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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이사야-18 택한 사람을 보라(이사야 42장 1-4절)
이사야서 42장 1절에서 4절부터 입니다.
[이사야 42장]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이사야서 42장은 지금부터 2700여년 전에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고 어떤 분인지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그림같이 그린 모습인데요,
이 말씀이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다 하는 것은 마태가 마태복음 12장 17절 이하에서 인용을 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을 향한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이사야 42장]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참 사람, 사람이면 모름지기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느냐 하고 참 사람을 보여주는데, 참 사람이면서 참 하나님이죠.
그래서 나중에 신약성경이 기록된 이후에 세월이 좀 지나서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할려고 신학자들이 모여서 최종 결론은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다.
‘베레호모 베레데우스’, 참 사람이고 참 하나님이다. 이렇게 결정했는데, 그래서 우리 모두가 사람의 표준을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표준을 정할 때 목사를 정하면 안 됩니다.
목사도 아주 시원찮은 사람이고, 아직도 덜 된 사람이고 모자란 사람이고 부족한 사람이니까 이게 표준이 되어서는 안 돼요.
그래서 표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예수님을 보여주면서,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우리가 예수님께서는 노목사를 보라.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라고 하신 거예요. 택한 사람을..
저도 사람을 보지 않고 어떤 훌륭한 사람이 더러 있어보이지만 제 마음에도 때로는, 그 사람이라면 그 목사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그렇게 내 마음으로 존경하는 분이 몇 분 있죠.
그렇지만 그것은 한 짧은 한 케이스에 불과한 것이고 최종적으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만큼 되는게 목표예요.
목표하는 기대치나 수준이 굉장히 높은 겁니다.
예수님을 보여주면서,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러니까 ‘그’가 있고 ‘그의 신’이 있는 거야.
그래서 그의 신 참 하나님이면서 참 신으로 이렇게 나타나는데,
..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이것은 놀라운 얘깁니다. 아직도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와서 이방에 공의를 베푼다 그런 말은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듣는 것 같아요.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의 꿈은 메시야가 와서 이방인들은 다 짐승으로 가축으로 만들어버리고 유대인이 최고 일등국민이 되는 것 이런 생각만하고 있는 것이지, 메시야가 와서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이런 생각은 아직도 못할 겁니다.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예수님의 사역의 스타일이 막 외치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조용조용히 거리에서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조용조용히 하셨어요
..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그러니까 예수님은 조용조용히 이야기 했습니다.
조용조용히 이야기 했지만 그 속에 진리가 있고 그 속에 생명이 있으니까 조용히 해도 멀리 가는 거예요.
땅 끝까지 가고 더 가는 거죠.
조용히 했는데도 섬에도 가요. 섬에도..
그때 무슨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편지도 잘 안갈 때 인데 조용조용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끝까지 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고함을 쳐도 큰소리로 외쳐서 멀리 안 가는 사람이 있고, 조용조용히 해도 멀리 땅끝까지 가는 생명력이 있다는 거예요.
저는 남의 설교를 별로 많이 못들어 봐서 모르겠는데, 저도 조용조용히 하는 편이죠.
고함을 지르는 편이 아니잖아요.
저는 왜 이렇게 목소리가 작아졌는지 모르겠는데, 목소리를 크게 했으면 성경강좌 했을 때 죽었을 거야.
조용조용히 하니까 제가 고함을 질러서 은혜 받습니까?
조용조용히 해도 은혜받는 사람은 은혜받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도 앞으로 설교하실 분이 많기 때문에 말씀드리는데, 설교라는 것은 웅변이 아닙니다. 원래..
조용히 하는 거예요.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태풍이 와서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산들산들한 봄바람이나 소슬한 가을바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지 태풍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괜히 고함을 냅다 지르는게 좋은게 아닙니다.
여러분 대개 내용이 없을수록 고함을 지르죠.
예수님이 조용조용히 했고, 제가 볼 때 바울도 조용조용히 했을 거예요.
베드로가 고함을 질렀지 않나 싶거든요.
베드로는 그 때 마이크도 없고 예루살렘 시내를 가로지르면서 하니까 예루살렘 사람들아! 이렇게 했을지 모르면서 어쨌든 대체로 진리라는 것은 조용한 겁니다.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그러니까 보통 세상 사람들은 강한 자, 능력있는 자, 실력있는 자 이런 사람만 늘 챙겨요.
여러분 회사에 가 보세요. 전부 최고 엘리트만 뽑을려고 이렇게 하는데, 예수님은 처음부터 안 그랬어요.
