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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산다는 건 어떻게 사는 걸까?
아직도 태생에 기반한 집안 문제를 감당하느라 내가 원하는 일에 집중할 수 없다니... 억울하다. 이 억울함의 감정에 눌려 사는 내가 초라하다. 이 감정을 어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원한 적 없는 생을 받고 왜 나를 낳았느냐고 부모를 원망하는 어린 세대들에게 어떻게 감히 생을 끌어안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화두를 안고 지내던 여름 유투브 알고리즘이 데려온 EBS ‘자연의 철학자들’ 시리즈를 통해서 이 저자를 알게 되었다. 여우숲 학교 교장, 김용규 편을 보고 이 사람의 생각이 궁금해서 강의 영상도 찾아보고 마음이 끌려 도서관에서 이 저자의 책 세 권을 대출하여 후루룩 맛있게 읽었다. ‘숲에서 길을 묻다’는 첫 저서로 2009년 출간되었다.
평생을 나답게 살고 싶다고, 채워지지 않는 나를 향한 그리움에 늘 마음 한 켠이 비어있던 나날들. 하지만 정작 나답게 산다는 건 어떻게 사는 것일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 나도 딱히 그 답을 알지 못하겠다고 인정해야만 하는 씁쓸함이라니... 많은 이들이 그럴 것이다. 어제도 이젠 33살 직장인이 된 제자가 술 한잔을 걸치고 밤늦은 시간 전화를 걸어왔다. 자기 사업을 하겠다고 호기롭게 직장을 그만둔 친구와 한잔하다 그 친구가 던진 한마디에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낯설어졌던가 보다. “난 너 같이 대단한 놈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게 이해가 안돼.” 그랬다고 한다. 그럭저럭 직장을 다니고 연애하고 부모님과 불화하고... 결혼 앞에서 주저하고 있는 청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내가 나를 방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서성이다 청춘이 가고, 그렇게 늙어가다가, 정작 죽음 앞에서 기꺼워질 수 있을까?
자기의식이 있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보편적이랄 수 있는 이런 근원적 불안을 정면으로 직시하고 자기답게 충실하게 살아내기를 결단한 후, 생에 대한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숲의 지혜에 귀 기울이는 저자의 숲 이야기는 그래서 인문적이다.
IMF를 겪고 벤처 붐이 일던 시절 30대의 잘나가는 젊은 CEO로 살았지만 삶이 공허하고 행복하지 않아 주말마다 등산을 하다 40대에 급기야 고향 괴산의 숲으로 돌아와 숲과 공부와 강의를 인생의 버팀목으로 삼아 자기답게 살아내고자 하는 사람이다. 숲 공동체를 일구면서 ‘생태’와 ‘자기 경영’이 결합 된 생태경영 콘텐츠를 생산하여 오늘과는 다른 삶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하는 카피, ‘인생 경영 철학’, ‘희망, 더 아름다운 삶의 찾는 당신을 위한 생태적 자기 경영법’... 실용과 무위의 양 간극을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낯설면서도 참신하여 어찌 풀어가는지 흥미롭게 읽어갔다.
숲에 사는 자연인의 이미지와 달리 연극적 구성을 활용한 책의 목차도, 문체도, 글쓰기 방식도 미끌어질 정도로 체계적이고 군더더기 없다. CEO로 공적 세계에서 훈련된 합리적 태도와 자신만의 섬세한 서정성, 그리고 직접 관찰한 숲의 생태에 대한 묘사와 그로 인한 깨달음, 생태와 식생, 환경 관련 전문 지식 등을 동원한 구체적 사례가 잘 어우러진 대중적 글쓰기의 전범, 모범생의 글 같다.
목차를 소개하면...
프롤로그. 희망의 숲에 그대를 소개합니다.
1막. 태어나다: 선택할 수 없는 삶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2막. 성장하다: 내 모양을 만드는 삶(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3막. 나로서 살다: 나를 실현하는 삶(나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4막. 돌아가다: 다시 태어나는 삶(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에필로그. 그대, 마침내 숲을 이루십시오.
