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뉴질랜드의 옛 친구 결혼식 때문에 파리로 떠났다.
아버지의 옛 친구 존 크리스탈 대위는 영국 육군 경비병 장교였다가 후에 형무소 소장이 된 사람이다
결혼식을 끝내고 아버지는 친구를 신혼여행에 떠나보내고는 신부의 어머니와 함께 생당도냉으로
돌아왔다. 스트랏톤 부인은 특이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성악을 전공한 가수라고 했지만
무대에 선 적이 있었는지는 내가 잊어버렸다. 어쨌든 그 부인은 약간 꾸미는 면이 있는 것 같았지만
무대 예술인다운 특징이 별로 없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부인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활기차 보였고 정력적인 성격 탓인지 자기 주장이 강하였다.
외모까지 남을 압도하는 듯한 위엄이 넘쳐 '귀부인', 혹은 '백작 부인' 이라고 불러야 어울릴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녀가 오자마자 우리 생활에 간섭하려 드는 것을 나는 은근히 못마땅해 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인의 관심과 충고와 지도가 매우 귀중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녀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어찌나 컸던지 우리가 생당도냉에서 영주할 생각을
아예 포기한 것도 바로 그 스트랏톤 부인 때문이었다.
새집은 거의 다 완성되어 이젠 들어가 살기만 하면 되었다.
아름다우면서도 단순하고 튼튼한 집이었다. 집 내부도 생활하기에 편리하도록 잘 꾸며졌다.
아래층에 있는 거실로 사용될 큰 방에는 중세기식 창과 역시 중세기풍의 커다란 벽난로가 있었다.
2층 침실로 올라가는 나선형의 돌계단도 아주 멋졌다. 집 정원은 아버지가 특히 정성을 많이 쏟은
곳이었다. 아버지는 그 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하여 이곳 저곳 여행을 많이 했다.
아버지는 1927년 겨울에는 마르세이유에서 몇 달을 지냈고, 지중해 항구인 셋드에서도 잠시 지냈다.
그러고 나서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이것은 모두 전시회를 위해서였다.
그 동안 나는 관립 중학교에서 점점 더 조숙한 프랑스 아이로 성장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다시 전시회 때문에 런던으로 갔다. 그때가 1928년 봄이었다.
곧 학년말이 될 때인데도 나는 장래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아버지가 며칠 안에 영국에서 돌아오리라는 것을 알 뿐이었다.
아버지가 관립 중학교로 찾아온 것은 5월 어느 날 맑게 갠 아침이었다.
아버지의 첫마디는 어서 짐을 꾸리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영국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나는 손에 묶여졌던 사슬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은혜로운 힘이 나타나
나를 가둬두었던 감옥의 문을 활짝 열어준 느낌이었다.
감옥의 벽돌 담에 비치는 햇살이 얼마나 찬란한지!
내가 그때 그 학교를 벗어나게 된 것은 하느님의 섭리임을 확신한다.
떠나기 전에 나는 작별하는 친구들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히죽거리며 웃어주는 잔인한 기쁨을
맛보았다. 검은 학생복에 베레모를 쓴 아이들은 양지바른 마당에서 양팔을 축 늘어뜨리고
나를 삥 둘러서서는 웃어주었지만 나를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짐을 실은 마차를 타고 조용한 거리를 내려가면서 아버지는 우리가 할 일을 일러주었다.
거리의 흰 먼지 속에 울려퍼지는 마차의 경쾌한 말굽소리!
먼지투성이 집들의 뿌연 담벽에 메아리치는 신나는 말굽소리! 자유, 자유, 자유! 라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울려퍼지고 있었다. 마차는 낡은 포스터가 누덕누덕 붙어 있는 다각형의 커다란
우체국 창고를 지나 길가에 줄지어 서 있는 플라타너스의 그늘 속으로 들어섰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앞에 보이는 빌레누벨 역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바로 일요일마다 생당도냉 집으로 가기위해 꼭두새벽이면 기쁨에 떨며 기차에 오르던
곳이었다. 우리가 조그만 기차에 올라타고 처음 아베이롱 계곡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갈 때,
나는 나의 13세를 상실한다는 생각에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초조하였다.