처음부터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모집한게 아니고, 저 갈릴리 벳새다 한 동네에서 7명이나 뽑아내니까 그렇게 예수님의 위대한 점은 정말 평범한 사람을 불러서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니까..
서울대학처럼 전부 대수능 380~390점 불러서 그런 것 교육하면 쉬워요. 그런 것은..
대수능 150점 짜리를 불러가지고 천재를 만드는게 그게 진짜 위대한 거죠.
저는 예수님의 위대함 하나님의 위대함이라는 것은 저 같은 지리산 골짜기에 초등학교 3학년에 퇴학해버리고 중학교도 때려치우고 목수일도 해가지고 돈도 못벌고..
그런 사람도 불러서 그래도 뭘 만들었잖아요.
그런 사람이 나는 지금 생각해도 TV에 나오면 저기 노목사 맞나?
저 뭐하러 나왔나? 저기에.
제가 들어보면 재미가 있어요. 그런 대로..
내가 들어도 재미가 있다니까.. 진짜..
예수님의 위대한 점은 저같은 평범하거나 평범 이하의 사람을 붙들어서 일꾼을 만드는 거야.
물론 모든 사람을 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고, 그래도 저는 볼 때 그래요. 사람을 볼 때 현재는 별볼일 없지만 잠재능력이 있어 보이는 거야.
그런 사람을 키우면 큰 사람 될 수 있다 잠재 능력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저는 나 자신을 잘 몰랐는데, 전에 얘기했죠. 초등학교 5년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하나..
제가 학교를 꽤 오래 다녔잖아요.
38살까지 다녔으니까 다니다가 말다가.. 공부하다가 중단되고 이렇게 했는데..
그렇게 많은 선생님 많은 교수를 만났는데, 그래도 나를 조금이라도 인정해 준 사람이 딱 하나 있었어요.
장만상이라는 선생님이 5학년때 방학식을 하는데 우리 반에서 공부를 하면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공부를 안 하고 있다..
그게 누구게? 해 가지고 나는 그 때까지 그런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거든요.
그런데 장만상 선생님이 평생을 교육계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내게서 뭘 봤는지 그런 말을 한 거예요.
1학기때까지 만해도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 1학기까지 반에서 60에서 20~30등.
공부하라는 말을 한번도 안 들어봤고 집에서.. 공부할 시간도 안 주고.. 오면 꼴베러 가라 나무하러 가라.
늘 그랬기 때문에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안 해 봤어요.
그리고 제일 하기 싫은 것이 학교가는 것이고 두 번째 공부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공부를 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을 안 해 봤어요.
그러나 그 선생님이 제게서 어떤 잠재능력을 본거야.
저 학생이 뭘 보고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살아계시면 뭘 보고 그랬느냐? 물어보겠는데, 돌아가셔서 물어보지 못했어요.
베드로 같은 경우도 보세요.
베드로가 비록 태어나기를 갈릴리 벳새다라는 조그만한 호숫가에 그런 동네에서 태어났고, 동네 터를 보니까 몇집 되지도 않아요.
그 동네 터를 봐서 한 동네에서 7명을 불렀다면 아마 30살짜리 다 부른거야. 내가 볼 때..
나이가 27~28살 내지 서른살 안팎이면 7명 다 불렀지 않겠나.
그 동네에서 모자라니까 딴 동네에서 더 부른 거죠.
그러니까 정말 평범한 사람 불러서 위대한 사람 만드는 겁니다.
저는 서울 대학 나와도 별로 위대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최고 엘리트를 불러가지고 하는 것 뭐 그건 별것 아녜요. 사실은..
그래서 여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모습은 그래요.
정말 세상에서 그렇게 탁월한 사람도 아닌데, 위대한 사람 만들어내는 것 위대한 일이죠.
우리 교회도 그래요. 사람을 지금만 보지 말고 저 사람의 5년후 10년후 20년후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그런 기대를 가지고 봐야 돼요.
저는 제가 하도 공부를 하기 싫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 스스로가 굉장한 사람이 될것이라고 생각도 안 했고, 지금도 내가 이만큼 여러분 앞에서 성경을 가르친다는 자체도 거의 때때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실감이 안 나요.
그런데 어떤 때는 에스라하우스에 600~700명이 왔는데 그 중에 수많은 목사님들이 앉아 있는 거예요.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지금..
말씀을 전할 때는 그냥 정신없이 하지만, 깜짝깜짝 제가 놀래고 어떤 때는 사람들을 앉혀놓고 내까짓게 누군데 사람을 책망을 하고..
그런 저 자신을 가끔 발견을 하면서 때로는 놀라기도 해요.
