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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씨된 자로서... 남양홍씨의 중시조 태사공님... 이후 중시조 할아버님들을 고려의 매국노란 무참한 용어로 표현함을 일단 송구하게 생각하며...
그래도 진실은 진실로서 객관적으로 밝혀져야 하고... 조상의 과오가 있다면 냉정히 지적하고 반성하고...사과할 건 해야 하는게 진정한 후손으로서의 임무라 생각되어... 무거운 맘으로 손꾸락질을 합니다.
남양홍문의 중시조 태사공(은열공???)의 후손 홍대순 할아버님(이후 존칭생략)은... 분명 왕건의 당고려에겐 치명타를 입힌 후손들이임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진실같습니다.
역사에 왜 집중논거가 않 되는 진 몰라도... 홍복원은 대대로 세습받은 인주도령시절 원나라에 항복 고려침공의 앞잡이가 되었고... 그의 아들 홍다구(홍차구?)는...아예 몽골인으로 고려 공략과 왜(일본?)공략에 심혈을 기울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픈 얘긴...제 조상 욕보단 이겁니다. 그 홍씨 일가들의 행적과 주거지역입니다.
고려 평안도 "인주"라 했습니다. 인주는 의주 근방이란 말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 일가는...대대로 인주지역의 "인주도령"직을 역임했었답니다. 마치 이성계 집안이 동북면 수장직을 대대로 역임하듯이여...
고려 명종때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왕이 팔관회를 베풀며...인주등 북계의 변방 도령(都令=그 지역 지방관들의 호칭)들을 초대했답니다.
그런데 이 서북계 신하(?)들이 명종에게 읍(인사만 꾸뻑)만 하고 절을 하지 않아...백관들 중 여럿이 죄를 묻자 고했으나... 명종이 완곡히 만류했답니다.
좀 이상하질 않습니까...? 대륙의 황제가 고려황젠데...몽골황제 앞에서 하는 식으로 절을 아홉번 까지 하진 않더라도...대충 한 번은 해 줄 만도 한데...? 자신들에 득이될게 전혀 없는 짓들을 ...아니, 대역죄로 삼대가 멸족당할 짓들을 저지르고도 살아 남았단 겁니다...?
홍씨 일가등의 서북계 도령들은...고려(당고려)왕들을 자신의 국왕으로 생각질 않았단 반증입니다. 단지 고려가 그들에게 작위를 내려 회유(또는 위무)하려 한 정황이라 하겠습니다.
말이 길어지니...먼저 홍씨 일가의 고려(당고려)에 대한 3대째 매국행위를 먼저 참고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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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매국노 '홍씨 3代' '몽골 앞잡이' 홍대순·홍복원·홍다구 배가 난파하려 하면 쥐들이 먼저 알고 도망친다고 했던가? 나라가 망할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조선의 매국노' 이완용이 조선의 멸망을 재촉했다면 고려가 몽골에 망할 때는 홍대순(洪大純) 홍복원(洪福源) 홍다구(洪茶丘) 3대(代)의 매국노가 있었다. 홍대순은 평안도 의주 근처 군사요충지인 인주(麟州)의 지역사령관격인 도령(都令)으로 있으면서 1218년(고려 고종 5년) 몽골이 거란을 압박할 때 자발적으로 몽골에 투항하였고 1231년(고종 18년) 몽골이 장수 살례탑을 보내 고려를 침공할 때는 자발적으로 향도(嚮導)가 되어 몽골의 진격을 앞에서 이끌었다. ※ 홍대순(洪大純)생몰년 미상. 고려의 역신. 본관은 남양(南陽). 일명 대선(大宣). 선조는 평안북도 인주(麟州:의주 남쪽)에 오래 살았으며, 역신 홍복원(洪福源)의 아버지이다. 1218년(고종 5) 원나라에서 합진찰랄(哈眞札剌)을 보내어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을 공격할 때 인주도령(麟州都領)으로서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항복하였다. 1233년 아들 복원이 필현보(畢賢甫)와 함께 난을 일으켜 선유사(宣諭使)인 대장군 정의(鄭毅)·박녹전(朴祿全) 등을 죽이고 성을 빼앗아 반역하자, 최우(崔瑀)가 가병(家兵) 3,000명을 보내어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민희(閔曦)와 함께 이들을 진압하니 복원은 몽고로 도망치고, 동생 백수(百壽)와 그 아들 딸들과 함께 사로잡혀 해도(海島)에 귀양가게 되었다. 그뒤 복원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동경총관(東京摠管)이 되어 고려군민을 다스리자 여기에 붙은 것이 40여 성이 되었다. 또한, 고려를 참소하여 군사를 따라 내왕하므로 최우가 이것을 근심하여 그를 달래기 위하여 대장군을 삼으니 참소가 적어졌다.
