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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호 남간 행록에 보면 정묘호란 병자호란에 의병을 모의한 기록 이 있고 이 격문은 1624년에 써진 것이다.
○ 남간은 평생 병약한 몸으로 살았는데 직접 의병에 가담하여 출 정한 것을 보면 전투의 목적 보다는 策士의 역할을 한 듯하다.
○ 정묘 詩나 병자 詩가 바로 義兵 策士의 머리에서 나온 아닌가.
◯이괄의 난 역사적 배경과 개요를 보면
1623년(광해군 15) 서인계의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등과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이괄 등은 반정을 위해 사모군(私募軍)을 이끌고 홍제원(弘濟院)에 모였다. 그런데 총지휘자로 추대되었던 김유(金瑬)가 사전 계획 누설을 이유로 소극적으로 행동하자, 이괄은 이를 비난했다. 따라서 반정에 성공한 후에도 김유와의 관계가 불편했다. 인조 즉위 후 서인들은 반정공신인 공서파(功西派)와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로 갈려졌고, 공신들의 사적군사력이 그대로 유지되자 '훈신군관'에 대한 비난이 높아졌다. 공서파들은 정권 안정을 위해 대북·소북 인사의 처형과 반역음모 적발에 힘을 기울였고, 자기파 중심의 논공행상을 함에 따라 非西人이자 무관인 이괄은 한성부판윤(오늘날 서울시장)에 머물게 되었다. 이어 후금(後金)의 성장으로 인해 북방문제가 심각해지자 이괄은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평안북도병마절도사 겸 부원수에 임명되어 영변으로 출진했다.
그런데 1624년 1월에 문회(文晦)·허통(許通)·이우(李佑)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전(旃)·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이에 기자헌·현집 등을 문초했으나, 역모에 대한 단서는 잡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공서파들은 이괄이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두렵게 생각하고 일단 아들 전을 서울로 압송하여 문초하려 했다.
이에 이괄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아들 전을 압송하러 온 이들을 죽이고 역시 서울로 잡혀가는 한명련을 구해내어 "군측(君側)의 악을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월 22일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을 선봉으로 하여 1만 2,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이괄군은 도원수군과의 충돌을 피하여 영변-자산(慈山)-상원(祥原)-평산(平山)-개성의 진격로를 택했다.
이괄군은 황주신교(黃州薪橋)에서 정충신과 남이흥(南以興)의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긴 후, 평산(平山)이 경비가 엄함을 알고 봉산 고읍(古邑)에서 전탄(箭灘)을 건너 샛길로 진군하여 마탄(馬灘:예성강 상류)에서 또 관군을 대파했다. 이괄군이 개성으로 진격함에 따라 인조는 공주로 피난 갔고, 2월 11일 반군은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여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고, 관원을 배치하여 새로운 행정체제를 세웠다.
한편 각처에 방을 붙여 도민(都民)의 마음을 안심시키며 생업에 충실할 것을 당부했다.
이때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길마재[鞍峴]에서 진을 치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반란군의 공격에 응전했다. 2월 11일 이괄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길마재를 포위·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밤에 수구문(水口門:지금의 광희문)을 나와 광주(廣州)로 향하다가 관군의 추격으로 완전히 흩어졌다.
이후 이괄·한명련이 2월 15일 이천(利川)에서 부하장수 기익헌과 이수백에게 죽음을 당함으로써 난은 실패했다.
이괄의 난은 대내적으로 수도의 함락, 국왕의 몽진(蒙塵) 등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공신세력 내부의 갈등의 노골화, 어영청 등 군영재편을 초래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이 후금으로 도망가 남침(南侵)의 야욕을 자극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의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괄도 본래는 인조반정의 공신인데, 공신들 간의 패권 다툼에 급기야는 역적으로 몰리게 되는 역사를 보니 참으로 안타깝다. |
募義都有司進士羅海鳳等。(모의도유사진사나해봉등)/모의도유사 진사 나해봉 등은
傳檄于道內諸君子。(전격우도내제군자)/도내의 모든 군자에게 격문을 전합니다.
嗚呼。(오호)/아!