그런데 또 그런 사람들이 10년씩 20년씩 신앙생활을 하다가 조용조용하게 들려주는 말씀을 듣고 변화되는 거예요. 사람마다 또 달라요.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 공부하는데 그냥 하나님을 만나서 그렇게 기뻐하고, 어떤 사람들은 레위기를 이야기하면서 성경 전체를 보는 눈이 새로 열렸다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서를 읽는데 거기에서 같이 울어가지고 계속 딴 사람이 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말라기 이야기할 때 그런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은혜가 안된다고 하다가 계시록 가서 그때서야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러니까 다 똑같지 않은 거야. 여러 곳에서 여러 말씀으로 사람들 부르고 깨우고 하는 것을 본다 말이죠.
그래서 꺼져가는 등불도 상한 갈대 그런 것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예수님 찾아온 사람들 보세요.
세리 마태는 그 당시 제일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야.
교회에 그런 사람 와 보세요. 손가락질 발가락질 해가지고 못견디게 할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거예요.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세리도 있고, 창녀도 있었다는 거죠.
예수님의 별명이 세리와 창기의 친구라는 거예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할 때, 죄인이라는게 앞뒤로 보면 창녀같거든요.
세리는 남자 중에서 제일 혐오스러운 직업이 세리.
여자 중에서 제일 미움 받는 것은 창녀.
이런 건데,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다.
예수님의 기념비적인 이름이예요.
그런 상한 갈대 인격 파탄자 같은 그런 사람을 예수님께서 버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면 변화가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여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 정말 가물가물하는 것도 끄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이 저절로 꺼지면 할 수 없지만, ‘에이 너는 왜 빛이 희미하냐?’ 하고 꺼버리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교회는 저녁예배에 80~90명 오는데 큰 교회입니다.
저 지리산에 가면 낮 예배 10명도 안 되는 교회가 여럿 있습니다.
저녁 예배는 2명 3명 앉혀놓고 이렇게..
일반 세상 같으면 벌써 끝났을 텐데, 그런 등불도 끄지 않는 거예요.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여러분 목회자가 신학을 학부에서 4년씩이나 하고, 신대원에서 3년 하고. 7년을 하고 그것으로 끝납니까?
그 뒤로 온갖 세미나에 가서 들어줄 사람도 없는데 부단히 갈고 닦아서 그런 할머니들 앉혀 놓고 알아듣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그 목사님들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정말 눈물이 납니다.
대화가 안 되거든요.
그러면 목사도 자꾸 쭈그러들어요.
자꾸 실력이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설교해야 설교 수준이 높아지고 느는데, 할머니들 앉혀 놓고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는가’ 하니까 ‘우리 며느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그 얘기 다 아시죠?
어떤 분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게 아니다’ 하니까 ‘떡 먹으면 됩니까? 밥을 먹어야지..’
‘그 말이 아니고 밥만 먹고는 안 된다’하니까, ‘그래 반찬이 있어야지’ 하면서..
그것 뭐 대화가 됩니까?
정말 할머니들과 하면 목사가 자꾸 위축되는 거예요.
10명 20명도 안 되는 사람과 평생을 거기에서 보내는 사람이 제가 아는 사람도 즐비하거든요.
우리 교회에서도 선교부에서 언제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그런 교회에 방문도 하고 위로도 해 줬으면 좋겠어요.
10명 20명 성도들 버리고 떠나지 못해서 한달에 생활비가 100만원도 채 안되는 그런 생활하면서..
그것 가지고 전기세 내고 전화세 내고 그것 가지고 자동차 기름 넣고 그것 가지고 경조비 내고.. 그러면 굶어 죽지는 않은데, 사람 구실을 못해요.
이웃에 할머니 할아버지 장례식거리만 남아가지고 봄 되면 줄줄이 떠나요..
그런데는 젊은 사람이 목사밖에 없으니까 상여도 목사가 다 맵니다.
이웃 교회 한 군내 젊은 목사 다 모여가지고 성도 돌아가시면 시골에 상도군이 없어요.
저도 여러 번 맸습니다.
그런 목사님들이 비록 대형교회를 섬기지 못했어도 저는 그런 목사님이 천국에서 상이 있다고 봅니다. 얼마나 참 감사한 일인지요.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나 안 나오는 사람이나 다 돌보고 심부름 하고 아프면 병원에 실어주고.. 그게 진짜 목회 아닙니까?
굉장한 예배당 지어놓고 수천명 수만명 모이는 교인에게 영광 받는 목사가 상이 있는게 아니라, 그런 사람은 하도 대접을 많이 받아서 천국에 가면 상도 없을 거야.
너는 네 상을 대접을 땅에서 다 받았다 하면 끝날것 아니야.