각 막을 거듭하며 저자가 들려주는 인생경영 철학은 그리 새롭거나 전복적인 지혜가 아니다. 어쩌면 그가 각 막의 막바지에 들려주는 조언은 조금은 진부할 수도 있는 관용적 지혜와 다름 없다. 그러나 이 책의 특별함은 그러한 관용적 지혜가 교장 선생님의 훈화처럼 당위적 강제로 뻔하게 와 닿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한 모범처럼 배어든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생에서 당면했던 인간 누구에게나 보편적이면서도 그의 생의 구체적 맥락 속에서 절실했던 질문을 숲의 생명체들의 생태를 겸손하게 관찰하면서 인간의 길만이 아닌 생명 일반의 길, 자연의 길에서 대답을 구했다는 점에 있다.
구체적인 숲의 생명체 각각이 살아내는 방식을 고요히 응시하고 자기 질문과 연결함으로서 자기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느낌, 그것도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살고자 하고 살아간다고 웅얼거리고 있기에 그가 숲에서 받은 감동에 나 역시 공명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은 숲의 생태에 대한 지식을 전함과 동시에 위로와 격려를 준다. 그리고 나도 숲으로 가고 싶다는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나만 들여다보지 말고 타자를 바라보자. 사람만 들여다보지 말고 풀도 나무도 그리고 그들이 창조한 공동체인 숲도 만나자.
하지만 저자가 부러운 것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를 알고 선택했다는 점이다. 취중에 길을 묻던 제자도, 지금의 나도... 결국 이 질문 앞에서 길을 잃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다. 무성히 키워왔다. 많은 가지를 펼쳤다. 어쩌면 지금은 떨구어야 할 때가 아닌가, 그래야 알게 되는 길이 아닐까? 그래서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떨구어야할까를 고민해야 할 때, 단순함 속에서 명쾌함을 구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언제 함 가을 낙엽지는 여우숲 학교를 방문해 보고 싶다.
각 막에서 발췌해 보았다.
1막. 태어나다.
생명 각자가 주체로서 살아갈 힘은 선택의 능력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생명체는 모두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 하지만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선택할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그것은 ‘태어나는 것’, 즉 ‘탄생’입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날 수 있는 생명체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또 자신이 나고 싶은 자리에 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가진 생명체가 있을까요? 절대 없습니다. 나는 이것을 모든 생명체에 부여된 ‘탄생의 불가역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형성되는, 바꿀 수 없는 관계들을 포함하여 ‘숙명’이라고 정의합니다.
어느 곳이건 숲은 숙명의 증거들로 지천입니다. … 인간에게도 그것은 숙명입니다. 인간 또한 나무처럼 부모의 몸을 빌려 어느 시간대에 태어나 그곳에서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 환경이 비옥하든 척박하든 태어난 자리에서 그의 삶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힘겨운 자리에 태어난 억울함이 있다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 혹시 그대도 살면서 태어난 자리가 억울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탄생의 불가역성이 가혹하다 생각한 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퍽 오랫동안 그런 분노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숲의 생명체들이 걷는 길을 보면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숙명이 지천인 숲이라지만, 생명 각자는 발아한 그 자리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들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나는 아직 주어진 자리가 억울하다고 분노하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이들이 만든 숲 공간에 머무르며 숲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를 좋아합니다. 나는 이들이 사는 곳에 ‘선택의 공간’이라는 이름을 붙여두었습니다. 좁은 환경이라는 제약을 이겨내도 조화를 찾아낸 그들의 선택이 아름다워서 생각해 낸 이름입니다.
다행히 숙명은 생명체 스스로 선택하고 운영할 수 있는 운명이라는 장치와 맞물리며 생을 구성합니다. 의도하지 않은 가난과 결핍과 고통을 만났을지라도, 운명은 그 제약 속에서 제 씨앗을 터트리고 꽃을 피울 기회를 허용합니다. 어떻게 그 기회를 맞을 것인가는 오로지 개별 생명체의 몫입니다.