하기야 우리가 그것을 잃은 지는 벌써 오래 되었다. 우리는 사실 생당도냉에 별로 오래 머물러 있지
못했다. 그리고 관립 중학교의 지독한 학습이 생당도냉에서 얻은 좋은 점을 모두 빼앗아버려
나는 아름다운 것에 무감각해졌다. 그러나 이제 막상 그곳을 영영 떠나게 되자 섭섭했다.
또 아버지가 애써 지은 그 아름다운 집에 살아보지 못하게 된 것도 서운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때 받은 은총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테니까.
내가 관립 중학교를 벗어난 것이 다행이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피칼디를 거쳐
북행 철로를 달리고 있었다. 잠시 후 우리가 해협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어슴푸레한 진주색
안개 사이로 철도 연변에는 '에집트 관광'이라고 써붙인 큰 간판들이 연달아 나타났다.
그 다음부터 나타나는 해협의 기선, 안개 속에 크림처럼 흰 호크스톤(영국 도버 근처)해안의 절벽,
우중충한 녹색의 구릉, 그리고 암벽 꼭대기에 단정하게 늘어서 있는 호텔들, 이 모든 것이 나를
한없이 들뜨게 했다. 그리고 짐꾼들이 런던 사투리로 질러대는 고함소리, 역 대합실의 독한 차냄새는
이제까지 내가 축제의 나라, 경외심을 자아내는 예모를 갖춘 묵직한 나라, 그러면서도 모든 종류의
즐거움을 지니고 있는 나라, 어떠한 경험에서 오는 충격이라도 겹겹의 칸막이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영혼에 닿을 듯이 보이는 나라로 여겨왔던 모든 상념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에게는 영국이 그 당시에나 그 후 2년 동안에나 이 모든 것을 의미하였다.
영국에 간다는 것은 일링(런던 교외 주택가)에 있는 모드 아주머니 집에 간다는 것을 뜻하였기 때문
이다.
카르톤 가 18번지의 붉은 벽돌집에는 공굴리기 놀이터를 겸한 작은 잔디밭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둘스톤 학교의 크리켓 운동장이 내다보이는 들창이 있었다. 이것은 19세기 때 안전 요새로 쓰이던
것 같았다. 이곳 일링은 빅토리아 시대의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도시였다.
그래서 똑같은 집들이 겹겹이 줄을 맞추어 쪽 고르게 서 있었고 성채처럼 보이는 집들 한복판에
모드 아주머니와 벤 아저씨가 살고 있었다.
참, 벤 아저씨가 군대 사령관이었던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캐슬바 가에 있는 둘스톤 소년 예비학교를 은퇴한 전 교장은 빅토리아 시대의 감정적이면서도
엄숙하고 위대했던 장군들을 꼭 빼닮았다. 그는 폭포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탐스러운 흰
수염에 코안경을 끼고 꾸부정한 어깨에 잘 맞지 않는 트위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절름거리며 천천히 걸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 특히 모드 아주머니의
주의가 필요했다. 그는 보통 조용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어쩌다가 무슨 극적인 표현을
할 경우에는 희극 배우 이상으로 아주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포성 같은 음성이 튀어나와 상대방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곤 했다.
모드 아주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평생토록 그처럼 천사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나이가 많아서 옷차림도 아주 구식이었는데 모자는 정말 우스꽝스러울 정도였다.
그 모자는 아주머니의 은혼식 때 유행했던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옷차림만 제외하면 아주머니는 날씬하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명랑하고 재치가 넘치는 나무랄 데 없는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특히 맑은 눈빛에는 다정다감한 빅토리아 시대의 소녀티가 남아 있다.
"마음에 꼭 든다" 라고 하는 표현은 바로 아주머니를 위해서 있는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주머니야말로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었다.
나는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 훌륭한 아주머니의 보호를 받으며 살게 된 것이다.
사실 아주머니는 내가 도착하자마자 리플리 학교에 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나를 데리고
옥스퍼드 가로 나갔다. 리플리 학교는 서리 주에 있으며 지금은 벤 아저씨의 돌아가신 동생의 부인이
경영하고 있었다. 벤 아저씨의 동생 로버트 씨는 자전거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자전거 브레이크 고장으로 벽돌 담벼락에 정면 충돌해서 일어난 비참한 죽음이었다.