그래서 목회자가 전혀 대접은 고사하고 그렇게 사는 분들이 있다는 겁니다.
제가 사천에 갔을 때도 정말 그런 교회가 서 있는 거예요.
안 넘어지고..
할머니 둘이.. 둘이 다 해봐야 글자도 모르고 전혀.. 글자도 모르는데도 권사님이야..
권할 사람이 있어야 권사지 아무도 권할 사람이 없는데..
그리고 간질병 하는 여자 집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간질병이 희한하게 예배당 오다가 뺑 돌면 집으로 가요.
예배당 오다가 선채로 뺑돌아서 집으로 가요. 희한한 간질병 환자예요.
처녀가 간질병 하는 환자 하나하고..
그리고 아동들 몇 사람.. 그런 데도 그게 안 없어져요.
세상 같으면 그런 회는 그게 무슨 회가 됩니까? 그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그런 상한 갈대같은 것도 꺾지 않고 저를 거기에 보낸거라.
보낸다고 거기에 갔어. 아무 것도 모르면서..
성경도 한번 안 읽어보고 전도사가 되어서 갔어요. 가서 그래도 예배당 짓고 사택 짓고 교육관 짓고 해가지고 지금은 60~70명 모인답니다. 시골인데..
제가 있을 때 30명. 5년 뼈빠지게 했는데도 40명을 채 안 넘어갔어요.
그런데 지금 오히려 시골교회 그렇게 사람 많이 죽고 내 보내는데, 제가 목회하면서 헌신 1호, 지금 전도사 부인 되는 사람이 백옥림이라고 하는 자매가 제가 목회하면서 자기 생명을 영원히 단번에 전체로 드리겠다는 헌신 1호예요. 1호.
또 초등학교밖에 졸업 안한 사람이 신학을 하겠다고 온거야. 그것도 대단하죠.
어떻게 했는지 지금 부산신학교에 왔어요.
우리 교단에는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못들어 가거든요. 옛날 말이지
그런데 들어간거야. 이병렬이라고..
얼마나 열심히 섬기는지 그 교회가 성장을 하는 거예요.
지금은 예배당이 가득 하답니다. 성도들이..
그래서 제가 그런 교회에 가서 보면 정말 저기서 예배를 몇몇 사람이 드리고 참 실감나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
..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그 예수님이 조용조용히 하시는 말씀이 생명력이 있어서 보나마나 수제자라는 베드로는 필기도 안하고 그냥..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마태는 좀 필기를 하고 그렇게 했는데 온 세상에 예수님 말씀이 얼마나 얼마나 많이 출판되었습니까?
지구상에 지금 예수님 말씀 복음서가 얼마나 많이 출판되었겠습니까?
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푸신 진리 때문에, 사람들이 자유하게 되고, 또 민주화가 되고, 독재자가 사라지고, 예수님 말씀 때문에 이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어요?
만약에 예수님이 안 오셨으면 인간들이 서로 물고 먹고 악해가지고 다 끝장났을 거예요.
앵글로색슨족 바이킹족 고트족 반달족 슬라브족 게르만튜튼족..
유럽의 사람들이 동양사람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얼마나 호전적으로 얼마나 악독한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예수님 믿어서 신사가 되고 철학자가 되고 예술가가 되고 과학자가 되고 이렇게 해서 오히려 세상을 그 악독한 사람들이 더 살기좋게 만들었잖아요.
기독교 문화가 들어가면서.. 예수님 때문에..
그래서,
..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여러분 이 물론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만, 그것보다도 우리 같은 완전히 진리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까막눈에 가까운 그런 우리들 저 같은 것을 불러가지고, 결혼할 때까지도 교회에 발도 안 대고 예수도 안 믿는 저 같은 까막눈을 불러가지고 교육시킨 것 보세요.
제가 결혼을 하고 애기를 낳고 물론 군대 갔다와서 29살 되어가지고 고등학교를 갔으니까 얼마나 웃긴거예요.
우리 큰 아이가 여기 와있습니다만 다 같이 공부를 했거든요. 같이..
‘아빠도 숙제해요?’ 그러면서..
그래서 ‘아빠 숙제가 많다.’ 우리 집사람 볼 때 전부 학생이죠. 자기만 학생이 아니고..
나중에 자기도 공부를 했어요. 자기도 공부를 하고..
‘이방의 빛이 되게 하고 소경의 눈을 밝게 한다’고 한 것은 꼭 육신적 소경뿐 아니라 영적으로 소경된 사람이 얼마나 예수님 때문에 눈을 많이 뜹니까?
천국에 대해서도 눈을 많이 뜨고..