이렇듯 숙명에 먹히지 않고, 오히려 숙명을 다스리며 자기 삶을 살아내는 것은 결코 낭만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들에게 그것은 차라리 지독한 선택입니다. 억울함과 분노와 절망에 머물며 자기 영혼을 썩게 하는 대신 차라리 통절한 전환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 전환은 거칠 것 없는 숙명을 타고난 이들의 모습을 부러워하고 따라하는 것으로 이룰 수 있는 느슨한 변화가 아닙니다. 나무들처럼 자신의 가지를 미련 없이 쳐내야 하는, 아프고 고된 일입니다. 수없이 시도하고 실패를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자기 씨앗게 담겨 있는 본원을 확인하고 그 힘을 믿는 일이며, 자신이 살아가야 할 ‘시대와 공간’을 아는 일입니다. 나를 아는 것, 내가 태어난 때와 그 여건을 아는 것, 그리고 생명체로서 내게 주어진 놀라운 힘을 믿고 끝까지 힘차게 살아내는 것! 이것이 생명이 주어진 자들이 할 일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가 주어진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삶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산꼭대기 바위틈이 주어지면 그곳에서, 거목의 그늘과 뿌리를 견뎌야 하는 곳이라면 역시 그곳에서, 물웅덩이 옆의 거친 경사지가 주어지면 또한 그곳에서, 강가 자갈밭 위의 한 줌 흙이 주어지면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제 삶을 시작하고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의 태어남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알고 수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생명 모두가 쉽고 편안하고 품위 있고 풍요로운 삶이 보장되는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자리와 삶만이 가치 있고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자본과 산업, 교육을 통해 수없이 그렇게 세뇌되어 왔지만, 쉽고 편안하고 품위 있는 자리만이 훌륭한 자리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저다운 모습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지요.
요컨대 하늘은 모든 생명에게 제 소용을 주어 이 땅에 보냅니다. 따라서 나 또한 우주적 소용이 깃든 존재인 것입니다. 생명 모두의 소용을 정하는 것은 오직 신의 영역입니다. 그것이 장대한 것이든 미약한 것이든 나에 의해서 수용되어야 합니다. 모든 생명의 역할은 다만, 그 우주적 소용을 믿고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자연의 모든 생명들이 하늘이 부여한 자리에서 제 삶의 뜻에 머리를 조아리고 평생을 제 힘껏 살아내듯이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해야 합니다. 아직 나의 소용을 모른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삶은 그리 짧지 않습니다. 떡잎이 어린 줄기를 만들고 가지를 만들어 새로운 삶이 시작되듯이 우리의 삶도 그렇게 시작될 뿐입니다. 그 어린 나무가 다시 줄기에서 가지를 내고 잎을 내며 거목으로 생장하듯이, 또한 하늘에 닿으려는 과정에서 무수한 고난과 시련을 만나 마침내 제 모양을 이루듯이 우리의 삶도 부단한 시작의 나날이 모여 자기를 완성하는 과정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곳이 사막처럼 느껴질지라도 그곳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숲은 그렇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삶을 수용하지 않고 열 수 있는 하늘은 없고, 시작하지 않고 넘을 수 있는 벽은 없습니다. 거목 아래에서 자라는 신갈나무가 하늘을 여는 방법이 그러하고, 커다란 벽 앞에 선 담쟁이 덩굴이 벽을 넘는 방법 또한 그러합니다.
2막, 성장하다.
식물은 이렇게 매일 빛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공평하게 비추는 햇살을 생명 저마다의 처지와 환경에 맞게 맞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그렇게 자기를 자라게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도 그래야 합니다. 사람도 꿈을 좇아 살아야 행복의 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빛을 잃은 모든 생명이 그 순간부터 시들 듯이 꿈을 잃은 사람도 그 순간부터 시듭니다. 겪어보니 꿈을 품고 산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자기를 닮은 꿈 하나를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기를 권합니다. 이왕이면 우리의 꿈이 빛을 탐하는 식물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식물들에게는 과한 꿈이 없습니다. 나무와 들풀은 오로지 자신을 꽃피우려는 꿈, 그래서 어떻게든 열매를 맺는 것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유를 증명하려 합니다. 나무는 숲을 지배하려는 욕심을 품지 않습니다. 들풀은 제 자리가 아닌 곳을 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는 꿈도 그렇게 나무를 닮아서, 들풀을 닮아서 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로지 자기다움에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생명체에게 꿈이란 하늘 한 자락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을 갖는 것임을 우리 모두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간직하는 꿈이 자립적이고 호혜적인 것이면 더 좋겠습니다. 나무와 들풀의 꿈은 언제나 자립적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독립영양생물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녹색식물은 지구를 순환하는 물 조금과 대기의 약 0.03퍼센트를 차지하는 이산화탄소 조금을 받아들인 후 빛의 마법을 빌려 스스로 영양물질을 만듦으로써 스스로를 실현해 온 생명체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토해내는 산소로, 또 그들이 생산한 각종 영양부능로 다른 생명들이 숨을 쉬고 밥을 먹습니다. 결국 그들이 자립적으로 살아가며 피우는 꽃과 잎과 열매와 육신에 우리를 포함한 수많은 종속영양생물이 하루하루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하루하루 태양을 경배하며 살아가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꿈도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들처럼 나답게 독립적으로 살면서도 그 삶이 이 세상을 더 맑고 아름답게 할 수만 있다면, 사람마다 이루어내는 세상은 얼마나 맑을까, 눈부실까, 그리고 배부를까... 생각하곤 합니다.