그래서 혼자가 된 피어스 부인이 학교 일을 맡게 되었다.
첫날은 아니라고 기억된다. 어쨌든 어느 날 옥스퍼드 가로 가고 있던 모드 아주머니와 나는
나의 장래에 관해서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우리는 회색빛의 플란넬 바지와 스웨터와 구두 등
내가 입을 옷가지들을 한 보따리 사서 들고는 거리 구경을 잘 할 수 있는 뚜껑 없는 버스 꼭대기
맨 앞 자리에 타고 있었다. "톰은 장래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는지 궁금하구나."
아주머니의 부드러운 눈이 나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다정하게 윙크를 하였다.
톰이란 바로 나였다. 아주머니는 가끔 상대방을 3인칭으로 불렀다.
아마 문제를 꺼내기가 쑥스러운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장래에 무엇이 하고 싶은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막상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에는 무언가 망설여졌다. 그래서 나는 빙 돌려서 되물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직업이겠지요?"
"물론이지. 글을 쓴다는 것은 아주 좋은 직업이고말고, 헌데 무슨 글을 쓰고 싶다는 거지?"
"소설을 썼으면 하고 생각했어요."
아주머니는 진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언젠가는 톰은 그 일을 잘 해낼 거다. 그런데 작가란 세상에서 성공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겠지?"
"알아요." 나는 금방 대답했다.
"그래,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다른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 글을 쓸 여유를 갖는 것 말이다.
소설가들이란 가끔 그렇게 시작한단다."
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신문기자가 되어서 신문에 글을 쓸 생각이에요."
"좋은 생각이지. 그 방면이라면 어학 실력이 좋아야 할 거야, 너라면 외국 특파원도 문제없겠구나"
"멋있는 기자가 되고, 그리고 틈틈이 좋은 글도 쓸 수 있겠죠?"
꿈에 부푼 나의 말에 아주머니는 다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물론 쓸 수 있고말고, 너는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일링에 도착할 때까지 이런 식의 좀 막연하면서도 이상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버스를 내려서 우리는 해븐 공원을 가로질러 둘스톤 학교에 들렀다.
그리고 리플리 학교의 여교장인 피어스 부인을 다시 만났다.
양눈 아래가 움푹 패어 있어서 어딘지 모르게 호전적으로 보이는 부인은 아버지의 그림이 몇 폭
걸려 있는 방 안에 서 있었다. 모드 아주머니가 인사 끝에 장래에 대한 나의 이상적인 포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교장은 아버지의 그림들을 쳐다보면서 예술가의 생활의 불안정함과
질서가 없는 혼란 같은 것을 미리 머리에 떠올린 모양이었다.
"이 아이도 제 아버지처럼 풋내기 미술가가 되고 싶다는 겁니까?"
피어스 부인의 음성도 퉁명스러웠지만 두터운 안경 렌즈를 통해서 훑어보는 눈빛은 더욱 엄해 보였다
"이 아이는 신문기자가 되고 싶어한단다." 모드 아주머니는 부드럽게 대꾸했다.
"당치도 않은 소리에요. 그것보다는 안정된 사업이나 해서 편안하게 살라고 하세요.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 없어요. 시작부터 잘 해야죠. 공연히 머리에 꿈만 가득 채워서 세상에 내보낼
생각일랑 하지 마세요."
좀 흥분한 듯한 피어스 부인은 날카로운 시선을 내게 돌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내 말 알아듣겠니? 풋내기 예술가가 되고 싶은 생각일랑 꿈에도 하지 말아라."
나는 여름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마치 동정을 받아야 하는 고아나 미아처럼 리플리 학교에
받아들여졌다. 그 학교로서는 내 신분이 도무지 못마땅했던 것이다.