또, 억울하게 갇힌 사람..
여러분 예수님 때문에 지구상에서 노예가 사라진것 아녜요?
그 미국 땅에도 한 동안까지는 노예가 있었는데, 알라바마주라든지 조지아주에 가면 목화밭에서 그야말로 목화따는 그런 미국 동남부가 무지무지 덥습니다.
거기서 텍사스주까지 얼마나 더운 농장에 그런 목화따는 흑인들 노예들이 다 해방되어서 지금은 떵떵거리고 살지 않습니까?
8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어떻든 간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다른 신들과 우상이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 문제를 기어이 해소할려고 일단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 바벨론으로 잡아가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것들아. 봐라 말이야.
10층 높이되는 금덩어리 우상이라도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 해가지고 그 굉장한 교육비가 든 거예요.
바벨론 포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9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10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여러분은 찬송가 중에 일평생에 무슨 찬송가를 제일 먼저 배운것 같애요?
저는 ‘내 주를 가까이’ 그것을 제일 먼저 배웠어요.
그 다음에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배웠고
교회에 나가기 전에 배웠습니다.
어디에서 배웠느냐?
축구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가지고, 축구도 보통 잘 하는 사람은 다리 안 부러지죠.
보통 축구를 잘 못하는 사람이 다리가 부러져요.
부러져 가지고 완전히 고참이 와서 일부러 워카발로 밟아 버렸어요.
대수술을 했는데 다리를 잘라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골반뼈를 떼어다가 이어 붙여서 거의 99.9% 정상으로 단지 부러진 그 자리에 못을 박아서 못이 있고 그 외에는 아무 이상이 없죠.
그래서 병원에 와 있는데, 보통 저 위에서 의정부 위에 근무했기 때문에 창동에 있는 병원까지 오고 거기에서 나으면 제대하는 것이고, 거기 수영에 있던 국군 통합병원까지 오는 대개 제대합니다.
내가 통합병원에 와서 제대 안 하고 복수한다고 올라갔었거든요.
그런데 그것 못하겠더라고..
모질지 못해서 복수도 못하고 말았습니다만, 거기 부산통합병원에 있을 때 수요일마다 수정동성결교회인가 지금 기억이 그래요.
전도사님이 나이가 제법 들었는데, 50이나 60이나 되어보이는데, 키도 짤막한 사람이 들어오면서.. 병원에 예배하는 홀이 따로 있어요. 환자들 병실 한 홀을 따로 만들어서 예배하는데, 수요일마다 오는데 들어오면서 ‘할렐루야..’ 깜짝놀랬잖아요.
처음 듣는 말이죠. 저게 무슨 말이냐.. 전혀 할렐루야가 저게 무슨 말인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말인데, ‘할렐루야’ 하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양반 설교 되게 못하는 가봐. 한 마디로 못 알아들었어요.
수요일에 몇번 갔는데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어요.
자기 딴에는 불이 타는데 나는 하나도 안 타.
혼자 열정적으로 불이 타는데 한마디도 몰 알아듣겠어 어떻게.. 한마디도..
노래는 그래도 기억에 남은 거야.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의심도 믿어야 의심이 나지. 나는 의심한 것도 없는데..
믿은 것이 없으니까 의심할 것도 없어요. 계속 손뼉치고 하는데..
나는 아 그냥 전부 다 거기는 잘라진 사람만 오거든요. 나만 잘라지지 않고 붙어있는 사람이고 다리가..
딴 사람들은 다 월남에 가서 폭풍지뢰 맞아가지고 발목만 나가는 거야.
조금 더 심하면 종아리까지 다 나가버리고 이런 사람들만 있는데..
제가 다리 하나 부러진 제가 제일 경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화장실 청소 내가 했어요.
그 사람들은 전부 다 잘라져 나간 사람들이니까..
‘할렐루야’ 하고 들어오는 그 분 지금도 얼굴도 생생한데, 하여튼 자기딴에는 충만해 보여. 내가 볼 때 무엇에 충만한지는 모르겠는데.
충만한 것은 좋은데, 한마디도 못 알아들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 뒤에 내가 믿고 나서는 내가 참 남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런 말 안해서는 안 되겠다..
어떻든 알아듣게 할려고 노력하는 편이죠.
또 한분이 오는데 번갈아 가면서 오는지 몰라. 키가 조금 더 작고 사람이 까무잡잡하고 그 사람은 아주 전도자로서 된 사람이예요. 내가 볼 때..
전도자로서 말을 잘 해요. 그 사람은 다른 것은 다 기억안 나는데, 하나가 기억나는 게,
어떤 사람이 선교사로 갈려고 모든 준비를 다하고 출발 두주간 앞두고 훈련 받는 중에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졌다는 거라.
