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14 높이13 너비3cm의 오석입니다.
좌대로 다리를 만들어 세우니 영락없는 소가 되었습니다.
순하고 어리석은 우리나라 소....
사냥꾼이 파놓은 구덩이에 떨어진 호랑이 이야기를 아시지요.
그리고 그 호랑이를 구해준 나그네가 처한 곤경에 대해서도 아실겁니다.
그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 합니다.
구덩이에 빠진 호랑이의 심정은 어땠을까 먼저 생각해봅니다.
처음 호랑이는 무척 당황스럽고 화가 났겠지요.
노여움에 가득 차서 온 산이 떠나가도록 포효를 질렀겠지요.
근처 동물들이 그 소리를 듣고 무서워서 오히려 그 구덩이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말이지요.
노여워하는 호랑이를 구해주고자 하는 미련한 동물은 없지 않겠어요?
그러다가 호랑이는 구덩이에 빠진 자신을 찬찬히 둘러보게 됩니다.
좁은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구덩이 속에서 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과거 위풍당당하던 모습을 기억해내곤 지금의 상황과 비교하며 서글픔에 잠기게 됩니다.
그러다가 구덩이 속에 파묻어 놓은 죽창에 발가락하나 안 다쳤다는 것을 알고는 누군가에게 모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햇볕 잠시 스쳐가거나 달빛 조금 드리워주는 것말고는 아무도 근처에 모습을 보이지 않자 쓸쓸함에 휩싸이기도 하지요.
배고픔이 편안한 마음을 앗아가면서 호랑이는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곧 사냥꾼이 나타나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생각에 어쩔 줄 모르고 좁은 구덩이 속을 서성이다가 죽창에 발을 찔리기도 합니다.
이제는 소리지를 힘조차 없습니다.
자기를 구해주는 자에겐 모든 것을 다해서 감사의 표시를 하고자 합니다.
그래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침내 자기를 구해주는 자,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속으로 결심하기도 합니다.
왜 이제야 나를 구해주느냐고요.
왜 선량한 마음을 품을 때가 아니고 말이에요.
(알라딘의 요술 램프 속의 지니가 그런 마음의 변천을 겪지요.)
그때 누군가가 다가옵니다.
올려다보니 자기를 구덩이에 빠뜨린 '사람'입니다.
화가 몹시 났지만 마음을 바꿔서 자기를 살려달라고 빕니다.
산 속 강자의 체면을 다 버리고 자기를 잡으려고 구덩이를 판 원수에게 말입니다.
나그네가 내려다 준 동아줄을 타고 구덩이 밖으로 나온 호랑이는 노여움의 표정을 어떻게 감출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보니 자기를 구덩이에 빠뜨린 사냥꾼은 아니지만 결국은 다 같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나그네는 자신을 구해줬다는 것으로 거드름을 피우려 합니다.
아니 뭔가 보상을 바라는 눈치입니다.
호랑이는 화가 납니다.
아니 너희 사람이 애초에 구덩이를 파놓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 곤경에 빠지지 않았을 거 아니니?
나그네는 소리칩니다.
아니 구덩이에서 다 죽어 가는 것 구해주었는데도 나에게 그렇게 대할 수 있니?
구덩이를 파 놓은 사냥꾼이 나와는 무슨 관계가 있다고,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줬는데 나에게 왜 그런 태도를 취하는 거니?
호랑이는 화가 나서 '배도 고픈데 너를 확 잡아먹을까 보다' 하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나그네는 기가 찹니다.
아니 자기를 구해준 은인을 잡아먹으려 하다니!
오냐, 네가 나에게 한 행동을 온 짐승들에게 알려 네가 이 산에 못 붙어있게 하겠다 라고 말하며 나그네는 주위를 두리번거립니다.
호랑이도 소리칩니다.
그래 좋다. 딴 짐승들에게 물어보자.
나를 곤경에 빠뜨려 놓고 다시 구해주는 척 하는 건 뭐냐.
네가 그래놓고 나에게 무얼 바라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니냐?
나그네는 소에게 달려가 물어봅니다.
소먹이를 챙겨주고 우리를 만들어 추위를 막아준, 사람이 은혜를 베푼 소에게 말입니다.
소는 오직 현재 사람에게 시달리는 것 밖에는 생각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먹이고 집을 지어줬더라도 오직 나를 부리기 위해서 나중에 잡아먹기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은 나빠' 라는 자신이 내린 명제 앞에는 어떤 다른 상황에 있든 사람의 입장은 전혀 생각해보고 싶지 않을 겁니다.