彼逆适負天地卵育之恩。(피역괄부천지난육지은)/저 역적 이괄은 알을 품듯 길러 준 은혜, 하늘과 땅에 빚을 지고 있음에도
肆陸梁吠主至毒。(사육양폐주지독)/방자하게 날뛰며 지독하게 주인을 짖는 개가 되어
至於稱兵邊圉。(지어칭병변어)/변방의 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며
將犯京邑。(장범경읍)/서울을 범하기에 이르렀으니
則在欒士臣民者。(칙재란사신민자)/가름대 역할로 모범을 보이는 선비, 신하, 백성들은
寧能哭殺而不效寢皮之策乎。(영능곡살이불효침피지책호)/어찌 울음으로 이를 죽일 수 있으며 적의 가죽을 깔고 앉을 대책을 세우지 않겠습니까.
<해설>
○도유사(都有司)는 향교ㆍ서원 따위의 사무를 맡은 우두머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의병을 모으는 募義 사무를 보는 우두머리란 뜻이다.
○란육지은(卵育之恩)은 알을 품듯 길러 준 은혜.
○육량(陸梁)은 날뛰다,
제멋대로 날뛰는 것. 장형(張衡) 서경부(西京賦)에, “온갖 짐승이 날뛴다.[百獸陸梁]” 하였음.
○폐주(吠主)는 ‘주인을 보고 짖는 개[吠主犬]’라는 표현이 있다.
○변어(邊圉)는 변방, 변방의 지역
○경읍(京邑)은 서울
○란(欒)은 둥글다, 야위다, 모감주 나무, 가름대 의 뜻이 있는 바 여기는 가름대로 해석한 것이 타당함.
○침피(寢皮)는 가죽을 깔고
生等以爲今日眞我死日也。(생등이위금일진아사일야)/생 등은 오늘이 참으로 우리가 죽어야 할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唾手奮臂。(타수분비)/손에 침을 뱉고 팔뚝을 걷어붙이고
裂裳募義。(열상모의)/치마를 찢어 내걸고서 의병을 모집하나니
聚甲士略干。(취갑사약간)/군인 약간과
粮餉略干。(량향약간)/양곡 약간
兵器略干。(병기약간)/무기 약간을 모으고
戴頭直前。(대두직전)/머리를 처 들고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
突刃觸鋒。(돌인촉봉)/칼날에 부딪치고 칼끝에 베이고
爲王師顔行。(위왕사안행)/왕의 군사에 앞장이 되어
而誓虔劉一天之讎賊也。(이서건유일천지수적야)/한 하늘을 같이 하지 못할 원수를 죽이기를 맹세 합시다.
<해설>
○唾手(타수)는 “손에 침을 뱉고” 이다. 사람들이 큰일을 하기 위해 손에 기를 모우려 할 때에 약간의 수분을 손바닥에 칠하려는데, 그렇기 위해 침을 바르는 행동으로 기를 모운 모습을 보여 준다.
야구선수들이 타석에 들어 갈 때에 야구 방망이에 스프레이 하는 것과 같다.
○奮臂는 팔을 들고, 팔뚝을 걷어붙이고,
○裂裳은 치마를 찢어,
“裂裳募義(열상모의)/치마를 찢어 내걸고서 의병을 모집하니”로 해석해야 한다.
이 말은 치마를 찢어 깃발을 만들어 내건다는 뜻이다.
○甲士는 군인, 조선시대 오위제(五衛制)의 중위(中衛 : 義興衛)에 속했던 군인
○粮餉은 양식,
○略干에서 ‘略’이 어느 본에는 ‘若’으로 되어 있음.
○虔劉는 살육,
○讎賊은 원수, 왜적,
嗚呼。(오호)/아!
三軍易得。(삼군역득)/3군은 얻기 쉽지만
一將難求。(일장난구)/한사람의 장군은 구하기 어렵습니다.