시시한 미술가의 아들인 데다가 프랑스 학교에서 2년씩이나 수상쩍은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선뜻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술가 기질에다가 프랑스인 기질이 겹쳤다는 것은 피어스 부인과 그 친구들이 질색하는 요소를
골고루 갖추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라틴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이미 열네 살이 거의 다 된 소년이 라틴어 문법책을
열어본 적도 없어서 멘사(라틴어 문법책에 나오는 첫마디로 '탁자'라는 뜻)의 어미 변화도 외울 줄
모르니 이런 아이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또 맨 아랫반에 내려가 어린 꼬마들 틈에 끼여 처음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창피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 관립 중학교라는 감옥의 경험을 겪은 나에게 리플리 학교는
즐거운 곳이었다. 느릅나무가 우거진 그늘 아래 푸른 잔디가 부드러운 널따란 크리켓 운동장에서
크리켓 공을 칠 차례를 기다리는 것도 기뻤고, 버터나 잼이 듬뿍 발린 커다란 빵이 나오는 간식시간을
기다리는 일도 신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더 코난도일 경의 작품을 들을 수 있는 시간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몽토방의 수난을 겪은 나에게는 지나친 사치요 평화였다.
혈색이 좋은 얼굴에 눈빛이 순진한 영국 소년들 역시 프랑스의 악동들과는 정신상태부터가 달랐다.
왜 그런지 이 아이들이 더 즐겁고 더 행복해 보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단단하고 안정된 가정에서 자랐고 세상과는 무지라는 두터운 담으로 격리되어 보호되고
있었다. 이 담은 아이들이 자라서 퍼블릭 스쿨(상류사회 자녀들을 교육하는 기숙 제도의 중고등학교)
에 진학하면 제 구실을 못하지만, 그때까지는 아이들을 때묻지 않은 순수한 어린이로 머물러 있게
하는 편리한 것이었다.
주일이면 우리는 모두 소년들에게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서 마을 교회로 행진해 갔다.
십자형 모양인 교회당 안에서 우리 자리는 좌우 날개처럼 생긴 양편이었다.
검은 이튼식 양복에 눈같이 흰 이튼식 칼라를 하고 줄을 맞추어 앉아서 빗질을 잘 한 머리를 숙이고는
성가 책장을 넘기는 우리의 모습은 천사들 같았다. 결국 나는 진짜로 교회에 가게 된 것이다.
주일 저녁에는 수풀이 무성한 서리 들판을 걸어 가까운 시골로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는 목조 건물로 된 훈련실에 모여 성가도 부르고 온스로 씨가 읽어주는 '순례자의 행적'을
듣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나는 내게 가장 필요한 자연 신앙을 약간이나마 알게 되었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나는 이 학교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 전에 침대 옆에서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는 것을 보았다.
식사 전에 기도를 바친 다음에야 식탁에 앉는 것도 처음이었다.
내 생각에 그 후 2년 동안은 나도 성실한 종교인이었던 것 같다. 나는 행복하고 편안하였다.
비록 은총은 막연하고 불확실한 모양으로 영혼에 작용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지만,
그 당시의 나에게 초자연적인 무엇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적어도 우리는 하느님께 자연적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자연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의물와 필요는 우리가 창조된 근본 목적과 동일한 것에 귀착되기 때문이다.
현대의 맹랑한 무신사회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는 나중에 이 두 해를 '나의 종교적 단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 매우 우스꽝스럽게 여겨지니 기쁘다.
그러나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너무나 드물다는 것이 또한 슬프다.
내 생각에는 사실상 모든 사람이 그러한 단계를 거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단계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모두 자기 탓이다.
인생은 수동적으로 겪기만 하는 일련의 단계들이 아니다.
선과 질서로써 진리 안에 하느님을 흠숭하려는 충동이 일시적이요
감상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자기 탓이다.자기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강력하고 지속적인 깊은 윤리적 충동을, 그 기원에 있어서나
그 지향에 있어서나 초자연적인 충종을 자신의 변하기 쉬운 부질없는 환상과 욕구의
수준으로 깎아내린 탓이다.
