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창에 붙어 살고 있는 청개구리를 보며
애니미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다차원의 세계다. 우주의 다차원도 그렇지만 생태와 의식도 다차원세계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주체 중심 사고로 인해 우리 문명은 세계의 다차원성과 상호의존성을 훼손하고 우리를 둘러싼 환경 곧 세계의 격변을 일으켜 수많은 생명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다차원 세계와 소통하지 않는 동어반복의 자폐현상 심화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노동운동 이후, 여성, 성, 인종, 장애, 어린이, 노인, 동물 등 다양한 타자들의 운동은 여전히 필요하다.
한국사회에서 타자와 소수자 담론으로서 가장 선두에 선 것은 페미니즘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내부의 젠더대립의 이분법적 시각의 한계는 여전히 남는다. 페미니즘에서 비판하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비판과 피해의식이 혐오와 대립을 강화하고 오히려 권력다툼으로 왜곡되는 보수화 양상도 나타났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페미니즘이 가장 경계해야 할 시각은 데카르트의 이분법 같은 젠더담론의 이분법일 것이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우리가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타자보다 타자들이다. 비록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극우 포퓰리즘과 독재의 징후가 강화되고 있지만, 그래서 아직도 타자주체가 절신한 상황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좀 더 급진적일 필요가 있다. 주체도 타자주체가 아니라 타자들주체로 재정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럴 때 가장 유용한 시각이 불교의 무아와 연기에 대한 통찰이다. 불교에서는 주체의 나라고 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있다면 세계 자체가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관계와 연쇄의 그물이다. 그러니 주체를 이 잡듯 뒤지고 뒤져봐야 나올 것은 다양한 타자들의 이주와 동거라는 맥락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혼성과 다성에 열려 있는 영매적 존재의 자각이 우리에겐 필요한 것이 아닐까?
여전히 공부와 예술의 관심은 다차원의 타자들과 함께 하는 자기 발견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애니미즘의 지대라고 생각한다.
애보리진
나는 애보리진들의 꿈의 시대와 무지개 뱀 이야기가 커다란 매력을 느낀다. 그래서 출판된 책이라도 있나 찾아보니 번역된 책이 없다. 아메리카 인디언 책은 꽤 나와 있다. 하다못해 남미와 아프리카의 신화집도 있지만 애보리진들의 신화와 문화를 담은 책은 단편적인 것 외엔 없다. 오리엔탈리즘처럼 문화인류학의 선사문화 담론도 제국주의자들인 백인의 투사와 왜곡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애보리진은 금기가 더 노골적이다. 더 이질적이고 더 낯선 타자들이다.
하지만 그나마 인터넷에 떠도는 동굴벽화와 애보리진 회화를 보면 훈데르트바서의 그림처럼 점과 선으로 표현한 생명에너지가 느껴진다. 그들에게는 생물과 무생물의 다양한 힘들을 의식하고 대화하며 살았다. 그들이 살았던 삶의 방식은 물론, 악기와 부메랑만 보아도 애보리진이 이렇게 냉대 받을 존재가 아니라 인류의 큰형님으로 존중받아야 함을 느끼게 한다.
백일
최근 지인과 추석 인사를 나누다가 문득 내 교육경력이 백일 남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12월에 3학년이 졸업하면서 학교 문을 닫는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변화가 나쁘지 않다. 더구나 일반학교에 대해 항상 비판적 거리를 두었다가 새로 시작하는 각종학교에서 다시 학생들을 만나다가 작년부터 학교가 교육청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일반학교처럼 교육청이 요구하는 서류와 절차에 매달리다보니, 영혼 없는 관료기계가 된 느낌이었다. 이렇게 형식과 절차가 중시되는 교육이 앞으로도 잘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교사들도 삶과 만남의 역동성이 점차 사라져 좋은 교사들은 많지만 참된 선생은 사라진 느낌이다.
더구나 최근 나는 학생들의 눈에서 무관심과 무력을 벽처럼 느낄 때가 많았다. 호기심과 갈증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밤새 게임을 하거나 서핑과 채팅를 하다가 낯설게 교실이라는 공간에 던져진 육체이탈자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학생들의 실존이 물리적 현실이 아니라 sns의 가상현실에서 초현실적로 살아가는 존재로 중심 이동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현실은 더 더럽고 따분하고 권태롭고 비루하고 우울하게 변하고 있다. 가상공간의 화려함이 강화될수록 현실공간의 비루감은 심화될 것이다. 디스토피아는 시대의 우울증을 반영한다.
최근 도서관에서 버려지는 책들을 보며 이제는 도서관이 완전히 책들의 무덤이 되어버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두산세계대백과사전’이 이제는 폐기 대상이 되어버렸다니 충격이었다. 90년에 대학에 입학해 중앙도서관에서 두 백과사전을 보며 나는 얼마나 벅찼던가? ‘한국현대시인대사전’이라는 한 뼘 두께의 책에서 김남주 시인의 시들을 처음 보고 받은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과 조선의 실학자들이 꿈꿨던 대백과사전을 우리는 1980년대에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인류와 민족의 모든 지식을 집대성한 백과사전 같은 사전류가 오히려 폐기 1순위이고, 한 세대의 문화도 공존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있다니 충격이었다. 과연 인터넷으로 충분할까? 생성형 AI로 충분할까? 확실한 것은 이것만이 유일한 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 학교를 다시 그리고 영원히 떠나게 되니 맘이 편치는 않다.
그래도 이것 집착일 뿐이다. 어떤 세계든 어떤 세대든 무의미했던 적이 없었고 또 유의미했던 적도 없었다. 하지만 세계는 여전히 찬란하지 않는가?
마당에 나가 밤하늘의 별들처럼 반짝이는 쥐꼬리망초꽃과 바랭이 줄씨들을 본다. 거기 앉아 있는 이슬들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