홍대순의 아들 홍복원(1206~1258년)도 아버지를 따라 무인(武人)의 길을 걸었다. 1232년 고려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하며 대몽(對蒙)항전에 들어가자 홍복원은 몽골군의 일원으로서 서북지방을 책임지는 낭장으로 있었다. 이듬해(1233년)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이가 병사들을 보내 서경(西京·평양) 탈환작전을 펼칠 때 홍복원은 대패하고서 겨우 목숨만 건진 채 원나라로 숨어들어갔다. ※ 홍복원(洪福源, 1206년 ~ 1258년)은 고려의 역신으로 본래 이름은 복량(福良),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도령(都領) 홍대순(洪大純)의 아들로서, 그 선조는 중국인으로 당나라 때 고려로 이주해 왔다. 1218년(고종 5) 고종 때 몽골이 강동성에 침입하였을 때 아버지 홍대순이 자진해 항복하여 적병을 불러들였다. 그도 또한 1231년(고종 18) 살리타이(한자: 撒禮塔)가 쳐들어오자 서경 낭장으로 있으면서 적에게 항복하였다. 몽골군이 돌아간 뒤 그는 반란을 일으켜 붙잡혔으나 몽골로 도망하여 동경 총관이 되었다. 그 후 몽골이 고려를 칠 때마다 그 앞잡이가 되어 들어오므로 ‘주인을 무는 개’라고 하였다. 후에 몽고에 볼모로 간 영녕공 준(永寧公綧)과 사이가 나빠지자 몽고 황족 출신인 영녕공 준의 부인이 황제에게 일러바침으로써 황제가 보낸 10여 명의 장사에게 맞아 죽었다. 이후 몽골은 다시 고려를 야금야금 침략하기 시작하는데 그 앞잡이가 홍복원이었다. '고려사'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원(元·몽골)의 군사가 매년 침입해 주와 군들을 함락했는데 이는 모두 홍복원이 인도한 것이다." 그 지역(北界·북계)현황을 홍복원이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에서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릴 것 같던 홍복원은 복병을 만나 비명횡사 하게 된다. 당시 인질(禿魯花·독로화)로 몽골에 끌려와 있던 왕족인 영녕군 왕준(王·1223~1283년)이 바로 복병이었다. 왕준은 고려 8대왕 현종의 8세손으로 명목상의 왕족에 불과했다.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승화후 왕온은 그의 친형이다. 그러나 고려가 고종 24년(1237년) 마침내 몽골에 항복하고 몽골이 고종의 친조(親朝·직접 황제를 찾아와 알현하는 것)를 요구하자 그 대안으로 이듬해(1238년) 왕준을 고종의 친자식이라고 속여 몽골에 보내게 된다. 요동지방으로 끌려간 왕준은 홍복원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고려사'는 "홍복원은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길어지니 사이가 나빠지고 왕준은 점차 불평을 품게 되었다." 그 사이에도 고려가 조공(朝貢)을 제대로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1246년(고종 33년), 1247년 몽골은 고려를 침공하였는데 이때도 홍복원은 선봉에 설 만큼 몽골 황실의 든든한 총애를 받았다. 홍복원과 왕준 사이의 사단은 1258년에 벌어졌다.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두 사람이 다투던 도중 홍복원은 왕준에게 "속담에 기르던 개가 도리어 주인을 문다더니 그 격"이라고 면박을 주었다. 이 말을 몽골 황족인 왕준의 부인이 들었다. "내가 개와 살고 있단 말이냐!" 부인은 즉각 황제에게 고했고 황제는 칙사와 장사 수십명을 보내 홍복원을 발로 밟아 죽여버렸다. 홍복원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홍다구(1244~1291년)가 매국노의 피를 이어받았다. 1261년 몽골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황제도 홍다구에게 홍복원의 관직을 계승해 몽골 내 고려군민에 대한 관할권을 내려주었다. ※ 홍다구 (洪茶丘 중국 원 [元] 무장) 1244(고종 31)~1291(충렬왕 17). 