사람은 나쁘니까 그가 하는 모든 행위도 다 나쁘니까요.
소나무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내게 해 준 게 무엇이 있길래 자기 마음대로 솔잎부터 나무둥치까지 가져가는지 이해를 못합니다.
사람이 나쁘니까 무조건 사람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토끼는 오히려 호랑이가 두렵습니다.
산 속에서 사람에게 잡히는 경우보단 호랑이같은 맹수에게 잡힐 가능성이 더 높지요.
그러나 마땅히 사람의 행동이 옳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호랑이가 수긍하기 힘들뿐더러 그 이후 산 속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해관계 속에서 토끼는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는 것으로 사람의 편을 들어주는 것 같이 되어버립니다.
토끼가 결코 사람을 위해 상황을 처음으로 돌렸다고 보지는 않지만, 은혜를 모르는 호랑이는 다시 구덩이에 갇히고, 나그네는 곤경에 빠진 호랑이를 못본 척하고 다시 자기 길을 가는 식으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결코 결론이 나지않는 이야기를 '동화책'에서는 결론을 냅니다.
은혜를 모르는 호랑이는 잘못을 뉘우치고 나그네는 그냥 제 갈 길을 잘 가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게 다일까요.
호랑이가 그 후 과연 진정으로 자기 반성을 할까요.
비록 이전에 나에게 잘못 했더라도 지금 잘하면 그 과거의 잘못을 잊고 나를 구해준 은혜에 감사하는 게 당연한 걸까요?
괜히 선량한 마음에 호랑이를 꺼내주는 우를 범하여 어려움에 처하지 말고 앞으로는 아무리 상대방이 곤경에 처해도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는 게 옳은 걸까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죄를 범했는데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냐고 무시해도 되는 걸까요.
비록 다시 호랑이가 구덩이에 들어갔지만, 만약 호랑이를 구하고 보내줬다면 나그네는 나중에 사냥꾼에게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많은 경우 우리는 호랑이의 입장이 되기도 하고 나그네의 입장이 되기도 합니다.
일 예로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과거 자신들의 선조가 무슨 짓을 저질렀던지 간에 내가 안 그랬는데
왜 우리들이 너희들에게 잘못했다 고개 숙이며 매번 반성을 해야하느냐,
또 네가 구덩이에 빠진 것은 네가 어리석기 때문에 빠진 것이기 때문에
지금 나에게 으르렁거릴게 아니라 네 어리석음이나 빨리 고쳐라 라고 일본은 이야기하고
나를 구해준 것은 고맙지만
그건 네 선조가 구덩이를 파서 나를 곤경에 빠지게 한 것이기 때문에 너는 당연히 할 바를 한 것이고,
그때 떨어지며 다친 허리에 대해선
두고두고 물심양면으로 보상해야하며 앞으로도 계속 나에게 미안한 표정지어야 한다,
선조의 노력으로 인해 지금 배가 부르면 그 선조가 저지른 악행을 씻는 노력을 해야한다는게 호랑이 입장의 한국이라고 생각도 해봅니다.
물론 다소 과장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서로가 그런 왜곡된 과거사에 물려있다면 결코 사이좋은 이웃이 될 수는 없겠지요.
다른 예로 부자와 빈자의 관계입니다.
극단적인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의 시각은
지금의 부자는 가난한 자의 호주머니를 털어 된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현재 자신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경영주나 기업들을 적으로 생각하고 싸웁니다.
나를 이렇게 빈곤에 빠뜨리게 한 부자는 다 없애야 하고 나를 고용하여 먹여 살리는 사회 전반적인 질서를 뒤엎어야 한다고 봅니다.
호랑이의 생각입니다.
당신이 나를 먹여살리는 건 나를 이용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소와 소나무 입장이 되기도 하지요.
반면 부자나 고용주, 기업들은 직접 돈도 주고 일할 기회를 준 자신을 적으로 모는 노조나 빈자의 시각은 적반하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그네의 입장입니다.
다소 도식적인 예가 되지만 일상 생활면에서 우리는 지하철역 앞에서 쪼그려 있는 사람에게 동전을 던지는 나그네가 됩니다.
진정 그 사람을 위한다면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털어야 할텐데,
입고 있는 옷을 다 벗어주어야 할텐데,
내가 능력이 있다면 빈곤의 구덩이에서 벗어나게 도와줘야 할텐데,
우리는 고작 몇 푼의 돈을 던지고 약간의 마음의 짐을 덜어놓는 것으로 나그네에게 닥칠 위험을 피합니다.
