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의 길을 걸어간 장군
임병식 rbs1144@hanmail.net
나름의 자부심인지, 프랑스 조르주 퐁피드는 묘지명에 '나는 사는 동안 내가 할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적어 놓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노벨상 수상작가인 극작가 버나드쇼는 이와는 다르게 비문에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다소 해학적 비문을 써 놓았단다.
이 두 사람의 비문을 생각하면 저절로 떠올려지는 인물이 있다. 바로 충무공 이순신장군으로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54년의 생애를 살고가신 분이다. 장군을 떠올리면서 두 묘지명을 떠올리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장군은 올곧게 살면서 나라를 구하신 분이지만 '내가 이리 살았노라'고 자화자찬하거나 '나 이럴 줄 알았다'고 자학하지도 않아서 그런 인생관이나 의식과 비교가 된다.
사실, 한 그루의 나무가 54년을 자랐다고 해서 거목의 반열에 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나무가 심어진 지 470년이 넘어서 지금까지도 발자취가 뚜렷하다면, 그 생애는 거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장군의 생애를 각종 서적을 뒤져서 돌아볼 적에 그야말로 간난신고의 삶, 지지라도 인덕이 없이 보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벼슬길에 들어서서는 못된 상사의 괴롭힘과 온갖 모함에 시달리고 끌어내리기에 골몰한 소인배들 사이에서 돌봐준 우군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겨우 한 두사람이 있었다면 서애 류성룡 선생과, 초창기에 파격적으로 벼슬을 올려준 선조임금 정도라고 할까. 하나 나중에는 선조임금 마저도 모략을 하는 같은 패가 되어 괴롭히는데 앞장섰으니 우군이라 할 수 없다,
장군은 이처럼 열악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나라를 구하는데 헌신했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서는 한산도대첩과 명량대첩을 이끌어 내고 이후에 벌어진 모든 전투도 승리를 거두었다. 그 과정에서 세 차례의 파직과 두 차례의 백의종군을 하는 기막힌 고비도 넘기게 되었다.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도 좌절하지 않는 건 오직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시기와 질투 속에서 묵묵히 소임을 하다여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인가. 장군의 벼슬길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적당히 아부하면서 부정과 비리를 눈감아 주었다면 넘길 수도 있는 일들이 그렇지 못하여 족쇄가 되었다. 하지만 장군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 부당한 명령은 과감히 거부하고 추호도 부정부패에 빠져들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고난은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없지 않다. 장군은 늦은 나이인 32세(1576년)에 출사를 했다. 무과에 급제하여 조그만 벼슬을 얻었다. 그것도 오지중의 오지인 함경도 동부비보의 자리였다. 여기서 임기를 마치고 훈련원 봉사직을 올랐으나 영광은 잠깐 이었다. 시련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훈련원 병조정랑 서익(徐益)이라는 자가 인사 서열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자기사람을 승진시키려고 하자 . 장군은 맞서서 단호히 거절했다.
아래 순위에 있는 자를 건너뛰어 천거한다면 당연히 승진할 사람이 누락되어서 공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장군은 누명을 쓰게 되었다.
장군이 발포만호(1580년)가 된 때였다. 5대 전라좌수사인 성박(成鎛)이 하루는 사람을 보내서 거문고를 만들려고 관아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가려고 했다. 장군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며 심부름꾼을 호되게 꾸짖어 내쫓았다.
“이 오동나무는 나라의 물건이다. 사사로운 용도로는 쓸 수가 없다. 본시 심은 뜻이 있을 테인데 어찌 오래된 고목을 하루 아침에 베어서 나랏일에 쓰지 않고 사사로이 취해 악기를 만든단 말이냐?”
엄히 꾸짖자 그 말은 즉각 보고가 되었다.
성박은 그 일을 가슴에 담아두고서 복수를 노렸다. 사람들에게 충무공은 버릇이 없고 무능하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그러고서 사감을 가지고 인사고가를 나쁘게 반영했다. 그 바람에 나쁜 소문은 진실처럼 퍼져나갔다. 하루는 어렵사리 복귀한 장군을 전라감사 손식(孫軾)이 능성(지금의 화순)으로 불렀다. 같은 패거리로 혼을 내주려고 장군더러 진(陣 )을 치는 도형을 그려보라 명했다. 정밀하게 그려내자 그때서야 악소문을 믿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헤칠 마음을 풀었다.
장군에게 가해진 음해는 집요하고 끈질겼다. 오동나무 사건으로 망신을 당한 성박에 이어 후임으로 부임한 이용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또다시 장군을 벌주려고 불시 점고에 나섰다. 관내 5관4포의 점검을 마치고 발포에 이르렀다.
그는 3명의 결석자를 문제 삼았다. 하나 이것은 형평에 어긋난 것이었다. 이미 다른 곳에서 수십 명의 결석자가 있는 것을 감추고 작은 허물을 따진 것이었다. 하지만 장군은 이미 그 명단을 입수한 터였다. 이를 좌수사의 수하가 눈치 챘다.
이용에게 귀띔을 하기를.
“발포의 결석자가 3명이고, 4포의 결석자가 훨씬 많은 것을 만호가 아는데 만약 장계를 올린다면 뒷날 해로운 영향이 있을까 저어됩니다.”라고 하자 수사는 깜짝 놀라서 장계를 되찾아 오라고 한 일까지 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뇌물을 바치지 않고 고분고분 하지 않는데서 생겨난 일이었다. 하지만 어찌 사람이 다 같은가. 벼슬이 높다고 하여 인격이 높아진 것도 아니다. 사람 나름인 것이다.