고려 후기의 부원분자(附元分子), 원나라의 무장. 본관은 당성(唐城:지금의 南陽). 본명은 준기(俊奇). 할아버지는 1218년(고종 5) 몽골에 투항한 대순(大純)이며, 아버지는 몽골 침입의 길잡이 노릇을 한 복원(福源)이다. 몽골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몽골군에서 활약했다. 1261년(원종 2)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관령귀부고려군민총관(管領歸附高麗軍民摠管)에 임명되었고 그뒤 고려 군민에 대한 관령권(管領權)까지 장악했다. 1269년 몽골군을 이끌고 고려에 와서 봉주(鳳州)의 둔전총관부(屯田摠管府)에 주둔하면서 부원세력의 부식에 힘썼으며, 1271년 삼별초(三別抄)를 진압하기 위해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진도·제주도에 출병했다. 1274년 원의 일본정벌 때 소용대장군 안무사 고려군민총관(昭勇大將軍安撫使高麗軍民摠管)에 임명되어 군량·선박을 징발하여 악명을 떨쳤으나 일본정벌에는 실패했다. 1275년(충렬왕 1) 원에 돌아가 왕권을 둘러싼 내전에 참가, 승상 백안편에서 상도(上都)를 공격했다. 1279년 제2차 일본정벌 때 고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용호위상장군 정동행성우승(龍虎衛上將軍征東行省右丞)에 임명되어 정벌을 지휘했으나 태풍으로 실패하는 바람에 다시 원으로 돌아갔다. 이후 고려에는 돌아오지 않고 요양행성(遼陽行省)의 관리로 재직하다가 죽었다. 홍다구가 고려에 끼친 해악은 아비 홍복원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원종 12년(1271년) 황제의 칙서를 갖고서 고려를 찾은 홍다구는 원종을 보고서 배례(拜禮)도 하지 않을 만큼 오만했다. 고려와 일본이 내통하고 있다는 거짓정보를 황제에게 올려 몽골이 두 차례에 걸쳐 일본정벌(東征·동정)에 나서게 만든 것도 홍다구의 공작이었다. 사실 지휘부 일부만 뺀다면 온전하게 고려의 국력을 동원한 정벌이었기에 고려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충렬왕 3년(1277년) 제3차 일본정벌을 획책했지만 몽골 내 상황으로 인해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홍복원에게는 홍다구 같은 매국노 아들만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홍다구의 아우인 홍군상(洪君祥·생몰년 미상)은 "영녕공은 원망할지언정 조국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충렬왕 18년(1292년) 몽골이 재차 일본정벌을 계획하며 고려로 하여금 배를 비롯한 군수물자를 동원하려 하자 홍군상은 고려의 뜻을 존중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홍군상이 직접 사신이 되어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갔고 최종적으로는 일본정벌 강행이 결정됐으나 배를 짓고 있던 도중 1294년 황제가 죽었다. 홍군상은 몽골 승상 완택(完澤)을 간곡하게 설득해 일본정벌은 중단됐다. 이에 고려조정에서는 홍군상에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칭호를 내려주었다.[이한우]
역사 연구와 평가는 공정해야 하니... 우리 남양홍씨 문중의 변명도 들어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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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문의 중시조 태사공(은열공?)은... 분명 태조 왕건이 궁예를 배신하고 황제에 등극할 시기의 최고 공신 "홍유"일 확률이 많습니다.
