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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 밖의 문화유적 찾기
◇ 고마청 터(雇馬廳 址) : 이화여자고등학교 내의 스크랜턴홀 건물(중구 정동길 26)
- 조선 후기에 민간의 말을, 삯을 주고 징발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
조선시대에 민간의 말을, 삯을 주고 징발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인 고마청(雇馬廳)은 현재 이화여자고등학교 내의 스크랜턴홀 건물이 위치한 곳에 있었다.
조선 전기에 역참(驛站)에서는 마호(馬戶)의 양인(良人)이 노비의 신분으로 천역(賤役)에 종사하던 형태로 역마를 마련하였다. 이리하여 각 지방 군현은 분양마 등 관마(官馬)를 이용하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에 와서 청나라에 예물을 바치기 위해 보내던 사신의 왕래나 진상물의 운반, 지방관의 교체에 따른 맞고 배웅하기․ 접대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종전의 급마 체계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조선 후기 현종 때 소와 말의 돌림병이 크게 번지자, 더욱 부족하게 된 말을 충당하기 위해 고마법(雇馬法) 제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현종 때 이경억(李慶億)이 경기감사로 재임할 때 우관(郵館) 여섯 곳을 세워 역마(驛馬)를 기르게 하고, 부족한 역마를 보충하기 위해 민간인으로부터 돈을 주고 말을 빌리는 고마법을 시행하였다.
또한 역마(驛馬) 외에도 민간의 말을 강제로 징발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이 당시 징발된 말들을 고마(雇馬)라고 하였다.
고마청이 위치하던 곳을 고마청 골이라고도 하였는데 조선말에 발행된 「서울 지도」에도 고마청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고마청 골은 조선시대에 서울의 주택지로 유명하였다. 의주로1가에는 고마청 골 · 미낫골 · 초리우물골 · 새말 · 장골 · 양태전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고마청 네거리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진귀한 물건들을 파는 점포가 즐비했다. 오가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들여온 물건도 많았다. 그중에는 공식적으로 들여온 물건도 있었지만 대부분 비공식적으로 슬쩍 들여온 밀수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거리에는 진귀한 한약재를 파는 약방, 질 좋은 비단을 파는 주단전, 조선에 없는 책을 파는 책방, 천하제일의 붓과 벼루를 파는 필방, 남자를 후리는 데 쓰는 향낭과 화장품을 파는 향방, 빗과 바늘과 수실을 파는 방물전, 고급 신발을 파는 당혜전이 즐비했다.
여자들의 비단신을 만드는 온혜방과 운혜방이 있는가 하면, 목이 긴 신발을 만드는 화공방과 목이 없는 신발을 만드는 혜공방이 있었다.
고마청 네거리에는 이렇게 좋은 물건이 많았으므로 도성의 내로라 하는 대갓집 규수들과 멋쟁이들이 드나들었던 조선의 첨단 유행 거리였다.
◇ 서대문 정거장 터 : 중구 순화동 1-149 일대(이화여자 외국어고등학교)
- 1900년에 한강철교가 놓이면서 경인선이 한성부에 들어와 생긴 최초의 역
서대문 정거장은 1900년, 서울 최초의 철도 시발역으로 현재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와 이화여
고 부지에 있었다.
대한제국 말기에 조정은 도성 내외를 연결하기 위해 외국자본을 도입하여 새로운 도로와 철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광무 3년(1899) 9월 18일, 경인선이 개통되어 우선 제물포~노량진 구간이 개통되었다. 그 이듬해 1900년에 한강철교가 놓이면서 철도가 한성부에 들어와 경인선은 서대문까지 연장되었다.
서대문 정거장은 1900년 7월 8일 경인선이 노량진~경성 간 개통과 함께 '경성역'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4년 후인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자 '서대문 정거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뒤 남대문역(현 서울역)의 확장으로 역할이 줄어들면서, 서대문 정거장은 1919년 3월 31일에 폐역되었다.
◇ 초리우물 터 : 미근동 31~38번지 부근(경찰청 민원실 옆)
- 물맛이 달고 차가우며, 물이 흘러넘쳐서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는 우물
‘초리우물’은 물맛이 달고 차가우며, 물이 꼬리처럼 끊이지 않고 흘러넘쳐서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초기에는 '꼬리우물(미정, 尾井)'로 불리다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초리우물'로 변형되었다.
이 우물이 달고 차가운 까닭에 염색이 잘 되므로 염색업을 하는 사람들이 이 근처에 많이 살았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이 부근 마을을 미정동(尾井洞)이라고 칭했던 것도 이 우물 때문이다.
◇ 프랑스 대사관 : 서대문구 합동 30번지
- 을사늑약으로 정동의 공사관을 폐쇄하고 1910년, 이곳에 새로 세운 영사관 자리
프랑스 대사관은 1910년에 공사관을 영사관으로 격하하여 이곳에 세웠다가 2020~2023년에 개 · 보수[리모델링]한 후 재개관하였다.