그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 뜻이 아닌가 보다 하고 선교사 가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갔다는 거예요.
전부 우리가 다리가 잘라졌는데 나만 안 부러졌지 다 다리가 부러진 겁니다.
그래서 의족을 해가지고 아프리카로 어디 갔다는 거야.
갔는데, 거기 식인종이 와서 잡아먹을려고 하더라는 거죠.
그래서 잡아먹을테면 맛보고 맛있거든 먹어라 하면서 고무다리 떼어 주니까 먹어보니까 맛이 없거든요.
그래가지고 오히려 선교사역을 잘 감당했다고 그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다리가 부러진 것도 다 합력하여, 다리하나 부러지고 안 잡아먹히는 것이 낫잖아요. 안 부러졌으면 통채로 다 잡아먹혀 끝났을 텐데..
그래서 나중에 하늘에서 내려왔다 해가지고.. 내려왔죠. 진짜 하늘에서 내려온거죠.
막 토인들이 신으로 떠받들고 해서 선교가 되었다 그런 얘기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거든요.
성경 이야기를 또 ‘할렐루야’ 그러면서 했으면 하나도 몰랐을 텐데, 그분의 그 얘기는 지금도 남아있는 거야.
정말 다리부러진 사람들에게는 너무 적시적절한 예화죠.
그 사람 얘기는 남아 있는데, 그 외에는 전혀..
어쩌면 그러면서 그 분 이야기 한번 듣고 참 일리가 있네. 그러고..
몇번 가서 노래 ‘내 주를 가까이’도 배우고..
‘내 주를 가까이’가 뭔지도 몰라. 전혀 모르고 들었어요.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뭘 의심을 깨치는지 모르고..
하여튼 노래도 배웠다는 겁니다. 노래를..
나중에 그러고 나서 한 5~6년이 지나서 교회를 갔거든요. 5~6년 정도 지나서..
교회에 가서 보니까 그 노래 부르는 거야. 금소교회 우리 고향에 있는 교회에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 불러도 때가 안 되었다면 못 알아듣는 거야.
그래가지고 결혼해서 애 낳고 무슨 공부를 해요?
내가 지금 같으면 용기가 없을 것 같아요. 지금 같으면..
그러나 그 때는 안 그랬어요. 그 때는 29살에 고등학교 갔는데 어찌된거냐?
그게 뭐 잘못됐냐?
내 동생은 26살에 같이 갔거든요.
그러니까 동네사람들이 전부 다 우리를 불쌍히 여겼죠.
그 사람들 괜찮은 집인데, 영 버렸다고..
장래가 많이 촉망되고 했거든요. 제가.. 믿거나 말거나..
보통 부군수와 놀고.. 제가 경상남도 정해식인가 하는 도지사때 경상남도 지사 표창도 받고 새마을 운동에 앞장서고 아주 상록수처럼 재건학교를 중학교를 만들어서 야간에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리고 골짜기까지 직행버스 노선을 개선하고 이런 데에 지역사회 개발하고 새마을 운동 워낙 열심히 하고 새마을 금고, 이런 돈 안 되는 일에 열심히 뛰어다니니까 사람들이 막 그리 저를 온 골짜기 사람들이 촉망된다 했는데, 어느 날 예수님 믿어가지고 소문이 영 집안 망치는 걸로 그렇게 났었거든요.
그것도 아들 둘씩이나 예수교에 빠져버렸다 해가지고..
지금 생각하면 참 내가 뭐 물론 나는 진리를 찾는 그런 마음은 있었지만, 야 내가 어떻게 그런 결단을 하고, 가족들이 그렇게 반대하고, 그 많은 친구 다 내팽개치고 그렇게 갔는지..
그리고 정작 전도사로 나설 때는 집과 논을 통통 팔아가지고 영사기 환등기 사서 전도한답시고 뭘 알지못하면서 전도한다고..
그래서 새 노래를 부르게 된 거예요. 새 노래..
전에는 제가 일반 유행가도 제법 하고 대중가요도 상은 못 받아도 수준급이었거든요.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나름대로는 잘 불렀어요
민요도 좀 하고 팝송도 꽤 즐기고 했거든요. 가곡도 나름대로 했고 찬송가 말고는 다 불렀어요. 노래를..
물론 지금 음이 많이 음정이 많이 갔지만, 그 때는 노래를 참 잘 했어요.
그러다가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그 모든 노래가 노래같지가 않은 거야.
