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의 통사체계에 충실하면서도 국어 문장의 살뜰한 아름다움에 도달하려는 자들은 늘 씌어진 것들 앞에서 만족하지 못한 채 기갈을 느낀다. 시인들은 그 기갈 때문에 하염없이 “모국어의 속살”에 제 속살을 맞대고 비비려는 욕망에 들린 자들이다. 모국어의 속살이 지어내는 살내음은 최음제 이상이다. 그것에 취해 관능적 열락에 빠진 자들이 주민으로 등록한 국가가 바로 시인공화국이다. 모국어는 계통발생의 기억에 새겨진 본능이며, 자아 그 자체다. 시의 어휘들 하나하나는 그 모국어의 가능성을 넓고 깊게 하고자 하는 실험이며 지적 모험의 산물이다. 소설가이자 칼럼니스트고 빼어난 언어학자이기도 한 고종석의 『모국어의 풍경』은 시혼(詩魂)에 들린 우리 시인 쉰 명을 불러내 모국어와 정분난 사연들을 낱낱이 폭로한다. 고종석이 기꺼이 파파라치되기를 자처하며 그 속내를 까발린 것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인 쉰 명의 속내가 아니라 시인 쉰 명이 지은 시집 쉰 권의 속내다.
김소월의 시가 “시인공화국의 정부(政府)”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은 까닭은 그의 시가 노래에 먼저 가 닿은 점, 그가 시인의 원형으로서의 가인(歌人)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김소월의 시어들은 뜻이 아니라 그 소리로써 먼저 공명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김소월의 시를 읽을 때 “그 소리들의 연쇄가 우리의 귀에 닿기도 전에, 우리의 구개와 가슴이 먼저 반응하여 언어와 유쾌하게 통정(通情)하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고 한다. 김소월이나 김유정은 다 같이 우리 고유말의 음악성에 눈을 뜬 시인들이다. 사람 마음속에 생겨나는 음향에 대한 미감을 내청(內聽)이라고 하는데, 특히 김영랑의 도른도른, 살포시, 보드레한, 즈르르, 애끈한, 조매로운, 아롱지는, 그리메, 서느라워, 가부엽게, 흐렁흐렁, 호동글, 홋근한, 서어한, 호젓한, 파름한, 섯드른, 바람슷긴, 하잔한, 포실거리며 등 체액처럼 쏟아내는 고유어들이 지어내는 소리들의 울림은 내청을 맑은 울림으로 가득 채운다. 천부적으로 소리 지향의 시인들인 소월이나 영랑은 모국어의 청각적인 미감을 의미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한국어가 가진 “음운구조와 통사구조를 제어하는 규칙들”의 완고성은 화운(和韻)의 조화나 울림이 빚는 음악성을 살려내는데 일정한 제약으로 작동한다. 한국어는 압운(押韻)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시인들은 간혹 동일한 자음이나 모음을 겹쳐 봄으로써 나오는 음성학적 맑은 울림으로 감정의 변화를 표현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소월과 영랑이 뛰어난 시인인 것은 그들의 시가 이런 한국어의 제약을 뛰어넘어 청각에 호소하는 음성적인 아름다움에 거뜬히 도달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소월이나 영랑과의 반대편에 서 있는 시인이 김종삼과 노향림이다. 이들은 모국어의 회화적 기능을 주목한 시인들이다. 그들의 언어들은 외부 세계를 충실하게 묘사하는 언어들이다. 이를테면 노향림의 시어들은 “정념의 전시장” 언어가 되기를 거부한다. 노향림의 연상(聯想)들은 기꺼이 묘사의 언어가 되기를 희망한다. “나무들이 / 뚫린 입으로 / 가득 저녁을 물고”(「서쪽 하늘」)와 같이 사물을 “의인화와 유정화(有情化)” 하기는 묘사를 위한 수단이다. 노향림은 소리조차 소리의 울림으로 드러내지 않고 그림으로 드러낸다. “새소리들이 쌀톨처럼 / 서쪽 하늘에 흩어졌다”와 같은 구절들을 보라. 고종석이 김종삼과 노향림의 시들이 1930년대 서양에서 유행하던 이미지즘의 영향권역에 있다고 노골적으로 못박지는 않지만, 김종삼에게서 “향서(向西) 취향”이 있음을 밝힘으로서 간접적 유추가 가능한 단서를 슬쩍 건네준다. 그 “향서 취향”의 끝간데서 피어난 게 김종삼의 시세계가 지어낸 “무적자(無籍者)의 댄디즘”이다. 김종삼의 시들이 외국 예술가들의 이름과 박래어들을 자주 빌려다 쓰긴 하지만, 박인환의 박래어 차용과 다른 것은 박인환의 그것이 제 교양이나 취향을 드러내는 겉치레에 그친 반면에 김종삼의 그것은 “향과 육즙이 듬뿍 담긴 상징의 과실”로 익혀냈다는 점이다.