조선과 프랑스 간에 외교관계가 정식으로 수립된 것은 1886년 6월 6일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 공관이 개설되었는데 그 위치는 박동(薄洞), 독일 공사관 서편(종로구 관수동 126번지)에 인접한 한옥을 사용하였다.
그 후 1888년 11월 4일, 쁠랑시 사무관은 프랑스 공관이 너무 협소하고, 또 임시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이듬해 10월 1일, 정동의 현 창덕여중 자리에 새로 공관 대지를 선정하였다. 그 자리는 서대문이 한눈에 보이는 현재 창덕여중(전일 서대문초등학교) 수영장 자리이다.
쁠랑시 사무관은 고종을 알현하여 1889년 초에 상하이에 거주하고 있는 프랑스인 건축가 쌀르벨르의 조선 초빙을 허락받아 프랑스 공관 건축이 추진되어 세워졌다. 시공은 중국인이 하였는데, 정초석(定礎石)에는 ‘RF 1896’으로 새겨져 있으므로, 1896년에 준공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한불(韓佛) 외교관계가 단절되자 프랑스는 공사관을 이듬해 1월에 철수하였다. 이어서 공사관을 낮추어 영사관으로 한 뒤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지속하여, 1910년 10월 1일에는 영사관을 현재 프랑스 대사관이 위치한 서대문구 합동 30번지로 이전하였다.
원래 이 자리는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별장이 있었던 자리라고 전한다. 이 건물은 건축가들이 한국 최고의 건축물로 인정할 정도의 걸작으로,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 순위 선정에서 2위를 했는데 건축가는 김중업이다.
◇ 이명래 고약 터 : 충정로 3가 377번지 부근(종근당 제약 뒤편, 미치코 식당)
- 이명래가 종기와 피부염 치료에 사용되는 전통 한방 외용제 고약을 제조한 곳
이명래 고약(膏藥)은 종기와 피부염 치료에 사용되는 전통 한방 외용제이다. 고약과 발근고로 구성되어 있으며, 항생제가 없어서 내성 위험이 낮다.
조선말 1895년에 충남 아산 공세리 성당에 부임한 프랑스의 에밀 드비즈 신부가 중국의 한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개발한 고약을 아산 공세리 성당 건축 노동자들의 피부질환 치료에서 시작해 유명해졌다.
드비즈 신부가 만든 고약을 배운 이명래(李明來 :1890 ~1952)는 1906년에 민간요법을 더해서 완성한 뒤에 ‘명래 한의원’ 제약사를 창업하여 종기 특효약 '이명래 고약‘으로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 충정각(忠正閣) : 서대문구 충정로3가 360-22번지(이탈리안 레스토랑 충정각)
- 1910년대에 건축된 한성전기회사'의 '맥렐란' 기사장이 살던 서양식 건물
충정각(忠正閣)은 191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양식 건축물로, 조선말에 서울에 전기를 공급한 '한성전기회사'의 '맥렐란' 기사장이 살던 곳이었다.
이 건물은 외관의 현관 · 창호 등이 축조 당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서울에 남아있는 서양식 건축물 중 유일하게 붉은색을 띤 9각형 포탑(첨탑)을 하고 있어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우동선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는 충정각에 대한 연구 논문을 통해 1912년 토지조사 당시 이 집이 미국인 맥렐란(R.A. McLellan)의 소유였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 논문에 따르면 멕렐란은 서울에 전기를 공급하던 '한성전기회사'의 기사장으로 1899년 입국했으며, 1902년에는 'Electric Light and Power in Korea'라는 제목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우동선 교수는 "맥렐란이 근무한 한성전기회사가 1909년 일본에 매각되고, 1910년 경술국치 당시 국내에 거주하던 대다수의 서양인이 귀국한 점을 생각해 볼 때 멕렐란은 이 저택을 1900년대 초에 건립한 것 같다"라고 주장했다.
충정각 건물은 당시 충정로 360-2번지에 속해 있었으며, 이후 1930년대 초 당시 소유자였던 일본인 타카마츠 류치키는 작은 규모의 건물을 새로 지어서 본 건물에 이어 붙여 사용했다. 타카마츠 류치키는 일제강점기의 식산은행의 비서과에서 근무한 인물이다.
충정각을 가장 오래 소유한 사람은 배금순으로 1956년부터 2007년까지 약 50년을 살았다. 이후 현재 소유자가 매입했고, 현재 이탈리안 레스토랑 충정각이 들어섰다. 충정각 이름은 미술 작가 겸 평론가 성환경이 지었으며, 현판은 서예가 정병례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충정각은 수령이 100년 이상 된 은행나무와 곧게 뻗은 향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고층 빌딩이 몰려 있는 도심 속이지만 한적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어서 인기가 많다.