위의 글들을 종합해 볼 때... 홍씨 문중은 대대로 당성(唐城,당항성?) 인근을 봉지로 받은 지역 호족인데... 고려를 배신한 몽골 제후시절의 이들 봉지는...내내 "인주"로 ...관직은 "도령(都令)"으로 나옵니다.
어느 연구엔...당성(당항성)은 돈황 인근이랍니다. 현재도 당항성이란 지명은 그 남쪽 청해성 인근에 현존하고여...
또한 "홍대순"이 고려를 배신했단 시기의 정황은... 몽골이 타타르(거란)을 정벌하려 갈 시기..첨엔 막다가 굴복,,, 길을 빌려준 혐의 입니다. 몽골에서 카자흐스탄 일대 거란(카라한) 을 치러 가려면...반듯이 통과해야 할 지점이 돈황등의 신장 위그루 지역입니다.
홍씨들이 대대로 봉지로 받아 작위를 세습했던 지역은... 그 황조가 발해든...서발해 격인 거란(요)이든...몽골이든...고려(당고려)이든...내내 요 신장지구 근방였단 얘기가 됩니다.
그래 조선의 홍경례등이 반란을 일으킨 서북도(평안도???) 는...요 돈황 인근일 확률이 많다 예상합니다. 홍길동의 그 도술도...이 지역의 유불선 합일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와 비슷한 "마니교"일 확률이 많고...
홍씨들의 시조 홍천하(洪天河) 가...8학사의 일원으로 고구려에 드려왔단 "도교"라고도 하고...유교'라고도 하는 그 종교는... 현재 돈황인근에서 젤 많이 나오는...서역식 불교유적의 "마니교(미트라교,미륵불교)"가 아닐까 싶습니다.
중원을 흔든 태평천국의 홍수전이... 객가(커자)족인것도... 이들의 종교가 기독교로 오인되는 것도...이들의 본고장인 돈황일대 불교는...유불선 합일의 미륵교(미트라교,마니교)였고... 이의 분파가 남방 벽련교였기에 그렇다 예측됩니다.
커자..즉,객가(客家)족들의 본고향도...돈황일대 랍니다. 당과 고구려의 요동벌 싸움때...발해 멸망후 거란(카라한)의 침공 때... 몽골의 침공 때...청나라의 박해 때...점점 남부로 밀려나... 남부인들관 격리된 생활을 유지했던게 객가들이요...그 대표적 예가 당성홍씨가 남양홍씨로 둔갑하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이들이 대륙남부에 설치한 객가촌들도... 이미 거란과 몽골이 송(고려)의 남부 왜인들도 있던 역을 치고 설치한 남한성...쌍성총관부등의 총독 집성촌격을 재 사용한 것일지 싶고여...
남양홍씨의 시조 홍천하는... 신라 선덕여왕이 당의 신하라 하여... 하대하질 못해 당신(唐臣)으로 불리고...현 한반도 당성(남양)에 봉해졌다 하나...
이미 고구려 때 받은 직책이 당성백(唐城伯)이고... 당과 고구려의 싸움때 난처해져...남쪽으로 피신... 지리산(덕산)으로 은거했다 선덕왕의 초빙을 받았다 함은...
돈황인근 당성에서... 고구려와 당의 전투때...신라와 당의 국경 청해성의 당항성을 거처... 사천성 덕산을 거처 호남성 덕산(지리산)에 은거했단 얘기로 들리고...