故前直講林堜。(고전직강임연)/옛날에 전 직강 임연은
世襲忠義。(세습충의)/대대로 충의를 이어온 집이요
兼有智略。(겸유지략)/겸하여 지략도 있는데
而身在草土。(이신재초토)/몸이 상중(喪中)에 있어
以禮自固。(이례자고)/예의를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生等引陳大義。(생등인진대의)/생 등이 대의를 들어
反復開勤。(반복개근)/반복해서 부지런히 말하기를
一依死節臣故崔兵使慶會故事。(일의사절신고최병사경회고사)/옛날에 병사 최경회가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신하의 고사로
强奪其情。(강탈기정)/강제로 그의 생각을 돌려
使之登壇。(사지등단)/단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當於同月十六日。(당어동월십육일)/이 달 16일에
整旅啓行。(정여계행)/군사를 정돈하여 길을 떠나
爲諸道倡。(위제도창)/여러 도를 위해 앞장을 서려고 하노니
伏願諸君子。(복원제군자)/엎드려 원하옵건대 모든 군자는
振敵愾之氣。(진적개지기)/적개심을 떨치고
勵死君之義。(려사군지의)/임금을 위해 죽을 의기를 가다듬어
千里來應。(천리래응)/천리 밖에서 응하여 오니
一乎偕作。(일호해작)/하나 되어 함께 거사를 합시다.
則必見賊不暇走而當死咋矣。(칙필견적불가주이당사사의)/그러면 적은 달아날 겨를 도 없이 씹혀 죽을 것이 분명합니다.
大抵遣賊君父。(대저견적군부)/무릇 임금에게 적을 보내는 것은
罪之大者。(죄지대자)/죄가 큰 것이요
與賊俱生。(여적구생)/적과 함께 산다는 것은
恥之甚者。(치지심자)/수치스럽기가 심한 일입니다.
伏願諸君子。(복원제군자)/엎드려 원하옵건대 모든 군자는
寧作沙場上鬼。(영작사장상귀)/차라리 백사장 위의 귀신이 될지언정
而毋爲無義之人也。(이무위무의지인야)/의리가 없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해설>
○三軍은 좌군, 우군, 중군을 지칭한다.
○啓行은 앞장서서 인도(引導)함. 여정에 오름
○敵愾은 적에 대(對)하여 품는 의분(義憤). 적과 싸우려는 의기
○偕作은 힘께 가고, 함께 거사하고,
○暇走는 달아날 겨를,
○死咋은 깨물어 죽다, 죽어 가다, 죽는다고 소리 지르다,
○遣賊은 도적을 보내어,
○君父는 임금과 아버지, 여기서는 임금을 말함.
○寧作은 차라리 oo이 되다란 뜻.
□ 필자의 마무리 글
국가 위기에 의병으로 참가하는 백성들에게 충성심이 넘치도록 하는 것은 募義 檄文이다.
계곡 장유도 남간의 격문에 여러 번 찬사를 보내는 말을 했다.
남간의 필력은 시문에서뿐만 아니라 여하한 상황에서도 걸 맞는 위대한 문장을 지을 수 있는 대문장가임을 간파할 수 있다.
필자가 재벌 번역을 통해 남간의 글 밑바닥에 깔린 뜻을 위로 건져 올려놓았으니 누구나 그 뜻을 이해할 것으로 본다.
□ 임연(林堜)에 대한 小考
○지금까지 집필한 향토사 글 중에 임간이 소개되는 것은 석호정사 기록에서 동야(東野) 임연(林堜)이 언급 되었다.
○옛 기록에는 林堜을 임연으로 기록하기도 하고 어떤 기록은 임간으로 기록한 것이 보이는데, 임연이 정확한 한자인 것 같다.
임간으로 본 기록을 보면 한자를 임간(林揀)으로 표기하였는데, 간(揀)과 연(堜)이 비슷하기에 혼동을 한 것으로 본다.
남간집 초벌번역도 임간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를 임연으로 바로 잡는다.
□ 임연의 역사 추적
○ 나주임씨 소개 사이트에서는 선조22年 己丑(1589)- 인조26年 甲子(1564)의 인물로 소개하였으나 졸년도가 틀린 것 같다.