돈을 주지 말아야한다는 또 다른 나그네의 논리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냥꾼의 도움을 받고 있으므로 정면으로 나서서 사냥꾼을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냥꾼 덕에 맛보는 고기맛을 때로 잊지 못하기 때문이죠.
내 마음 속도 그렇습니다.
어떤 어려움의 상황이 생기면 내 속에는 나그네와 호랑이가 생깁니다.
구덩이에 빠져 거친 논리를 감춘 못된 호랑이가
죽창에 찔려 피흘리는 발톱으로,
단순하지만 선한 나그네를 잡아먹겠다고 으르렁댑니다.
나그네는 구해 주고 나서도 욕을 얻어먹고 위협을 당합니다.
행복하게 살려는 나그네를
가치있게 살지못한다고 호랑이는 위협합니다.
그렇지만 호랑이를 반박할 논리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갑니다.
아주 호의적인 시간이 내게서 기억을 흐리게 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하여 호랑이를 고립시키지만
그러나 그러한 토끼의 해결방식이 해결점이 되지는 않아 보입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원점으로 돌아와도 해결되지 않고 안과 밖으로 반대로 꼬이는,
거친 논리의 발톱을 숨긴 용렬한 호랑이와
선량하지만 비겁한 나그네가 여전히 살아있으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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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 제가 하고자하는 이야기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요즘 시국에서 윤석열 정부가 호랑이의 태도와 닮았다고 하는 겁니다.
호랑이는 구덩이에서 나오자마자 돌변하여 나그네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라고 결론냅니다.
구덩이에서 빠져나왔으면 자신의 노여움와 배고픔을 이치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가장 확실한 해결법은 자신을 구덩이에 빠뜨린사냥꾼을 잡아먹어서 분노와 허기를 해결하는 거겠죠.
그러나 호랑이가 당장 사냥꾼을 찾아나설 용기와 지혜가 없다면 차선의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내가 배가 고프다, 내가 화가 났다 라는 이 두가지 욕구를 분리할 줄 모릅니다.
눈앞에 닥친 딱 한가지 욕구, 당장 눈 앞의 너를 잡아먹야겠다 가 다입니다.
그렇게 결론을 미리 내놓고 나중에 연역적으로 논리를 갖다 붙입니다.
먹잇감을 잡느냐 놓치느냐 라는 이분법적인 행위만 해온 무식한 호랑에게도 그냥 나그네를 잡아먹는 것은 이치가 맞아 보이지 않기때문입니다.
너 나그네와 사냥꾼은 다같은 사람이다,
소와 소나무는 사람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잡아먹어도 된다
라는 엉터리 삼단논법으로 말이죠.
호랑이는 평소에 쳐다도 안봤을 소나 소나무를 부추켜 그들의 말을 근거로 삼습니다.
소나 소나무는 사람과 이해관계가 있고 양가감정이 있습니다.
호랑이의 논리대로 하자면 숲속의 동물도, 사람의 친구인 개와 고양이도 증인으로 데려와야 합니다.
그러나 숲에선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후환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집에 있는 개와 고양이는 이 사실을 알리없죠.
호랑이는 이렇게 의도적으로 선택적인 표준편차를 만듭니다.
숲속에 제대로 된 어른은 없습니다.
늑대와 시라소니가 편을 갈라 싸우면서 사자와 코끼리는 사라졌습니다.
말귀를 못알아 듣는척하며 용기있는 토끼가 나섰습니다만 처음으로 되돌리기, 혹은 원상태로 만들기 설정은 결코 호랑이에게 불리하지 않습니다.
나그네에게 유리한 조건도 아닙니다.
처음을 호랑이가 구덩이를 피하여 그냥 지나가는 것으로 하면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호랑이도 나그네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나그네를 잡아먹겠다는 미련한 생각때문에 호랑이는 처음의 설정을 구덩이에 빠지는 것으로 합니다.
호랑이는 세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그냥 구덩이를 지나치기.
둘째 구덩이에 빠진 후 죽기 살기로 노력하여 빠져나오기.
세번째 나그네의 도움으로 구덩이에 나온 후 노여움과 허기를 다른데서 적절하게 해결하기.
잘 할 수 있는 해결점을 놔두고 호랑이는 나그네를 잡아먹어야겠다고 계속 으르릉댑니다.
호랑이는 단순해서 사태의 해결을 지고 이기는 승부로 봅니다.
이번 사월 또뽑기 게임에서 꼭 이겨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코 호랑이는 스스로 해결점을 찾지 못하는 듯 합니다.
그사이 저멀리서 나그네가 곤경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마을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다가옵니다.
호랑이의 다음 선택이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