나무는 좀 더 저다운 모습을 만들고 자기의 영역을 얻고자 새로운 시도를 키우겠지만, 그중 아주 많은 모색들이 폐기되거나 상실의 흔적으로 남게 됩니다. 인간은 그러한 흔적을 실수나 실패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나무의 삶이 보여주듯이 그러한 모색의 결과로써 제 삶의 모양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 자발적 선택이었든, 아니면 의도하지 않은 운명이었든, 장엄한 오늘을 이룬 나무들의 뒤안길에는 늘 버리거나 잃어야 했던 모색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라는 생명체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수많은 시도와 모색을 하고, 때로 실패와 손실을 감수한 뒤에야 그리워하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공들여 뻗었던 소중한 잎과 가지를 버리거나 잃어야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나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버림과 상실 없이는 이어질 수 없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 모색의 결과로 따라오게 될 수많은 실책과 용도 폐기를 무용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나무가 버린 가지와 낙엽이 땅을 뒹굴며 썩어감으로써 삶의 자양분이 되듯이, 덕분에 삶이 다시 튼튼해지고 성장하듯이, 우리의 삶도 실책을 통해 나를 만나고 성장하도록 짜여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자라며 버려야 하는 많은 것들이 어쩌면 저답지 않은 것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혹은 이 공간과 이 시대, 또는 내 이웃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운명의 한 부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거목을 이룬 모든 나무가 그렇게 모색과 버림과 상실의 시간을 살아냈으을 알아야 합니다. 거목을 부러워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걸었을 수많은 비틀거림의 길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숲의 나무가 그러하듯이 삶은 모색과 버림과 상실을 통해 이어지는 것입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쌓은 모색과 버림과 상실 중 아름다움이 깃들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숲의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경쟁에 대한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숲은 타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숲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오직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요, 새로운 영역의 창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핏빛 대지에서 영혼을 고갈시키며 앞을 다투는 경쟁이 아니라, 나만의 푸른빛이 가득한 공간에 서는 것. 감히 추한 욕망이 넘보지 못할 가지만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 타자를 파괴하여 하늘을 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낡은 나날을 부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 경쟁의 요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천박함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내고, 아름다운 경쟁으로 더욱 푸르러지는 세상을 그리워합니다. 오늘도 나는 이 숲에서 그날을 그리워합니다.
생태학자들은 이러한 숲의 경계 영역을 임연부라고 부릅니다. 이 임연부가 있음으로써 숲 전체는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경계의 땅은 생물종의 다양성이 매우 높은 곳입니다. 그들의 생산 활동 또한 활발한 곳입니다. 경계는 숲에서 흘러내리며 이탈하는 물과 영양물질을 한 번 더 잡아두고 활용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또 물의 흐름을 늦추로 토양의 유실도 막아줍니다. 결국 이곳은 인간의 정주 환경에도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해줍니다. 그러니 이 경계의 땅에 참으로 오묘한 저마다의 삶이 있고, 전략이 있으며, 그것으로 생명공동체는 더욱 푸르러집니다. 따라서 경게야말로 수많은 기회가 열려 있는 동시에 지극히 위대한 자연 순환의 공동체적 법칙이 살아 있는 땅인 것입니다.
경계지대를 찾아 제 삶을 살아가는 생명들을 보노라면 우리 모두가 제 꼴을 찾아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키가 작고 여린 풀이나 딸기나무 관목들은 숲의 중앙부를 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차라리 숲의 경계지대를 택합니다. 그곳에서 각자 제게 맞는 전력으로 위험을 피하며 자신을 꽃피우는 삶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또한 서로가 서로를 살찌우는 선순환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지금 세상은 모두에게 주류의 삶을 살라고 합니다. 모두가 숲의 한복판에서 가장 큰 키를 키우고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워야 훌륭한 삶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숲의 한가운데를 ㅏ지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중심이 되기를 원한다면, 세상은 더욱 치열하고 각박해질 뿐입니다. 모두가 주류라 부르는 삶을 살 이유도 없습니다. 누군가는 그토록 아름다운 경계의 길을 걷도록 태어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저 저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저답게 자라고 저다운 꽃을 피우면 족합니다. 그것으로 각자는 행복하고, 생명의 공동체는 더욱 풍요롭게 지속되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뜻이 분명 그곳에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언제나 경계의 삶을 즐거워합니다.