○ 임연(林堜/1589.7.26-1648. 10.11)의 자는 동야(東野)이며 호는 한호공(閒好公)이시며 본관은 나주이시고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신 임서(林㥠)의 장남으로 서기 1589년 7월 26일에 나주군 다시면 회진리에 태어나 1610년(광해군 2년) 성균관 진사가 되었고, 이로부터 3년 후인 1613년 계축년 증광시 문과의 병과에 합격하였다.
○ 나주임씨 소개 사이트에서는 관직에 몸담고 있는 것은 마치 새장 속에 갇힌 새와 어찌 다르랴 생각하여 오직 산수를 찾아 한인(閑人)이 되어 여생을 보내고 싶어,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영산강을 선유하면서 좌우 산세와 흐르는 강물의 조화를 이룬 영산강 서쪽 용금봉 아래 조그마한 별서(別墅)를 지어 당호는 만휴당(萬休堂)이라 하고 수년 동안 왕래했으나 지형이 그윽하지 못하고 즐길만한 곳이 못되어서 영산강 연안을 따라 상하를 두루 심토(深討)하시다가 1630년 가을에 드디어 사포와 몽탄 사이에 오묘한 곳을 찾았으니 나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영산강 중류요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배뫼마을이다.
이곳에 식영정(息營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영산강의 유일한 절경을 바라보면서 당시 명망이 높으신 주변의 인물들과 자리를 함께 하여 세사를 논하고 시를 읊고 여생을 보내던 중 인조 임금의 소명을 받고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주상을 모시고 남한산성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임무를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식영정에서 풍류를 즐기며 생활하시다가 1648년 10월 11일 여생을 마치셨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과연 이괄의 난 때에 의병의 지휘관으로 앞선 것인지 임연의 관직 생활을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로 정리하고자 한다.
① 광해군 11년 기미(1619,만력 47)/10월4일 (계축)
성현 찰방(省峴察訪) 임연(林堜)이 지난 9월29일에 하직하여 -이하생략
② 인조 5년 정묘(1627,천계 7)/11월19일 (임오)
임련(林堜)을 지평으로 삼았다
③ 인조 6년 무진(1628,숭정 1)/ 2월6일 (무술)
임련(林堜)을 장령으로 삼았다
④ 인조 10년 임신(1632,숭정 5) / 2월15일 (계미)
임간(林堜)을 정언으로 삼았다./ 한자로 보면 임간이 아니라 임연이다.
⑤ 인조 10년 임신(1632,숭정 5) / 3월12일 (기유)
임련(林堜)을 장령으로 삼았다.
⑥ 인조 14년 병자(1636,숭정 9) / 7월24일 (병인)
임련(林堜)을 사간으로 삼았다
⑦ 인조 14년 병자(1636,숭정 9) / 9월11일 (임자)
임련(林堜)을 집의로 삼았다.
⑧ 인조 15년 정축(1637,숭정 10)/ 4월27일 (병신)
임련(林堜)을 집의로 삼았다.
⑨ 인조 21년 계미(1643,숭정 16) / 7월13일 (갑진)
임련(林堜)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⑩ 인조 26년 무자(1648,순치 5) / 3월19일 (갑인)
임련(林堜)을 우승지로 삼았다.
□ 한편 승정원일기에서는
① 인조 계해(1623)/임련(林堜)을 정언으로 삼았다.
② 인조 계해(1623)/황해도 경시관(黃海道京試官) 임간(林堜)
③ 인조 5년 정묘(1627)/호조 정랑에 임련(林堜)
④ 인조 5년 정묘(1627)/예조 정랑에 임간(林堜)
⑤ 인조 5년 정묘(1627)/지평에 임련(林堜)
⑥ 인조 5년 정묘(1627)/직강(直講)에 임련(林堜)
⑦ 인조 5년 정묘(1627)/사예(司藝)에 임련(林堜)
⑧ 인조 6년 무진(1628)/임련(林堜)을 장령
⑨ 인조 6년 무진(1628)/임련(林堜)을 영암 군수(靈巖郡守)
⑩ 인조 9년 신미(1631)/임련(林堜)을 상례(相禮)
⑪ 인조 9년 신미(1631)/임련(林堜)을 사도시 정(司䆃寺正)
⑫ 인조 9년 신미(1631)/임련(林堜)을 사예(司藝)
⑬ 인조 9년 신미(1631)/임련(林堜)을 상례
⑭ 인조 10년 임신(1632)2월23일/정언 임련(林堜)은 현재 나주(羅州)에 있으니 속히 역말을 타고 올라오도록 하유하되....