아무튼 하늘은 장군을 단련시키려고 했던 것일까. 못된 상사들과의 악연은 멈춰지지 않았다. 서익이 또 함정을 파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는 군기차관이 되어 발포에 나타났다. 그는 앙갚음을 하려고 ‘군기를 전혀 보수하지 않았다’며 파직을 상고해버렸다. 이는 장군이 생애 첫 파직을 당한 일이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586년, 장군이 함경도 군산만호로 부임한 때였다. 함경병사 이일에게 장군이 여진족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 수차례 병력보충을 건의했다. 그러나 묵살했다. 장군은 다른 곳의 장수가 죽어나가고 병력 손실이 많은 중에도 경흥부사 이경록에게 도움을 청하여 적을 물리쳤다. 그리하여 백성 60여명을 구출해 냈다.
그런데 적반하장으로 병력보충을 묵살한 이일은 자기의 과오를 감추려고 흉계를 꾸몄다. 이에 장군이 단호히 말했다.
"내가 힘껏 싸워 적을 물리치고 백성 60명을 구출하고 돌아왔는데 그 전쟁이 어찌 패전이라 할 것이며 또 군사를 더 배치해 달라고 몇 번이나 청했으나 불허한 공문서 서목이 내 수중에 있으니 조정에서도 죄가 결코 나한테 있지 않음을 알 것이요."
이렇듯 장군의 23년간의 군 생활은 파란만장했다. 이는 장군이 전라좌수사와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으면서 원균 등에게 당한 모함을 제외한 그 밖의 핍박이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서 세상을 올바르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느낄 수 있다. 그런 무리들과 물들지 않으려고 얼마나 고심했을까. 장군이 공익이 아니고 정의롭지 못한 일에는 결코 눈감지 않았음은 어떤 각오와 사명감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점이 훌륭하고 귀이다.
장군은 군율을 다스리는 대는 엄격했지만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피란민을 거두어 둔전에서 농사 지으며 살게 한 것이나, 아들 면(冕)이 명량대첩 한 달 후에 죽자 코피를 한 되나 쏟으며 비통해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인장지덕(人長之德) 목장지패(木長之敗)라 했다. 큰나무 옆에서 자라는 나무는 피해를 보지만 큰 인물 옆에서는 덕을 본다는 것이다. 실로 장군이 계셔서 나라가 보존되고 백성들이 살아남았음이다. 장군은 복무 중에 수많은 모함과 질투를 받았지만 그러면서도 굽히지 않고 소인배의 길이 아닌 대인의 길을 걸어간 행적을 보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다. (2015)
첫댓글 요즈음의 우리 공직자들이 본받아야 할 올곧은 성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입신양명에 눈이 멀고 시기와 모함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소인배들로 인하여 나라가 위기에 빠지고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가 싶습니다. 지식과 기술을 쌓기 전에 먼저 사람다운 사람을 기르는 교육이 강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올곧은 사람 곧 충의지사들은 평온하고 안락한 생을 누리지 못함은 세상에 선보다는 악이 넘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신의 영달에 연연하지 않고 공익과 정의를 위해 대쪽같이 처신하신 공께 삼가 경의를 표합니다.
충무공에 대한 자료를 읽어보면서 장군이 우리민족의 성웅으로 존경받은 바탕이 단순히 임진왜란시 23전 23승이라는 전무후무한 전과를 올려 나라를 구했기 기 때문만은 이님을 알았습니다. 소인배들의 끊임없는 괴롭힘을 견딘 끝에 우뚝선 인물로 탄생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분도 이 글만은 꼭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이순신장군은 하늘이 우리 민족에게 보내준 구세주와 같은 분입니다.
위란지계에 그 토록 일편단심 애국 애족 했으나, 세차례 파직, 두 차례 백의종군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아무리 시기하고 질투한 무리가 많아도 이 나라 호국의 자랑스런 거목이 되셨습니다.
장군을 모함한 서익 성박 원균 윤두수 같은 자들은 역사의 냉혹한 심판대 아래 저주하고 심판해야합니다.
결국 충무공이순신 장군은 이 민족 이나라의 태양 같은 인물이 되셨으니 이 어찌 통쾌하지 않으리요!
역사는 결국 사필귀정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순신장군이야말로 천세 만세 기려질 인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상급자로부터 가진 중상모략과 당했지만 사필규정처럼 정의는 반드시 이기듯 자신의 뜻을 펼쳐보였으니 참다운 애국자요 큰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갖은 중상모략과 거센풍파를 이겨내고 나라를 위해 백의종군하신 이순신장군이야 말로 진정한 영웅이고 존경의 대상이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청석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도 경중의 차이는 있겠으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살아오신 삶과 20년 가까이 지극정성으로 아내의 간병생활을 하시는 지고지순한 모습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옆에서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순신장군은 정말 성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선조의 속좁은 질투와 소인배같은 조정대신과 장수, 그들의 시기와 모함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라 구하는 일에 진력하셨으니 그런 장수는 전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나올것 같지 않습니다.
소군호선생님께서 저는 좋게 봐주시고 따스시니 더 없는 우군이고 마음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