당시 신라의 위치가 사천성,양자강 이남였단 예측도 하게 만드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못 믿으시겠다면...홍씨 일가가 대대로 도령직을 역임했단 "인주(麟州)"의 몇 않 되는 위치추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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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백련(白蓮)과 김인경(金仁鏡)의 사랑
인주(麟州)에 백련(白蓮)이라는 기생이 살았다. 김인경(金仁鏡)이 일찍이 중국으로 사신을 가던 중 인주(의주)에서 기생 백련을 만나 그와 사랑하게 되었는데 헤어진 뒤에 김인경은 백련에게 시를 보냈는데,
북으로 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에 말을 보내노라. 그대는 당연히 대화봉(大華峰)을 지나가겠지 봉우리에서 만약 옥정(玉井)의 연꽃(백련)을 만나면 이 몸이 너를 그리다 얼굴이 초췌하다고 일러주렴.
라고 하였다.그 뒤에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다시 만나니 백련(白蓮)이 그 시를 바치니. 이에 다시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주었다.
城南城北碧重重 성남성북벽중중
疑是巫山十二峯 의시무산십이봉
白髮未成雲雨夢 백발미성운우몽
玉顔都不損春容 옥안도불손춘용
남쪽과 북쪽의 성이 겹겹으로 푸르르니,
마치 이것이 무산(巫山)의 열 두 봉이 아닌가.
백발에 운우(雲雨)의 정은 이루지 못하였는데,
옥 같은 얼굴에 젊은 모습 아직도 그대로구나
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오래 만에 만나 기나긴 회포(懷抱)를 풀었다. 백련이 먼저 그리는 감정을 표현한 시를 지었다고 전하는 데 보한집(補閑集)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고 김인경(金仁鏡)의 대답한 시(詩)만 전한다.
친구인 이인로(李仁老)가 김인경이 기생 백련(妓生 白蓮)을 사모한 것을 보고 희롱(戱弄)하며
風暖鶯嬌客路邊 풍난앵교객로변
千紅百紫競爭姸 천홍백자경쟁연
使君却厭春光鬧 사군각염춘광료
獨向秋塘賞白蓮 독향추당상백련
바람결 따스하고 꾀꼬리 소리 아리따운 나그네 길가 수많은 붉은 꽃 아름다움을 자랑하듯 길가에 섰는데, 사군(使君)은 어찌하여 화려한 봄꽃을 싫어하는고. 홀로 가을 연못에 피어난 흰 연꽃을 좋아하는가.
라고 하였다 고 한다.
김인경(金仁鏡 ?∼1235(고종 22).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경주. 초명은 양경(良鏡)이며. 명종 때 문과에 차석으로 급제하여 직사관(直史官)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 고종초 조충(趙冲)이 강동성(江東城)에서 거란군을 토벌할 때 판관으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예부낭중을 거쳐 추밀원우승선이 되었으며 1227년(고종 14)에는 수찬관(修撰官)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찬수하였다.그해에 동진(東眞)의 군대가 정주(定州)·장주(長州)로 쳐들어오자 지중군병마사가 되어 의주(宜州:지금의 德源)에서 싸웠으나 대패하여 상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얼마 뒤 형부상서·한림학사에 오르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인재를 취하였다. 이어 지추밀원사 상서좌복야(知樞密院事尙書左僕射) 등을 역임하였다.1232년 강화천도 이듬해 왕경유수병마사(王京留守兵馬使)가 되고 정당문학 이부상서 감수국사(正堂文學吏部尙書監修國史)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이르렀다. 