◇ 충정아파트 : 충정로 3가, 충정로 30번지
-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로 90년 된 건물
충정아파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로 90년(건축물대장 기준)된 건물이다. 이곳은 지하 1층·지상 4층의 건물로 현재도 50가구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이 건물은 2022년에 서울시가 철거를 가결하여 지상 28층 주상복합(192세대)으로 재개발된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일본인 도요타 다네오가 건립했다.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과 미군이 차례로 사용했고, 1961년에는 관광호텔로도 사용했던 오래된 건물이지만, 시멘트벽이 다이아몬드 처럼 강해서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다만 소문을 듣고 구경 오는 사람들이 많아 이 아파트 주민들이 상당히 애로를 느끼고 있어서 현관 유리에 경고문까지 붙어 있다.
◇ 의령 터널 : 서대문구 충정로 일대, 충정2교(충정교 고가차도) 부근
- 의소 세손(사도세자의 장남) 의령원(懿寧園)의 이름을 붙인 터널
의령 터널은 충정로3가와 서대문구 일대에서 경의선이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철도 터널이다.
이 터널 명칭은 북아현동의 추계대학교(중앙여자고등학교)자리에 안장되었던 조선 후기의 의소 세손(사도세자의 장남) 의령원(懿寧園)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의령원은 조선 21대 영조 때 사도세자의 장남(의소 세손)이 두 살에 죽자, 이곳에 안장하고, 의소묘(의령원)라 명명한 것이다. 의소 세손은 ‘애기능’이라 칭하고, 이곳은 능안골, 능의 안동네라고 불렸다. 이 애기능(의령원)은 1949년 4월에 서삼릉으로 이장하였다.
◇ 화양극장 터 : 서대문구 미근동(서대문 로터리)
- 서대문 네거리의 1980년대 홍콩 영화 흥행지로 유명세를 떨친 극장
화양극장은 서대문 로터리에 있었던 단관극장이다. 이 극장은 임권택 감독의 <단장록>으로 1964년에 문을 열었다. 707석 규모의 극장으로 1980년대 홍콩 영화 흥행지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나 우여곡절을 겪은 후, 1990년대 들어오면서 재개봉관이 되었다.
이 극장은 드림 시네마, 서대문아트홀(2009), 청춘극장(노인 전용)으로 이름을 바꾸며, 48년간 운영되었다.
2012년에 영화관 기능을 종료하자, 서울시가 도시·주거환경정비 계획 변경에 따라 24층 관광호텔 건립을 추진 중이다.
◇ 말뚝이 소극장 터 : 크리스털백화점 9층(서대문역 부근)
- 각설이 타령, 품바와 민속 탈놀이 형식을 빌려 사회 비리를 풍자한 연극 ‘서울 말뚝이’의 상연 지로 유명한 극장
말뚝이 소극장은 1980년대 서대문구 일대에 있었던 지하 소규모 극장으로, 극단 '태멘'이 다방을 개조해 개관한 문화공간이다. 이곳은 각설이 타령과 민속 탈놀이 형식을 빌려 산업화 시대의 사회 비리를 풍자한 연극 "서울 말뚝이"의 상연 지로 유명하며, 정규수 등의 <품바> 가수의 초창기 공연 무대였다.
이 소극장은 서울 말뚝이를 무대에 올리며, 전라남도 출신 청년 예술가들의 상경과 예술 활동을 담은 역사적 유산이다.
1인극 <품바>를 무대에 올린 연극, 연출가, 극작가, 시인인 김시라(金詩羅 : 1945~2001)는 고향인 전남 무안에서 천사촌의 김자근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의 참혹성에 충격을 받은 그는 숨져간 원혼들과 시민들을 위로하고자 연극에 뛰어들었다. 1981년 12월, 무안군 일로면 공회당에서 "친애하는 각설이 동지 여러분"이라는 이름으로 1인극 <품바>를 무대에 올려 큰 호평을 받았다.
이후 목포, 광주에서 많은 호응을 받자, 서울로 진출하여, 연극 <품바>로 대학로와 대학가를 휩쓸어 전국적인 문화상품으로 떠올랐다. 1983년 2월에는 서대문 푸른극단 초청으로 <말뚝이 소극장>에서 <품바> 공연을 하였다.
한때 공연 내용을 문제 삼아 당국에 의해 해외 공연이 금지되기도 하였지만, 1981년부터 1998년까지 17년 동안 4,000회 공연을 가질 정도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1996년에는 연극 <품바>가 한국 연극 사상 최장기 공연, 최다 관객으로 인정이 되어 한국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이듬해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일본 등에서 순회공연을 가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