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밭에서
채화련
천 길 어둠 헤치고
둥둥 떠올라
스미지 않는 밀랍 되어
백리 오물 덮으려
제 가슴 펼친다
한 줄기 빛으로
어리는 연
고이 어미의 품으로 품더니
여의어
물 위에 떠가는 꽃잎
밤새,
연밥에 패어진 눈물 자욱
가을 오는 소리
채화련
며칠을 밤마다 두드리던
비가 그치고
가는 이와 오는 이 사이로
살포시 젖어드는 은행잎과
소소한 상념이 나부끼며
흩어지는 거리
저만치 바라보이는 하늘이
먼 수묵화 배경으로
어우러지고
살아있는 것들의 하릴없는 몸짓 위로
제 색을 드러내 맘껏 뽐내다
사라질 무상함이여
가을은 길섶으로부터 잦아든다
단조로운 박자로
오랜 빗소리처럼
이 가을
채화련
나지막한 풀벌레 소리가
어둠 타고 둑 따라 이어지니
희미한 가을의 손짓이더라
내가 그리는 선과 색
투명한 하늘에 가 닿으면
이내 파랗게 물들어지겠지
달무리로 감싸면
여름 짓무른 상처 아물수 있을까
바람에 수놓으면
들꽃으로 송송이 피어날거야
익어가는 내음을 사랑하는 우리네 삶이
들판의 풍경으로 정겨워지면
발밑에 차곡차곡
가슴 절절한 시어가 될거야
이 가을
누가 詩를 종이에 적는가
흔적
채화련
속절없는 마음 설은 때는
후리지아 한 묶음
창가에 놓아두고 싶다
아득히 먼 곳일지라도
그대 있음에
바람 향기 실려 달려가고 싶다
반생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영영 잊지 못하고
죽음보다 더 멀리 달려가건만
안개 속 그대 모습 지워져 가고
문득 카나리아 울음
문 두드리거든
그대 흔적 찾아
먼 길 떠난 거라 여겨주세요
배롱나무
채화련
우리 푸르게 만나
하루를 백일같이
백일을 하루같이
마주 보며 사랑하리라
그리운 숲길
도란도란 웃음소리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톡톡 번지는 꽃망울
입가 꽃주름 고이 접히다
추억은 나무 그림자로 짙어드니
백일을 읊었던 사랑의 노래
배롱나무 걸려 아롱지네
별
김형범
사랑합니다
어던 것도
그대를 대신할 수 없어
나
그냥저냥
살아갑니다
꽃
김형범
그대는 꽃입니다
무슨 꽃인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쉼 없이 피고 있습니다
그대는 향기입니다
어떤 향인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혼미하도록 다가옵니다
그대는 바람입니다
어떤 바람인지 알 순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그대의 바람이
늘 나를 흔듭니다
꽃 따러 갔다가, 꽃 따라 가버렸지요
김청수
동생은 세상에서 겨우
백일을 살다가 갔지요
세상 더 먹은 나는 살아남아
철딱서니 없이 이 골목 저 골목 쏘다녔지요
어미는 꽃 피는 봄날,
꽃 따러 갔다가
꽃 따라 가버렸지요
우리 어머니
손놀림, 그렇게도 빨랐다더니
좋은 솜씨 칭찬도 자자했다더니
흰 명주 옷 입고
하느적 하느적 나비 되어 날아가 버렸지요
병원 침대에 누워서
눈에 밟히는 어린 새끼들 남기고
그 새벽 어둠에 말려 가버렸지요.
돌탑
김청수
언젠가는 아무데서나 뒹굴었어리
모가 나서 강물에 흘러내리기도 했으리
누군가의 돌팔매가 되어 피를 흘리기도 했으리
험한 세상 건너라고
징검다리로 강을 건너기도 했으리라
칼 같은 마음 무디기 위해
오래 강을 흘렀으리라
그러나 오늘 다시 긴장을 놓지 않고
한 단 한 단
서로의 어깨를 딛고
등을 짚고 일어선다
누가 건들면 쉽게 쓰러질 듯
바람 속에서 흔들리지만,
한 생애가
와르르 무너진다 해도
둥글고 부드러운 이마가 견고하다.
창포 항 문어잡이
김동원
동해 폭설이야 내리라면 내리라지
갈매기 콧등에나 내리라지
문어하면 봄 문어文魚라
붉은 물결 등대 너머 번지는구나
새벽해야, 수평선 화폭을 칠하라지
구름에 경심줄도 달아야지
물안개에 도래도 달아야지
총각 어부 처녀도 낚아야지
미끼는 가재가 그만이라
청어 내장 더 좋을 시구
아이쿠, 이놈 먹물 뿜는 구나
바다에 시를 찍 찍 갈기는 구나
반들반들 이마가 빛난 문어야
여덟 다리로 빨판으로
칭 칭 칭 저 아침 햇덩이 감아 올려라
격발
김동원
그 여자의 무릎에 누워 화경花莖을 들어서야만 했다. 다가서니 형形이 없구나. 하늘에 바람의 두 다리가 걸려 있다. 그렇게 번지거라, 붉은 언어여! 쪼개지리라. 장미의 격발擊發, 그 피의 흰 나비여! 추상은 추상의 거리만큼 아득한 순수. 꽃의 피살, 교활하구나 혀여! 멀어서 낯선 언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