3막. 나로서 살다.
그들의 안식은 어쩌며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제입니다. 여름네 저마다 키워낸 성장의 증거들을 알몸으로 보여주며 나무는 서로를 살찌우기 위한 공간을 창출해냅니다.
그들이 서로를 위해 부를 쌓는 방식은 낙엽으로 잎을 떨어내는 것입니다. 나무들이 낙엽을 만드는 것은 더 깊은 안식에 드는 의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축재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낙엽은 숲의 모든 식물들이 생장에 쓰고 남은 잉여가치입니다. 질소와 인산과 칼륨처럼 소중한 영양소는 몸속으로 다시 회수하여 저장하고 탄소를 중심으로 하는 부차적인 양분들은 잉여가치로 잎에 남겨둡니다. 식물들은 그것을 숲 바닥에 떨어뜨림으로써 다시 생장의 계절에 쓰 거름을 만듭니다. 수많은 미생물과 지렁이와 곤충과 이끼 등 다른 생명들이 그들을 덮고 매만지며 살아갈 것이고, 결국에는 이를 흙으로 되돌려놓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흙 속으로 돌아간 양분을 흡수하며 해를 잇는 자신의 욕망을 펼칩니다. 이렇게 낙엽은 식물 각자가 출자하여 만드는 공동 은행과도 같습니다. 벌거벗은 나무들의 키는 봄과 다르고, 그 다른 만큼이 그들의 성장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로 남을 뿐입니다. 오로지 그것만이 자신의 부로 남고, 폐기하는 낙엽들은 서로를 위한 부조가 됩니다. 따라서 가을의 숲은 온통 축재의 축제입니다. 두발자전거로 계속 질주해야 유지되는 것이 인간의 방식이라면, 숲의 방식은 낙엽들을 통해 벌이는 ‘축재의 축제’라는 바퀴를 하나 더 둔 세발자전거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숲은 느리지만, 훨씬 더 안정되게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지속하고 있는 셈입니다.
4막. 돌아가다.
이렇듯 나무의 주검 속에는 항상 새로운 생명이 깃듭니다. 그곳은 무수한 생명들의 집이고 식탁이고 사냥터이고 놀이터입니다. 나무들은 항상성을 잃고 주어진 삶을 정리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푸석푸석 썩어가는 그들의 몸은 누군가의 은신처요 사냥터요 놀이터였다가 비와 바람을 만나면서 아주 천천히 흙으로 되돌아갑니다. 흙으로 되돌아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들은 모든 것을 내어주어 다른 생명을 부양합니다. 썩어가는 나무가 물을 머금어 축축해지면 이끼들이 그 물기로 배를 채우며 자라게 됩니다. 이렇게 자란 이끼는 나무의 죽음에 생기를 더합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크고 작은 생명들을 부양하고 숲을 지키는 나무들은 자신의 일생과 주검 모두를 흙에게 바칩니다. 모든 나무의 죽음이 풍성하고 숭고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더하여 나는 사람이 죽음을 맞는 자세 또한 나무를 닮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묘지 안에 갖혀 영원을 꿈꿀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도 누군가를 위한 ‘만신창’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누군가는 바로 대지요, 다른 생명들일 것입니다. 나무의 삶이 그러했듯이 결국 우리의 삶도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은 모든 생명들에게 죽음을 통해 그 빚을 갚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나무들의 그 빚을 갚으며 한 줌 흙으로 소멸하듯이 우리의 주검도 그러해야 합니다.
죽음을 자기 자신의 완전한 소멸이거나 알지 못하는 영역으로의 이동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 죽음은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마땅한 길을 걸어 삶의 끝에 도착한 이에게 삶은 결코 미련으로 남지 않을 것이며 죽음 또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것입니다.
내 오두막 옆에 잠든 어르신이 보여준 것처럼 죽음은, 우리가 빚을 졌던 이 별로 고요히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들을 위해 흙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이쪽의 삶이 닫히고 저쪽의 새로운 소임이 열립니다. 두여월할 것은 오히려 살고 있으되 살아 있음에 철저하지 못하고, 죽음의 때에 이르러서도 그 죽음에 철저하지 못한 우리의 삶입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일은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삶과 죽음의 기회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