문무를 겸하였으며 여러 방면에 재능을 겸비한 것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특히, 시사(詩詞)가 청신하고 당대에 유행하는 시부를 잘하여 세상에서 ‘양경시부(良鏡詩賦)’라고 칭송하였고, 서체는 예서(隸書)에 뛰어났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무산(巫山)은 무산지몽(巫山之夢)에서 동의어- 조운모우(朝雲暮雨). 천침석(薦枕席).유사어- 무산지운(巫山之雲). 무산지우(巫山之雨)출 전- 문선(文選) 송옥 고당부(宋玉 高唐賦)무산(巫山)의 꿈이란 뜻으로, 남녀 간의 밀회(密會)나 정교(情交)를 이르는 말.전국 시대, 초나라 양왕(襄王)의 선왕(先王)이 어느 날 고당관(高唐館)에서 노닐다가 피곤하여 낮잠을 잤다. 그러자 꿈속에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첩(小妾)은 무산에 사는 여인이온데 전하께오서 고당에 납시었다는 말씀을 듣자옵고 침석(枕席:잠자리)을 받들고자 왔나이다."왕은 기꺼이 그 여인과 운우지정(雲雨之情:남녀 간의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다. 이윽고 그 여인은 이별을 고했다."소첩은 앞으로도 무산 남쪽의 한 봉우리에 살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양대(陽臺) 아래 머물러 있을 것이옵니다."여인이 홀연히 사라지자 왕은 꿈에서 깨어났다. 이튿날 아침, 왕이 무산을 바라보니 과연 여인의 말대로 높은 봉우리에는 아침 햇살에 빛나는 아름다운 구름이 걸려 있었다. 왕은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 조운묘(朝雲廟)라고 이름 지었다 고한다.
중국 무산
김인경이 인주기생과 이별한 시기는... 위그루역사의 카라한(거란)이...탕구트(북송)을 쳤단 시기와 일치합니다.
위의 고려 김인경 과 인주기생의 러브스토리를 보자면...
김인경이 머물던 도성에서 북쪽으로가 인주란 얘기인데... 후대의 해석은...설마허니 중원이겠나..?...허고... 그저 신화의 무산(巫山)에 존재한단 여신(염제의 아름다운 처녀귀신 동생)과의 동침설화를 비유했다고만 해석하나...
김인경의 시를 냉정하게 보자면... 김인경이 있는 도성(성도,한성)이 첩첩산중인 무산(巫山)과 유사해...도성의 성루들을 무산에 비유했을 뿐이고... 도성에서 인주(麟州)까지 가려면...무산을 거처야 함을 이른 글이며...이는 사천성 무산 넘어에 인주가 있단 얘기니... 인주는 오늘날의 신장 위그루 지역이며...인주 인근이 "의주"란 얘기로 보건데...
발해(대진)이 망하자 고려가 점령했다가...거란에게 빼앗겼다 금의 발호로 금을 도와 그 댓가로 되찾고... 다시 몽골에 빼앗겼다... 원과 무굴(明,무굴리스탄) 두 몽골이 싸우던 와중에... 다시 점령하려 하다...명(모굴리스탄 몽골) 출신 이성계에게 도륙을 당한 그 장소...요동과 의주는... 현재의 신장자치구 일대일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우리 홍씨의 정식 중시조 태사공님이야 왕건의 개국공신이니까 빼고... 그 아래 우리 홍문의 중시조격 분들께서...당고려(왕건고려)에 지대한 타격을 입힌 점...당고려(왕건고려)의 후손들께 사과 드리오며...
그래도 하나... 고려를 괴롭히고...결국 대조선을..동국고려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양이들의 멍밍이족...왜놈들에 대해선... 원나라가 그리 구찮으니 왕위다툼 전쟁 끝나고 하자..지발~~~~ 사정을 해도... 원나라 칸들을 부추겨 왜노들을 일망타진할 것을 주창했단 점은 좀 좋게 봐 주셨으면들 합니다.
사실은 홍다구의 라이벌들인 삼별초가 왜노들 지역인 동남아로 숨어 들어서였긴 하지만여...^. .^
그것만 성공했으면...어쩜 근세사 처참한 동국조선족들의 비극들은 없었을 지도 모를 일이니까여...ㅡ.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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