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55
그것에서 진정으로 무엇을 보았느냐?
그것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그것의 어느 부분을 보았는가?
그것의 어떤 새로운 의미를 읽었는가?
대상과 현상의 어떤 면에 어떤 이야기가 안겨있는가를 들여다보려는 관심이야말로 시적 발화의 출발점 행동이다.
나는 평소에 포즈가 생각이고 공간이 생각이라고 믿는다.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에 따라 파악되는 내용이 다르다. 장미원에 있는 많은 장미 가운데 있는 한송이와 하얀 식탁보가 덮인 식탁에 놓여있는 장미 한송이가 다르고,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하는 5분의 시간과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는 5분의 시간이 다르다. 아침햇살 속에 있는 나팔꽃과 저녁 해거름에 있는 나팔꽃이 다르고 비오는 날의 나팔꽃이 다르다. 모든 대상과 현상이 시간과 장소,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보여지는 모습이 다르고 의미 또한 다르다.
폴 세잔이 같은 장소를 여러 각도에서 그림을 그렸듯이 시인이 사물을 보는 시각 또한 다르지 않다. 시인은 한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며 상상력을 발휘한다.
좋은 시는 늘 시의 안테나를 세우고 이런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김남조 시인은 ‘시는 시기심이 많다. 어쩌다 딴 짓하다 돌아오면 절대로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고 했다. 인내하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꾸준한 수련이 필요하다.
수련修練은 그 너머의 것에 대한 열망이자 열정이기 때문이다.
재즈가 순간의 느낌대로를 중요시 하듯이 시는 열정과 순간적 느낌의 결과물이다.
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적 의미 그 너머를 응시한다.
그래서 시창작은 마법이면서 혁명이라고 한다.
마법적 가치에 대한 긍정적 상상력(영감)과 혁명적 소망이 시세계를 완성한다고 했다. 시적영감詩的靈感은 신의 숨결이 불어넣어진 것을 의미하면서 예측되지 않고 기획되지 않은 것들과 만남을 통해 가능한 접맥이다.
세상에 존경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바람이 부는 것도 꽃이 피는 것도
어둠이 슬금슬금 산 그림자를 데리고 오는 것도
아침이 오는 것도
이슬 한 방울 톡 떨어지는 것도
사랑이 새처럼 지저귀고 꽃처럼 피어나는 것도
경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
통속적인 세상을 다 뒤적여도 낯설고 경이롭다
너무 통속적이어서
너무 평범해서 정겨운 그 말이 문득 낯설다
그 말이 진심이다
경이롭다
사람이 사람 속으로 흘러들 수 있다는 말,
비로소 세상이 맑아진다
들춰보면 마음이 빛임을 안다
예순이 이순耳順임을 안다 - 신병은 <이순耳順>
시는 아름다운 통찰이면서 아픈 통찰이다. 아픔도 아름답게 갈무리하는 순화작용이 있다. 그렇게 보면 시는 아픈 통찰 보다는 아름다운 통찰이다.
시적 통찰은 너를 통해 나를 보고, 나를 통해 너를 보는 서정이다.
그러면서 세상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고 다시 발견하는 과정이다.
좋은 시는 봄이 오면 봄을 느끼고, 목련이 피면 감동하고, 감흥하는 서정성을 잃지 않으려 하고 꽃이 피는 것으로 하늘의 뜻을 읽어내려는 통찰이고 통섭이다.
꽃이 피는 현상에서 바람도, 햇살도, 기다림도, 의지도, 견딤도 읽어낼 수 있다.
이 모든 게 알고 보면 ‘들여다보는 힘’의 결과다.
그 들여다보는 힘의 원천은 지식의 총량을 지칭하는 ‘스키마’다.
법정스님은 지식은 바깥의 것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지만 지혜는 안의 것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 했다.
기존의 정보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 들여다보는 힘이고 창작의 원리다.
앙드레 마르시앙은 ‘숲속에서 나는 숲을 바라보는 있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는 것을 느낀 곤 했다. 어느 날 나를 바라보며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바로 나무들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시인에게 혹은 바깥의 세상이 시인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에 빛나는 시 혹은 이미지가 섬광처럼 오는 것이다.
시인은 봄꽃 하나에 우주를 살피는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매일매일, 매순간마다 사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체험하는 사람이다.
봄이다
다시 봄이다
묵언의 힘으로 봄의 문을 연다
의자 위에 가부좌를 튼 햇살의 숨소리도 새롭다
새로운 햇살을 데리고
새 봄바람을 데리고
새 물소리를 끌고
새 잎과 함께 새 봄이 온다
봄이다
점심 때가 되어 꽃이 확 피었다
기적이다
그러자 한순간에
바람소리도 물소리도 이슬도 아침도 계절도 기적이다
하늘의 뜻이 지천에 난리다
꽃이 피는 것도
꽃이 지는 것도
기적이다 - 신병은 <봄, 피다>
시 쓰기는 삶의 지혜를 하나하나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 주변의 사물이나 현상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다. 재발견이다.
존재하는 현실로부터 존재해야 하는 이성적인 것들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현상을 통해 현상의 이면에 숨죽이며 떨고 있는 삶의 본질을 드러내는 사유의 힘이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본질은 하나가 아니고 진리 또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즉 공간성, 시간성을 갖는다.
시인은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대상과 현상에 숨겨진 삶의 의미를 발견해 내고 독자들은 또 한 번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숨겨진 이미를 이끌어낸다.
이때 서로의 정서적 의미가 만나면서 울림을 갖게 된다.
독자로 하여금 여백이 있는 삶을 전해준다.
공감이다.
공감에는 말의 채굴이라는 수련과정, 즉 말과 사물이 하나이기를 소망하게 된다.
말과 사물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는 시적의미가 아닌 일상적 의미다
말과 사물, 이름과 이름이 붙여진 것 사이의 융합이 이루어질 때, 그보다 먼저 시인이 자기 자신과 세계와의 화해를 요구한다. 그 화해의 매개가 상상력이며 마법적 가치이다.
이때 사물과 말은 인식의 재탈출이고 의식의 새로운 깊이를 이루게 되는 메타언어를 경험하게 된다.
수많은 좋은 향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 독한 냄새도
지키고 껴안으려는 모성적 향기다
가족들의 음지에서 늘 힘든 생을 사셨던
어머니도 그랬다 - 신병은 <은행나무 생존법>부분
공자는 오십에 지천명知天命하고 육십에 이순耳順 했다고 한다.
하늘의 뜻을 헤아리고 세계의 뜻을 헤아리는 마음도 알고 보면 자연의 뜻에 순종할 줄 알고 배려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시를 쓰는 마음이 곧 지천명知天命이고 이순耳順이다.
그것은 꽃의 마음을 헤아리고, 나무, 풀, 햇살, 바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이고 결국 나를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마음이다.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며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 순리에 따라 살게 되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공자의 마음이 곧 시의 마음이다.
얘야, 조금만 더 살아 보아라
강물은 강에만 흐르는 것이 아닐 거야
오래 정든 사람들도
멀리 떠난 사랑도
내 안에서 유유히 강물로 흐를 거야
겨울에도 따뜻한 깊이로 흘러
봄비 속 먼 기억들도
잘 살아 있었다고 무사하다고
가슴 가슴으로 강물이 흐를 거야
벚나무에도 은행나무에도 느티나무에도
웅크린 틈새 풀어 강물이 흐를 거야
영락없이 봄이 올 거야
모두가 봄일 거야
잘들 계시냐고
봄비 내려 새록한 연둣빛 안부
강물로 흐를 거야 - 신병은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