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숙 개인전 SEO, YOUNG SOOK
2014. 4. 14(월) ▶ 2014. 4. 20(일)
Opening 2014. 4. 18(금) 6:00pm
===안산 단원미술관 제2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충장로 422(성포동) | T.031-481-0504
[해설] 원형적 인간 그리고 자연의 흔적으로부터 / 사이미술연구소 이승훈
인간과 자연의 근원 혹은 원형에 대한 탐색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서영숙 작가의 최근 작업은 ‘자연 풍경’(Landscape) 시리즈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대상이 점차 일상의 자연을 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의 초기 작업에서 ‘문명의 기원’(Origin) 시리즈를 통하여 보여주었던 거칠고 상징적인 형식으로 표현 한 방법은 어느 정도 일상적 자연의 형상 안으로 순화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인데, 이러한 변화는 단색조(Monochrome)의 풍경을 거쳤던 과정을 볼 때 작품들은 최근 좀 더 시각적으로 화려해 진 것 같으며 시각 형식상의 변화가 그 동안에 일정하게 이행되어 왔음도 알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의 작업에서 주목하여야 할 부분이 그의 시각적 형식상의 변화보다는 그가 일관되게 작업해 오고 있는 그의 작업 과정과 그 방법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주로 어떤 형상이나 대상을 붓으로 묘사하고 그려내기 보다는 색깔 별로 여려 겹의 물감 층을 만들고 이를 깎거나 긁어내며 형상을 만드는 방식으로 작업을 해 왔다. 이는 마치 조각이나 판화 작업과 유사해 보이기도 하지만 여러 겹의 표피층을 직접 화면에서 깎고 긁어내서 색과 형상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회화와 조각 그리고 판화의 특성 사이에서의 중간적이고 혼합적인 작업 방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판화에서 판이 물감이 종이라는 매개체 옮겨지면서 간접적인 표현 방식으로 바뀔 때의 일부 완화되는 느낌과는 달리 그의 작업 결과물에서는 판 자체의 물질감이 그대로 남겨져 있기에 직접적이고 촉각적인 물성이 느껴지는 특성이 있다. 물감의 안료가 캔버스 위에서 비스듬히 깎여지면서 표면의 색 밑으로 새로 드러난 밑색은 종이로 옮겨진 판화에서 느껴지는 색감이나 판의 요철이 종이에 찍혀져 느끼게 되는 착시적인 공간감과는 달리 직접적이다. 이것은 또한 회화에서 페인팅에 의해 칠해진 물감의 두께에서 오는 질감이나 물성의 느낌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색채의 경계 면으로부터 드러나는 선명함이 있다. 전체적인 화면에서 움푹 패이고 긁혀진 느낌이 그대로 잘 전달된다는 점에서 보면 기존의 스크레치 기법 이상의 목판화와 같은 질감마저 느끼게 된다.
그의 작업에서는 ‘색을 칠한다’라는 개념보다는 여러 겹의 물감 층을 목판화에서의 판을 만들듯, 혹은 목조각에서 표피의 나무 껍질을 깎아내듯 캔버스 위에서 여러 겹의 색깔의 지층에 대해 깎고 긁어내며 작업하기에 ‘조각 한다’라는 개념이 더 어울릴 정도로 여타 회화작업과는 다른 작업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서영숙 작가의 작업 방식의 기원은 그가 초기에 작업하였던 ‘문명의 기원’(Origin) 시리즈로부터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이때 그려냈던 이미지는 원시 석기시대의 ‘타제석기’이었다. 그런데 작가는 초기 작업에서부터 작업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작업의 방법을 원초적인 방향에서 수행하고자 그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당시 사용했던 방식은 기존의 채색 방식으로 작업을 하면서도 점선, 스크레치, 크렉처럼 무위적인 결과물을 얻기 위한 기법들이었는데 이러한 방법들은 작가에게 있어서 인간의 기계장치가 아닌 손을 통해 깎아내고 긁어내는 행위와 같은 가장 원초적인 감각을 경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문명 이전의 세계 즉 타제 석기를 만들었던 원시세계의 원초적 인간이 손수 경험했던 세계와 유사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후 자신의 작업이 기존의 ‘페인팅’ 방식 보다는 ‘조각’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리기’ 보다는 ‘만들어가기’라는 방식으로 점차 작업 기법에 있어서 작업 개념의 변화가 있게 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작가가 그려내고자 한 것은 인간이 지식이나 문명과 같은 이물질이 개입하기 이전의 원초적 상태에서의 원시적 인간에서만이 감각할 수 있고 발견할 수 있는 근원적 원형 그 자체이었기에 그가 당시에 발견하게 된 ‘타제석기’라는 모티브는 형상의 이미지의 차원뿐만이 아니라 작업의 개념과 작업 과정상의 기법의 변화도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작업의 방식은 이후 계속 그의 작업의 주된 표현 방법이자 작업의 태도가 되어 그의 작업을 변화하게 하는 동인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의 최근 작업에서도 그가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풍경과 같은 가시적 자연의 세계이지만 그가 실제로 관객에게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은 자연 이면의 촉각적이고 원초적인 인간 내면에 있음직한 인간 본연의 감각의 세계이며 자연과 인간의 원형적 세계 바로 그것일 것이다.
감각이라는 것은 언어보다 더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 커뮤니케이션 통로일 것이기에 작가는 문명이라는 도구에 마비된 현대인들의 감각에 눈뜨게 하는 원형적 풍경을 그려내 보여주고자 ‘타제석기’를 깎아내는 것과 유사한 원시적 행위의 감각을 기반으로 현대의 자연 풍경을 그려내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자연의 풍경은 태고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원형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대상일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자연의 풍경을 그려내는 것과 동시에 원시적 감각으로 스스로 깎아내고 긁어낸 경험의 흔적을 캔버스에 남기는 방법을 통해 작업을 보는 이들의 눈뿐만 아니라 몸에 말을 걸고자 하는 것 같다.
이러한 감각이 작가가 자연을 보고자 하는 방식이기에 그리고 그의 방식으로 자연을 만지고자 하는 방식이기에 작가는 그의 작업을 보는 이들에게 전달되는 감각의 영역 역시 시각에 머무르기 보다는 촉각으로 동시에 향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눈으로 하여금 자연을 보도록 만드는 사이에 어느새 몸은 자연을 만지고 감각하게 만들기 위하여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요소가 동시에 화면 속에서 겹쳐 보이게 만들고 있다.
타제 석기를 만들었던 원시시대의 원초적 인간이 느꼈던 방식과 유사하게 캔버스를 조각도로 깎고 긁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작가가 경험하게 되었던 느낌들이 그대로 흔적으로 남겨진 화면은 이제 작가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림을 그려낸 회화 작품이기 이전에 일종의 원초적 감각의 시간적 기록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결국 일상의 자연을 그려내면서도 동시대적 일상성 안에 내재해 있는, 그리고 그 장구한 세월 속에서도 불변하는 인간과 자연의 원형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곳에 침잠하기 위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원형적 모습이라 할 행위들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 원시적 감각의 경험을 그의 작업을 통하여 공유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지금도 그 흔적들을 남기려는 되새김질과 같은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