서정주의 『화사집』을 두고 “이 얇은 시집은 한국어가 감당할 수 있는 감각의 가장 아스라한 경지에 우뚝 서 있다”고 쓴 것은, 시인의 위대함이 정치적 올곧음, 혹은 지적 훈련으로 습득한 교양이나 훈육으로 얻은 도덕에서가 아니라 모국어의 감각적 깊이에 온몸으로 반응할 줄 아는 언어능력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국어에 대한 마술적인 부림의 재능이 생전의 서정주가 취한 어리버리한 정치 행적에 대한 면죄부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곡예에 가까운 공적 생애의 역겨운 행적이 서정주의 시가 도달한 “감각의 아스라한 경지”에서 드러내는 아름다움을 다 가리지 못한다. 꽃뱀, 고양이, 수캐, 노루, 몰약, 닭피 따위로 이루어진 서정주 초기 시학의 탐미 취향에 대해 고종석은 “노릿한 아름다움의 세계”라고 이름 붙인다. 서정주와 역상(逆像)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시인이 김수영이다. 김수영의 한국어들은 투박하고 거칠기 짝이 없다. 고종석은 그 까닭을 김수영의 시가 “노릿한 화장을 거부하고 비시적(非詩的) 일상어로 버무”린 데서 찾는다. 김수영의 위대함은 당대의 정치적 인식의 첨단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평생을 “시시한 발견의 편집광(偏執狂)”으로 살면서 정직성에 투신한 결과로 이해한다. 김수영이 당대 정치의식의 가장 높은 데 도달하고, 그걸 시 속에 투영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의식을 행동과 실천으로 옮기는 데는 실패한다. 그래서 “혁명은 안되는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든가,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와 같은 자기반성에서 비롯된 고백이나 자조섞인 한탄을 시구에 흘려 넣은 것이다.
고종석이 김소월·서정주·백석·김영랑·김정환 등에 대한 문학적 평가를 후하게 한 반면에 상대적으로 박인환, 오장환, 정지용, 황지우 등에 대한 평가에 박한 태도를 보인 것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박한 평가를 받은 시인의 명단에 정지용과 황지우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바가 있다. 1930년대 시단의 좌장이자 조지훈·박목월·박두진 등을 『문장』지를 통해 추천하며 멘토르 역할을 하고, 『정지용시집』과 『백록담』 등이 신문학의 최고의 성과로 꼽히면서 “정지용 신화”는 한국문학사 안에서 정설화하고 있다. 허나, 고종석의 평가는 매우 냉정하다. 한마디로 “정지용의 자리는 지나치게 격상돼 있다.”는 것이다. 고종석의 판단에 따르자면 정지용은 미당이나 소월, 그리고 까마득한 후배인 오규원에게 못 미친다. 그 까닭을 한국어가 근대적 문학언어로써 정지용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해지고 세련된 형식으로 진화한 데서 찾는다. 정지용에 대한 평가가 후한 것은 이미 “확립된 권위에 대한 추종의 관성” 탓이라고 말한다. 1980년대 이후 “파괴의 양식화”를 자기의 시적 브랜드로 독점사용하고 있는 황지우의 시에 대한 평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지우 첫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대한 고종석의 평가는 더욱 싸늘하다. 고종석은 황지우의 시들이 “지나친 자기연민이 낳은 엄살로, 자학의 분무기를 통한 자기현시로, 요컨대 자기집착으로 잉잉거린다.”고 쓴다. 황지우 시가 노출하고 있는 과장벽과 자기현시욕, 거기에 “너무 헐거운” 시적 형식이 겹쳐진 이 시집이 누려온 화려한 명성은 공허한 것이라고 발설해버린다.