좋은 음식과 상쾌한 시골 교회와 푸른 농촌이라는 배경에서 기도는 꽤 매력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상 '영국교회'(성공회)는 계급 종교다. 국가 전체가 아니고 소수 지배층이라는
특정한 사회와 그룹의 종교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까지 영국교회가 비교적 강력한 결속을
지탱하고 있는 주된 기반이다. 대다수가 은총이나 성사를 믿지 않기 때문에 교리적 일치는
별로 없는 것이 확실하며, 신비적 유대는 더욱 보잘것없었다.
그들을 단합시키고 있는 것은, 사회적 전통이라는 강력한 매력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특정한 사회계급과 관습을 고수하는 완고한 집착이다.
영국교회의 존립은 거의 전적으로 영국 지배계급의 연대의식과 보수주의에 의존하고 있다.
즉 영국교회의 힘은 자연적인 어떤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습적 계급을 결속시키는
강한 사회적 혈통적 본능에 있는 것이다.
영국의 농촌, 옛 성곽과 시골집, 여름 오후의 크리켓 게임, 템즈 강 위에서 벌어지는 티 파티,
군고기, 파이프 담배, 크리스마스 무언극, 펀치(영국의 풍자만화 주간지), 런던 타임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은 그저 생각만 해도 따뜻하고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닻을
영국인의 마음에 내리게 하는 달콤함 때문에 국왕과 모교에 달라붙듯이 영국은 영국교회에
달라 붙어 있다.
내가 리플리 학교에 입학해서도 이 모든 것들은 뒤섞여서 나를 강력하게 지배하는 바람에
기도하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초자연적인 매력이 그대로 자연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나에게 부여된 은총은 단번에는 아니지만 점차로 흐려졌다.
내가 크리켓과 이튼식 칼라와 과잉 보호라는 평화로운 온실에서 사는 동안 진정한 신심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억지로 세워졌던 악한 벽이 허물어지자마자, 즉 내가 퍼블릭 스쿨에
가서 그 아이들의 예민한 정서 아래 숨겨져 있는 것 -영국인도 프랑스인과 똑같이 야수적이라는 것-
을 알자마자 나는 가면이나 가식으로 가려져 있는 것들을 굳이 보존하려고 애쓰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 모든 것을 지성으로 따질 능력이 없었다.
설령 나의 지성이 그렇게 할 만큼 발달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그 전망을 발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은 나의 지성과 의지에서가 아니라 정서와 감정에 의해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 이것은 영국교회 설교단에서 얻어들은 대로 성공회의 교리가 분명하지 않고
전혀 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허비된 은총과 파멸된 영혼을 생각하면 몹시 두렵다.
성공회가 윤리면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아마도 이 교회가 '참 교회'의
신비체와 생명의 결합이 없다는 것 외에도 이 교회의 기초가 되는 사회적 불의와 계급적 억압에
기인하는 탓도 있을 것이다.
성공회는 대체로 계급 종교이니만큼 분리될 수 없는 그 계급의 범죄를 도급맡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추측일 뿐이고 논증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열네 살이 되자, 리플리 학교로서는 늦은 셈이지만 적어도 퍼블릭 스쿨 장학생 선발시험을
치를 수 있을 정도의 라틴어는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지망할 학교에 대해서는 벤 아저씨가 은퇴한 교장다운 전문적 안목으로 선택해주었다.
아버지가 재산이 없는 데다가 미술가였으니 하로우나 윈체스터 같은 큰 학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윈체스터 학교는 벤 아저씨가 최고로 꼽는 곳으로서 이미 많은 학생들을 그 학교 장학생으로 보냈다
그러나 내가 그곳에 갈 수 없는 이유가 두 가지 있었다.
아버지가 학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실은 외할아버지가 미국에서 학비를 대주기로
되어 있었지만) 장학생 시험이 나한테는 너무 어려우리라는 것이었다.
마지막 선택은 모두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 학교는 중부지장에 있으며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창피하지 않을 만큼의 전통과 역사가 있는 학교였다.
게다가 최근에는 교장의 노력에 의하여 학교가 더욱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 훌륭한 교장이 이제 은퇴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 섭섭한 일이었다.
이 모든 사정을 벤 아저씨는 훤히 꿰뚫어서 잘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모드 아주머니도 힘을 내라고
나를 격려해주었다.
"오캄 학교는 네 마음에 꼭 들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