⑮ 인조 10년 임신(1632) 3월12일/정언 임련(林堜)은 지방에 있으면서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⑯ 인조 10년 임신(1632)3월13일/장령 임련(林堜)은 지방에 있으니, 감찰(監察)이 다시(茶時)를 하겠습니다.
⑰ 인조 10년 임신(1632)/임련(林堜)을 부호군
⑱ 인조 11년 계유(1633)/필선 임련(林堜)
⑲ 인조 12년 갑술(1634)/장령 임련(林堜)
⑳ 인조 12년 갑술(1634)/임련(林堜)을 부호군
- 역사기록에도 간(揀)과 연(堜)을 혼동하여 기록한 것을 필자가 그대로 베낀 것이다. 임간이 아니라 인연이다.
○고문헌의 기록을 보면
①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癸亥靖社錄 >正言林堜
② 청음집/ 掌令임간
③ 시남집(市南集) >市南先生別集卷之八 >日記 >/余卽與輔德林堜
④ 지호집(芝湖集) >芝湖集卷之十二 >行狀 >/臣與林堜議此事。
⑤ 지호집(芝湖集) >芝湖集卷之十二 >遺事 >/適講官林堜。病不任行。
기록으로 본 임연의 벼슬은 화려하다.
문중의 기록으로 보면
예조정랑(戶ㆍ禮曹正郞), 상례(相禮), 필선(弼善), 보덕 겸 병자호란독전어사(輔德兼丙子胡亂督戰御史), 집의(執義), 사간(司諫), 사도시정(司導寺正), 사복시정(司僕寺正), 우승지(右承旨), 형ㆍ공조참의(刑ㆍ工曹叅議), 영암군수(靈岩郡守), 진주목사(晋州牧使), 원주목사(原州牧使), 남원부사 겸 토포사(南原府使兼討捕使)를 역임하였다.
○ 임연의 가계표
임평(林枰) (중종문과) |
임붕(林鵬) (명종문과) |
임복(林復) (명종문과) |
임서(林㥠) (선조문과) |
임연(林堜) (광해문과) |
임담(林墰) (인조문과) | ||||
임진(林晋) (명종무과) |
임제(林悌) (선조문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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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로, 형제간에 과거합격을 안행(雁行)이라 표현하는데, 대단한 가문이다.
대대로 나주에서 살았던 인물들이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서는 임동(林棟)으로 입력되어 있어 수정이 요구된다.
□ 故前直講林堜(고전직강임연)의 해석
故가 이름 앞에 붙을 때는 죽은 자를 뜻하는데, 1624년에는 임연이 살아서 활동하는 시대이므로 故를 “옛날에”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故가 원래, 본래라는 뜻이 있어, 본 글에서는 원래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원래 전 직강 임연은”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 같다.
초야에 묻혀 사는 전 직강 임연을 이괄의 난 토벌 의병 대장으로 초빙하는 문구인데, 1624년에 벼슬의 현직에 있었으며, 직강의 벼슬이 아닌 정언의 벼슬로 보아지는데, 이 부분은 앞뒤가 맞지 않다.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가.
1624년 이괄의 난 때에 벼슬은 정언 아니면 성현 찰방이었는데 말이다.
1624년의 벼슬을 보면 승정원 일기에서는 정언이었으며, 조선왕조 기록으로 보면 광해군 시절에 성현찰방을 역임하였었다.
직강의 벼슬은 인조 5년 정묘(1627)의 해이다.
필자가 추측컨대, 남간집의 원고 정리는 1638년 남간이 살아생전 때의 일이다.
남간집 원고를 정리하면서 격문을 손질하고, 그때에 임연을 전 직강으로 고쳐 써 넣은 것으로 추측되나, 이것은 추측일 뿐 격문 내용의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다른 고문헌에서 임연의 이괄의 난 때 의병 활동 기록이 발견된다면 수수께끼는 풀릴 것으로 본다.
