곡을 붙여 혼자 즐 기고 있었는데, 학교 친구들이 권해 콘테스트를 받게 했다.
몇번 실패한 뒤 어떤 콘테스트에서 우승하고 레코드 회사와 계약, 62년 <쌍 또와 마미> (Sans Toi Ma Mie)의 대히트에 의해 스타가 되었다.
그 후에도 잇따라 뛰어난 작품을 쓰고 그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자기자신의 노래외에는 부르지 않는것으로 유명하다.
프랑스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또 불어로 많은 노래를 불렀지만 프랑스인들은 그가 뛰어난 가수라고는 생각치 않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일본에서는 우상적인 존재로까지 큰인기를 얻고 있다.
1962년 싱글 "밤의 멜로디 La Nuit"가 히트되어 널리 알려져 있으며 64년 당시 21세의 아다모는 벨기에 적십자사 창립 100주년 기념식장에서 왕과 왕비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당시 파올라공주를 위해(다정하신 파올라,Dolce Paola)를 작곡해 헌정하였다. 이어 1965년 9월 16일 파리의 올림피아 극장에 등단하여 22세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샹송 가수라면 꼭 등단하고 싶어 하는 무대에 선 것이다. 1966년 올림피아 실황을 담은 2집 Adamo a L'Olympia를 발표했다. 이때부터 단골출연자로 73년까지 모두 4회에 걸쳐 자신의 스테이지를 마련했고 그때마다 실황앨범을 출반했다.
아다모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풍부한감정은 그를 유럽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한 가수중 한명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벨지움으로 이민한 가수이다. 그의 첫번째 앨범 Vous Permettez Monsieus의 성공으로 그는 세계적인 가수가 되었고, 그 앨범은 팔백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세웠다. 아다모는 Victor Hugo, Jacque Prevert, George Brassers 와 Italian canzoetta와 tangoi의 영향을 받았다. 아다모는 Tombi La Neige, Sans Toi Mamie, Quand Les Roses등을 히트시켰다. 1980년대 이후 이렇다할 활동이나 히트작은 없으나 매년 겨울이면 어김 없이 국내 음악팬들에게 찾아오는 샹송 가수이기도 하다. 1990년 3월말에 그는 새로운 모습으로 파리에서 재기공연을 가졌고 1993년초 앨범 Reveur De Fond를 워너뮤직에서 발표하였다. 수록곡중 사랑에 대한 내용을 담은 Plus Fort Que Le Tenos, Cet Amour가 히트했으며, 올드 팬에게는 향수를 안겨주었다. (아~ 나도 어느새 올드 팬이 되버렸나,,) 사실 자료를 모집하다가 쌍 뚜아 마미 라든가 밤의 멜로디인 라네즈를 보면 아직도 귓가에 선선합니다.
Lamour Tm Ressemble (사랑은 당신처럼)
C'est Ma Vie (그것은 인생)
La Nuit (밤의 멜로디)
Le Ruisseau De Mon Enfance (그리운 시냇가)
Salvatore Adamo - Valse D' Ete (지난 여름의 월츠)
Inch' Allah - Adamo
아다모 노래중에 가장 히트작은 '눈이 내리네'이지만 그래도 이 노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노래가 끝나면 되감기를 수십번...그렇게 되감기가 귀찮아 60분짜리 테입 A,B판 전면 복사를 했던..
1966년에 아다모는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건국(建國)의 사적(史蹟)을 찾아가 매우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텔아비브 호텔의 한 방에서 이 <인샬라>를 썼다고 한다.
아다모가 의도하는 바는, 전투에 희생된 사람들의 진혼과 더불어, 적군과 아군의 구별 없는 평화에의 소망이었으나, 이 노래는 아랍 제국의 반감을 샀다.
이윽고 1967년 6월 중동 전쟁이 일어나자, 마치 아다모의 예언이 적중한 것과 같은 상황이 되어, 프랑스를 비롯한 이탈리아와 독일 등에서도 대히트하면서 유럽에서의 명성이 확고히 굳어졌다.
수많은 그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특히 뛰어난 곡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다모 자신의 노래가 정평이 나있고, 1978년에 재취입도 했다.
또한 가사는 4행시 10절로 이루어져 있으나, 너무 긴 때문인지 그후의 무대나 재녹음에서는 끝부분을 자르고, 1절을 부르고 있다.
나는 보석 상자 속에서 오리엔트를 보았네.
깃발이 되고 있는 달도 보았네.
그리고 그 빛을 세계를 향해 노래하려고 4행시로 엮어 보았네.
그러나 내가 예루살렘을 보았을 때,
바위 위의 개양귀비에 몸을 구부리자 진혼곡이 들렸네.
초라한 예배당이여.
땅 위에 평화를 달라고 속삭이는 그대들에겐 보이지 않는가?
새들이 그 날개로 숨기고 있는 '국경 위험'이라는 불꽃의 문자가….
길은 샘으로 통하고 있다네.
양동이에 가득 채우고 싶더라도 그만둬요,
마리 마를레느여.
그들에겐 그대의 몸이 물 만큼의 값어치도 없는 것이니까.
인샬라, 인샬라.
올리브 나무는 그 그림자에 울고 있네.
적지에 사로잡혀 폐허 밑에서 잠을 자는 상냥한 아내나 연인을 위해….
철조망 위에서는 나비들이 장미를 감시하고 있네.
사람들은 경솔하니까 내가 대담하게 하려고 하면 나를 거부할 테지만.
대리석 무덤을 갖지 않은 600만의 넋을 위한 진혼곡.
그 무덤은 더럽혀진 모래일지라도,
그들의 넋은 600만 그루의 나무를 돋아나게 한 것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