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밤에 생긴 일(It Happened One Night)
최용현(수필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핵심 5개 부문인 작품상과 감독상, 각색상, 남녀주연상을 모두 받은 영화를 그랜드슬램 수상작이라고 한다. ‘벤허’(1959년)와 ‘타이타닉’(1997년),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2003년)은 모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1개 부문의 상을 받은 최다 수상작이지만 그랜드슬램 수상작은 아니다.
1929년에 시작된, 100년에 가까운 아카데미상 역사에서 그랜드슬램 수상작은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4년)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년), 그리고 ‘양들의 침묵’(1991년) 세 편뿐이다. 아카데미에서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고, 미국영화연구소(AFI)에서 선정한 100대 영화에서 35위를 차지한 ‘어느 날 밤에 생긴 일(It Happened One Night)’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은 사무엘 홉킨스 애덤스의 단편소설 ‘Night Bus(심야 버스)’를 원작으로, 1930년대 대공황기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미국의 상류층 여성과 서민층 남성의 신분차이를 뛰어넘는 사랑을 유쾌하게 풀어낸 로맨틱 드라마이다. 아카데미 감독상을 세 번 수상한 1930년대의 명감독 프랭크 카프라가 흑백영상으로 연출하였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우리에게 친숙한 클라크 게이블과 프랑스에서 이민 온 여배우 클로데트 콜베르가 열연하여 아카데미 남녀주연상을 받았다.
엘리(클로데트 콜베르 扮)는 은행가인 대부호 앤드류스(월터 코놀리 扮)의 외동딸이다. 엘리는 파일럿 출신인 킹과 결혼약속을 했는데, 킹이 자신의 재산을 노리는 사기꾼임을 알고 있는 앤드류스는 딸의 결혼을 막기 위해 마이애미의 요트에 엘리를 감금한다. 그러나 엘리는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으로 뭍에 올라 킹을 만나러 뉴욕 행 야간버스를 탄다. 그 버스에는 근무 중 음주로 해고당할 위기에 처한 뉴욕의 신문기자 피터(클라크 게이블 扮)가 맨 뒷좌석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엘리는 피터 옆에 앉게 된다.
잠시 쉬는 휴게소에서 엘리가 돈과 소지품이 든 가방을 날치기 당했음에도 신고하기를 거부하자, 피터는 그녀의 정체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버스에서 첫 밤을 지낸 두 사람은 휴게소에서 시간을 끌다가 버스를 놓치게 된다. 신문 1면에서 딸을 찾는 대문짝만한 기사를 본 피터는 그녀가 사기꾼 킹과 약혼한 대부호의 딸 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 버스를 타고 가던 두 사람은 홍수로 다리가 유실된 곳에 다다르자, 이동캠프에서 두 번째 밤을 보내게 된다. 여기서 엘리는 자신의 잠자리를 배려해주고 칫솔과 아침식사까지 챙겨주는 피터에게 호감을 느낀다. 이때 앤드류스가 보낸 탐정들이 찾아오지만, 두 사람은 부부행세를 하며 위기를 모면한다. 또, ‘엘리를 찾아주는 사람에게 1만 달러를 준다’는 신문광고를 본 승객이 엘리를 알아보고 신고하려하자, 피터는 조직폭력배, 권총소지 운운하며 겁을 주어 쫓아내는 등 엘리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도와준다.
엘리의 신분노출 우려 때문에 더 이상 버스를 탈 수 없게 되자, 두 사람은 걸어가다가 풀숲에서 잠을 자며 세 번째 밤을 보낸다. 돈이 다 떨어진 두 사람은 밭에서 캔 당근으로 허기를 채우고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얻어 타면서 뉴욕으로 향한다. 엘리가 실종된 지 사흘이 지나자, 딸의 안위(安危)를 걱정하던 아버지는 ‘킹과의 결혼을 허락하겠다.’며 킹의 이름으로 ‘돌아와 다오. 내 사랑…’ 하며 다시 신문광고를 낸다.
이 광고를 본 엘리는 킹에게서 마음이 떠난 듯 뉴욕도착 전 마지막 날 밤, 후불(後拂)로 들어간 모텔에서 피터의 침대로 다가가 헤어지기 싫다며 울면서 사랑을 고백하는데, 놀란 피터는 엘리의 구애에 대답을 하지 못한다. 피터는 자다가 새벽 3시에 일어나 신문사로 찾아가 자신이 엘리와 함께 지냈던 이야기를 특종기사로 써주고 1천 달러를 받아 숙박비 해결을 위해 급히 모텔로 돌아온다. 그러나 피터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생각한 엘리는 아버지에게 연락하여 마침내 킹과의 성대한 결혼식을 준비하는데….
클로데트 콜베르는 세상물정 모르는 엘리 역을 맡아 철딱서니 없게 행동하지만, 사랑을 찾아 바다에 뛰어들거나 히치하이킹도 서슴지 않는 엉뚱한 매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감독이 허벅지를 보여주는 히치하이킹을 요구했을 때, 엘리가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대역이 찍은 화면을 보고 ‘저건 내 다리가 아니잖아!’ 하면서 다시 그 장면을 찍었다고 한다. 엘리가 치마를 걷어 올리며 허벅지를 보여주는 이 장면은 이후 영화에 나오는 모든 히치하이킹 장면의 원조가 되었다.
클라크 게이블은 가난한 신문기자 피터 역을 맡아 뛰어난 임기응변으로 엘리를 자상하게 돌보며 미국 최고의 상남자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굳힌다. 그는 엘리가 대부호의 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대하고, 또 그녀가 사리분별을 못할 때는 질책하기도 한다. 피터는 따뜻한 심성과 가식 없는 행동으로 엘리의 마음을 얻어 결국 대부호의 사위가 되는 행운을 차지하게 된다.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은 딸의 현명한 선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뜨거운 부성애(父性愛)를 바탕에 깔고, 버스에서 만난 두 청춘남녀가 신분상의 간극(間隙)을 유머와 감성으로 따뜻하게 녹여내면서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영화이다. 특히 두 남녀의 미묘한 심리전과 톡톡 튀는 대사, 그리고 결말부분 결혼식에서의 반전은 이 영화가 나온 지 90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면서도 의표를 찌른다.
이 영화는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교과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마이애미에서 뉴욕으로 가는 4박5일간의 장거리 여정을 다룬 로드무비이기도 하다. 이제 저작권이 만료되어 유 튜브에서도 이 영화를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첫댓글 좋은 영화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