다 일단 멀어져버리고 제가 뭐 바둑도 좋아하고 또 시원찮지만 서예도 좀 한답시고 어지간히 먹물께나 흘리고 취미로 했어요.
하여튼 세상에서 좋아하던 것 싹다 밀어버리고 오직 성경, 솔라스크립트.
완전히 성경에만 매달리게 되고 그렇게 했던 건데,
제가 지금은 후회가 없습니다만 어떻든 아무도 붙잡아 주는 사람이 없는데, 성경이며 찬송이며 새노래는 완전히 새 노래로 부른 것이고,
또 관심은 모든 관심은 성경에 쏟아 붓고 이렇게 됐어요.
그럴 때 우리 집사람이 고생한 것, 고생하고 반대하고 고생하고 반대하고 얼마나 반대했는지 모르죠.
맨날 부부싸움 하고.. 어렵게 살다보니까 뻔질나게 한 달이 멀다하고 싸우는 거죠.
애들이 굶으니까 애들이 무슨 죄가 있냐 내가 죄가 있다고 그러냐?
당신은 사명감 있어 간다하지만 이 애들은 무슨 죄가 있냐고? 왜 이 애들이 굶어야 되나.
내일 아침에는 내일 아침에 가서 봐야지 그렇게 싸우는 거야.
어떤 때 밤새도록 싸우고 화해도 안 하고 학교가버리고..
예배당도 계속 짓고 손님이 계속 오니까..
그렇게 하면서도 그것을 내가 아내가 이렇게 반대하니까 내가 포기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어요. 한번도.. 내가 괜히 전도사로 나섰다 그런 것은 꿈에도 생각안하고,
아무리 고생해도 아무리 어려워도 심지어 폐병에 걸려가지고 각혈을 두 번 씩이나 하면서도 내가 왜 전도사로 나섰는가 그런 생각을 해 본 것이 없습니다. 단 한번도..
제가 불렀던 새 노래 중에 지금은 그 노래 많이 안부릅니다만 처음에는 아는게 그것 밖에 없으니까 열심히 불렀죠.
찬송가를 제가 음치이기 때문에 목사가 되었을 때도 찬송가 절반도 못 부른거야.
시골에서 누가 반주해주는 사람도 없고 어디가서 배워야.
성경학교 신학교에 가서 다른 사람이 부를 때 따라서 배워야 부르는 것이지..
반주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어떻게 부를 줄을 몰라요.
악보를 볼줄 모르니까 보기는 보아도 ‘도’ 인지 ‘레’ 인지 몰라.
그렇게 내가 목회하면서 음악이 딸려가지고 우리 집사람도 반주를 못하거든요.
집사람은 나 보다 노래를 더 못해요.
노래 잘 부른다고 해도 음치 아닌 것은 아닙니다.
노래 잘 불러서 음치가 많아요.
제가 대표적으로 노래 잘 부르는데 음치예요.
그래서 우리가 정말 여기에도 최근에 믿은 사람은 새 노래 부르는 사람이 있겠죠
..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11 광야와 거기 있는 성읍들과 게달 사람의 거하는 촌락들은 소리를 높이라 셀라의 거민들은 노래하며 산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12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선전할지어다
13 여호와께서 용사같이 나가시며 전사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14 ○내가 오래 동안 고요히 하며 잠잠하여 참았으나 이제는 내가 해산하는 여인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15 내가 큰 산과 작은 산을 황무케 하며 그 초목을 마르게 하며 강들로 섬이 되게 하며 못들을 마르게 할 것이며
16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흑암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17 조각한 우상을 의뢰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그러니까 지금 잘나간다고 하는 바벨론 사람들은 크게 수치를 당할 것이고, 너희 지금 노예취급을 당하는 너희는 정말 새노래를 부르는 새로운 민족으로 만들겠다.
하나님의 열정이 대단하죠.
어떤 바벨론 포로가기 전에 악당들은 그야말로 칼과 기근과 염병에 얼마나 진노하셔서 죽여버렸지만, 남은 자들이 바벨론에 가서 훈련받고 돌아오는 사람들, 물론 다는 아닙니다.
다는 아니고 그 중에 일부가 하나님 말씀을 배운거예요. 바벨론에 가서..
바벨론에 가 있으면서 전혀 공부하지 않고 하나님 알려고도 하지 않고 바벨론 문화에 물들어가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완전히 소경도 있어요.
그 뒤에, 18절에 그러죠?
18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애타는 심정으로 부르짖고 해도, 여전히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 있어요.
옛날에 이사야가 소명 받을 때 그랬잖아요. 가서 이 백성으로 마음으로 둔하게 하고 귀가 막히게 하고 눈이 멀게 해서 내게 와서 고침받지 못하게 하라.