필자가 지속적으로 숨은 자료를 찾아볼 것이다.
혹여 나주임씨 문중에서 자료가 있다면 제공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인조 26년 무자(1648,순치 5) / 3월19일 (갑인)자 기록을 보면, 임련(林堜)을 우승지로 삼았다 하였다.
이것이 임연의 마지막 벼슬인 듯하다.
그런데 나주임씨 종중에서 세운 임연의 비석에는 좌승지로 새겨져 있다. 우승지 다음에 좌승지까지 역임한 것인가(?)
□ 계간수창 책자를 보면
1994년도에 발간된 계간수창의 책자 말미에 인물소개가 있다.
여기에 소개되는 나해봉란에
“1624년(갑자)의 이괄 난에는 영광군수 원두표로 더불어 격문을 내어 의병을 일으키고 林直閣 堜과 더불어 군을 거느리고 나섰다가 적의 괴수가 잡혔단 말을 듣고 그쳤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직각은 규장각의 관직으로 정조 이후 때에서 생긴 것이니 이것도 맞지 않은 표현이다. 直講을 直閣으로 誤記한 듯하다.
다만 남간의 기록으로 보면 임연과의 의병 출병은 맞는 것 같다.
이 분야의 자세한 자료가 나주임씨 측에서 나오기를 바란다.
첫댓글 一依死節臣故崔兵使慶會故事。(일의사절신고최병사경회고사)/옛날에 병사 최경회가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신하의 고사로.....
충의공 최경회(崔慶會,1532~1593의 위패가 김천일 장군과 나란히 진주 촉석루 (창렬사)에 모셔져 있다 (맹렬히 싸우다 진주성이 무너지자 두분 다 남강에서 순절함)
의기 (논개)가 최경회의 첩이라 한다.
남이흥(南以興ㆍ1576∼1627)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 본관은 의령(宜寧
충장공은 23세 때 부친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무술을 연마해 27세인 1602년 무과에 급제한다. 정안현감으로 부임해 학정을 뿌리 뽑고(29세) 의주판관으로(33세) 3년간 변방의 적폐를 일소했다.
백사 이항복의 휘하에 들어가(36세) 부령부사를 제수 받고 부령진을 6진중에 가장 튼튼하게 만들었다. 진주목사로 나가(42세) 임란 때 허물어진 진주성(촉석루)을 중수했다.
이괄의 난 때 큰 공을 세워 일등공신에 책봉되고 숭록대부 종일품에 특별 승진됨
이렇듯 공을 세운 분인데 진주성 알림판에 생년이(?~1627 ) 제가 알려 주었음
(의령남씨 종친회에서....
남유(南瑜) 나주목사(羅州牧使) 증참판 정3품 증종2품 (참판(종2품) 남세건의손자...참의(정3품) 남응룡의아들)
남이공(南以恭) 이조판서(吏曹判書) 정2품(나주목사)
남이흥(南以興) 안주목사(安州牧使) 증영의정 정3품 증정1품 충장공 (나주목사(정3품) 남유의 아들)
彼逆适負天地卵? 夘; 누워 뒹글원)育之恩。則在欒?率:거느릴솔)士臣民者
82년 대동보와 틀린곳
남간집선(南磵集選) 南磵集選卷之一 文 討逆适募義檄 나해봉(羅海鳳) 1799년 b_021_360b
募義都有司進士羅海鳳等。傳檄于道內諸君子。嗚呼。彼逆适。負天地卵育之恩。肆陸梁吠主之毒。至於稱兵邊圉。將犯京邑。則在率土臣民者。寧能哭殺而不效寢皮之策乎。生等以爲今日眞我死日也。唾手奮臂。
裂裳募義。聚甲士略干。粮餉略干。兵器略干。戴頭直前。突刃觸鋒。爲王師顔行。而誓虔劉一天之讐賊也。嗚呼。三軍易得。一將難求。故前直講林堜。世襲忠義。兼有智略。而身在草土。
以禮自固。生等引陳大義。反復開勸。一依死節臣... 한국고전 번역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