고종석이 시를 평가하는 잣대는 모국어의 감각적 울림과 그 깊이에 도달해 있는가, 아닌가 에 있다. 시가 대상에 대한 미적·언어적 탐구며,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경지에서 공공선(公共善)과 불이(不二)라면 이 기준은 틀리지 않다. 고종석이 조악하고 서툰 한국어 사용자인 박인환을 폄훼하고, 채호기의 『수련』을 “한 미적 대상의 속살에 대한 한국어의 접근 가능성을 그 극한까지 실험”한다고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잣대의 흔들리지 않는 엄격함을 보여준다. 고종석의 『모국어의 속살』을 읽는 내내 즐거웠던 것은 우리 시에 대한 빼어난 품평을 남긴 김현이 떠나고 난 뒤 그 고적한 빈자리를 고종석이 채울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어쩌면 고종석은 이미 김현의 미적 감식안을 넘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가지 사족. 고종석의 “시인공화국”에 성미정, 김수영(여성시인), 양선희, 정화진, 정지원, 이순현, 김경미, 조윤희, 조용미, 이연주 등과 같이 시단에서 객관적 평가를 받지 못하는 여성시인들이 대거 호명되어 초대된 반면에, 김춘수, 박용래, 황동규, 정현종, 천양희, 김명인, 송재학, 장석남, 이윤학, 문태준 등과 같은 빼어난 시를 쓰는 시인들이 그 초대에서 빠진 것은 의외고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뇌의 문화지도』, 다이앤 애커먼, 김승욱 옮김, 작가정신, 2006
다이앤 애커먼이 지은 책이라면 그 값이 얼마라도 기꺼이 그 대가를 치르고 살 마음이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펴낸 『감각의 박물학』에 대한 매혹과 신뢰가 그 만큼 깊었던 것이다. ‘감각’이라는 하나의 끄나풀에 의지해 인간 정신과 행동에 숨은 비밀을 풀어낸 『감각의 박물학』은 놀라운 책이다. 애커먼의 가장 뛰어난 점은 자연주의적 감성과 과학적 관찰의 유연한 결합, 그리고 그것을 풀어내는 놀라운 수사학적 능력이다. 그의 책들은 화려하고 섬세한 수사(修辭)의 우주교향곡이라 할 만하다. 단언컨대 애커먼의 책은 결코 독자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그 해부의 대상이 이번에는 ‘뇌’다. “반짝이는 존재의 둔덕, 쥐색 세포들의 의회, 꿈의 공장, 공모양의 뼈 속에 들어 있는 작은 폭군, 모든 것을 지휘하는 뉴런들의 밀담, 어디에나 있는 그 작은 것들, 그 변덕스러운 쾌락의 극장, 운동 가방에 옷을 너무 많이 쑤셔 넣었을 때처럼 두개골 속에 자아들이 가득 들어 있는 주름진 옷장.” 이것이 무엇인가 ? 이게 바로 ‘뇌’, “마법에 걸린 베틀”이다.
『활을 쏘다』, 김형국, 효형출판, 2006
수렵·채취의 시대에는 활쏘기가 유력한 생존 수단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화약 총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활쏘기가 훌륭한 무기의 하나였을 것이다. 활쏘기가 더는 생존 수단이나 무기로써 효용을 다한 뒤에도 공동체 질서를 고양하려는 집단의식의 하나로 살아남았다. 동양의 전통에서 활쏘기는 군자가 마땅히 따르고 추구해야 할 만한 도와 예법으로 여겨졌다. 어떤 이는 “욕심을 내지 않는 무심이 활쏘기에 앞서 가져야 할 마음 자세”라는 것에 주목해 활쏘기를 득도의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우연히 국궁 취미에 흠뻑 빠진 저자는 동양 고전을 두루 뒤적이며 활쏘기의 역사와 내력을 살피고, 활에 담긴 현실사회적 함의를 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