그대로 지금도 눈도 귀도 마음도 열리지 않은 사람이 있거든요.
그런 사람에게 지금도 하나님이 화가 나는 거죠.
18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19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전히 소경이 되어서 속을 썩이니까..
그래서 엄청난 것을 안겨줬는데 그것을 다 멍청하게 빼앗겼다는 거야.
여러분 출애굽기 19장 5절 6절에,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그 어마어마한 은총을 중요한 줄을 모르고 다 빼앗기고 만다는 거예요. 멍청한 것들이..
그래서 여기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거예요. 그것 생각만 해도 화가 나니까..
18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19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같이 소경이겠느냐
20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21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 하셨으나
22 이 백성이 도적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도로 주라 할 자가 없도다
그래서 그 엄청난 제사장 나라 된 그런 영광과 사명을 그냥 다 빼앗기고 만 거예요. 멍청한 것들이..
그러니까 하나님이 화가 나는 거예요.
23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장래사를 삼가 듣겠느냐
24 야곱으로 탈취를 당케 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도적에게 붙이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너희들 다 망하게 한것이 내가 한 거야. 바벨론이 망하게 한 것이 아니야.
내가 망하게 해서 너희가 망한 거야.
그런 얘기죠.
..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백성들이 그 길로 행치 아니하며 그 율법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2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으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매 그 사방으로 불붙듯하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이 사람들이 깨닫지 못해요.
그래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패망하리라.
그렇게 얻어 맞아도 안 되고, 때려도 안 되고, 달래도 안 되고, 가르쳐도 안 되고, 바벨론 가서 성경을 열어서 보여줘도 그래도 안 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존귀에 처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
여러분 사람이 되어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냥 고깃덩어리에 불과해요. 고깃덩어리.
고깃덩어리도 부정한 고깃덩어리 먹을 수 없잖아.
사람이 되어가지고 진리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르크스’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거예요.
그런 아무 존재 가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진리를 선포해서, 진리를 선포 안 해도 사람이 사물을 보고 하나님의 솜씨와 그 흔적을 느끼고 아무도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다고 하는데, 성경 말씀을 가르쳐도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면 기가 막힌 거죠.
그래서 지금도 다시 이 내용은 어쩌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기 직전에 누군가가 예루살렘에 돌아가기 전에 최소한으로 이것은 알고 돌아갈 때 돌아가더라도 이 정도는 알아야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갈 수 있지 않느냐?
그래서 포로를 바벨론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굉장한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애가 타는 심정을 가지고 가르칠려고 했던 어떤 사람의 글 같이 보이는데,
아마도 이사야의 정신을 계승하는 이사야의 제자들 중에 어떤 사람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사실 제자가 별로 없었어요.
예레미야때는 바룩이라는 사람이 조금 들은 정도이고 이사야는 그렇지 않은 것 같거든요.
‘이 말씀을 제자들 중에 봉함하라’ 그런 말이 있어요. 이사야 읽어왔잖아요
그래서 이사야 정신을 이어받는 사람들은 바벨론 포로 가서도 있었을 것이고, 이사야서라는 책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 이사야가 쓴 예언서를 바벨론 포로갈 때 가져갔던 어떤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꾸준히 이사야서를 보면서 국민 교육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아니겠느냐?
바벨론 포로 기간 중에 이름이 나와있지 않아서 알 수가 없는데, 정말 이사야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국민들을 깨우칠려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보는 거죠.
그러니까 바벨론에서 미쉬나, 성경 해석서가 나오고 게메라 탈무드 이런 여러 가지 구약성경 해석 문서가 나오것것을 볼 때, 어떤 열정있는 그런 제자들이 있었는데, 이분들이 써가지고 이사야서 두루마리에 같이 이어붙인 것으로 보는 거죠.
43장은 다음 시간에 보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하나님의 종 하나님 마음에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택한 사람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는데, 바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의 표상으로 참 사람으로 참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방에 공의를 베풀며 외치지 아니하며 들레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가 거리에도 들리게 아니하고 조용히 말씀하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며, 그래서 공의를 베푸시는데 진리로서 공의를 세워나가셨습니다.
낙담하지 아니하고 또 교만하지도 않고 자기를 내세우려고도 하지 않고 깊이 겸손하게 섬기셨으나, 그 말씀 속에 생명력이 있었기 때문에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며 저 지리산 골짜기에 있는 양들도 주의 복음을 듣게 하셨나이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다시 우리를 통해서 아직도 듣지 못한 사람이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사오니,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진리를 신실하게 증거할 수 있는 주님의 종들 되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