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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문명의 창조적인 근원, ‘청동’에서 과학기술을 살피다 | |||
동북아 청동합금기술의 정수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기가 철기에 앞서 인류 역사를 장식하게 된 이유는 청동이 갖는 장점 때문이다. 구리 의 녹는점은 1,085℃고 주석의 녹는점은 232℃인데,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은 주석의 합금비율에 따라 대략 875~994℃에서 녹는다. 이에 비해 철의 녹는점은 1,538℃이다. 불을 다루는 기술이 아직 미숙했던 인류가 철기 대신에 먼저 청동기를 개발하고 사용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은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세형동검(細形銅劍), 다뉴세문경(多鈕細文鏡), 고인돌 등이다. 이 중에서 청동합금기술의 정수는 당연히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다뉴세문경 등에 들어 있다. 그런데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은 살상을 위한 무기이고 다뉴세문경은 의례용 거울로써 서로 용도가 다르다. 무 기와 거울의 용도 차이는 형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합금기술에서도 나타난다. 현존하는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의 합금비율을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구리:주석:아연의 비율이 대략 75:14:7 정도이다. 반면 다뉴세문경 의 구리:주석 합금비율은 65:33 정도이다. 동검이 무기로 기능하려면 살상력이 높아야 하고, 다뉴세문경이 거울로 기능하려면 반사율이 높아야 한다. 동검 의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적당한 강도와 탄성이 필요하다. 청동의 살상력을 최대한 높이기 위한 주석의 합금 비율이 바로 14% 전후인데 한국의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바로 이 합금비율을 알고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에 적 용했으며, 여기에 7% 정도의 아연을 합금하여 강도를 더 높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거울로 기능한 다뉴세문경은 반사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주석의 합금비율을 33%까지 올렸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중국의 청동기, 특히 칼과 같은 무기류에는 주석이 20% 이상 포함되는 것으로 되어 있으 며, 실물을 조사할 경우 아연 대신 납이 합금된 경우가 많았다. 이 같은 중국의 청동제 무기에 비해 우리 비파형동 검이나 세형동검은 당연히 강도가 높았다. 물론 살상력 역시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비파형동검과 세 형동검은 동북아 청동합금기술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동검의 합금기술을 계승한 신라시대 청동 범종과 조선시대 청동 활자 현재 국내에는 신라시대의 범종으로 상원사 동종(上院寺 銅鐘, 국보 제36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국보 제29호),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淸州 雲泉洞 出土 銅鐘, 보물 제1167호) 등이 전하고 있다. 이 중에서 제작연대와 제작자, 제작 동기 등이 모두 밝혀진 종은 성덕대왕신종 하나이다. 성덕대왕신종은 일명 봉덕사종 또는 에밀레종이라고도 하며 높이 333㎝, 구경(口徑) 227㎝로써 771년(혜공왕 7)에 완성됐다. 그런데 상원사종·성덕대왕신종·청주 운천동출토동종 등은 모두 청동으로 주조된 범종이다. 특이한 사실은 신라시대의 청동합금비율이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의 청동합금비율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특히 상원사종과 성덕대왕신종의 주석 비율 13%는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의 주석비율 14%와 사실상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고 하면 동검에 들어있던 아연이 빠지고 구리의 비율이 8% 내외 높아졌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범종과 동검에서 나타나는 유사점과 차이점의 역사적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신라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면, 그 통일은 비록 불완전했지만 청동기시대 이래의 끊임없는 전쟁을 일단락 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신라의 역사로 한정해보면 시조 박혁거세 이래 지속된 삼국 간의 전쟁이 마무리됐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건국 이래 전쟁에 시달리던 신라는 나당전쟁 이후에야 평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 평화는 위태위태했다. 바다 건너 일본의 도발 가능성 그리고 내부의 혼란 가능성 때문이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일본의 도발은 물론 내부의 혼란도 제거해야 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국보 제306-2호)』에 의하면 문무왕(626~681)은 평상시에 항상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내가 죽은 후에 나라를 지키는 대룡(大龍)이 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합니다”했다고 한다. 문무왕이 대룡이 되어서라도 막고자 했던 대상은 무엇보다도 일본이었다. 문무왕은 일본의 도발을 막기 위해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무왕은 감은사를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유언으로 자신이 죽은 후 감은사 어귀의 바다에 장사지내라 했다. 문무왕은 아들 신문왕(692)이 감은사를 완공하자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보물을 선사하기까지 했다. 이 같은 이야기에는 삼국통일전쟁과 나당전쟁 등을 치른 신라인들의 평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들어있다. 그것이 바로 만파식적의 피리소리 즉 음악의 힘으로 평화를 지켜내겠다는 염원으로 표현된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에 의하면 성덕왕(737)은 태종무열왕(603~661)을 위해 경주 북천(北川)에 봉덕사를 창건했는데, 이것은 성덕왕이 태종무열왕의 영령에 힘입어 내부의 혼란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나아가 봉덕사 창건과 완공, 그리고 봉덕사신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신종의 주조는 앞서 감은사의 창건과 완공, 그리고 만파식적의 등장이 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감은사는 문무왕 때부터 창건되었지만 완성은 신문왕 때였으며, 봉덕사는 성덕왕 때부터 창건되었지만 완성은 효소왕(702) 때였다. 그리고 봉덕사의 완성을 기념하여 경덕왕(765)과 혜공왕(758~780) 두 대에 걸쳐 성덕대왕신종이 주조됐다. 이렇게 보면 성덕대왕신종 역시 만파식적과 마찬가지로 음악의 힘으로 평화를 지켜내려 한 신라인들의 염원이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청동합금기술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성덕대왕신종은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의 합금비율을 계승했다. 그러나 그 용도는 전혀 반대였다. 동검은 살상용이었지만, 신종은 평화용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 역시 통일신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청동합금기술을 계승해 계미자(癸未字), 갑인자(甲寅字)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청동 활자를 창조했다. 계미자는 1403년(태종 3 계미년)에 만든 것으로, 유학을 널리 권장하기 위해서 책의 간행과 보급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제작됐다. 갑인자는 1434년(세종 16)에 만들어졌는데, 특히 한글 활자로도 만들어져 함께 사용된 우리나라 활자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들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은 과학기술에 더하여 시대정신이 어우러질 때 가능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글 신명호(부경대학교 사학교 교수) | |||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자료 좋아유. 고마워유.사랑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